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조카가 아팠다. 지금도 병원에 입원중이다. 감기와 장염인듯해 병원을 들락날락 거리다가 '이상하다'는 느낌으로 종합병원을 다시 찾았더니 '당장 입원부터 시키라'고 닥터가 말했단다. 입원후에 피검사를 했는데 염증 수치가 너무 높게 나왔다며 정말 큰일날뻔 했다는 말을, 우리 엄마와 제부는 들었다고 했다. 그냥 흔한 장염, 요란 떨지 않아도 될텐데 왜그러나, 하는 생각을 속으로 막연히 했던 제부는 사태의 심각성 앞에 죄책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렇게 심하게 아픈 줄 몰랐다고. 지난주말에 다시 피검사를 했는데 염증 수치는 처음보다 조금 나아진 상황, 조금 더 두고봐야 겠다고 했고 어제 다시 피검사를 했을 때는 이제 좀 나아졌다며 가능하면 이번주초에 퇴원할 수 있겠다고 했단다. 그러면서 닥터는 여동생에게 말했단다. 이제와서 말이지만, 사실 처음 병원을 찾은 아이를 보고 '큰일났다'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짜고짜 증상이고 뭐고 물을 겨를 없이 입원부터 시키라 했다고. 그리고 피검사를 하면서 속으로는 '어쩌면 늦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도 했단다.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했었다고. 그리고 아이는 이제 어느정도 회복했다.
금요일과 토요일, 조카가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발에 링겔을 꽂고서도 아이는 방긋방긋 웃었다. 이모이모, 하면서 잘도 따랐고, 조금만 말을 걸어줘도 참 잘도 웃었다. 환자복을 입고 주삿바늘을 꽂고 있는 이 어린 아이가 너무나 안쓰러운데, 그러면서도 웃고 있다니. 게다가 아이들 병동이란 얼마나 힘든 곳인지. 이 침대 저 침대에 누워있는 작은 아이들, 소리지르고 울고 짜증내는 아이들. 그 숱한 아이들의 소리소리들, 반드시 어른이 옆에 있어야 하는 나이들이라 병실 안은 분주했다. 좁고 시끄러운 곳. 아이들이 입원한 병원에 가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난 이게 싫었다. 누군들 좋아하겠냐마는, 정말이지, 차라리 어른이 아파야 한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게 된다. 고작 세 살 아이가 아팠기 때문에 누군가 어른이 계속 옆에 있어야 했고, 덕분에 우리 엄마도, 제부도, 여동생도 몸살감기와 피곤에 시달리고 있다. 아이가 회복하면 괜찮아지겠지. 아이가 있는 병원에 찾아가 들여다보고는,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 때문에 미안해졌다.
동생이 입원한 병원에 찾아갔던 여섯 살 조카도 덩달아 감기에 걸렸고, 나는 여섯 살 조카를 데리고 금요일 밤에 소아과를 찾았다. 감기약 처방을 받기 위한 것이었는데, 저녁 일곱시 반의 소아과에는 사람이 많았다. 이 많은 아이들이 다 아프다고 생각하니 내가 다 스트레스를 받더라. 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이 시간에 찾아야했던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을 터. 각자가 해야 할 일들, 먹고 살 일들에 열중하다가 집에 돌아와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을 생각을 하니, 사는 게 뭔가, 싶어졌다. 아이와 병원에 와 처방전을 받고는 약국에 가서 약을 사고, 집에 가서는 또 빨래며 설거지 청소를 해야겠지. 밤은 짧을 것이고 쉬는 시간은 없겠지. 사는 건.. 뭘까?
그런 일상들 속에 이 책을 읽는 것은 나쁜 선택이었다. 조여진 신경줄이 더 팽팽해진 것 같았달까. 잠실이란 동네에 살면서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극명하게 갈리는 빈부의 격차를 보는 것도 답답했고, 초등학생인 아이들을 앞으로의 특목고와 대학진학을 위해 새벽 두시 까지 공부시키는 걸 볼 때는 숨이 막혔다. 스무살 가난한 여대생은 과제와 수강신청을 위한 노트북을 사기 위해 이를 악물고 몸을 팔아야 했고,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이 집과 저 집은 서로의 경제형편을 저울질했다. 본인의 시간은 없을만큼 자식들을 '라이드' 하기에 바쁜 엄마들, 아이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공부를 잘해주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엄마들. 자기 자식의 단점을 고치려고 하기 보다는 담임을 학교에서 잘라버리려는 엄마들이라니. 아, 너무 짜증이나서 머맅털을 다 뽑아버리고 싶었다. 이게 단순히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거라면 이렇게까지 짜증나진 않을텐데, 현실이기 때문에 더 미칠것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렇게 될까?
나는 지금 이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혹여라도 내가 만약 저들과 같은 동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아이를 낳아 키운다면, 내 남편의 직업을 자랑스레 얘기하고 싶어하고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하고 내 아이의 학원을 알아보기 위해 동분서주 하며, 이 학원 끝나면 저 학원, 저 학원 끝나면 이 학원, 집에 돌아와서는 간식 좀 챙겨주고 과외를 시키는 것까지... 나도 그렇게 될까? 그러다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 교육을 위해 대치동으로 무리해서 이사를 가려고 할까? 요란한 아내, 요란한 엄마가 될까, 결국엔?
아, 역시 아이를 낳는다면 벌목꾼들이 가득한 숲으로 가는 게 최선인듯...
아이야, 숲에서 뛰어놀아라. 청설모랑 다람쥐랑 숲을 벗삼아 뛰어놀아라. 육체노동하는 건강한 사람들 틈에서 건강하게 자라라. 아침도 풍족하게 차려줄게 마음껏 뛰어놀아라. 점심엔 버터를 잔뜩 발라 구운 스테이크를 해줄게. 에헤라디여~ 너는 그냥 벌목꾼이 되어라. 치열한 경쟁 속으로 들어가지 말자. 아이야, 숲에서 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 문 밖에는 갈잎의 노오오오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내 친구 중에 도시공학과 교수하는 애가 있거든. 걔가 그러는데, 우리나라가 도시주거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돈이 모자랐대. 당연한 일이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국민들 먹이기도 바쁜데 제대로 된 주거를 형성해줄 여유가 있었겠어? 그래서 아파트를 짓는 민간기업에 모든 걸 떠넘겼다 하더라고. 놀이터라든가 공원, 노인정 같은 기반 시설은 원래 일정 공간마다 나라에서 지어줘야 하잖아? 근데 그렇게 하면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민간기업에서 대규모 아파트를 짓게 한 거야. 아파트 단지 내에 공공기반 시설을 다 조성해놓고 개인이 자기 돈 내고 구매하게 만든 거지. 정부로서는 꿩 먹고 알 먹는 셈. 덕분에 우리나라 국민들은 놀이터와 공원을 자기 돈 내고 구매하여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말씀이야. 물론 그건 아파트를 살 만한 여력이 있는 국민에 한한 이야기지만. 아무튼 우리나라 국민들, 정말 너그럽지 않아? 아마 세계에서 가장 정부에 너그러운 국민으로 기네스북에 올라도 될걸?" (p.264)
"유미 예쁘죠. 근데 그거 아세요? 예쁜 여자 보면 쳐다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건 인간의 본성이라는 거. 유부남도 본성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죠."
유미는 들고 있던 포크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남편이 구사하는 이런 식의 유머, 정말 유치하고 저질이다.
"강간이나 살해 욕구도 본성이지."
그녀가 남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순간 테이블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어른들 사이에 오가는 심상찮은 기색을 눈치챈 해성이 얼른 핸드폰을 내려놓고 스파게티를 입으로 집어넣었다.
"에이, 왜 그래. 그냥 농담한 건데." (p.145)
본성을 아무데다 갖아붙이는 인간들 때문에 짜증나고, 정부가 해야할 일을 국민 개개인의 탓이라고 돌려버리는 것도 짜증난다. 이래서 교육이 중요한건데, 이래서 투표가 중요한건데..이놈의 나라.. 가장 기본적인 바람은, 다음 대통령을 정말 잘 뽑자는 거다. 니네가 불행한 거, 니네 책임이지, 라고 말하는 개떡같은 사람을 뽑지 말고.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까봐, 나는 너무나 무섭다.
김무성이 모르는 게 있는데, 아마 대부분의 남자사람들도 모르는 것 같아 다시 한번 이 친절한 내가 말해주겠다. 남의 물건을 빼앗으면, 빼앗은 놈이 나쁘다. 다른 사람을 때리면, 때린 사람이 나쁘다. 여자를 강간하면, 강간범이 나쁘다. 강간 당하지 않기 위해 밤길 조심하고 성추행 당하지 않으려면 옷을 얌전하게 입으라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니다. 강간하지 말라고 말해야 한다. 강간하지마, 강간은 범죄다, 강간은 나쁜 거다, 강간하지 마, 라고 말해야 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악덕 업주가 있다면, 악덕 업주가 나쁜 거다. 거기다 대고 그런 사람을 볼 줄 아는 것도 능력이다, 방법이 없다, 라고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젊은이들에게 말하는 건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알겠냐? 방법이 없다, 니네가 잘 알아서 해라, 라며 개개인에게 불행의 책임을 전가해버리는 사람을 우리는 대통령으로 뽑아서는 안된다. 이미 당할만큼 당하지 않았나. 이명박이 대통령이던 시절, 아, 나라가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됐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되고 나니, 아 더 나빠질 수도 있었어! 하고 놀라 자빠질 지경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에서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니까 부디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도록 투표를 하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세살 조카는 어린이집을 관두기로 했다. 당분간 집에서 우리 엄마가 돌봐주기로 했고, 한 달 뒤에는 여동생이 방학하니, 개학할 때까지는 집에서 데리고 있기로 했단다.
아이들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게 뭐가 그렇게 큰 바람인가.
월요일 아침, 우울해지려는 기분을 붙잡으려고 했는데, 지하철 역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타야할 지하철이 방금 출발했다는 걸 알게 됐다. 8분을 기다려야 다음 열차가 온다. 그러자 꾸역꾸역 밀어넣으려던 우울함이 쏟아져내렸다. 하아, 8분. 이 8분의 기다림이 툭, 나를 건드려버렸네. 이 기분을 어떻게 좋게 하려나 싶어 오랜만에 캬라멜마끼아또를 사마셨다. 우유를 잘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지방우유로 주문해 마셨는데, 아, 너무 맛이 없어서 먹다가 버렸다. 밍밍한 맛...그냥 조금 고통스러움을 견디며 맛있게 먹을 걸. 비싼 돈 주고 커피 사서 맛도 없고...총체적으로 우울하구나.....
뭐, 금세 나아지겠지..
대통령...내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