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방 사냥꾼 베라 스탠호프 시리즈
앤 클리브스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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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하버 스트리트]보다 더 재미있다.


돈 많고 은퇴한 사람들이 밤마다 술을 마시는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어쩌면 그렇게 매일을 여유롭게 살 수 있는지, 어쩌면 그렇게 집 안을 완벽하게 꾸며놓을 수 있는지 그런 환경에 놓이지 않은 베라는 궁금하며 질투심도 일지만, 그들 개개인에 대해 알게 됐을 때 많은 것들을 숨기고 살고 있다는 걸 보게 된다. 그래, 사람이 그렇게 완벽한 삶을 살 수 없지.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것 같은 그들이었지만, 심지어 부부사이에서도 그들은 비밀을 갖고 있었다.


사건과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뚱뚱한 독신 여성 베라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것, 그리고 후배 여성과 후배 남성과 일을 같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무척 좋다. 냉정함을 홀리에게 주고 따뜻함을 조에게 준 것도 유쾌한 설정이다.

사건의 중심과 주변에 있는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삶을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장점. 읽으면서, 아 이 맛에 소설을 읽는 거야, 생각했다.




베라 시리즈는 나오는 족족 다 읽어봐야지.


집 옆쪽으로 구식 부엌 정원이 딸려 있었다. 과일 덤불에는 망을 씌웠고, 식물이 나란히 싹트고 있었다. 모든 것이 깔끔했다. 수전은 정원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있었다면 분명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카스웰의 솜씨다. 그들은 이 집을 사랑했고, 이 정도의 시간을 집에 투자할 수 있다면 분명 은퇴했을 것이다. 정원 너머로 언덕은 가파르게 바위산으로 이어졌다. 잠시 서있으니 양 우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P22

"나이절 루카스입니다."
"소문은 다 들으셨겠지요."
"음, 수전 새비지, 퍼시 노인의 딸이 간밤에 전화해서, 카스웰 저택 하우스시터가 도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개울 옆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보려고 위층에 올라가 보기도 했습니다." 베라는 그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도 그를 위해 슬퍼하는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 P73

베라는 자기도 조금만 잘 갈고 닦으면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아침마다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시간을 들여 얼굴에 분칠하는 수고를 감당할 만큼 가치 있는 남자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P75

애니는 자기도 모르게 대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두려워했다. 고통이나 질명이라는 현실이 아니라, 자신이 없이도 세상이 돌아간다는 자체가 무서웠다. 아직도 그녀는 어둠에 삼켜져 갑자기 사라지는 악몽을 꾸곤 했다. - P120

나이 든 여자가 탁자에 앉아 있었다. 혼자였고, 같이 온 사람은 안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잇는 것 같았다. 뺨에는 둥글게 분을 발랐고, 립스틱은 입술 경계를 넘어 파우더까지 번져 있었다. 옷은 밝은색이었다. 파란 코트와 분홍색 스카프, 그녀는 탁자 위에 헝겊 인형을 들고 아기처럼 어르며 말을 걸고 있었다. 자동차 창문이 닫혀 있어서 뭐라고 하는지 들을 수는 없었지만, 홀리는 인형을 계속 탁자 위에서 아래위로 어르다가 아기처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노인에게서 당황스러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치매였다. 어쩌면 알츠하이머일 것이다. 이렇게 도로 가까이 혼자 내버려두면 안전하지 않으니, 보호자가 근처에 있을 것이다. 홀리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왜 저런 노인을 밖에 돌아다니게 할까? 어디 보호소에 있는 게 노인에게 더 편하지 않을까? 하지만 홀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노인의 편안함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123

자신이 이렇게 잔인하게 타인을 재단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자기도 저렇게 약하고 정신 나간 노인으로 생을 마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갑자기 구역질이 나도록 역겨웠다. - P123

홀리는 카모마일 차를 끓여 거실로 향했다. 사각형의 방에는 물건이 별로 없었고, 홀리는 그게 좋았다. 이 집 융자 보증금을 대느라 몇 년 저축을 쏟아 부었지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그 돈이 한 푼도 아깝지 않았다. 이곳은 업무의 긴장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정적이 좋았고, 자동차 소음이 없어서 좋았고, 새로 칠한 벽의 날렵한 모서리와 다림질해서 반듯하게 접어놓은 침대 시크가 좋았다. 도전적인 곳이 경력을 위해 좋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북동부로 옮겼고, 이 아파트로 이사 온 뒤로는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 P132

"요즘도 안 좋은 남자하고 사귀나요?" 베라는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하려고 해 보았지만, 이제는 그냥 이야기에 휩쓸려 수사와 관계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애니는 딸이 외지에서 일한다고 했고, 베라는 굳이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았다.
"학교에 다닐 때 선생 중 한 사람과 관계를 가졌죠. 선생은 해고당했어요."
"그건 학생 잘못이 아닙니다!" 베라는 받아쳤다. "특히 미성년일 때는. 유일한 잘못은 남자한테 있어요!" - P137

"이렇게 멀쩡한 척하는 것도 압박 아닌가요?"
로레인은 피식 웃었다. "모든 부부는 뭔가 가장하고 살아요. 항상 정직하면 미쳐 버리고 말겠죠. 성공적인 이성 관계는 선의의 거짓말과 사소한 아첨으로 이루어지지 않나요? 파트너가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상대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해 주는 거예요."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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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느 분의 리뷰를 보다가 이런 댓글을 읽었다. 댓글 쓴 사람을 굳이 밝히진 않겠다.



"최근 페미니즘 무브먼트와 함께 이게 르뽀인지 극화인지 으냥 유우머인지 경계가 모호한, 다시 말하자면 소설로서의 가치나 아름다움은 현저히 떨어지는 작품이 시대성 하나만으로 시장을 휩쓰는 경우가 많은데, -> 이래서 한국 문단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ㅠ"




보면서 너무 어이가 없었네.

한국 문단이 죽었다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건 본인이 그렇다는 거에 힘이 실리도록 가져온걸테고.

한국 문단이 죽었다고? 지금 그 어느때보다 활발한 게 한국문단인데? 저 댓글러가 한국남자라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닐지. 내가 보기에 죽은 건 한국 문학이 아니라 한남문학이다. 한남문학이 죽은 걸 한국 문학이라고 퉁치는 것 같은데, 한국문학의 베이스도 정통도 한남이 아니다.


황정은, 김금희, 최은영, 김초엽, 한강, 정세랑, 윤이형.. 페미니즘 무브먼트를 놓고 보지 않더라도, 그 소설로서의 가치나 아름다움을 보더라도 여자작가들이 한국 문학을 휩쓸고 있는데 죽기는 뭐가 죽어. 어처구니가 없네. 

시인들은 어떻고? 여자 시인들이 지금 얼마나 아름다운 시들을 써대는지 알고서 그런 얘기하나? 

한국 문단은 거칠고 아름답게 냉철하게 살아있다.


죽은건 한국 문단이 아니라 한남 문단이다.

한남 문단이 죽어도 하나도 아쉽지 않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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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2019-09-22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입니다. 현대 한국문학의 세태도 읽지 못하는 자가 한국문학이 죽었니 뭐니를 탓하다니요. ㅋㅋ 그저 웃음만 나옵니다. 앛 더 이상 한남스러운 문장들이 나오지 않아서 그런가?ㅎ

다락방 2019-09-22 14:52   좋아요 1 | URL
한국 문학이 어디 죽었나요? ㅎㅎ 이렇게나 격렬하게 살아있는데 말입니다. 제 눈에는 보이는 한국 문학이 저사람을 비롯한 일부에게는 보이지 않는모양입니다. 아니면 한남의 문장이 아니라면 문학 취급을 안하는건지.. 하하하

에곤 실례 2019-09-22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애란 김세희 구병모 박연준도 넣어 주세요.필요하다면 누드모델을 했다고 떳떳하게 말하는
차세대의 기대주 이슬아도 넣고요. 문학한남들의 도태는 환영할만 하지요.

다락방 2019-09-22 20: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에곤 실례님. 문학한남들의 도태는 환영할 만하지요. 그들이 사라진 것이 한국 문단이 죽어가는 건 결코 아니죠. 오히려 사라져야 할 것들이 사라져가는 건 바람직하죠.

단발머리 2019-09-22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편하겠죠. 불편하니까 그런거겠죠.
이해하기도 공감하기도 어렵구요.
왜 이런 소설, 이런 이야기들이 시장을 휩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겠죠.

한국문단은 등단을 통해 작가들이 발굴되고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이 대중들에게도 많이 소비되는 구조이죠. 그게 좋은가 나쁜가를 떠나서, 한국문단이 죽었다고 생각하게 하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작품들이 바로 그 제도를 통과한 작품이라는 거죠. 그전에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거죠. 왜? 나한테 불편한 작품이니까. 여자들이 쓴 거니까.

다락방님 분노에 100번 동의합니다.
저는 분노 더하기 헛웃음... 허허허.

다락방 2019-09-22 20:10   좋아요 1 | URL
아 진짜 너무 싫은 댓글이에요. 평소에도 페미니즘에 대해 안좋은 관점으로 글 쓰던 사람의 댓글이라 너무 뻔히 속이 들여다보였어요.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그러더라‘ 하면서 자기 주장 살짝 얹는 식으로. 아 진짜 너무 투명하죠 ㅎㅎ

저도 지금은 그냥 헛웃음만 나오네요. 계속 책을 읽고 글을 쓰면 뭐하나요. 한국 남자들은 사고의 변화가 절대 없는데 말입니다. 후훗.

syo 2019-09-22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남 문학 으하하하하

저 같은 경우 나오는 족족 사서 읽고 싶은 책을 쓰는 작가들은 다 여성이거나, 그나마 생물학적 남성이라면 게이이거나..... 이게 과연 제 개인적 취향의 문제일 뿐일까요??

다락방 2019-09-22 21:51   좋아요 0 | URL
한국 문단은 곧 한남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게 너무나 잘 드러나는 댓글이었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시이소오 2019-09-2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여전히 통쾌하시군요. 나열해주신 작가들의 면모가 후덜덜합니다. 남성작가들 분발해야겠어요~~

다락방 2019-09-23 07:56   좋아요 0 | URL
통쾌는요, 무슨. 이렇게나 많은 독자들이 많은 한국문학을 읽고 있는데 한국 문단 죽었다는 소리하니까 딥빡이 와서.. 한국 문단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지 너무 뻔하게 드러나잖습니까!!

공쟝쟝 2019-09-23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의 한국문단 독자로 인입되며 요즘 행복한 독서 만끽중인 1인!!!으로서 동감합니다..(이전의 한(국)남(자) 작가들 문학ㅋㅋㅋ은 거의 안읽었는데요 재미가 음써서 안읽은 거드라고요 ㅋㅋ..)

다락방 2019-09-23 07:57   좋아요 0 | URL
한국 남자들의 작품이 재미가 없는 것도 없는거지만 쓸데없는 걸 많이 써놓잖아요. 박범신의 은교에는 은교의 자아가 전혀 없이 성적대상화된 은교만 있고(그러나 늙은 남자의 자아는 거기있죠), 김훈은 여자아이의 성기 안이 따뜻할 거라는 걸 아비의 시선으로 써놓고.. 할아비나 아비나 다 너무 읽기 싫은 글 쓰잖아요. 그걸 누가 읽어요. 그렇다고 한국 문단이 죽은 건 아니죠. 이렇게나 젊은 여성작가들이 팔팔하게 끓고 있는데요.
 
캉탕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7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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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가기 위한 수단 혹은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오래전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목적지가 어디인지만 계속 염두에 두고 있으면, 버스나 기차를 타든 중간에 잠시 쉬어가든, 걸어서 오래 걸리든, 어쨌든 우리는 가고자 하는 바가 확실하다면 어떻게든 그곳에 가게 될거라고. 그러나 이렇게 어쨌든 닿기 위해서라면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축에 속한다고 스스로를 생각하는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지를 모르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되, 지금 여기는 아닌 것 같은 상태.


이승우는 자신의 책 《캉탕》에서 등장인물 '핍'의 행동을 가져와, 그가 정착하기 전에, 머무를 곳을 찾기 위해 했던 것이 항해라 얘기하고 있다. 여긴 아닌 것 같아,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이렇게 해볼까, 라고 생각해 배를 탔고, 그 배는 어느 곳에 정착했고, 정착해보니 여기가 바로 내가 머무를 곳이다, 라는 생각에 배에서 내렸다. 나는 결국 여기에 오기 위해서 떠돌아 다녔구나, 내가 떠돌아다닌 건지는 몰랐지만, 나는 이곳을 찾기 위해 배를 탄거였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내가 머무를 곳, 정착할 곳을 찾았다면, 그제야 자신이 항해를 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정착해있다. 그러나 언제든 떠날 준비도 되어있다. 나는 이곳이 내가 정착할 곳임을 안다. 그러나 낯선 곳이 저 어디에 있다는 걸 알고, 충분히 낯선 곳을 마주치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나 당신은 어쩌면 항해중인 걸 수도 있다. 아직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채로, 닿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채로, 그런 채로 대부분 잔잔한 바다 위에서 때로는 파도가 공격하는 곳에서 항해중인 걸 수 있다. 항해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항해는 뜻밖의 일로 이름 모를 곳에 정착할 수도 있다. 핍은 배가 멈춘 곳에서 나야를 만나 그곳에 정착하고 남은 삶을 살게된 것처럼, 당신 역시 어느 순간 배가 멈춘 곳에서 나야를 만나 배에서 내려, 그곳에 터를 잡을 수도 있다. 나야와 밥을 먹고 나야의 노랫소리를 듣고 나야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아, 나는 긴 항해를 마쳤구나, 비로소 정착했구나, 생각하며 고요한 낮과 밤을 보낼런지도 모른다.



이승우의 캉탕은 문장 때문에 읽는 맛이 있다. 나는 이승우가 언제나 건드리는 자신 안의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도 싫어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그의 문장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아니야, 문장이 아니라 주인공이 가진 저 깊은 곳에, 다른 사람에게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개인의 은밀한 비밀 같은 것을 사랑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캉탕에도 이승우 고유의 문장이 있고 개인의 은밀한 비밀이 저 안에 숨겨져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 있고 불완전한 삶이 있다. 그리고 정착한 사람이 있고 항해하는 사람이 있다. 정착하고자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되질 않아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저 먼 캉탕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캉탕으로 가서도 하루에 몇 시간을 걷는 사람이 거기에 있다. 나 역시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먼 곳으로 가 몇 시간이고 걷고 싶다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생각했다. 걷다가 지치면 해변가에 철푸덕 주저앉아도 좋을테고 해변가의 술집으로 들어가 자리잡고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셔도 좋을테다. 생각들을 쏟아내기 위해 걷고 또 걷는 일을 몇날이고 반복하다보면, 아마 해변가 술집엔 내 고유한 자리가 생기겠지. 그렇게 걷기 위해 갔다가 어쩌면 나도 그곳에 정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 나는 나도 몰랐는데, 내가 정착하고 있는줄 알았는데, 사실은 떠돌고 있었구나, 뒤늦게 깨달으면서.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은 아직 항해중인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은 항해중이고, 당신은 아직 세이렌의 노래 소리를 듣지 못했고, 당신은 아직 배에서 내리지 않았고, 당신은 아직 스스로가 항해중인 걸 알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캉탕에 닿는 시기와 당신이 캉탕에 닿는 시기에는 어쩌면 시간차가 있을 수 있겠지. 나와 당신이 캉탕에 이르게 된 이유와 방법은 달랐을지언정, 결국은 배에서 내려 만나게 될 수도 있겠지. 우리가 닿지 않을 사람들이라면, 내가 다시 항해를 시작하게 될 즈음에야 당신이 비로소 캉탕에 닿을 수도 있고. 나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다시 항해할 수도 있고 당신은 여기에 오기 위해 그동안 길고도 긴 항해를 했구나, 할 수도 있겠지. 결국 당신과 내가 각자의 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면 그 먼 바다에서 당신과 나는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한 명이 캉탕에 이미 닿아 있다면 다른 한 명을 기다린다면 언젠가 배는 흐르고 흘러 캉탕에 닿게 되지 않을까.


선술집, 해가 잘 드는 곳에 이미 당신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앞자리에서 문이 열릴 때마다 돌아보면서, 책장을 넘기고 있을지도 몰라.

사실 나는 정착해 있는 사람이니까.







그는 핍을 보고 싶었다. 바다에서 내린 후 다시는 배를 타지 않은 사내. 바다에서 내렸으므로 정박했고, 정박했으므로 바다에 타지 않은 남자. - P36

한중수는 J가 본 핍을 보지 못했고 J는 한중수가 본 핍을 보지 못했다. 시간은 조르바를 에이해브로 만들 수도 있고 에이해브를 조르바로 만들 수도 있다. 아니, 시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20년 전의 핍과 20년 후의 핍 사이에 달라진 것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에게는 조르바로 인상 지어진 사람이 다른 이에게는 에이해브로 기억되지 말란 법이 없다. 핍은 한 사람이 아니다. 어떤 순간의 누군가의 핍이 있다. 어떤 순간의 횟수와 누군가의 숫자를 곱한 만큼 많은 여러 핍이 있다. 어쨌든 그가 만난 핍은 J가 말해준, J의 말에 의해 인상 지어진 핍이 아니었다. - P45

J는 대체로 한중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는데, 그것은 한중수가 J에게서 자기 목소리를 듣기 때문이었다. 혹은 자기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만을 듣기 때문이었다. 설득은 설득하는 사람의 권위보다 설득당하는 사람의 형편과 의지에 더 의존한다. 말하는 사람이 효과적인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효과적인 말로 듣기 때문에,그 경우에만 설득이 일어난다. 심지어 스스로 결정한 것을 추인받거나 이미 한 선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부의, 권위를 가진 목소리를 설득하는 자로 불러오기도 한다. 가령 스승의 어떤 교훈을 삶의 지표인 것처럼 언급하는 착실한 제자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스승의 수없이 많은, 더러는 충돌하는, 다른 맥락 때문에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는 여러 가르침들 가운데 제자는 어떤 특정한 충고만을 스승으로부터 받은 중요한, 더러는 유일한 가르침으로 언급한다. - P48

그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언제나 먼저 싸움을 걸어야 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가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싸움밖에 없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진 자는 그 상태를 평화라고 부른다는 것을 그는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가진 자가 자기 것의 일부를 내주는 일은 절대로 인어나지 않았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가진 것이 없는 가즌 가진 것이 없는 채로 살게 된다는 것을 그의 경험이 가르쳤다. 그러니까 가진 것이 없는 자가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서는 가진 자가 하지 않는, 할 필요가 없는, 치열한, 치사한, 때로 공허한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21

책을 통해 세상의 넓이와 문학의 매력을 맛본 청년에게 밭에 거름 주고 바다에서 김 뜯어 오고 하는 머슴 노릇이 좀 갑갑했을라고. 실제로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어. 오랫동안 고래잡이배의 선원 노릇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해 배가 정박한 항구에서 만난 여자에게 빠져 살림을 차리고 그곳에 정착했어. 그러고는 다시 배를 타지 않았지. 그 양반, 정착지를 찾기까지 떠돌아다닌 거라고 해야 할까. 정착지를 찾지 못해 떠돌아 다닌 거라고 해도 되겠지. 떠돌아다녀야 정착할 곳을 찾을 수 있다는 교훈도 아주 억지스럽지는 않을 테고 ……. 정박할 때까지는 바다에서 내리지 않는다, 이게 그 양반이 내게 한 말이야.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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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22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린이책 읽는 법》의 작가 '김소영'의 신간이 나왔다. 어린이책 읽는 법이 비단 어린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듯이, 이 《말하기 독서법》역시 아이들을 위한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된다. 주변에 글쓰기 자체를 어려워하는 어른들도 결코 적지 않은데 그들을 위해서도 아주 맞춤한 책이 되어주지 않을까?


그런 한편, 좋은 책을 내는 작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에 대해서도 어제 내내 생각했다. 전작이 《어린이책 읽는 법》이고, 그 다음 책이 《말하기 독서법》이라니.. 김소영 작가는 시간이 흘러 먼훗날 돌이켜봐도 자신이 낸 책에 뿌듯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발언들을 생각하며 낯부끄러워질 때가 있듯이 과거에 써둔 글을 읽어보며 부끄러워질 때가 많다. 그것이 나로부터 나온 글이라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이런 글을 썼었다니, 하며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책으로 나온다면 더 그렇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이 읽은 건 아니라해도 이미 세상에 뿌려진 책인만큼 그것에 어떤 후회할 내용이 있다면 나는 또 얼마나 부끄러울 것인가...

그러나 김소영 작가는 앞으로도 그런 걱정을 할 일이 전혀 없을 것 같다. 너무나 좋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으니,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서도 '엣헴, 나는 이런 책을 썼지' 하며 으쓱으쓱할 수 있지 않을까.

전작에서도 진심을 느끼며 책을 읽었던 바, 이번 책 역시 그러할텐데, 어쩌면 글쓰기란 어떤 사람들에게 타고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진심은 역시 통하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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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한 아이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선생님, 그러니까 그 장면에서요……” 하고 조잘조잘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방도 미처 내려놓지 못한 채 늘어놓는 말들이라 두서없지만 이런 말에는 생기가 있고, 솔직한 아이의 감정이 담겨 있다. 이런 순간에 “자, 이제 독후감을 써볼까?”하면 어떻게 될까? 독서의 재미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말하기 독서법’을 지도하고 있는 저자의 독서교실을 찾은 아이들은 무엇보다 책 읽기의 즐거움에 흠뻑 빠지게 되는데, 그 비결은 바로 ‘말하기’에 있다. 책을 읽은 뒤 글을 쓰게 하면 3분도 힘들어하던 아이에게 말을 하게 하면 30분이 넘도록 신이 나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읽고 쓰기 전에 말하기로 아이가 책 읽기의 재미를 스스로 깨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고자 이 책을 펴냈다.

아직 읽기도 서툰 아이에게 읽은 것에 대해 쓰게 하면 독서는 힘들고 귀찮은 일이 된다. 그래서 저자는 독후감을 쓰기 전에 읽은 것에 대해 말하게 하라고 강조한다. 말하게 하면 책 읽기가 즐거워진다. 책 읽기의 즐거움을 깨친 아이에게는 읽기 능력이 생기고, 읽기 능력이 자리 잡으면 이는 글쓰기 실력으로 이어진다. 읽고 이해하고 쓰는 것이 수월한 아이에게 공부머리가 트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나아가 평생 책을 가까이하는 독자이자 교양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저자는 읽기 능력과 공부머리가 트이는 독서 교육의 필수 지침과 구체적인 방법을 이 책에 모두 담았다. 그림책, 동화책, 동시집, 동화책, 지식책 책의 주요 갈래별로 나눠 아이가 책을 읽은 뒤 어떻게 말을 하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방법들은 저자가 시행착오를 거치며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그 성과를 증명한 것들이다. 독후감 쓰기 때문에 책이 싫어진 아이, 학습만화만 읽는 아이 때문에 걱정하는 부모들에게 이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진짜 독서를 위한 출발점이자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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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와- 책날개의 작가소개를 읽어보니 정말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저자는 1998년생이다. 우리 나이로 이제 22살인거다. 그런데 10대에 이미 <피어리드>라는 비정부기구를 조직해 생리빈곤층인 저소득층 학생과 노숙자들에게 생리용품을 공급해준다 한다. 와.


일단 이 책은 저자 본인의 초경 얘기로 시작한다. 10대 초반 생리를 시작하면서 학교에 다니고, 학교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노숙자와 이야기를 하게되고, 그러다가 그들이 생리용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대단히 충격을 받는 거다. 아니, 정부가 노숙자에게 생리대를 공급해주지 않는단 말이야? 그렇게 저자는 10대에 자기가 단체를 만들어버려...


하아- 진짜.. 난 뭐했냐.

이 책 몇 장 읽지도 않고 난 뭐했냐 대체..하는 생각을 어제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십대에 생리를 시작한 것도 나와 같거늘, 나는 그 당시에 저소득층의 학생, 노숙자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었다. 맙소사..


이 책을 받아들고 한번 후루룩 넘겼다가 눈에 꽂힌 단어가 '생리 빈곤'이었다. 잠깐 옮겨보겠다.



생리 빈곤이란 월경하는 동안 생리용품(또는 청결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품목)을 구입할 형편이 되지 않는 상태를 지칭한다. 이 용어는 2017년부터 영국에서 널리 쓰였지만 미국에서도 생리 빈곤 문제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p.125)



이 책의 저자는 노숙인들의 생리 문제에 대해 알게 되며 관심을 갖게 되고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월경에 대한 글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듣거나 검색해서 적어나간다.



개발도상국에서 여학생들의 주된 결석 원인은 생리인데, 이는 어느 정도는 그들이 적절한 월경용품을 사용할 수 없어서다. 그와 동시에 일부 국가에서는 초경을 소녀에서 여성으로의 변화로 여기며 초경을 시작한 여자아이는 아내와 엄마가 될 준비가 되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조혼이나 여성 할례, 심지어 사회적 격리까지 이어진다. 나는 미국 내 대부분의 주에서 아직까지 생리용품을 사치용품으로 여겨 판매세를 부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면 탈모 치료제인 로게인이나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 같은 제품에는 세금이 붙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면 대체로 이런 반응이 이어졌다. "지금 &@%$&# 장난해?! 아저씨들의 탈모와 발기부전 치료제는 생필품이고 생리 기간을 깔끔하게 지내게 해주는 제품은 사치품이라고? 말도 안 돼!" (p.16)



잘못된 걸 고치기 위해서는 일단 잘못된 걸 알아야 한다. 알기 위해서는 관심을 가져야하고. 가만히 있는데 잘못된 것이 저절로 고쳐지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앞서서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저자 '네이디아 오카모토'는 질문하는 사람이고, 잘못된 걸 볼 수 있는 사람이고, 공부하는 사람이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십대에 이미 비정부기구를 설립하고 20대에 이걸 세상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책으로 내는 사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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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가세가 기운 시절, 노숙인 여성들과 친해진 네이디아는 생리용품 대신 마분지 상자, 비닐봉지, 솜뭉치 등을 사용한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생리 빈곤 문제에 대해 인식한다. 그리고 이내 노숙인뿐 아니라 생리용품을 살 돈이 없어 한 달에 일주일씩 결석하는 저소득층 학생들, 생리용품을 배급받기 위해 교도관들에게 굽힐 수밖에 없게 되는 재소자들, 초경을 시작한 후 조혼을 하거나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제3세계 소녀 등 생리 빈곤 때문에 자기 능력을 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알게 된다.
월경 같은 생리 현상 때문에 그 누구도 활동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네이디아는 2014년 비정부기구 피리어드를 세워 생리용품 패키지를 배포하며 누구든 평등하게 생리 기간을 보낼 수 있게끔 돕고 있다. 평범한 학생에서 ‘월경권 운동가’로 거듭난 네이디아는 이 책을 통해 생리가 실제로 어떠한 경험인지를 가감없이 공개하고, 생리용품의 역사, 월경 정책, 미디어에서 생리를 다루는 방식 등을 짚어가며 어떻게 하면 생리를 둘러싼 낙인과 금기를 깰 수 있는지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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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여러가지로 부끄럽다.


















《여성의 설득》이란 제목만으로 나는 이것이 사회학, 인문학으로 분류되는 책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설'이다! 꺅 >.< 아니, 소설의 제목이 '여성의 설득' 이라니요... 우리집 강아지 이름을 '냥이'라고 지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잖아요?


책소개를 보니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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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시의적절한 주제로 출간 즉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강하고, 복잡하며, 야망 넘치는 여자들의 이야기

‘이 시대 여성에게 꼭 필요한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는 소설가 메그 월리처. 아직 국내 독자에게는 이름이 낯설지만, 오늘날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깊숙하게 조명하는 소설을 주로 펴내며 미국 여성 독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여성의 설득』은 시의적절한 소재로 출간 즉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로 개성 강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여성 서사 드라마다. NPR, 피플지, 커커스 리뷰, USA투데이 등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배우 니콜 키드먼이 영화 제작을 발표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목소리를 꺼내는 일을 힘들어하는 수줍음 많은 그리어라는 젊은 여성이 캠퍼스 성추행 사건에 휘말리며 페미니즘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미국 여성운동의 중심축이었던 60대 페미니스트 페이스 프랭크의 지지와 연대가 큰 영향을 미친다. 이 복잡하고 흥미로운 두 여성의 이야기는 최근 몇 년 동안 사회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예민한 주제들을 섬세하게 다루며 이 시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고민할 만한 지점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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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는 강아지와 오래 살았다. 고양이랑도 며칠간 살았던 적이 있다. 성인이 되어서는 같이살 생각을 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나에게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고양이의 경우는 심지어 '싫어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나이들면서 고양이랑 사는 친구들을 계속 사귀다보니 이제는 가끔 길고양이에게 소세지를 사주기도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개나 고양이랑 한집에 사는 일에 대해서는 나에게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작년에 병원에 갔다가 닥터의 권유로 알러지 검사를 했다. 몇해전에는 반응을 보는 검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혈액으로 하는 검사였다. 200가지 이상에 대해 검사하는 거라고 했는데, 그 검사를 한 뒤에 닥터는 '고양이 근처에는 가지말라'고 말했다. 와, 나도 몰랐는데 내가 고양이털 알러지가 매우 심한 사람인거다. 와.. 수치가 진짜 어마어마했어. 내 주변에 나랑 친한 친구들은 고양이랑 같이 사는데, 심지어 두 마리랑 살고 막 이런단 말야? 그런데 나는 어째서 고양이털 알러지가 있는 사람인거지?


그러다 고양이랑 같이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갔던 날의 일이 기억났다. 그 집에서 하룻밤을 잤는데, 다음날 아침 샤워를 하면서 엄청 괴로웠던 기억. 코가 난리가 난거다. 이 집이 건조한 집인가, 그래서 비염이 심해졌나, 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날 너무 괴로웠고, 아아, 나중에 피검사로 '고양이털 알러지' 얘기를 듣고는, 아아, 나 그 알러지여서 그랬구나! 싶어진 것. 그 날의 내 육체적 고통이 너무 괴로워서, 그 친구 집에 놀러가고 싶어도 이제 갈 수가 없어 ㅠㅠ


만약 같이살게 된다면 나는 고양이보다는 강아지 쪽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본능적으로 내가 내 안의 알러지를 알았기 때문인가. 그러나 강아지라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다. 고양이털처럼 위험할 정도로 수치가 높지 않다뿐이지, 강아지털 알러지도 있더라, 내게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무튼 나에 대한 TMI 잔뜩 써놨는데, 서민 교수님의 새 책, 《서민의 개좋음》도 나왔다.


서민 교수님은 정말이지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써서 책으로 후딱후딱 내시는지 진짜 대단하다.. 나도 후다닥 써서 팡팡 내고 막 이러고 싶지만, 그렇게 냈다가 또 나중에 아아 이것은 후회가 되는 글이다...이럴까봐 너무 쫄리고...

최근에도 지면에 발표되고 누가 읽을까봐 너무 조마조마한 글이 있어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역시 글은 타고나는 사람이 써야 하는 가봐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아, 나란 인간이 하염없이 부끄럽다..





















이승우의 신간이 나왔다고 해서 어머! 이러고 후딱 질러서 어제부터 읽고 있는데, 책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 채로 일단 사서 일단 읽기 시작했단 말이야? 아아..모비딕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모비딕..모비딕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다보면 다들 모비딕을 한번 이상씩은 마주쳤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비딕을 읽어두면 다른 책들 읽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되겠군'이라는 생각을 한것이지. 그래서 큰 마음먹고(정말?) 이북으로 결제해 크레마에 담아 두었는데, 언제 샀는지 모르겠지만, 담아두긴 했으되 읽진 않은 책 중의 한 권이 되어버리고 만것. 그런데 이승우의 신간을 읽다보니 모비딕이 나와... 주인공 '핍'이 (아니, 핍이라뇨, 그것은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이잖아요..) 모비딕을 너무 좋아해서 닳도록 읽고, 자신이 캉탕이란 섬에서 선술집을 하면서 그곳의 이름을 모비딕에 나오는 배 이름으로 짓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모비딕의 등장인물에 비유하고..막 그런단 말이야? 그러니 내가 얼마나 읽고 싶겠어요?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모비딕이 전자책으로 있다!!


라고 생각하다가,


그렇지만 종이책으로 읽어야 제대로가 아닐까...


라는 미친 생각을 하다가... (집어쳐, 너는 종이책을 가지고 있어!!)


나는 또 생각하면 바로 실행에 옮겨버리는 적극적이고 날쌘 여자사람...


네, 어제 종이책으로 또 질러버림.. 이승우 님이여... 다른 책 얘기를 본인 책에서 하지 마세요. 저같은 사람 생겨버려요..


















이승우 책 절반정도 읽었는데, 진짜 .. 이승우 문장 읽는 거 나는 너무 좋고, 아니 이 책에서 모비딕 얘기 하니까 또 모비딕 겁나 읽고 싶고, 이 책에서 주인공이 저기 저 먼 섬으로 떠나는데 나도 그렇게 가고 싶고, 주인공이 하루에도 몇 시간씩 걷는데, 나도 퇴사하고 가서 걷고싶다, 막 이런 생각하고...



퇴사하고 싶습니다...






아무튼 이래저래 내가 부끄러운 날이고 퇴사하고 싶은 날이다. 반가운 신간 소식들에 부끄러워지다니, 아아, 인간이란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존재인것...

나란 여자,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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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9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9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친 사랑의 서》에 나오는 사랑들은 정말 미친 사랑인 것 같다. '사랑'에 방점이 찍히는 게 결코 아니라 '미친' 에 방점이 찍힌다. 나는 정말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사랑에 관대한 편이고 또 사랑이란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나를 무너뜨리지 않을 수 있도록, 그 사랑이 나를 파괴하지 않도록 내가 정신을 차려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 사랑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거나 아프게 만든다면, 혀를 깨무는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사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사랑이 가져오는 게 즐거움이나 행복이 아니라 파괴와 고통이라면,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계속 쥐고 있어야할 필요가 있는가?


나에게도 어떤 형용사를 붙여도 모자라지 않을 사랑이 있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며 게다가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들,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나에게 그 사랑의 '끝까지' 가보라고 조언들을 한다. 할 때까지 해봐, 갈 때까지 가봐, 라고.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나를 응원하겠다고. 끝까지 가 몸을 던져서 파괴시키고 나면 그 다음엔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공통적인 의견인데, 아아, 나란 여자는 정말이지 고집이 세서 그런 식으로 파괴에 나를 놓고 싶지 않고, 그런 식으로 상대방에게 미련 없이 돌아서고 싶지도 않다. 사랑은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라지만, 그 바닥은 우리가 가진 치부일 수도 있고 감추고 싶은 면일수도 있지만, 개인이 가진 고유한 바닥을 드러내는 것과 둘이 만나 바닥을 치는 것은 다르다. 나는 둘이 만나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것은 하고 싶지 않고 그런 식으로 우리가 쌓았던 소중한 시간을 파괴하고 싶지도 않아. 게다가 그 과정에서 나도 상처입을 것이며 상대에게도 나는 사랑이나 추억 대신 다른 부정적 감정을 심어주게 될 가능성이 있는데, 아아, 나는 그런거 정말 너무 싫어. 나는 내 관계에 지긋지긋해지고 싶지 않고 상대로부터 작작좀 하라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다.



나는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사람이 내 옆에 있기를 원하지만, 상대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더 행복하길 바라지는 않지만(나는 천사가 아니야 ㅎㅎ),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너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어!' 라는 마음으로 상대를 파괴하고 싶지 않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내가 상대를 소유하고 싶다는 소유욕이 크기는 어마어마하다고 나 스스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내 소유욕을 채울 수 없다고 해서 상대를 망가뜨릴 수 없단 말이야. 그래서는 안되는거지. 그것은 상대를 파괴하는 동시에 나를 파괴하는 일이야.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질 수 없다니, 니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다니, 그것은 말도 안돼!! 하면서 상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정말이지 상상도 할 수 없는데, 이놈의 미친 사랑꾼들은 그걸 하네.. 하아- 그것은 미친 '사랑꾼' 이 아니라 정말이지 '미친' 사랑꾼이야. 그런 사랑이라면 나는 거절이다 진짜.



미칠만큼 사랑하는 건 인생에 있어서 필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정말 미치지는 말아야한다. 미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침몰이다.




작가들의 사랑에 대해서 무슨 환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나름 현실적이고 냉정한 사람이라 작가들이 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고. 책과 책읽기를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으앗 역시 소설이 짱이야!! 라고 언제나 부르짖으면서도(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책 좋다고 울뻔했다), 그러면서도 문학하는 남자들에 대해서라면 판타지를 가진 적이 없다. 그들의 사랑이라고 더 특별할 것도 더 아름다울것도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하하하하, 이렇게 죄다 미친놈들인지는 몰랐네, 내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다른 사람의 연애, 다른 사람의 사랑에 대해 함부로 말을 덧대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스스로 늘 다짐하는 바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미친 사랑은 하지말자. 나를 떠나다니 너를 죽여버리겠어, 너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갈 수 없어, 라면서 차로 들이받는 짓 같은거... 하지말자.




'테네시 윌리암스'는 '프랭크'에게 반해 정사를 나누었는데, 이에 윌리암스의 애인인 '판초'는 그를 차로 들이받으려고 했다.



살아생전 다이애나가 윌리엄스의 상담사까지 한편으로 끌어들여 그를 이성애자로 개조하려고 애쓸 무렵, 그 판을 뒤집어버릴 만한 인물이 등장했다. 보는 이가 눈을 의심하리만큼 잘생긴 뉴욕 태생의 시칠리아인 프랭크 멀로Frank Merlo라는 남자였다. 판초와 프로빈스타운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윌리엄스는 해안의 모래언덕에서 프랭크와 딱 한 번 뜨거운 정사를 나누었다. 윌리엄스가 한눈판 것을 눈치챈 판초는 자동차로 그를 들이받으려 했고, 그러다 차 바퀴가 모래에 빠지자 차에서 내려 끝까지 그를 쫓아가 분풀이를 했다. (테네시 윌리엄스, p.190)



도대체 왜 '판초'와 휴가가서는 다른 사람에게 반했다고 정사를 나누었는지 원. 그건 휴가를 함께한 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그러나 반해버려가지고 예의고 뭐고 없었겠지. 판초는 이에 빡쳐서 차로 들이받으려 하는 거다. 그곳이 해안가가 아니었다면, 차 바퀴가 모래에 빠지지 않았다면...윌리엄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시인 '바이런'은 여자라면 환장한 남자였는데, 누나와 근친상관 관계에 있으면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다. 다른 여자와 결혼한 이유는 이 근친상관 관계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기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결혼을 자신만을 위한 '수단'으로 삼은 것만으로도 괘씸한데(결혼은 자기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필요한 것이니까), 결혼하고 나서도 그가 변하지 않은 것은 더 괘씸하다.



결말이 그리 좋지 못했던 독실하고 부유한 애너벨라 밀뱅크Annabella Milbanke와의 결혼은, 그가 편지로 심드렁하게 청혼하고서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성사되었다. 그녀와 결혼하면 재정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무엇보다 이복누이 오거스타의 치명적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심산으로 청혼한 것이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결혼하도록 부추긴 것이 바로-바이런을 향한 감정이 그 못지않게 뜨거웠던-오거스타였다고 기록으로 남겼는데, 당시 오거스타가 내세운 이유는 "결혼만이 두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니까"였다고 한다. (바이런, p.111)



나의 경우에도 '모든 걸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결혼을 하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던 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지금은 잘 알고 있다. 만약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것이 결혼으로 이어졌다면 나는 물론이고 나와 결혼한 상대 역시 전혀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결혼이란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오지랖 떠는 게 듣기 싫었고, 일단 결혼하고나면 그 오지랖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결혼을 염두에둔 상대는 나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내가 하는 모든 것을 그저 내버려둘 사람인 듯 보였고, 그래서 나는 결혼이란 제도 속으로 들어가 타인들의 오지랖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계속 다른 사람을 좋아하려고 했고, 다른 관계도 가지려고 했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가. 결국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그랬다면 아마 나는 지금쯤 그 불행한 결혼에서 이미 빠져나왔을 것이다. 그건 내 욕심으로 인해 상대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었을 것이고, 상대를 불행하게 만들면서 나 역시 행복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그런데 바이런은 했다. 바이런은 했고, 바이런의 이복 누나는 그런 바이런을 부추겼다.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완전히 다른 타인을 자신들의 인생에 끌어들인 것. 결국 바이런의 아내는 행복하지 못했고, 바이런은 결혼한 후에도 누나를 불러 한참을 같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 일로 아내가 속을 끓이는 건 뻔한 일이지만, 그러나 이 미친 바이런은 누나의 일만으로 아내를 괴롭힌게 아니었다. 정부를 두고 애인을 사귀고.. 하아- 바이런에게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어 여자들이 그렇게 ..


바이런은 정부를 버리고 애인을 사귀는데 이 애인좀 보소, 남편을 버리고 바이런의 집으로 하녀로 들어가는 것도 모자라 나중엔 대운하에 몸을 던지기까지 한다. 물론, 대운하에 몸을 던지기 전 바이런을 죽이려 드는 걸 거쳤고!!



바이런은 그곳에서 제일 처음 사귄 정부를 버리고 이번에는 문맹 제빵사의 아내를 만나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아예 남편을 버리고 바이런이 사는 집으로 들어가 열네 명의 하인 대열에 가정부로 합류했다. 바이런은 그녀의 불타오르는 색정과 특이한 버릇들-섹스를 하다가 교회 종소리가 들리면 성호를 긋는다든가 하는-은 좋아했지만, 레이디 캐롤라인을 떠올리게 하는 유난스러운 질투와 드라마틱한 언동에 곧 질려버렸다. 그래서 집에서 나가달라고 하자, 그녀는 바이런에게 식탁용 나이프를 휘두르더니 베니스의 대운하에 몸을 던졌다. 바이런에게 고용된 곤돌라 사공들이 그녀를 얼음장 같은 물에서 건져내 왔지만, 바이런은 꿈쩍도 안 하고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짐을 싸서 내보냈다. (바이런, p.118)



하아- 상대로붙 거절 당했다고 나이프를 휘두르다니... ㅠㅠ 상대를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면 그것은 곧 자기에게 향하기 마련이다. 그게 뜻대로 안되자 대운하에 몸을 던져.. 왜요, 왜.. 그러지마요 진짜 ㅠㅠ


파괴하지 말자, 우리.

사랑을 잃는 건 너무 괴롭지만, 상대로부터의 거절 혹은 거부는 너무 고통이지만, 우리는 어른이잖아. 거절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 '노'는 노다. 아니라고 말하는 걸 두 번 세 번 말하게 하지 말자. 지긋지긋하다 진짜. 우리는 거절할 수 있고 거절 당할 수도 있어. 그렇다고 해서 나이프를 들고 상대에게 돌진하지도 말고, 차로 들이받지도 말자. 그것은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길이며, 차로 들이받고 나이프를 들고 돌진한다고 해서 상대가 갑자기 나를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야. 오히려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나로부터 더, 더 멀어지게 하는 거다. 제발, 제발 파괴욕망을 그대로 바깥으로 내보이지마.



바이런은 그런데 참 진짜 개놈이네.. 저래놓고 매춘에 빠지기 시작한다... 하아.. 안될놈은 역시 안되는거야.. 그런 놈을 사랑하지 말아요, 여자들이여... 사랑 없어도 우리는 잘 살 수 있다. 사랑만이 유일한 답이 아니야.



이 책에서는 근친상간에 대해서도 여러차례 등장하는데, 바이런이 그랬고(이복누나), '대프니 듀 모리에'가 그랬다(아버지). 그리고 '아나이스 닌'이 그러했는데, '아버지와의 근친상간'이라면 사실 그 관계를 딸이 원했다기 보다는 폭력에 의한 것이지 않았을까. 대프니 듀 모리에의 경우에는 언니와 여동생이 모두 레즈비언이었고 대프니 듀 모리에가 레즈비언 자매들을 몹시 혐오했다고 한다. 대프니 듀 모리에만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것이 아버지와의 근친상간으로부터 온 폭력의 트라우마가 아닐까 싶다. 아나이스 닌 역시 아버지와 성관계를 맺었는데, 이건 진짜 쌍욕 나오는게, 아버지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심리 상담사가 처방한 치료방법이었다는 거다. 진짜 어휴...심리상담이란 무엇인가....



딸이 첫 픽션 작품에 '근친상간의 집'이라는 제목을 붙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호아킨 닌은 자신의 치부가 폭뢰될까봐 전전긍긍했다. 사정인즉슨, 거의 20년 동안 남남처럼 지내다가 상봉한 부녀는 닌의 심리상담사(그도 닌이 침대로 데려간 남자 중 하나였다)의 권고에 따라 연인사이가 된 것이었다. 상담사는 닌에게, 어릴 적 그녀를 버리고 도망간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아버지를 유혹한 뒤 차버리라고 했다. 닌은 그 빗나간 조언을 받아들여, 프랑스 남부에 있는 어느 호텔에서 호아킨과 여러 차례 밀회를 가졌고, 그러다 갑자기 아버지와 연락을 끊어버렸다.

책제목에서 '근친상간'이 사전적 의미와 상관없이 은유적으로 쓰인 표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호아킨은 부녀간의 부적절한 관계가 만천하에 드러날까봐 노심초사했다. (아나이스 닌, p.177)



이게 뭐야 진짜 ㅠㅠ 아니 심리 상담사 이 미친놈아 그걸 조언이라고 하냐. 그리고 그 조언을 받아들이다니. 물론 심리 상담사를 찾아가야 했을 정도로, 그 조언대로 할 정도로 당시의 아나이스 닌은 영혼이 상처입은 채였겠지만, 하아- 아니 이 아버지 미친 놈아. 그게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했다는 것은 자기도 그러면 안되는 거라는 걸 인지한거였잖아? 야이 미친새끼야.. 하아-




톨스토이가 아내를 막대한 것이야 워낙 유명하긴 하지만, 활자로 구체적으로 읽는 것은 또다른 빡침을 안겨다줬다. 자신의 작품에 있어서 아내의 조언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그 모든 작품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도 아내였고, 그러면서 열셋이나 되는 아이의 출산과 육아도 아내의 몫, 가사 노동도 아내의 몫이었다. 이런 씨부럴.. 그런데 나중에는 자신의 저작권에서 오는 수입도 다 마다할 것이며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아내가 미쳐버릴 지경이 되어버리는 것이여..



소피아가 가장 못 견뎌했던 것은 남편의 위선이었다. 그렇게 공공연히 개탄하던 풍족한 삶을 톨스토이 본인도 계속해서 누리고 있는데다, 금욕주의를 설파하면서 뒤에서는 그녀를 자꾸 임신시키고 있다고 일기장에 쏟아놓았다. (한편 톨스토이는, 소피아가 자꾸 자기를 유혹해 그가 이상적 가치로 여기는 금욕을 지키지 못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소피아는 저작권을 포기해봤자 민중에게 득이 되기는커녕 출판업자들 배만 불릴 텐데 남편이 자꾸만 저작권을 내주겠다고 하는 저의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피아가 보기에 그것은 가족에 대한 철저한 배신에 불과했다. 작품 인세가 가족의 주요 수입원인데 그걸 내놓으면 남편 사후에 자식들이 거지 신세가 될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톨스토이, p.68)



가사노동과 육아로부터 떨어져있다면 돈이라도 벌어와야지, 톨스토이야. 거기다 대고 금욕주의 어쩌고 하면서 돈도 안벌려고 하고 가사노동도 안해... 그런데 왜 임신은 시켜 .....



여자들이 임신과 출산을 하게된 것은 당연히 상대로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그렇게 뻔질나게 아내를 임신시켜놓고 집안일은 나몰라라 했고, 아아, 출산과 육아로 달라진 자신의 아내를 지긋지긋해 하기도 한 작가들이 또 있었으니.. 오스카 와일드여....... 내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써글놈아..




그렇게 끈끈한 파트너십을 자랑했건만, 와일드는 콘스턴스가 임신을 하면서 맞닥뜨린 여체의 변화에 자신이 강한 혐오감을 느끼게 되리란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형태가 망가지고 뒤틀리고 흉측한 것에 욕정을 느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아내의 임신한 몸을 보고 이렇게 토로했다. "출산이 욕정을 죽였고, 열정은 임신에 묻혔다." 자신의 감정이 그렇게 극적으로 변한 것을 애석해하며 와일드는 이렇게 썼다. "결혼했을 때 나의 아내는 춤추듯 반짝이는 눈동자에 웃음소리 마저 노래하듯 듣기 좋은, 백합처럼 뽀얗고 늘씬한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런데 1년여 만에 꽃 같은 우아함은 자취를 감추었다 …… 그녀를 따뜻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억지로 만지고 키스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늘 몸이 안 좋았고, 그것도 모자라- 아! 떠올리기도 싫다. 구역질 나서." (오스카 와일드, p.269-270)




니가 사람새끼냐... 그 여자가 왜 임신을 하게 된건데, 왜 출산을 하게 된건데, 왜 몸이 안좋아진건데!!




디킨스는 어떻고! 그는 45세에 18살의 여배우와 사랑에 빠진다. 하아- 디킨스에 대해서라면 여러가지 말을 듣곤 했는데, 일단 나는 그가 《두 도시 이야기》에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보여준 태도를, 그 재미있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사두고 아직 안읽고있긴한데, 디킨스가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내놓고는 나중에 유명한 작가가 되고나서는 그들을 멸시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유명해진 뒤에도 태도가 변하지 않은 사람은 같은 이름을 가진 작가가 '찰스 램'이라는 것까지. 이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팟캐에서 들은것 같은데, 여하튼 이 디킨스가... 내가 울면서 읽은《위대한 유산》을 쓴 디킨스가 열세 차례나 임신한 아내를 두고 27세 연하의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다니.. 아니, 이런 것에 대해서도 굳이 사랑이라고 이름 붙여줘야 하는걸까? 싫어라..



똑똑하고 생기 넘치는 넬리는, 열세 차례의 임신(그중 몇 번은 유산했다) 이후 몸매도 육중해지고 움직임도 둔해진 아내와 살고 있던 디킨스에게 분명 신선한 자극이었을 것이다. 아내 캐서린은 원래도 활력이나 지성 면에서는 디킨스에게 대등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산후우울증으로 남편과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말았다. (디킨스, p.243)




사람들이 결혼을 선택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헤어지기 싫어서, 항상 같이 있고 싶어서가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외에도 다른 이유들이 충분히 있을 터. 그러나 자기에게만 좋은 이유만으로 결혼을 선택하면 상대를 파괴하고만다. 디킨스 역시 아내와 결혼을 했을 때, 그 아내를 '가장'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캐서린을 향한 디킨스의 애정은, 그가 배고픈 무명작가였던 시절 그를 거부했던 첫사랑 마리아 버드넬maria Badnell에게 품었던 감정에 비하면 뜨뜻미지근한 수준이었다. 그러다 풋풋한 넬리가 등장하자 마흔다섯 살의 문호는 청년 시절 불태웠던 뜨거운 감정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빅토리아 시대의 남자들도 중년의 위기는 당해낼 수 없었나보다. 디킨스는 영국 어느 구석이든 마다않고 쫓아다니며 새로운 열정의 대상에게 구애했고, 그를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로 만들어준 동력인 그 지독한 집념으로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했다.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 그는 캐서린과의 결혼은 처음부터 안 될 운명이었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불쌍한 캐서린과 나는 애초에 서로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었고, 이제 와서 나아질 희망도 없어. 지금 무너지고 있는 모습은 내가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거야." (디킨스, p.243)



자기야 새로운 사랑에 빠졌으니, 사실 우리 결혼은 그러면 안되는 거였지, 라고 세뇌시킬 수 있다지만, 그렇다면 아내는 뭐가 되는가? 아내가 선택한 결혼은 남편의 바람 앞에, 남편의 세뇌 앞에 한낱 쓰잘데기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아내는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이 망가지는 것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중년의 위기' 어쩌고 운운하는 문장은 뭐여... 쓰벌. 여자는 중년 안오냐. 내가 중년이다.




이 책에 실린 게 다 이렇게 '미친' 내용만은 아니다. 궁극적인 사랑과 함께살기의 모습도 당연히 있다. 가장 인상적인건 '애거사 크리스티'인데, 그녀도 첫번째 결혼에서 실패하고 상심했지만, 자신의 글쓰기를 지원해주는 좋은 남자를 만나 오래 함께 산다. 


크리스티의 이 부분이 좋아서 좀 길지만 인용한다.



크리스티는 영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의 중간에 그와 좋게 헤어질 작정이었다. 그런데 중간 체류지에서 딸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그녀가 어쩔 줄 몰라하자, 맬로언은 자기 일정을 변경해가면서 그녀를 집까제 에스코트해주었다. 몇 달 후 맬로언이 그녀의 집에 초대받아 일주일간 머물던 중 청혼하자, 두 사람의 우정은 그녀가 예상치 못한 단계를 맞았다. 그는 빌려간 책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그녀의 침실 문을 두드렸고, 그 방에서 프로포즈했다.

나이 차 때문에 우정 이상은 불가능할 거라고 선을 그었던 크리스티는 뜻밖의 전개에 너무 놀랐고, 꼬박 두 시간 동안 맬로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다시는, 아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남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지 않겠노라고 결심하고 살아온 그녀였다. "여자에게 진정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남편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까"라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맬로언의 프러포즈를 받고 몇 주를 고심한 끝에 크리스티는 다시 한번 위험을 무릅쓰고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나이 차 때문에 고민한 일은 부질없는 짓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훗날 그녀는 이런 농담도 했다. "고고학자야말로 최고의 남편감이지요. 아내가 나이들수록 더 흥미를 보이거든요."

바다처럼 관대한 새 남편 맬로언은, 정작 본인은 남편의 유적 발굴 현장을 마음껏 돌아다니면서도 그에게 절대 골프만은 치지 말아달라고 강경하게 당부하는 아내의 한 맺힌 요구도 순순히 들어주었다. 유물 발굴 현장에서 그녀는 종종 조수 역할을 자처해 유물들을 손질하거나 복구하고, 도자기 조각을 끼워맞추고, 발굴된 물품의 목록을 정리했다. (애거사 크리스티, p.346)




내가 당신한테 준 책, 그거 준 거 아니야, 빌려준거야. 그러니 돌려줘야 해... (킁킁)







로버트 브라우닝도 아내의 글에 반해서 팬레터를 보냈다가 결혼하게 됐는데, 나는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인지, 여자의 글쓰기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너무 좋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삶인 것 같다. 여자는 글을 쓰고, 남자는 그 글의 독자가 되어주고 응원해주고 지원해주는 삶. 크리스티는 그런 삶을 자신의 남편과 살았던 것 같다. 게다가 크리스티가 그저 남편의 응원만 받고 끝낸 게 아니라, 고고학자인 남편의 조수노릇도 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얼마전에 읽은 '샬럿 퍼킨스 길먼'의 일화와는 매우 다른 경우가 아닌가. 지적인 활동을 하지 말라는 처방 때문에 더 아플 수 밖에 없었던 샬럿은 결국 남편과 이혼을 하고 소설을 써낸다. 내가 하는 행위가 '옳다'는 것,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인데, 이것을 응원해주는 게 아닌 '그만두라'는 사람과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책읽기를 그리고 글쓰기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나는 이 일을 함에 있어서 전혀 부끄러움이 없으니까. 사랑하는 이의 응원을 받는다면 앞으로 더 쭉쭉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서 얻게 되는 것들로 나는 또 더 자랑스러워질테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삶은 얼마나 이상적인가.

크리스티는 관대하고 젊은 남자와 함께 살면서 또 유물 발굴 현장을 함께 다니면서 그 장소를 소재로 새로운 소설을 써내기도 한다. 정말이지, 너무 좋은 삶이다..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을 읽다보면 남자가 여자를 소개받고 사랑에 빠지면서 '내가 다른 사람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지 몰랐어' 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녀가 부모도 없고 가난하기 때문에 남자의 부모가 그녀와의 결혼을 반대하자 남자는 그녀와 헤어진다. 그리고서는 이내 얘기한다. '사랑이 식을 수 있을줄은 몰랐어' 라고.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이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하고 헤어지면서 이렇게나 설레발을 치는 가벼운 남자였는데,


톨스토이 역시 자신의 아내 소피아를 처음 만나 결혼할 때 "서른네 해를 살도록 이토록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토록 행복해질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톨스토이,p.64) 라고 말했더랬다.

그러나 소피아는 평생 고생만했지..



한편, 앨리스 토클라스도 거트루드 스타인을 만났을 때 종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앨리스가 프랑스의 수도에 도착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스타인가에서 열린 파티였다. 거기서 앨리스는 파티 호스트 부부에게, 아니 다른 참석자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거트루드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는 온통 황갈색으로 빛났다. 토스카나의 태양에 그을린 따스한 갈색 머리칼은 군데군데 금빛으로 반짞이고." 앨리스가 『기억되는 것What Is Remembered』에서 그때를 회상한 구절이다. 앨리스는 처음 거트루드를 소개받는 순간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천재를 만났음을 알려주는 소리였다(어쨌거나, 거트루드의 주장은 그랬다). (거트루드 스타인과 앨리스 B.토클라스 p.352)



이 부분을 읽는데, 아, 혹시... 내 상대도 그 때, 2007년에.. 그러니까 그 해의 8월에 설마 종소리 들린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천재를 만나서 종소리 들렸니, 당신? 솔직히 말해봐, 들렸지. 그리고 속으로 그랬지. '천재다, 천재가 나타났다!' 후훗. 첫눈에 반한 것은 나의 지적인 미 때문이었니? 후훗.

그때, 나도 몰랐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토록 행복할 수 있을 줄은. 지금은 다 끝나버렸지만. It must have been love. But it's over now.



윌리엄스는 단 한 번의 밀회로 끝날 줄 알았던 프랭크와 지속된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프로빈스타운에서 단 한 번의 밀회로 끝날 줄 알았던 프랭크와의 인연은 결국 윌리엄스의 인생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이듬해 뉴욕의 어느 델리카트슨delicatessen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다시 마주쳤을 때, 윌리엄스는 프랭크에게 왜 그동안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프랭크는 윌리엄스의 성공에 편승하려는 놈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고 대꾸했다. 우연찮게도 두 사람이 모래언덕에서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직후 윌리엄스의 작품이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미국 남부 출신의 미녀 블랑시 뒤부아의 비극적 몰락을 그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윌리엄스는 미국의 위대한 극작가 반열에 오른 터였다.

재회한 지 몇 주 안 돼서 프랭크는 맨해튼에 있는 윌리엄스의 아파트에 들어가 동거를 시작했다. 트럭 운전사이자 해군 참전용사인 프랭크는 소식적 거리의 부랑아였다가 자기 인생을 백팔십도 변모시켜 독학으로 문학광, 연극광이 된 비범한 인물이었다. 윌리엄스는 그의 그 팔팔한 열정에 준수한 외모만큼이나 매력을 느꼈다. "그는 정말 생명력 넘치는 사람이었어!" 윌리엄스는 프랭크를 떠올리며 감탄을 내뱉었다. "그는 내게 낮이고 밤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사는 법을 가르쳐주었지. 현실과의 가교가 되어주었다고 할까. 세상을 제대로 알게 해주었어. 덕분에 나는 그런 삶을, 프랭크가 죽는 날까지, 14년간 누릴 수 있었고. 그 14년은 내가 어른이 된 이래 최고로 행복한 시기였어." (윌리엄스, p.191)



나도 우리가 그 날 단 한번의 만남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아무튼 지금 연락 없는 거, 설마... 설마.....

나의 성공에 편승하려는 놈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거야? 그래? 내가 너무 위대해지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운거야?

괜찮아, 그 자존심은 넣어둬, 넣어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이 책에는 미친 사랑이 가득하다. 미친 '사랑'이 아니라 '미친' 사랑. 사랑을 하되 미치지는 말자. 파괴로 나를 이끌지도 말것이며 파괴로 상대를 이끌지도 말자. 우리는 파괴하지 않고 또 파괴 당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삶을 풍요롭게 잘 살아낼 수 있다. 사랑은 많은 부분에서 답이 될 수도 있고 또 구원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사랑만이 유일한 답은 아니며 최선의 답도 아니다. 우리는 사랑 없이도,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받지 않고서도 잘 살아낼 수 있다. 《토이 스토리4》에서 그걸 잘 보여주지 않던가. 이제 나이들어버린 등장인물들은 나를 사랑해주는 주인 없이도 자신들의 삶을 잘 개척해나간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다. 미쳐서 파괴로 빠져들어가는 대신, 미치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삶을 잘 개척할 수 있어. 나를 지원해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최선의 상대가 될 사람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굳이 그 관계속으로 뚜벅뚜벅 들어갈 필요가 없다.






올그런은 보부아르와 진심으로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돌로레스와 마찬가지로 감정적인 삼각관계에 발을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더군다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관계에 굴러들어온 돌 취급당하는 것에 강한 반감을 가졌다. 올그런을 향한 절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보부아르는 결혼에 반대하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고, 사트르트와 자신의 자유 둘 다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끝내주는 잠자리도 아주 오래전 맺은 계약을 깨뜨리게 만들지는 못했고, 그래서 때를 잘못 만난 두 연인은 결국 이별의 수순을 밟았다. 올그런은 이후 두 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했지만 끝까지 보부아르를 용서하지 않았고, 죽기 직전에 어느 기자에게 그녀를 심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보부아르) - P163

스물한 살 때 보부아르는 역대 최연소로 철학과 교수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후보에 올랐는데, 프랑스의 대학 체제에서 교수 자리를 따내려면 반드시 그 시험에 응시해야 했다. 판정단은 보부아르가 철학과 최고의 학생이라는 점에 만장일치로 동의했지만(해당 학위를 받은 여학생으로서는 아홉번째였다), 그녀는 2등으로 만족해야 했다. 최고의 영예는, 아마도 남자라는 이유로, 사르트르에게 돌아갔다. (보부아르) - P155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건만 엘리엇은 그녀와의 관계를 극구 감추었고, 그래서 엘리엇의 지인들 중에도 극소수만이 그녀의 존재를 알았다.
에밀리는 자신의 희생적인 침묵이 웨딩마치로 보상받을 줄로 믿고 군소리 없이 그림자 연인 역할을 계속했다. 그러나 비비안이 죽고 나서도 엘리엇이 둘의 관계에 도장을 찍을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에밀리는 크게 낙담했다. 오히려 엘리엇은 앞으로 다시는 다른 여자와 생을 함께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이나 지껄이는 것이었다. 이런 가슴 아픈 거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우정은 유지되었다. 아마도 에밀리 쪽에서, 비비안이 그랬듯, 언젠가 그가 마음을 바꿀지 모른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T. S. 엘리엇) - P40

두 사람의 불같았던 8년의 연애는 그렇게 갑자기 끝이 났다. 마지막 만남은 파리에 있는 루이즈의 아파트에서 이루어졌는데, 그녀는 울면서 플로베르의 다리를 때려가며 그동한 맺힌 한을 다 토해냈다. 플로베르는 속으로는 활활 타는 장작으로 그녀를 후려치는 상상을 했지만, 충동을 꾹 누르고 조용히 일어나 그곳에서 나갔다. 그 일을 계기로 플로베르는 루이즈에 대한 애정이 차갑게 식었다. 루이즈 쪽에서는 계속해서 애간장을 태우며 나중에 그가 파리에 다시 왔을 때 최소 한 번 이상 그를 만나려고 애썼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플로베르) - P131

톨스토이의 뮤즈이자 개인 비서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것도 대단한데, 소피아는 집안일에서도 흠잡을 데 없는 주부였다. 그 시대의 보통 여자들처럼 소피아도 모든 기운을 가족들을 돌보는 데 쏟았는데, 톨스토이가 글쓰는 데 집중하는 동안 거의 혼자서 열셋이나 되는 자식들(그중 아홉이 건강히 살아남아 성인이 되었다)을 키우고 교육시켰다. 지칠줄 모르고 밥을 짓고, 바느질하고, 병든 소작농들을 돌보고, 남편 대신 출판사 사장들과 협상을 했으며, 남편의 작품이 금서로 지정됐을 때는 그를 대신해 러시아 황제에게 읍소하기도 했다.
그런 수많은 역할에 따르는 체력적인 한계만 해도 힘겨운데, 성녀聖女라 불려도 좋을 만큼 참을성 많은 소피아는 엄청난 감정적 고통까지 견뎌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속 여주인공들은 그렇게 잘 이해하고 동정했던 톨스토이가 현실에서는 더없이 매정하고 자기중심적이었으며, 특히 아내를 그렇게 못마땅해했다. (톨스토이) - P66

그뿐 아니라 작품 속에서 레빈이 약혼녀에게 자신의 총각 시절 일기를 읽게 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톨스토이도 열여닯 살 먹은 소피아에게 자신이 계집질하고 술독에 빠져 도박이나 하고 다닌 젊은 날의 기록, 그리고 자기네 저택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에 얽힌 사정까지 굳이 읽어보게 하는 우를 범했다.
"그의 과거가 어땠는지 다 읽고 나자 눈물이 쏘ㄸ아졌다." 소피아는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톨스토이) - P65

자진해서 폭로한 과거에 예비신구가 그렇게 충격을 받았음에도, 두 사람은 3일 뒤 혼인 ㅅ약을 주고받았고 톨스토이 가의 저택이 있는 러시아의 시골 야스나야 폴랴나로 함께 떠났다. 밤새 마차를 타고 가면서 톨스토이는 아내의 순결을 빼앗았고, 훗날 소피아는 그때의 경험을 일기장에 이렇게 묘사했다. "어찌나 고통스럽고 참기 힘들 만큼 수치스러웠는지!" (톨스토이)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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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9-1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읽다가 몇몇 사람 얼굴 찾아보고 그랬는데요. 바이런은 정말 실물이 너무 궁금해서(그토록 꽃미남이라니 어디 한번 보자! 싶은 마음) 구글 이미지 검색 불티나게 했어요. 근데 이상한 초상화만 나와서 에잉.... 이 따위 얼굴에 그렇게 여자들이 반했단 말인가. 아직도 의아합니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두 번째 결혼 정말 잘했지요. ˝고고학자야말로 최고의 남편감이지요. 아내가 나이들수록 더 흥미를 보이거든요.˝ 이 농담도 정말 로맨틱-

저는 테네시 윌리엄스를 좋아해서 그런지 그가 프랭크를 만나서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니까 그냥 그걸로 용서했어요. 애인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반하고 결국 그 사람과 하룻밤이 아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진정한 연인이 되는 시나리오 넘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ㅋㅋㅋㅋㅋ 그 전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쿨럭;;;(제 경험담이라서 윌리엄스를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ㅋㅋㅋㅋㅋㅋ)

암튼 이 책은 이렇게 작가들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사랑, 자기의 미치광이 모습을 소환하는 재미도 있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욕막이라는 이름의 전차』오타 수정하셨네요. 이 제목도 왠지 재밌었는데.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9-18 10:47   좋아요 1 | URL
제가 걍 알라딘 창 열고 다다다닥 쓰기 때문에 오타를 바로바로 못잡아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게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읭? 이러면서 오타가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욕막이 보였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저는 윌리엄스에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결국 그가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할만한 상대를 찾은 건 참 좋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그 상대가 좋은 상대였잖아요. 인생은 결국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궁극의 상대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어요. 공교롭게도 그렇게 찾아가는 중에 내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지만 말예요. 누군가의 옆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찾았다면, 옆에 있는 사람이 화나는 건 너무나 당연한거겠죠. 나는 너인줄 알았는데 너는 다른 사람이란 말이야? 라면서 고통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러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났다니... (눈물이 그렁그렁)


저는 같은 경험담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한 적이 있어요. 저에겐 너무 자연스러운거였고, 그래서 아마도 연애상대에게 온전히 사랑을 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거 나빠요. 이제 안그러려고요.. (뜻밖의 자기고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에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뭔가 사랑이야기를 가득 읽고나니 재미있더라고요.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싶으면서. 크리스티 사랑 이야기도 정말 좋았어요! 저 이 책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오늘 주문했어요. 뭐랄까, 제 사랑이 안되고 우울할 때 들춰보면 좋을것 같아요 ㅋㅋ 그리고 누군가에게 얘기해주기도 좋을것 같고요.

들어봐, 윌리엄스는 애인이 있는데 다른 사람한테 반했거든. 그랬더니 그 애인이 빡쳐서 차로 들이받으려고 했대 글쎄, 이러면서 말이지요. 후훗.

감은빛 2019-09-20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이 글을 읽었는데, 밤에 택시를 탔다가 라디오에서 이 책을 소개하는 걸 들었어요.
톨스토이 부분이었는데, 기사님이 소리를 줄여놔서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가 너무 톨스토이를 비판하고 소피아 편으로 흐르자, 남성 진행자가 막 수습하려고 들었던 게 기억나요.

다락방 2019-09-20 13:44   좋아요 0 | URL
라디오에서 이 책 얘기가 나왔군요!!
이 책 읽다보면 글 좀 쓴다는 남자 작가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밉고 짜증나는지 몰라요. 바이런, 디킨스, 핏츠제럴드(ㅠㅠ), 톨스토이.. 으으... 남성 진행자가 왜 수습하려 들었을까요? 그건 본인도 톨스토이랑 다를 바가 없어서일까요? 톨스토이만큼 능력이 있진 않지만 여자를 대함에 있어서는 톨스토이와 같은 태도를 가진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하하하하.

심술 2019-09-22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이 독후감만 읽어도 정말 흥미진진하고 스펙타큘라하고 뭐 막장드라마 뺨치네요!

안녕하셨죠? 오랜만입니다.
보내 주신 책 <뉴욕 미스터리>는 고맙게 잘 읽었어요.

전 가난한 이들을 향한 두 찰스의 아주 다른 태도를 첨 안 게 윤흥길 단편소설에서였죠.
아마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였을 겁니다.
이 단편이 꽤 유명했기에 제 추측으론 락방님이 들은 그 방송 출연자도 이 단편을 읽고
‘램과 디킨즈의 가난한 이를 향한 다른 태도‘를 안 거라고 생각되는데 물론 제가 틀렸을 수도 있죠.

그나저나 윤흥길의 그 단편 읽던 때도 벌써 22~23년 전이군요. 세월이 너무 빠릅니다.

요즘 일교차 큰데 건강 조심하세요.

다락방 2019-09-22 13:20   좋아요 0 | URL
심술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도대체 뭐하시느라 그동안 안오셨던 겁니까! 자주 자주 좀 오세요. 제 서재가 썰렁하지 않습니까! ㅎㅎ

아, 댓글 읽으니, 그 팟캐스트 진행자들이 윤홍길 단편소설을 읽고 얘기한건가 봅니다. 맞을 것 같아요.

하아, 일교차 건강... 적절한 댓글입니다, 심술님. 제가 안그래도 요즘 비염이 심하게 와서 어제는 병원가 수액도 맞았어요. 예전엔 비염와도 괴롭지만 견뎌냈는데 이제는 수액 없이 지나갈 수가 없게 되어버렸네요. 이것이 바로 늙어가는 것..인가 봅니다. 슬픔 ㅠ

심술님도 건강 유지하세요!!

심술 2019-09-23 12:28   좋아요 0 | URL
건강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자,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락방님 곁에는 책도 서재벗도 조카도 있으니까요.

다락방 2019-09-23 13:02   좋아요 0 | URL
ㅎㅎ 네, 책도 서재벗도 조카도 있으니 씩씩하고 즐겁게 살아야지요.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