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탕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7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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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가기 위한 수단 혹은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오래전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목적지가 어디인지만 계속 염두에 두고 있으면, 버스나 기차를 타든 중간에 잠시 쉬어가든, 걸어서 오래 걸리든, 어쨌든 우리는 가고자 하는 바가 확실하다면 어떻게든 그곳에 가게 될거라고. 그러나 이렇게 어쨌든 닿기 위해서라면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축에 속한다고 스스로를 생각하는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지를 모르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되, 지금 여기는 아닌 것 같은 상태.


이승우는 자신의 책 《캉탕》에서 등장인물 '핍'의 행동을 가져와, 그가 정착하기 전에, 머무를 곳을 찾기 위해 했던 것이 항해라 얘기하고 있다. 여긴 아닌 것 같아,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이렇게 해볼까, 라고 생각해 배를 탔고, 그 배는 어느 곳에 정착했고, 정착해보니 여기가 바로 내가 머무를 곳이다, 라는 생각에 배에서 내렸다. 나는 결국 여기에 오기 위해서 떠돌아 다녔구나, 내가 떠돌아다닌 건지는 몰랐지만, 나는 이곳을 찾기 위해 배를 탄거였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내가 머무를 곳, 정착할 곳을 찾았다면, 그제야 자신이 항해를 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정착해있다. 그러나 언제든 떠날 준비도 되어있다. 나는 이곳이 내가 정착할 곳임을 안다. 그러나 낯선 곳이 저 어디에 있다는 걸 알고, 충분히 낯선 곳을 마주치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나 당신은 어쩌면 항해중인 걸 수도 있다. 아직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채로, 닿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채로, 그런 채로 대부분 잔잔한 바다 위에서 때로는 파도가 공격하는 곳에서 항해중인 걸 수 있다. 항해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항해는 뜻밖의 일로 이름 모를 곳에 정착할 수도 있다. 핍은 배가 멈춘 곳에서 나야를 만나 그곳에 정착하고 남은 삶을 살게된 것처럼, 당신 역시 어느 순간 배가 멈춘 곳에서 나야를 만나 배에서 내려, 그곳에 터를 잡을 수도 있다. 나야와 밥을 먹고 나야의 노랫소리를 듣고 나야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아, 나는 긴 항해를 마쳤구나, 비로소 정착했구나, 생각하며 고요한 낮과 밤을 보낼런지도 모른다.



이승우의 캉탕은 문장 때문에 읽는 맛이 있다. 나는 이승우가 언제나 건드리는 자신 안의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도 싫어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그의 문장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아니야, 문장이 아니라 주인공이 가진 저 깊은 곳에, 다른 사람에게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개인의 은밀한 비밀 같은 것을 사랑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캉탕에도 이승우 고유의 문장이 있고 개인의 은밀한 비밀이 저 안에 숨겨져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 있고 불완전한 삶이 있다. 그리고 정착한 사람이 있고 항해하는 사람이 있다. 정착하고자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되질 않아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저 먼 캉탕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캉탕으로 가서도 하루에 몇 시간을 걷는 사람이 거기에 있다. 나 역시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먼 곳으로 가 몇 시간이고 걷고 싶다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생각했다. 걷다가 지치면 해변가에 철푸덕 주저앉아도 좋을테고 해변가의 술집으로 들어가 자리잡고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셔도 좋을테다. 생각들을 쏟아내기 위해 걷고 또 걷는 일을 몇날이고 반복하다보면, 아마 해변가 술집엔 내 고유한 자리가 생기겠지. 그렇게 걷기 위해 갔다가 어쩌면 나도 그곳에 정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 나는 나도 몰랐는데, 내가 정착하고 있는줄 알았는데, 사실은 떠돌고 있었구나, 뒤늦게 깨달으면서.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은 아직 항해중인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은 항해중이고, 당신은 아직 세이렌의 노래 소리를 듣지 못했고, 당신은 아직 배에서 내리지 않았고, 당신은 아직 스스로가 항해중인 걸 알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캉탕에 닿는 시기와 당신이 캉탕에 닿는 시기에는 어쩌면 시간차가 있을 수 있겠지. 나와 당신이 캉탕에 이르게 된 이유와 방법은 달랐을지언정, 결국은 배에서 내려 만나게 될 수도 있겠지. 우리가 닿지 않을 사람들이라면, 내가 다시 항해를 시작하게 될 즈음에야 당신이 비로소 캉탕에 닿을 수도 있고. 나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다시 항해할 수도 있고 당신은 여기에 오기 위해 그동안 길고도 긴 항해를 했구나, 할 수도 있겠지. 결국 당신과 내가 각자의 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면 그 먼 바다에서 당신과 나는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한 명이 캉탕에 이미 닿아 있다면 다른 한 명을 기다린다면 언젠가 배는 흐르고 흘러 캉탕에 닿게 되지 않을까.


선술집, 해가 잘 드는 곳에 이미 당신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앞자리에서 문이 열릴 때마다 돌아보면서, 책장을 넘기고 있을지도 몰라.

사실 나는 정착해 있는 사람이니까.







그는 핍을 보고 싶었다. 바다에서 내린 후 다시는 배를 타지 않은 사내. 바다에서 내렸으므로 정박했고, 정박했으므로 바다에 타지 않은 남자. - P36

한중수는 J가 본 핍을 보지 못했고 J는 한중수가 본 핍을 보지 못했다. 시간은 조르바를 에이해브로 만들 수도 있고 에이해브를 조르바로 만들 수도 있다. 아니, 시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20년 전의 핍과 20년 후의 핍 사이에 달라진 것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에게는 조르바로 인상 지어진 사람이 다른 이에게는 에이해브로 기억되지 말란 법이 없다. 핍은 한 사람이 아니다. 어떤 순간의 누군가의 핍이 있다. 어떤 순간의 횟수와 누군가의 숫자를 곱한 만큼 많은 여러 핍이 있다. 어쨌든 그가 만난 핍은 J가 말해준, J의 말에 의해 인상 지어진 핍이 아니었다. - P45

J는 대체로 한중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는데, 그것은 한중수가 J에게서 자기 목소리를 듣기 때문이었다. 혹은 자기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만을 듣기 때문이었다. 설득은 설득하는 사람의 권위보다 설득당하는 사람의 형편과 의지에 더 의존한다. 말하는 사람이 효과적인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효과적인 말로 듣기 때문에,그 경우에만 설득이 일어난다. 심지어 스스로 결정한 것을 추인받거나 이미 한 선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부의, 권위를 가진 목소리를 설득하는 자로 불러오기도 한다. 가령 스승의 어떤 교훈을 삶의 지표인 것처럼 언급하는 착실한 제자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스승의 수없이 많은, 더러는 충돌하는, 다른 맥락 때문에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는 여러 가르침들 가운데 제자는 어떤 특정한 충고만을 스승으로부터 받은 중요한, 더러는 유일한 가르침으로 언급한다. - P48

그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언제나 먼저 싸움을 걸어야 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가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싸움밖에 없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진 자는 그 상태를 평화라고 부른다는 것을 그는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가진 자가 자기 것의 일부를 내주는 일은 절대로 인어나지 않았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가진 것이 없는 가즌 가진 것이 없는 채로 살게 된다는 것을 그의 경험이 가르쳤다. 그러니까 가진 것이 없는 자가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서는 가진 자가 하지 않는, 할 필요가 없는, 치열한, 치사한, 때로 공허한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21

책을 통해 세상의 넓이와 문학의 매력을 맛본 청년에게 밭에 거름 주고 바다에서 김 뜯어 오고 하는 머슴 노릇이 좀 갑갑했을라고. 실제로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어. 오랫동안 고래잡이배의 선원 노릇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해 배가 정박한 항구에서 만난 여자에게 빠져 살림을 차리고 그곳에 정착했어. 그러고는 다시 배를 타지 않았지. 그 양반, 정착지를 찾기까지 떠돌아다닌 거라고 해야 할까. 정착지를 찾지 못해 떠돌아 다닌 거라고 해도 되겠지. 떠돌아다녀야 정착할 곳을 찾을 수 있다는 교훈도 아주 억지스럽지는 않을 테고 ……. 정박할 때까지는 바다에서 내리지 않는다, 이게 그 양반이 내게 한 말이야.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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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1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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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1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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