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배우가 되고 싶어 오디션을 보는데, 오디션을 볼 때마다 번번이 떨어진다. 그런 여자가 확인하게 되는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지극히 평범한 사람1 이라는 것. 나보다 더 예쁜 여자, 나보다 더 연기 잘하는 여자가 더 많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누구에게나 찬란히 빛나는, 어디에서나 반짝거리는 사람이고 싶었지만, 그녀는 스스로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그냥 그런 사람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남자도 마찬가지. 재즈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죽어가는 재즈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한 그이지만, 사실 그는 규칙적인 돈벌이도 없고 또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해야 하는 것이 죽을만큼 싫은, 남들이 보기엔 그냥 가난하고 무능력한 남자다.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그냥 그런 평범한 사람. 세상이 어두우면 그도 어둡고 세상이 밝으면 그도 밝아서, 그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사랑이란 건 그 어두운 세상에서 역시 어둡게 가려진 나에게 찬란한 조명을 비춰주니, 내가 있는 곳만 밝아지고 또 그가 있는 곳만 밝아진다. 평범한 사람들이 수두룩한 이 세상에서 저기 저 사람이 찬란하고 특별하다고 내게 말해준다. 그래서 이렇게 밝은 내가 저렇게 밝은 그에게로 걸어가고, 저렇게 밝은 그가 이렇게 밝은 내게로 다가온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저 평범한 사람 1,2 지만, 서로에게만큼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너무 신나고 서로의 꿈에 대해 듣는 것도 너무 신난다. 여자는 '나는 재즈가 싫어!'라고 말했었지만, 이제 남자에게 '당신 때문에 재즈가 좋아졌어'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너는 글도 쓸 수 있으니까 니가 연기할 극본을 직접 써봐!'라고 격려해주기도 한다. 서로의 생각과 꿈과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고 있는 그들은, 그래서 적절하게 서로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고 응원을 해줄 수도 있다. 그렇게 서로에게 익숙해지는데, 그 익숙해짐 때문에 각자가 감추고 싶었던 것을 들키기도 한다.


너 그거 싫어하잖아, 너가 원하는 거 그거 아니잖아.


라고 말을 했을 때, 나는 적당히 타협하고 그래서 이대로 멈추려고 했는데, 그냥 이렇게 멈추고 싶었는데, 내가 감추고자 했던 나를 상대가 알아채버리는 거다. 이 익숙함은 그래서 좋고 또 그래서 싫다. 이 익숙함은 그래서 편하고 그래서 불편하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 사랑했고 그래서 서로가 아닌 길을 가는 것 같을 때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그러지 말라고 말을 한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나랑은 좀 다르구나 생각했다. 물론 내가 저들과 같을 수는 없다. 나는 저들이 아니고 또 저런 관계에 놓여있지도 않으니까. 그러나 나는 이제 끼어들어서 방향을 잡아주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묵묵히 기다리는 사람 쪽인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내가 '아닌 길로 가는 걸' 보지는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성숙한 사람이고 내가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도 성숙한 사람이니, 자신에게 맞는 길을 자신이 잘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과정에서 그저 조용히 바라봐주면 되는 게 아닐까.


다른 얘긴데, 토요일 외출하면서 들었던 팟캐스트 에서는 우울증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책, 《마흔통》에 대해 얘기하면서 진행자들은 '자기 객관화'와 그래서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법들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 방송을 들으면서 나는 '나 역시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게 우울감이 찾아오면, 어라, 이거 뭐지, 하고 들여다보려고 애쓰고,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스스로 그걸 털어내기 위해 노력을 한다. 이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가 내 감정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것까지 생각해보게 됐는데, 나는 내 감정을 '안다'는 결론이 났다.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잘 알고 있고, 잘 들여다보고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내 능력이고 또, 상대로 하여금 나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도 내 능력이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내가 내 감정을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또 인정하는 것도 내가 가진 큰 능력이다. 나는 자신의 감정이 어떤 건지 잘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고, 그건 똑똑한 사람이라 해도 별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내가 보기엔 명확해 보이는 감정을 자신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것은 감정의 문제인지라, 내가 거기다 대고 '니가 느끼는 감정은 바로 이런 거야' 라고 얘기할 생각은 없다. 그것이 어떤 감정이든, 자신의 감정은 자신이 알아채고 자신이 들여다볼 몫이다. 혹여,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아 그때 그 감정이 이런 것이었고, 그래서 내가 그때 그렇게 행동하면 안되는 거였구나' 라는 걸 깨달으며 후회한다 해도, 그 역시 철저하게 자신의 몫이다. 나는 이걸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초조해하지 않으면서 바라볼 수 있는 입장이 된 것 같다.








다시 라라랜드로 돌아가서,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게 익숙해지면서 그게 불편해지기도 해 서로 소리지르며 다투기도 한다. 인상적인 장면은, 그렇게 다퉜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주 금세,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난 적도 없었던 것처럼 친근한 사이가 될 수도 있다는 거다. 내일 아침 8시까지 내가 올테니까 나오기 싫으면 그건 니가 알아서 해, 라고 다툼의 마지막을 장식했는데,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도 여자가 나타나지 않자, 남자는 그냥 차를 몰고 가버리려고 한다. 그때 여자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막 출발하려는 차에 타면서 "커피 사러 갔다왔어" 라고 하는데, 남자가 너무나 심드렁하게 또 일상적으로 '어' 라고 하는 거다. 이 장면은 진짜 짜릿할만큼 좋았다. '그' 남자와 '그'여자였기 때문에 '그' 대화가 가능했으니까. 익숙해진다는 게 좀 더 좋다는 쪽으로, 이래서 기울고야 만다. 불편하기도 하다는 걸 계속 인식하면서도 좋은 점이 더 많아, 하게 된달까.



익숙해지고 다투고 그리고 여자가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기로 결정하면서, 여자는 남자에게 묻는다.



Where are we?



남자는, 흘러가는 대로 두자고 한다. 아, 어찌나 가슴이 서늘해지던지. 그러나 그 서늘한 대사는 늘 내가 했던 대사이다. 연인에게 이별을 말했던 몇 년전에도 나는 그에게 시간이 우리를 있어야 할 곳에 데려다 놓을 것이다, 라고 말했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흘러가는 대로 두면, 그것은 가야할 곳으로 있어야 할 곳으로 흘러갈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든지간에, 흘러갈 것이다. 어떤 관계는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면 끊어지지 않을 수 있을지 몰라도, 어떤 관계는 백날을 울어도 끊어질 것이다. 나와 당신의 관계라는 것은, 그저 내 바람 하나로만 이어지거나 혹은 끊어지는 게 아니니까. 



정말 뻔한 영화인데 장면장면이 다 좋다. 정말 뻔한 영화인데도 끝나고나면 뻔하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고 좋아하게 될 영화랄까. 중간중간 너무 아파서 가슴이 쿡쿡 쑤시고 눈물이 핑 고이기도 했지만, 이것이야말로 현실인 것이다. 더이상 어두운 곳에서 그만 혼자 환하게 빛나지는 않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제는, 여러 사람들 속에 그가 묻혀있어도 또 나 역시 그에게 여러 사람들 중에 묻혀 있는 사람이어도, 그 모두가 있는 공간에서 마치 우리 둘만 있는 것처럼 세상이 정지하기도 한다. 특별함은 그저 평범함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이랬던' 특별함이 '또다른' 특별함으로 남아 있다. 



이 영화를 너무 좋다며 두 번 본 친구는 영화를 보면서 내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간 나의 글을 읽어왔던 것들이 영화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아서 내 생각이 났다고 한다. 나는 그들과 전혀 다른 사람이고 또 전혀 다른 배경을 갖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나의 글들과 잘 맞아떨여저서 자꾸 연상이 됐다고 했다. 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온걸까?

이 좋은 영화를 보면서 또 좋아하면서 내 생각을 하는 친구라니!!!

















토요일에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친구1에게, 너 그때 아팠던거냐 목소리가 피곤하게 느껴지더라, 라고 했는데 이런 내게 친구는 '예민하다'고 했다. 맞다 그 때 두 시간동안 계속 말해야 해서 피곤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민하게 그걸 캐치했다는 거다. 나는 그런 친구에게 '나는 너를 알잖아' 라고 했다. 관심이지, 라고. 관심이 있으니까 알아챌 수 있는 거다. 다른 사람들에겐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변화가 눈에 보이는 법이니까. 관심이 있으면 목소리로도 상대의 기분이나 마음 상태를 알아챌 수가 있고, 표정으로도 알아챌 수가 있다. 남동생은 내 표정만 보고도 내 기분을 알아채는데, 정말 귀신같이 잘도 꼬집어낸다. 그러면 내가 이렇다저렇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응, 하면서 바로 위로 받는 기분이 된다. 이것은 익숙함이 가져오는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익숙한 사람을 몇 명쯤은 꼭 만들어두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관계에 힘써야 하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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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아이 같은 모습이라던가
내가 존경하고 믿는 부분 모두 다
똑같이 예뻐해 난 너를 공부해
완벽한 사람이 아니어서
더 많이 좋아해

가끔 짓는 슬픈 눈빛이라던가
애써 숨기려는 지친 모습까지도
난 모두 느껴져 널 많이 걱정해
나에겐 일부러 강한 척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지금 네가 짓는 표정
네가 나에게만 짓는 표정
오직 나만 볼 수 있는 표정
세상에서 네가 어떤 사람이든

내겐 꾸미거나 지어내지 말아
있는 그대로의 너로 와라
보여줘도 돼 나를 믿어봐도 돼

깊이 잠들면 잠꼬대하는 거랑
거짓말할 때 코를 찡긋하는 버릇도
다 너무 소중해 넌 나를 웃게 해
완벽한 사람 아니라도 괜찮아

지금 너를 보는 표정
내가 너에게만 짓는 표정
오직 너만 볼 수 있는 표정
세상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든

네겐 꾸미거나 지어내지 못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줘
보여주게 돼 전부 드러내게 돼

나는 절대 너를 판단하지 않아
세상의 잣대로 재지 않아
내가 아는 너의 모습 그대로 믿어

내겐 꾸미거나 지어내지 말아
있는 그대로의 너로 와라
보여줘도 돼 나를 믿어봐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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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살 조카는 텔레비젼에 나오는 촛불 집회 사진을 보고 제엄마에게 왜저러는거냐고 물었다고 했다. 여동생은 거기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답을 최선을 다해 해줬다는데, 그 과정에서 저기 저 사람들 중에 이모도 있고 삼촌도 있어, 라고 했단다. 그러나 제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여동생의 관점이 다르고 '엄마랑 아빠는 다르다'라고 말을 했더니, 조카는 '엄마는 그런데 왜 아빠랑 결혼했어?'라고 묻더란다. 여동생은 '사랑해도 정치적 성향은 다를 수 있는거야'라고 했다는데, 그러자 조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맞아. 사람은 다 다르니까. 이모가 늘 그랬어."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나는 진짜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아마도 텔레비젼을 보면서 조카가 보고 있는 텔레비젼에서 외모 비하를 하고 인종으로 비하를 하는 것 같을 때마다 나는 말했더랬다. '세상에는 이렇게 생긴 사람도 있고 저렇게 생긴 사람도 있어, 사람은 다 다르거든' 이라고 했고, 매스컴이 하는 말들을 그대로 가치관으로 삼을까봐 간혹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사람은 다 다르거든' 이라고 말을 했었는데,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고작 칠 살인 조카가 내 말을 듣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저 부지런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을 한 것 뿐인데, 아, 다 듣고 있었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실 칠 살인 조카가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이 다 다르다는 말을 들었던 것과 듣지 않았던 것은 확실히 다르지 않을까. 여동생이 저렇게 말해주는데 진짜 울컥하는 기분이 되었다. 내가 잘하고 있구나, 내가 잘하고 있어. 그래서 여동생에게도 말했다. 


내가 잘하네, 나 잘한다.


하고. 흑흑 ㅠㅠ




오늘 아침에는 컨디션이 별로였다. 책을 읽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아, 그냥 멍하니 노래 들으면서 출근길 지하철 안에 앉아 있었다. 도중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는데, 내 기분을 잘 감추지 못해서 '너 상태 메롱이네' 라고 들켜버리고 말았다. 나름 안들키려고 하느라 했는데, 난 잘 못숨기네. 책도 읽기 싫고 나아지지 않은 기분으로 양재역에서 내렸는데, 힘없이 의욕없이 터벅터벅 걸으려는데, 뒤를 돌아보니 저기 내가 타야할 버스가 신호에 걸려있다. 어라? 저거 안타면 십분 기다려야 하는데? 하는 마음에, 다다다닥 정류장을 향해 뛰었다. 뛰면서 일상의 비루함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나 컨디션이 엉망이고 힘도 없고 의욕도 없는데, 그런데도 출근하겠다고 다다다닥 뛰어야 하다니, 아, 삶은 진짜 지독하게 비루하구나... 하아- 고단하다. 고단한 삶....


문득, 장 그르니에의 《섬》, 그 중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한 번의 상처쯤이야 그래도 견딜 수 있고 운명이라 여기고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날이면 날마다 바늘로 콕콕 찔리는 것 같은 상태야 참을 길이 없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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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6-12-1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 좋아요.. 아침부터 왠지 울컥 하는 기분이 듭니다.

라라랜드 다들 재미있다고 그러더군요. 아직 보지 않았는데, 다락방님 글 보니 아니 볼 수 없겠습니다~ 저도 이 영화 보면서 다락방님을 내내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상대의 기분을 파악했을 때 주로 모른 체 합니다. 제가 들키고 싶지 않아 그런 것 같아요. 정말 도움을 줘야할 것 같을 때만 -그것도 제 판단이지만- 아는 체 하지요. 때론 슬픔과 아픔을 혼자 간직하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상대는 또 그냥 알아줬으면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겨울이라 그럴까요..?

다락방 2016-12-12 16:32   좋아요 0 | URL
[섬]의 저 구절을 읽으며 밑줄 그었었는데, 오늘 아침 저 문장이 생각나더라고요. 삶은 정말 치사할 때가 많아요.

라라랜드 정말 좋았어요, 꼬마요정님. 친구는 새로운 연인이 보아도 오래된 연인이 보아도 좋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더라고요. 꼬마요정님도 얼른 보고 오세요. 꼬마요정님은 또 어떤 걸 느끼시고 생각하실지 궁금해요. 라라랜드 보면서 아 영화란 정말 좋구나,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어서 정말 좋구나, 생각했어요.

때로는 자기가 알아치재 못한 감정을 남이 먼저 알아채주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다른이의 감정을 먼저 캐치했을 때, 상대에게 ‘너의 감정은 내가 볼 때 이렇다‘ 라고 말하기가 조심스러운 부분이라, 스스로 들여다보고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요.


라라랜드 보고 오시면 후기 들려주세요!

LAYLA 2016-12-1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라랜드 보고 제 가슴은 멍이 들어서...
도대체 이 슬픈 걸 어떻게 두 번씩 보는거냐고 혼자 속으로 소리도 지르구요...?
연말 제 가슴은 해피엔딩 전용이라고 이번 기회에 못을 박아버렸습니다.
해피엔딩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전 마지막이 너무 슬펐어요 ㅠㅠ

다락방 2016-12-12 16:34   좋아요 1 | URL
아, 라일라님. ㅠㅠ
저 역시 마지막이 너무 슬펐어요. 그러지말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그래, 저게 흘러가는 대로 된거겠지, 흐르고 흘러 저렇게 되었겠지‘ 체념하는 마음도 되었고요, 또 그 체념이 슬퍼 울고 싶어지기도 했어요. 저는 한 번 더 볼까 말까... 생각하고 있어요. 다시 보면 또 다른 게 보일 것 같기도 하고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해서요.

몬스터 2016-12-14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nited Kingdom/La La Land/Release date / January 13, 2017

나오면 꼭 보께요 ㅎㅎㅎ

다락방 2016-12-14 08:19   좋아요 0 | URL
아아 개봉이 너무 늦군요, 몬스터님! 그래도 꼭 보세요. 보시고 감상 들려주세요!!

여울 2017-01-12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달이 지나고서야 봤네요. ost 듣고 있어요. 내용을 까맣게 잊기를 잘했네요. 가장 남는 대목도ㆍㆍ‥감사
 
성폭력을 다시 쓴다 - 객관성, 여성운동, 인권
정희진 엮음, 한국 여성의전화 연합 기획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프란츠 파농이 너무나 적절하게 말했듯이, 식민지 사람들은 지배자의 언어와 자기 언어, 두 개의 언어를 배워야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은 자기 언어만 알면 된다. 여성은 남성의 언어를 이해해야 생존할 수 있지만, 남성은 여성의 언어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정희진,p.9)

이제까지 한국사회에서 여성폭력의 범주는 직접적, 가시적, 신체적인 의미의 폭력에만 머물러 있다. 성적, 심리적, 정서적, 경제적 차원의 성차별 제도 안에서 형성된 여성의 인식과 해석은 여성폭력 개념 구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소위 ‘정조 관념이 투철한 순결한 여성이 목숨 걸고 저항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당한‘ 사건처럼, 성폭력에 대한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 부합할 경우에만 폭력을 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여성은 자신의 성역할(‘순결‘)과 목숨을 바꿀 것을 요구받는다. 때문에 유아 성폭력이나 윤간처럼, 여성의 행위성이 삭제된 저항 불능 상황의 폭력만 성폭력으로 인정되고 이러한 피해자만 ‘진짜‘ 피해자가 된다. 이로 인해 검거되는 성폭력 가해자는 언제나 10대 남성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는 다시 성폭력이 10대의 ‘혈기 왕성한 본능‘으로 해석되는 근거를 제공한다. 남성 시각의 성폭력 해석이 악순환을 낳는 것이다. (정희진,p.31-32)

섹슈얼리티로 인한 여성의 고통은 비가시화된다. 낙태, 구타, 성매매등 대개의 여성 섹규얼리티 관련 문제는 형식적으로는 불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합법이다. 그래서 섹슈얼리티 문제는 법 제정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관련법이 없어서 처벌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남성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시각과 의지가 없어서 처벌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희진,p.33)

운동사회 성폭력을 문제화할 때 항상 제기되는 대표적 담론인 ‘음모론‘과 ‘조직보위론‘은, 남성의 경험에서 정의된 ‘진보‘의 대의·조직이 어떻게 여성의 경험을 주변화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선 ‘음모론‘은 성폭력을 여성-남성의 문제가 아닌 남성-남성의 문제로 환원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KBS사건에서 피해자들의 경험은 가해자와 대립하는 다른 남성(집단)의 음모로 끊임없이 치환되었다. 2000년 말 노조 선거 당시에는 "상대 후보의 조작"으로, 2001년 2월 100인위 공개 당시에는 "막 출범한 노조의 단합을 흔들려는 세력의 발흥"으로, 2001년 5월 언놀노조의 가해자 징계 당시에는 "비리를 감추기 위한 언론 노조 일각의 비이성적 작태"로, 가해자는 전가의 보도처럼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러한 해석 속에서 피해여성들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배후 세력‘의 조종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수단‘일 뿐이며, 성폭력은 여성 인권 침해가 아니라 남성간 권력 투쟁에서 활용되는 ‘빌미‘일 뿐이다. 피해자들과 친한 주변사람에서부터 기자, 검사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을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논리를 쉽게 받아들였다. (전희경, p.59)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를 명예훼손, 무고, 모욕, 심지어 간통 등으로 역고소한 예는 이전에도 있었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명예훼손 역고소), 1988년 강정순 씨 피해 사건(무고 및 간통죄로 피해자 구속), 1993년 서울대 신정휴 성희롱 사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현상은 ‘성폭력 피해 말하기‘를 범죄로 만듦으로써 성폭력 근절 노력을 사회적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이때 피해여성의 성폭력 문제 해결 노력은 남성 특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전희경, p.63)

아내구타를 제외하고 아내강간을 포함시킨 성폭력특별법안은 이후 국회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아내강간 조항마저 삭제된다. 당시 한 국회의원은 "아내강간을 처벌한다면 우리나라 남자들의 대부분은 아침에 직장에 가지 못하고 경찰서로 오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아내강간‘이 남편의 권리이자 아내의 의무로서 얼마나 일상화·정상화 되어 있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일상‘이고 ‘정상‘인 여성폭력을 문제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증한다. (정춘숙, p.95)

이미 한 번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가다 잡혀 들어와 폭행당했고, 성적 학ㄱ대로 수치심과 두려움에 숨죽여 있던 피고인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고 "죽여버리겠다"고 가위를 들고 몸을 일으키는 남편에게 대항할 때, 어떻게 팔 다리를 구분하여 찌를 수 있으며 어떻게 다시 도망갈 엄두를 낸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항소 이유서에서 "피고인은 피해자를 사망케 하는 외 다른 선택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감히 살인이라는 결과를 의욕하였다는 점에서 그 죄질이 극히 불량합니다"라고 살인의 고의성을 주장했다. 검사는 양형 부당을 이유로 항소하였고, 항소심 재판부 역시 판결문에서 이를 인정하여 김정미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하였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판단은 성인-비장애-남성의 특수한 경험을 보편화하는 남성 권력의 실천일 뿐이다. (정춘숙, p.110)

젠더 폭력으로서 ‘몰카‘와 성폭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첫째,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어 피해여성이 ‘죄인‘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강간 범죄에서나 ‘몰카‘ 범죄에서나 문제화되는 것은 ‘가해자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가‘가 아니라 피해자의 처신이다. 둘째,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가해자는 자신의 범죄 사실 자체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지만, 피해자는 오히려 피해 사실을 숨긴다. ㅂ씨 피해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스스로 ‘ㅂ씨와의 성관계를 찍은 몰카를 가지고 있다‘며 언론에 범죄 사실을 알렸으며, ㅂ씨는 사건 발생 초기에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는 강간범이 강간 피해여성에게 ‘강간 사실을 가족·주변 등지에 알리겠다‘며 협박하고, 피해여성은 이를 숨기기 위해 가해자의 요구에 끌려 다니는 메커니즘과 똑같다. 범죄는 가해자가 저질렀으되, 사회적 처벌은 피해여성을 향한다. (강김아리, p.135)

셋째, 강간과 ‘몰카‘의 정치적 효과는 일반 여성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만들어, 일상적으로 여성의 몸을 규율, 통제한다. 이제 여성들은 공중 화장실이나 공중 숙박 시설을 이용할 때 ‘몰래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이러한 범죄에 대한 주변의 반응과 처벌 과정은, 잠재적 피해여성들에게 ‘이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 기제가 없으며, 당하는 사람만 피해를 보는 것이니, 미연에 알아서 조심하는 게 최선의 방책‘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즉 ‘ㅂ씨 비디오‘의 존재 자체가 일반 여성들에게 일종의 ‘경고‘이자 ‘본보기‘인 것이다.
강간 문제에서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남성의 폭력성‘이 아니라 ‘여성의 몸‘이었듯이, ‘몰카‘ 역시 여성의 몸을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만든다. 강간과 ‘몰카‘, 그것은 여성들 스스로 종속을 체화하게 하는 가부장제적 공포와 통제의 수행자이다. (강김아리, p.136)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여성을 돕는 상담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는, 피해자들을 특정한 전형성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폭력 피해여성들이 항상 불안해하고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이러한 모습은 폭력 피해를 당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모습으로 폭력의 결과일 뿐이지, 그런 여성들이 폭력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피해여성들 중에는 가해남성보다 기질이 세거나 활동적인 사람도 있으며, 착하지도 않고, 일상 생활에 성실하지 않은 이도 있을 수 있다. 피해여성들은 가해남성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이러한 피해여성을 만나면 혼란스러워한다. 특별한 사람만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혼란을 갖게 되는 이면에는 ‘순수한 피해자‘,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라는 통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통념은 여성 폭력에 대한 비판을 ‘피해 사실‘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돌리게 한다. (김효선, p.176-177)

‘전형적인 피해자‘란 남성 사회의 신화이자 남성들이 투사하는 희망적 판타지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그런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여성 폭력을 문제화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피해 사실, 그 자체여야 한다. (김효선, p.177)

우 지사 성추행 사건을 공개하고 정치적 법적 역공세에 대응하는 동안 제주여민회에 대한 지역 여론은, 한마디로 ‘요망지지만 무모하다‘는 것이었다. ‘질 것이 뻔한 싸움을 왜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권력의 무서움을 모르고 대항하는 당돌한 운동 방법 역시 미숙하다는 비판이 많았다. 어떤 이는 우 지사 성추행 사건이 선거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변화 불가능한 것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무모했다고 말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제주 사람들은 4·3이라는 지역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권력의 요구에 순응해왔고, 선거는 학연, 지연, 혈연에 의해 좌우되어왔다. 이와 더불어 제주지역에서 ‘정치‘는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고 남성적인 문제로 간주되어왔기에 성추행은 선거에서 아무런 변수가 되지 않았다. ‘당돌하다‘라는 말은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평가적 언어이다. 이런 의미를 여성단체 활동을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남성의 눈으로 여성단체의 활동을 평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김효선, p.180)

현숙 씨 자신이 강력히 제기하고 있는 ‘미혼모‘용어의 부당성이다. 이런 맥락에선 ‘비혼모‘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현숙 씨는 지적하고 있다. 즉 ‘결혼‘을 기준으로 해서 ‘미혼모‘ 혹은 ‘비혼모‘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을 구분하는 것은, 지금처럼 결혼이 선택인 시대 흐름에도 역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숙 씨는 "‘미혼모‘란 용어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여성이 아이를 키우거나 또는 키우지 않기로 하는 상황과는 별개로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만 강조하는 감이 있다"며 "‘독신모‘나, 외래어지만 ‘싱글 맘(single mom)‘이란 용어가 훨씬 평등한 용어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 자신도 스스로를 ‘싱글 맘‘이라 부르며 딸에게도 "우린 싱글 맘 가족이지, 그치"라고 말한다. 혼인 관계만을 잣대로 모성을 규정한다면, 스스로 어머니가 되기로 결정한 여성의 권리가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이은경, p.201-202)

군산시 대명동 윤락가 화재 사건은 처음 불이 났을 때부터 진화까지 20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5명이 숨졌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참사였다. 특히 5명이라는 인명피해가 발생한 데는 윤락 업주가 윤락녀들이 도망가지 못하기 위해 쇠창살로 창문을 막고 통로를 한 곳에만 설치한 데다 윤락가에 대한 사회의 구조적인 무관심이 더해졌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정미례, p.208, 당시 언론재인용)

그런데 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군산 지역 성매매업소(개복동 유흥주점) 여성들이 경찰에 정기적으로 ‘성 상납‘을 해왔다는 사실을 밝혀 충격을 주었다. 당시 3명의 여성들은 배 변호사에게 "1998년 중순부터 18개월 동안 군산 지역 형사들에게 100여 차례에 걸쳐 정기적으로 술 접대를 했으며 경찰 고위 간부 등에게 수차례 ‘성 상납‘도 했다"고 밝혔다. 이는 성매매 업주들이 군산 지역 공무원들에게 정기적인 ‘성 상납‘을 해왔으며 이런 유착 관계 때문에 경찰이 성매매업소 단속을 사실상 방치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정미례, p.215)

한편 2000년 9월 26일 《한겨레》에 서울 미아리 성매매업소 포주들이 ‘상납계‘를 만들어 단속 경찰들에게 3년여에 걸쳐 6~7억 원대의 뇌물을 전해온 사실이 보도되면서, 성매매 업주와 경찰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생 관계에 있음이 전 사회적으로 공론화 되었다. 법으로는 성매매를 금지하고 있지만 성매매가 광범위하게 용인되는 한국 사회에서, 경찰은 이미 성매매 산업 구조의 일부이다. (정미례, p.219)

현행법상 명예훼손은 피해여성이 여성단체에 상담하는 등 피해 사실을 제3자에게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가해남성은, 성폭력 가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피해여성을 괴롭히는 자신의 행위를 남성의 인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남성 중ㅅ임적 사회 구조에 편승한 가해남성의 2차 성폭력 행위(social rape, second rape)가, "성폭력 가해자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보편적 인권 개념으로 옹호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성폭력 가해자에게도 인권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인권은 성폭력 가해자가 수사 과정에서 고문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 등을 의미하는 것이지, 가부장제 사회에서 피해여성을 억압하는 가해남성의 권력이 인권은 아니다. (정희진, p.236-237)

성매매에 반대하는 여성주의자의 입장을 ‘여성 이기주의‘, ‘장애인 차별‘, ‘비장애인 중심주의‘의 일환으로 보는 남성 장애 인권운동가의 전제는 장애 남성도 비장애 남성과 똑같이 매춘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장애 여성의 성적 권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같은 입장을 남성과 여성을 모두 포함하는 보편적인 장애 인권론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일부 장애 남성의 주장은 그들 자신이 비장애 남성으로부터 차별 받으면서도 그것을 비판하기 보다는, 남성 성기 중심적이며 여성과 장애인에게 억압적인 이성애자의 섹스를 끊임없이 모방함으로써 정상성을 욕망하는 것이다. 장애 여성, 비장애 여성, 장애 남성은 비장애 남성 섹슈얼리티의 공동의 피해자이다. (정희진,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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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쓰시는 분, 저 좀 주세요.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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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8 0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12-08 07:5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아니 그런데, 정말 오랜만이십니다!!

잘 볼게요.
:)

다락방 2016-12-08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로버트 제임스 월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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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곧잘 사랑에 빠지고 또 빠지는 사랑마다 뜨거워질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연애를 반복하긴 하지만 활활 타오르지 않을 수도 있고. 연애를 할 때마다 백도씨까지 끓어오르는 사람도 있지만, 매번 육십도 이상으로만 타오르다 단 한 번만 백도씨까지 타올라, 그 기억을 평생 안고 가져가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나는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사실 어떻게 매번 백도씨까지 타오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들은 말뿐이지, 사실은 정말 백도씨가 되어 활활 타올랐던 건, 단 한 번뿐이지 않을까? 누구나 평생 살면서 기억하게 되는 '가장' 사랑하는, '최고로' 사랑했던, '미친듯이' 뜨거웠던 연인은, 단 한 명 뿐이지 않을까? 물론 매순간 연애에 최선을 다하고, 또 매순간 자신의 연인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죽기 전에 기억나는 '단 하나의' 사람 같은 게 존재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는 로버트 킨케이드처럼, 이렇게 생각한다.


"할 이야기가 있소, 한 가지만. 다시는 말하지 않을 거요, 누구에게도. 그리고 당신이 기억해 줬으면 좋겠소.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을 거요." (p.150)





로버트는 매디슨 카운티로 다리(bridge)의 사진을 찍으러 갔다. 길을 물으러 그 동네의 집에 들렀다가 프란체스카를 만나게 되고, 그들은 처음 본 순간부터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리고, 마침 프란체스카의 남편과 아이들이 집울 비웠기에, 나흘간 그녀의 집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그 때 프란체스카의 나이는 마흔다섯이었고, 로버트의 나이는 쉰둘이었다.


나는 이런 사랑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스무살에도 오고 스물 일곱에도 오지만, 마흔 다섯에도 온다는 걸 믿는다. 그리고 마흔 다섯에 온 사랑이 온 삶을 통틀어 가장 뜨거울 수도 있다는 것을 믿는다. 대체적으로 사랑은 엇박자인지라, 나에게 가장 강한 영향을 미쳤던 나의 연인에게, 나 역시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내가 그를 추억하는 만큼, 그는 다른 사람을 추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란체스카가 로버트를 추억하고 로버트가 프란체스카를 추억한다는 것을 그 둘은 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확신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강렬한 사랑이었음을, 평생을 두고도 잊지 못할 사랑이었음을, 그 전과의 삶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강렬한 사건이었음을, 그들은 안다. 그리고 상대가 안다는 것 역시도 알고 있다. 그들은 나흘간 사랑을 나누고, 그 후에 이십년이상 서로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는 채로 살면서,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향해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누군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세상에는 단 한 순간의 기억만으로 평생을 지탱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대부분이 그럴 지도 모르겠다. 


처음 본 순간부터의 강렬할 끌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믿음, 나흘간의 섹스, 그 후에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프란체스카는 그를 따라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던 자신을 후회하지만, 그러나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머무는 것 뿐이었음을, 프란체스카도 그리고 로버트도 안다. 이들이 함께 있는 동안 사랑하고 또 헤어진 후에 어디에 있든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까지, 순간적으로 내가 될 순 있었다. 응, 맞아, 한 순간의 기억으로 평생을 지탱할 수도 있지. 나는 당신을 향한 그리움으로 지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도 있어. 그런데,


이 책으로 놓고 보면 이 사랑이야기는 좀 작위적이란 느낌을 준다. 평생을 그리워하는 거, 이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작가가 너무 욕심을 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랑을 좀 더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 굳이 음악가의 인터뷰까지 실을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사랑이야기는 당연히 나에게 가장 특별한 것이지만, 뭐랄까, 이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말하기 위해 쓸데없이 군살을 붙인 느낌이랄까. 

게다가 이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내가 무척 흥미를 가지는 사랑의 형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낄 수가 없다. 남자 작가의 한계일지 모르겠지만, 곧잘 그들은 주인공에 자신의 로망을 불어넣는 것 같다. 물론, 그게 작가가 가진 가장 큰 유리한 점이기도 하겠지만, 로버트는 누구에게도 구속 받지 않는 사람이며 일에 있어서는 엄청난 프로이다. 게다가 근육질이고, 어느 여자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며 바람처럼 떠돈다. 이건 뭐랄까, 그냥 남자들의 로망 같다. 그렇게 떠돌다가 중년에 인생사랑 만나 그 사랑을 평생 간직하며 목걸이 메달로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달고 다니는 남자라니, 흐음, 로맨틱하긴 하지만, 있을 수도 있겠지만, 너무나 소설 같다. 게다가 프란체스카는 젊은 시절 남자만 기다리는 타입의 여자였으니, 그 또한 내 관심을 끌지 못한다.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지루하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눌러붙어 있는 사람은 사실, 내 타입이 아니다. 물론 상황이란 게 있다는 것을 알고, 지금까지의 삶을 한 순간에 놓고 갈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나로서는 매력을 느낄 수 없는 타입의 여자랄까. 집에만 조용히 가만히 있는데 인생사랑이 제 발로 걸어들어오다니... 흠.. 뭐 어쨌든, 그렇게 외부로 발을 뻗어 나갈 수 없는 타입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나흘간의 만남과 사랑이 인생사랑이 된 걸수도 있겠다.


나는 이들이 경험한 나흘간의 사랑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내가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사랑을 하지 못한 채로 사느니, 이 나흘간의 사랑을 겪고 평생을 그리움에 허덕이는 편이 낫겠다고도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로버트와 프란체스카가 주인공인 이 책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나는, 하오체를 읽는게 힘들어지고 말았어...



오랫동안 내가 당신을 향해, 당신이 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하오. 우리가 만나기 전에는 서로를 몰랐지만, 분명히 우리가 함께 되리라는 확신이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도 저 가슴 밑바닥에서 쾌활하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오. 하늘의 부름을 받아 광활한 초원을 나는 외로운 두마리 새처럼, 그 모든 세월과 인생 동안 우리는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던 거요. (p.40)



그녀는 추억했다. 추억하고 또 추억했다. 아이오와 92번 도로를 따라 빗속을 달리던 빨간 후미등의 이미지. 20년도 넘는 세월 동안 그 안개가 내리는 가운데 살았다. 그녀는 무심결에 자기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녀 위로 그의 가슴 근육이 스치고 지나가던 느낌이 그대로 살아났다. 맙소사, 그녀는 그를 너무나 사랑했다. 도저히 그렇게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리라 생각될 만큼 그를 사랑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를 예전보다도 훨신 더 많이 사랑하고 있다.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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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6-12-06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오..체 읽는 것이 힘든 사람 추가요~^^ 자꾸 오그라들어요 ㅎㅎ 전 이 책 별 감흥 없이 읽었는데 그 이유를 다락방님 글을 읽고 알게 됐어요. 완벽한 남주와 수동적인 여주... ㅎㅎ

다락방 2016-12-06 16:02   좋아요 0 | URL
제가 한창 할리퀸을 읽던 시절에는 남자의 하오체를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이젠 하오체를 견디기가 힘이 드네요. 하아-
작가가 자꾸 ‘이 사랑 완전 짱이지?‘ 이걸 강조하는 것 같아서 좀 짜증났어요. 가만 둬도 알아서 다 판단할 수 있는데 말이죠. 작가가 욕심을 너무 많이 부리면 좋지 않은 글이 나오는 것 같아요. ㅎㅎ

LAYLA 2016-12-07 0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찬양하는 글만 봤는데 락방님 글을 읽으니
그렇지
맞아
그라췌!
막 공감하게 되고요...?
캐릭터 분석은 날카로운 지적인거 같아요.

다락방 2016-12-07 09:01   좋아요 0 | URL
그라췌! 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소리내서 해보고 빵터졌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린 시절에 읽었을 때 재미없었거든요. 이제 프란체스카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 다시 읽으면 어떨까 싶어 읽은건데, 음, 찬양할만한 책은 아니에요. 책은 그대로인데 제가 변한거겠죠... 하하하하하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 e-book 나왔습니다!! 전자책으로 나왔다고요! 아하하하하.
















원고 검토 때문에 전자파일 받아서 먼저 훑어봤는데, 아아, 역시 몇년전 책이라 그런지, 그 당시엔 좋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읽어보니 좀 유치하고 오글거리더라고요 ㅠㅠ 다음번 책은 더 나아져있길 바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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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0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쓴 글을 다시 읽을 때 느끼는 심정은 마치 어린시절의 모습이 찍힌 사진 앨범을 보는 기분입니다. ^^;;

다락방 2016-12-06 14:19   좋아요 0 | URL
크- 그래서 사람은 자꾸 발전해야 하는가 봅니다. 부끄러워요 ㅠㅠ

단발머리 2016-12-06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ㅎㅎ
이 책의 e-book을 읽기 위해서라도 나는 크레마를 사야하지 않겠는가...!!!

다락방 2016-12-06 16:03   좋아요 0 | URL
아니, 단발머리님은 이미 종이책을 가지고 계시니까 이 책을 또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오글거리더라고요. 오글오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6-12-06 16:08   좋아요 0 | URL
아하... 그런가요?
두 번째 읽을 때도 전 좋았는데^^

그나저나... 제가 이유경 작가의 3번째 마니아라는 사실을 수줍게 알려드립니다. ㅎㅎ
1번째 마니아는 이미 알고 있으니 2번째 마니아를 찾는 일만 남았습니다.
누구실까요, 이유경님의 2번째 마니아?!?
ㅋㅎㅎㅎㅎㅎ

다락방 2016-12-06 16:54   좋아요 0 | URL
제가 단발님 댓글 보고 지금 가서 검색해봤더니, 이유경 작가의 첫번째 마니아는 다락방이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두번째 마니아는 마노아님 이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공개 2016-12-0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번 책도 기대합니다 ㅎㅎ

다락방 2016-12-06 16:53   좋아요 0 | URL
으앗. 고맙습니다! >.<

2016-12-08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12-09 09:00   좋아요 0 | URL
^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