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팔 원피스를 입었다. 이 원피스에 해줘야하는 허리띠가 보이질 않았다. 옷장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질 않았다. 아 젠장, 이를 어쩌지. 갈아입거나 허리띠를 더 찾다가는 회사에 지각을 할 것이다. 아 .. 나는 거친욕을 해가며 그냥 그 위에 자켓을 입었다. 이대로 가면 안될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버스를 탔다. 자리가 나서 앉았다. 오,
편하다..
이 느낌이 싫었다. 허리띠를 하지 않아 편한 이 느낌이. 아 젠장. 어쩐지 앞으로는 허리띠를 할 수 없을것 같은 느낌. 숨쉬기도 앉기도 모두 편해진 이 살찐느낌.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불편한 이 살찐 느낌. 아, 쉬바, 가을이라 그런거냐, 라고 혼자 이래저래 핑계를 대보지만, 나는 안다, 이건 가을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다음번에는 입기 전에 벨트를 찾아놓자, 그리고 벨트를 해도 편할 수 있는 몸이 되도록 스파르타식 다이어트를 하자, 라고 불끈 결심해보지만, 아, 과연 될까.
그런데!
이 가을에 스파르타식 다이어트를 결심한 사람들이 제법 있는가 보다. 나처럼 으응, 가을이라 이런거야? 라고 스스로의 육체에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 왜냐하면, 갑자기, 뜬금없이, 그동안은 안그랬는데, 10월 9일, 11일, 12일, 13일에 차례로 이 DVD 에 대한 땡스투 적립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슬프면서 웃기고 웃기면서 슬펐다. 그러니까 다들 봄에 입었던 옷을 입으려는데 힘겨웠구나, 육체의 후덕해짐을 느꼈구나. 다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이 DVD 를 선택했구나. 내가 이 DVD 의 리뷰를 언제 썼는가 확인해봤더니 작년 가을이었다. 한 달만에 10KG 감량을 할 수 있다고 써있는 이 DVD 를 그러나 나는 당연히 한 달을 하지 못했고, 오늘 새삼 땡스투 들어온 걸 보면서 이 DVD 를 찾아 다시 다이어트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다시!! 벨트 하지 않은 내 모습이 챙피해서 얼른 집에 가고 싶다. 하아- 이러면서 점심 메뉴를 생각하고 있다니...orz
이 책은 굉장히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또한 엄청나게 지적이라는 느낌도 주고. 나는 이 책을 이틀째까지를 읽었는데, 명확하게 그리고 또렷하게 확, 이해가 되고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천천히 곱씹어 읽어봐야 하는 책. 어떻게 설명을 하면 될까, 어쨌든 책장에 꽂아두고 천천히 읽어보고 싶은 책이라고 하면 될까. 게다가 존대말로 쓰여졌는데, 그 존대말이 주는 느낌이 꽤 겸손한 느낌까지 준다. 저자는 많은 것들을 자신 안에 품고 있으나 거기에 대해 잘난척을 하려는게 결코 아니다, 지극히 겸손하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할 뿐이다, 하는 느낌. 공부하는 자세로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별 취미가 없는 사람인데, 이 책에 있어서는 공부하는 자세로 읽어야 될 것 같다. 좀 길지만, 몇 구절을 인용해보겠다.
(미술관, 영화, 음악활동, 텔레비전 시청, 잡지, 스포츠관람, 담배를 그만두면서) 왜일까요? 정보가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보다 힘든 일이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 옳은지 어떤지를 알 수 없게 된다는 겁니다. 대체 이렇게 있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시달립니다. 정보가 말해주는 대로 행동하면 그 질문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정보를 모으고 무엇보다 먼저 정보통이 되려고 합니다. 게다가 정보를 무시하는 척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저는 싫었습니다. 그런 태도, 그리고 그런 태도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을 거절했습니다. (p.19)
새로운 소식을 발빠르게 듣기 위해 혹은 알기 위해 검색을 하고, 새로운 시스템에 발빠르게 적응하는 모습, 그래서 그 모든것들에 우르르 몰려드는 현상들에 대해 묘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나에게, 위의 구절과 그리고 다음에 인용할 구절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질 들뢰즈의 강력한 말이 있습니다.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 라는. 하이데거도 '정보'란 '명령'이라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들 명령을 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정보를 모은다는 것은 명령을 모으는 일입니다. 언제나 긴장한 채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누군가의 부하에게, 또는 미디어의 익명성 아래에 감추어진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의 부하로서 희희낙락하며 영락해가는 것입니다. 멋지네요.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자신이 옳다고 믿을 수 있으니까요. 자신이 틀리지 않다고 믿을 수 있을테니까요. (p.22)
그리고 읽고 쓰는 것에 대한 그의 견해들 혹은 그의 견해를 대변해주는 것들.
들뢰즈는 삶자체를 노래하는 문학이나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 자살하는 자가 왜 많은가 하고 물었습니다만, 그 이유는 저절로 분명해집니다. 읽고 또 쓰는 그 한 행 한 행에 어렴풋이 자신의 생사를 걸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시 한 번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녀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시원시원하게 이런 말을 써버리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바람직하다 하더라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서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것(독서) 자체가 즐거워서 그것(독서)을 하는 즐거움은 세상에 없는 걸까요? 목적 자체인 즐거움이라는 건 없는 걸까요? 독서는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적어도 나는 때로 다음과 같은 꿈을 꿉니다. 최후 심판의 날 아침, 위대한 정복자, 법률가, 정치가 들이 그들의 보답- 보석으로 꾸민 관, 월계관, 불멸의 대리석에 영원히 새겨진 잉름 등-을 받으러 왔을 때 신은 우리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오는 것을 보시고 사도 베드로에게 얼굴을 돌리고 선망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말하시겠지요. "자, 이 사람들은 보답이 필요 없어. 그들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pp.51-52)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의 곤난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무슨 일일까요?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추기경을, 대주고 자리를, 주교 자리를 마련하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황제가 높은 사람이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교회법을 지키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십계명을 지켜라" 라고 쓰여 있을 뿐입니다. 수도원을 지으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공의회를 열라고도, 그 결정에 따르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성직자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면죄부는 논할 계제도 못 됩니다. 며 번을 읽어도 그런 것은 쓰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 이야기가 쓰여 있습니다. (pp.78-79)
어느 날 루터가 있던 비텐베르크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혁명의 민중이 폭도로 변하는 것을 보고 루터는 그것을 제지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연설합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여기서 "태양과 별이 우리를 속입니다"라는 것은, 이단으로 생각되고 있던 점성술을 말합니다. 연설은 이렇습니다.
남자들은 술과 여자로 몸을 망칠 염려가 있다.
그렇다면 술을 금지하고 여자를 죽이라고 할 것인가?
태양과 별이 우리를 속인다고 한다면,
그것을 하늘에서 떼어내야 하는가?
그런 성급함이나 폭력은 신에 대한 신뢰의 결여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이 나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셨는지를 생각해보라.
말이 그 모든 것을 이루었던 것이다.
여기서 루터가 '읽은 것'을 "기도이고 명상이며 시련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떠올립시다. 의미는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성급함이나 폭력을 부정하고 말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pp.98-99)
멋지다. 대단히 멋진 책이 아닌가! 조금 쉬었다가 사흘째를 읽을참인데, 오, 그러나 이 책의 운명은 이미 제목에서 드러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이 책의 표지는 이지경이 된 것.
그러니까 목요일부터 조카가 와있었다. 책읽자, 라며 내 손을 끌고 가 내 책장앞에 선 조카는 왔다갔다, 어딨지? 어딨지? 를 반복하며 책을 찾는척 하더니 가네시로 가즈키의 『GO』를 들고 내 침대에 앉았다. 그러더니 이모 가방 어딨지? 어딨지? 라며 내 게도 책을 읽으라고 하는거다. 내 가방에서 내가 읽는 책이 나온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방에서 이 책을 꺼내들었다. 조카는 내게 자신의 옆에 앉으라고 하더니 쫑알쫑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 옆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데, 조카는 틈틈이 내게 '이모 책읽어' 라고 하는거다. 알았다고 내 책을 보는 척 하다가 나는 이모 물마시고 올게, 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응, 이라고 대답하던 조카는, 그러나, 물 마시고 돌아온 내게, 이렇게 찢어진 책표지를 들고서는 '이모 찢었어' 라고 하는거다. 아! 아! 아! 아! 아! 나는 찢어진 책 표지를 보며, 결국 잘렸구나, 하고 책의 제목을 보며 잔인한 운명을 탓했다.
영화는 초반부터 어떤 진행이 될지를 충분히 알 수 있을만큼 진부하다. 그러나, 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열세살 소년의 짝사랑이 재미있어서기도 하지만, 영화속 '라이언 고슬링'이 무척이나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별로 할 일 없는 그러나 돈은 많은 바람둥이인데, 와, 진짜 엄청 멋있어. 그가 양복을 차려입고 술 집에서 여자들에게 말을 걸면 그녀들은 하나같이 그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간다. 당연히 그를 따라가지 않은 여자가 등장하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 라이언 고슬링, 그 멋진 남자가 여자를 침대로 데려가기 위해 유혹하는 최종미션은 무려, 영화 『더티댄싱』의 마지막 장면인 그 리프트다. The time of my life 를 틀어놓고 여자가 남자에게 뛰어가고 남자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올리는 바로 그 장면. 와- 보는데 막 좋고 흥분되는거다. 꺄울,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
이 바람둥이가 진짜 사랑을 하게되고, 그래서 여자를 유혹하고 섹스를 하는 대신 밤이 깊도록 '대화'를 한다. 그리고 여자의 가족들을 만난다. 이제 남자는 변했다. 그는 이제 사랑을 하게 됐는데, 오, 겉모습이 진짜 우라지게 멋지다. 하아- 라이언 고슬링, 당신 진짜 짱멋지네요. 흑흑.
조카는 어제 돌아갔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할머니와 이모가 같이 가야한다며 비명을 지르고 울었다. 할미 같이, 이모 같이, 라고 계속 소리질렀는데도 할머니와 이모는 차에 타질 않았고, 조카는 같이 가지 못한다는 것을 이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엔 안그랬는데, 이젠 헤어지는게 뭔지 알아가는 것 같다. 물론, 다시 만날테지만, 자주 만날테지만. 그 어린 아이가, 고작 27개월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가, '같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니. 애틋하다.
원피스는 벨트와 같이 입어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