어제 오후 3시 50분, 친구 부인의 전화를 받았다.

"xx 씨가...오늘 3시 22분 저 세상으로 갔어요....흑흑"

전화를 끊고 난 뒤 스스로를 자책했다.

시간이 좀 더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착각이어서.

췌장암이 십이지장을 통째로 막아 10여일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신장마저 망가져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으니,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난 이번 주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해야 했고,

그게 끝나는 토요일 오전에 그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했다.

세상은, 안타깝게도, 내 희망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고,

그 친구는 내가 도착하기 열아홉 시간 전에 먼저 가버렸다. 

이제 만 49세, 그냥 가기엔 아까운 나이로 말이다. 


암이 처음 진단된 4월 말, 내가 처음 예약해 준 곳은 강남성모병원이었다.

X병원에서 아버지 진료를 받으면서 이 병원은 안되겠다 싶었던 게 이유였는데,

하지만 그 부인은 "최고의 의사한테 진료할 거예요"라며 X병원으로 갔고,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4개월 남짓 살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X대 병원의 A교수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때까지 "많이 좋아졌다"며

환자와 보호자를 속였고,

결과적으로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그들로부터 빼앗아 버렸다.

내가 보기엔 항암치료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A는 "크기가 줄어들었다" "혈액 내 암수치가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죽기 2주 전까지 했고,

그 때문에 본인과 어머니는 삶에 대한 희망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세 딸의 결혼식은 보고 죽어야겠다던 친구의 말이 지금도 떠오르는데,

하지만 그 인간이 좋아졌다며 환자를 기만하던 순간에도

췌장암은 간의 담도를 침범해 수치 15의 황달을 만들었고,

더 자란 암이 십이지장을 막아 물조차도 마실 수 없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얘기해 줬다면 먹고픈 걸 먹고 정리도 했으련만,

친구는 장이 완전히 막힌 뒤에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제야 "2주를 괜히 허송세월했다"며 탄식했다. 

난 그의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담당교수가 말하지 않는 것을 내가 말하는 건 월권이었고,

나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있는 친구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전공의들에게는 "저 환자 곧 죽을 거니까 특별히 해줄 게 없어"라고 해놓고선

바로 그 입으로 환자에게 "많이 좋아지고 있다"고 하는 분열적인 심리를,

난 이해할 수 없다.

전공의는 "교수님마다 스타일이 다르니 이해하시라"고 보호자를 위로했지만,

그런 말이 대채 누구에게 도움이 된단 말일까?


항암을 아예 하지 않았다면 좀 달라졌을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술을 마시던 4월 25일에도 친구의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항암을 받고 난 뒤 친구의 상태는 훨씬 더 나빴다.

8월의 어느 날, A는 친구가 홍삼을 먹었다고 야단을 쳤다.

웃긴 건, 그게 죽음을 한달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고,

전공의들에게 "특별히 치료할 게 없다"고 말하던 때였다.

그 홍삼이 치료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난 알지 못한다.

A가 보호자들을 격분시킨 건 친구가 이제 곧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더 해줄 게 없다고 퇴원하라고 강요했다는 점이었다.

갑자기 호스피스를 알아봤지만 자리는 없었지만,

A 말대로 몸에 주렁주렁 줄을 단 채 집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환자 부인은 응급의학과 교수에게 울며 사정한 끝에 응급실에서 3일의 말미를 얻어냈고,

그 동안 성바오로병원 호스피스에 자리를 얻어냈다.

하지만 다른 곳에 비해 바오로의 호스피스는 너무 열악했다.

친구와 보호자는 내가 알아봐주는 강남성모의 호스피스로 옮길 날만 기다렸지만,

친구가 숨을 거둘 때까지 강남성모에서는 끝내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내 힘이 닿는 곳은 아니었긴 해도, 이 점이 난 미안하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강남성모를 친구는 죽어서야 갈 수 있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영안실이 꽉 차서 다음날까지 기다려야 자리가 난 탓에

그 다음날부터 조문객을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태어난 후 많은 지인이 세상을 떴다.

그때마다 가슴이 조금씩 비워졌지만,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은 가슴의 절반 가량을 비워버렸다.

먼 훗날, 머리가 하얗게 된 내가 그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던 상상을 가끔 했는데,

이젠 다른 그림을 그려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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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5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15-09-0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ㅠ_ㅠ

부리 2015-09-11 12:14   좋아요 0 | URL
네 답글 감사드립니다. 친한 친구의 죽음은 마음의 일부를 빼앗기는 느낌이네요. ㅠㅠ

책읽는나무 2015-09-06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리 2015-09-11 12:14   좋아요 0 | URL
감사드립니다. 친구도 이제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