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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평점 :
<새벽 거리에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긴 하지만,
그의 전공분야인 추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신 이 책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불륜에 거의 모든 분량을 할애한다.
회사 신입사원과 사랑에 빠진 와타나베는 원래 성실한 가장이었건만
불륜에 빠지게 된 뒤 어떻게든 아내를 속일 궁리만 하게 된다.
예컨대 불륜상대와 1박을 하고 난 와타나베는 아내에게 이렇게 둘러댄다.
"거래처 사람과 몇 차를 거치는 사이에 상대가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집까지 데려다 주게 되었다...겨우 집을 찾아 들여보내 주고 이제야 해방되어
돌아가는 길이다."
아내는 이 말을 믿어 주는데, 이거야 그럴듯하긴 하지만 다음 장면은 좀 가증스럽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불륜녀와 같이 보내려는 와타나베,
아침에 나가면서 "이런! 휴대전화 배터리가 떨어졌네! 충전하는 걸 깜빡했어!"라고 호들갑을 떨고,
회사에선 충전이 잘 안된다면서 전화를 꺼 놓는다.
그러고는 회사전화로 집에 전화해 2년 전에 돌아가신 은사가 다시 돌아가셨다고 한 뒤
불륜녀에게 달려가 꿈같은 1박을 보낸다.
친구들의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친하게 지내던 세명의 친구와 술을 마신다고 해놓고 불륜녀에게 달려가는데,
그 친구들은 그를 위해 진짜로 한잔을 하면서 알리바이를 만들어 준다.
사실 이건 그 친구를 망치는 것일 뿐 진정 그를 위하는 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친구의 그런 부탁을 대부분 거절하지 못한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오늘 너 만난 걸로 해줘"라는 친구의 부탁을 몇 번인가 들어준 적이 있다.
다행히 그 친구는 숱한 바람을 폈지만 아직까지 걸리지 않았는데,
그의 부인을 만날 때면 괜시리 죄책감이 든다.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다.
바람을 피느라 들어오지 않는 남편이 의심스러워 평소 친하던 친구 네명에게
남편 혹시 어디 있는지 아냐고 문자를 보냈더니
동시에 답이 왔다.
"걱정 마세요. 그 친구, 지금 저랑 같이 있어요."
사람들은 이런 걸 친구간의 우정이라 생각하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바람 피는 건 친구의 사생활이라 간섭하기도 애매하고,
그러지 말라고 한들 들을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히 그 친구는 바람 생활을 청산하고 가정에 돌아갔기에
내가 원망을 들을 일은 이제 없을 것 같지만,
이놈의 우정이 바람까지 커버해 줘야 되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