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영국 남자의 문제














퓰리처상에 『깡패단의 방문』이 있다면 부커상에는 이 책, 『영국 남자의 문제』가 있다. 둘다 괜찮은 책이지만-좋아할 수는 없다- 책을 읽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한다. 어찌나 책장이 안넘어가는지...영국 남자의 문제는 깡패단 보다 더 안 넘어가더라. 나는 영국 남자의 문제를 시작하고 너무 책장이 안넘어가서 도중에 다른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옆 무덤의 남자』와 『집착』. 그리고 다시 영국 남자의 문제로 넘어왔는데, 아, 포기할까 말까를 엄청 망설였다. 이 책을 나보다 먼저 읽은 친구는 왜 부커상을 받았는지 알겠다고 했고, 그랬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 뭔가가 있을거라는 기대로 포기하지 않고 꾹 참고 읽었다.


이 책은 책 뒷 표지에 쓰여진 [옵저버]의 찬사처럼 '위트와 따뜻함, 지성, 인간적인 감성과 이해심으로 가득한 작품' 임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찬사처럼 '정말 웅장하다, 위대하고도 위대한 작가' 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이 책은 따뜻한 책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 놓인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가득한 책이니까.


친구는 이 책이 영국 남자의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제라고 했지만, 나는 이 책이 영국 남자의 문제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제목처럼.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을 비난하는 남자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을 보호하려는 남자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는-유대인이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반유대주의자라는 말까지 듣는- 남자


이 모든 영국 남자들의 문제.


작가는 이 모두의 입장에서 이 모두의 의견을 보여준다. 그들 모두의 생각에 그럴 수 밖에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건 작가의 노력이 제대로 반영된 게 아닐까. 한 번 더 읽으면 좀 더 잘 이해될 것 같지만, 한 번 더 읽는다고 지루한 책읽기가 갑자기 재미있는 책읽기가 될 것 같지는 않으니 포기.



이 책의 주인공 '트레스러브'는 순간순간 나를 닮았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그 모습이. 게다가 여자친구가 바람을 피울거라는 망상에 시달리는 데에는 달리 위로할 도리가 없다.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자신의 망상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걸. 유대인이 아닌 그는, 자신이 유대인일거라는 확신에 가득차서 '부모가 내게 유대인이라고 말하지 않은건 그걸 내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잘생겼지만 사람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저것 많은 강의를 들었지만 잘 할 수 있는건 없다. 그는 쉽게 사랑에 빠진다.



"힘내." 사람들은 구내식당에서 그를 만나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들을 때면 그저 울고 싶었다. '힘내.' 그건 정말 슬픈 말이었다. 기대할 것이라고는 힘내는 것밖에 없다면, 그가 힘을 낼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할 뿐 아니라 힘내서 할 일도 별로 없음을 시인하는 셈이니까. (p.16)



나는 힘내라는 말이 별로 와닿지도 않고 좋지도 않아서 듣기도 싫고 하기도 싫은 말인데, 그게 트레스러브와 같은 이유였을까.  



트레스러브는 그간 마른 여자들을 애인으로 두었었다. 그의 두 아들의 각자 다른 엄마 둘도 말랐다. 그러나 지금 그가 사랑에 빠진 여자, 헤프지바는 아주아주 덩치가 크다. 자신이 그동안 사랑했던 여자들과는 다르다.


모든 것이 달랐다. 헤프지바를 만나기 전에 그는 입으로만 먹었다. 이제 그는 온몸으로 먹었다. 그의 몸 전체를 닦으려면 아주 많은 냅킨이 필요했다. (p.267)


헤프지바는 대개 다음 날까지 설거지를 미뤘다. 싱크대에 그릇을 쌓아두어서 주전자에 물을 채우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리고 싱크대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부엌 테이블에 놓여 있곤 했다. 냄비와 자기그릇은 손님 1백 명을 치르기에도 충분할 정도였다. 트레스러브는 그녀의 그런 점이 좋았다. 그녀는 과식 후에는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즐거움에는 대가가 따르지 않았다. (pp.270-271)


아, 헤프지바의 사고 방식은 너무나 근사하다. 멋지다! 과식 후의 설거지는 너무 우울하잖아!!


그는 헤프지바가 움직일 때 매트리스가 크게 출렁이는 것이 좋았다. 그녀가 끼어들면 모든 것이 거대해졌다. 그가 그녀와 함게하는 처음 그 순간부터 땅은 움직이고 바다는 들썩이고 하늘은 한데 모여서 검게 변했었다.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심한 뇌우 속에서 살아남는 것과 같았다. (pp.352-353)



아, 덩치 큰 여자와 사랑한다는 건, 심한 뇌우 속에서 살아남는 것과 같은 거구나! 멋지다. 뇌우 속에서 살아남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여자라니. 멋지다. 



오늘 점심에는 쌈밥을 먹었다.



아주 많은 야채와 고기를 잔뜩 먹고 배가 불렀다. 과식을 했다. 그렇지만 이 과식 후에 나는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었다. 디저트는 초코 케익이었다. 죄책감이 느껴질만큼 넘치는 쾌락을 선물해주는 초코케익. 윽.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마시면서 어찌나 흡족했는지, 나는 아마도, 이대로 가다가는, 뇌우 속에서 살아남는 기분을 선사해주는, 그런 여자가 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벌써 그런 여자......인걸까.



댓글(2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2-06-2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저도 힘내, 라는 말을 꽤나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덮어놓고 응원하는 느낌이라서요. 그런데 다락방님 페이퍼에 출현하는 책들은 다 한 번쯤은 읽어보고 싶어져요. 다락방님이 좋다고 하시든, 별로라고 하시든 말이에요. 저는 오늘 밤 베개 맡에 <한 여자>를 두고 읽을 예정이랍니다. 왠지 이 책은 그렇게 읽어야 더 좋을 것 같아서 ㅎㅎ
ps. 뇌우 속에서 살아남는 기분을 선사받는 것과 선사해주는 건 다른 느낌일까요?

다락방 2012-06-21 16:13   좋아요 0 | URL
우앗, [한 여자] 정말 좋아요, 수다쟁이님. 수다쟁이님의 감성이라면 몇 번이고 울컥울컥 할거에요. 이 책, 영국 남자의 문제는, 좋은 책인데 너무 지겹게 읽혀요.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전혀 없어요, 전혀. 이 책 한 권 읽는데 일주일 이상 걸렸네요. 어휴.

뇌우 속에서 살아남는 기분을 선사 받는 것과 선사해 주는 건, 아마도, 다른 느낌이겠죠. 어떤 기분이 '더' 좋은지는, 우리 비밀로 하도록 합시다. ㅎㅎ (뭔말인지..............)

비로그인 2012-06-21 17:33   좋아요 0 | URL
CD 플레이어 구매 완료!
고마워요, 다락방님 ^ㅇ^~ 모르고 지나칠 뻔했어요~

다락방 2012-06-21 17:37   좋아요 0 | URL
마침 하루 특가지 뭡니까! 으흐흐흐흣

야클 2012-06-21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심치고는 좀 heavy 하게 드셨네요. 혼자 드시진 않았을테고, 매번 이렇게 푸짐한 점심을 같이 드시는 분(아마도 회사동료?)은 누구실까요? 완벽한 그림이 되려면 옆에 소주도 한 병 있어야 할 듯. ^^

다락방 2012-06-21 16:14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너무나 너무나 소주를 마시고 싶었지만 점심 먹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야 하는 처량한 신세라 맥주 한 병으로 만족했습니다. ㅎㅎㅎ
고기를 저보다 더 좋아하는 직장 동료와 함께 먹었습니다. 꺄울!

레와 2012-06-21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츄릅................................. ㅡ.ㅜ


배고파 다락방..

다락방 2012-06-21 16:14   좋아요 0 | URL
난 아직 든든해요. 이것이 바로 고기의 힘!! 움화화화화화화화화홧. 점심을 거하게 먹으니 오후 네 시에 배가 고프지 않네요. 원래는 세 시에 고프기 시작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선인장 2012-06-21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상을 받았다는 말이, 한국 출판계에서는 거의 주례사처럼 쓰이는지라 그리 관심을 두지는 않지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은 이후로 부커상이라면 혹시? 하는 기대가 생겨버렸어요.
부커상+다락방님이라면 일단은 흠....

힘내라는 말은 하하에게나..(ㅋㅋㅋ, 도대체 무한도전이 없는 토요일을 언제까지 견뎌야 할까요?)
아주 오래 전 기형도의 편지를 읽고 난 후, 그를 흉내내어 저는 언제나
이봐, 힘을 아껴봐, 라고 말해요.

힘내라는 말보다, 힘을 아끼라는 말이, 훨씬 더 위로의 말로 들리거든요.
안 그래도 우린 너무 힘을 내서 살고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님도, 힘을 아껴요..
고기의 힘도, 늦은 밤에는 위력을 잃을테니... (그러나저러나 배 고프네...^^)

다락방 2012-06-21 17:57   좋아요 0 | URL
저는 퓰리처상 엄청 좋아하거든요. [올리브 키터리지]와 [로드]라니. 아우...진짜 짱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깡패단의 방문]이 좀 당황스러웠어요. 그간 제가 읽어온 퓰리처와는 좀 달랐다고 할까요. 그 책도 지루하게 책장 안넘어갔는데, 이 책 [영국 남자의 문제]도 책장이 안넘어가네요. 어찌나 길게 걸리는지 중간에 몇 번이나 포기 하려고 했거든요. 책은 좋아요. 저는 그 모두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좋았어요. 그들 모두를 이해하려고 하는게 보인다고 해야할까요. 그렇지만 감탄할만큼 좋은 책은 아닌것 같아요. 이건 아마도 지루함이 많이 작용한 탓이겠죠.

저는 비슷한 말로 기운내도 별로에요. 그리고 제일 싫은 말은 '신경쓰지마'에요. 이미 신경을 쓰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신경쓰지마, 라고 말하는건 굉장히 무책임하게 느껴지거든요. 신경쓰지마, 라고 누가 말한다고 신경쓰지 않게 되는게 아니잖아요. 그 말은 듣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그 말에는 전혀 힘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말인것 같아요.

저는 저녁에 불족발을 먹을거라서 힘 써도 괜찮아요, 선인장님. ㅎㅎ 그 때 그 때 쓴 힘을 저는 알아서 척척 보충한답니다. ㅎㅎㅎㅎㅎ(힘에 있어서 만큼은 자기관리 철저한 여자사람입니다. 훗)

2012-06-21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2-06-21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한국 남자의 문제>를 쓸 사람은 없을까요? 혹시 다락방님이^^

다락방 2012-06-22 09:58   좋아요 0 | URL
ㅎㅎ 한국 남자의 문제를 굳이 책으로까지 쓸 생각은 없네요. 생각하기도 싫어서요. ㅎㅎㅎㅎㅎ

비연 2012-06-21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배고파요...참외 한쪽 먹고 앉아 있는데..ㅜ

다락방 2012-06-22 09:58   좋아요 0 | URL
어머, 비연님. 왜 겨우 참외 한 쪽을! 저는 저녁에는 불족발과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ㅋㅋㅋㅋㅋ

카스피 2012-06-2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쌈밥에는 돼지 불고기(그것도 고추장)가 정석 아닌가요???

다락방 2012-06-22 09:59   좋아요 0 | URL
노노노노 그렇지 않습니다. 음식의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댈러웨이 2012-06-22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었다 놨다 했던 책이네요.
하워드 제이콥슨, 어느 북쇼에서 남들 다 싫다는 책 한 권을 풀어내는데 쉽지 않은 사람이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나저나 전 다락방님이 좀 살이 찐 분이였음 해요. 이 무슨 심보? ㅎㅎㅎ
음...그렇지만 자꾸 졸리가 떠올라요. --

다락방 2012-06-22 09:59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좋은 책이었지만 하워드 제이콥슨을 또 찾아읽게 될 것 같지는 않아요. 빨려드는 글을 쓰는 작가는 아닌듯 해서요.

댈러웨이님, 걱정마세요. 전 알라딘에서 주는 검정색티 라지 사이즈를 쫄티로 소화시키는 여자사람입니다. 훗.
:)

아무개 2012-06-2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이라도 뜯어 먹고픈 마중물입니다아~
30분 있음 퇴근이네요. 불타는 금욜 화르르르륵!!! ^^

2012-06-22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5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6-22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점심에 삼겹살 먹고파요.ㅎㅎ
덩치 큰 여자랑 사랑, 뇌우 속에서 살아남는 기분.ㅋㅋ
전 당장 왜 올리브 키터리지가 떠오르죠? 덩치 크고 무뚝뚝하고 시큰둥하지만 사랑할 줄 아는 여자.
마지막 편 '강' 읽다가 일흔 넘은 올리브의 사랑에 눈시울 붉어지더라구요, 다락방님.

다락방 2012-06-25 11:16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는 아까부터 오늘 점심은 무얼 맛있고 푸짐하게 먹을까를 고민중이랍니다. 같이 먹는 동료랑 같이 고민하고 있어요. 아침엔 점심 메뉴 고민, 점심엔 저녁 메뉴 고민...인생은 이런거겠죠. ( ")

아, 프레이야님 이럴때 정말 저는 깜짝깜짝 놀라요. 저도 올리브 생각했거든요. 사실 페이퍼에 올리브 이야기를 하려고도 했는데 그러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생략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프레이야님께서 언급해주시네요. 아, 이런거 정말 좋아요! 제가 얼마나 좋아할지 프레이야님도 짐작하시죠? :)

저는 덩치 큰 올리브가 동료 선생의 도망가자고 하면 가겠어? 라는 말에 그러겠다고 대답했던게 정말 좋았어요. 사람들은 으레 덩치가 크면 그 사람의 성격도 강할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강하고 굳은 사람일거라고. 그러나 그 안에 섬세한 여자가, 여자로서 인정받고 싶은 여자가 있죠.

안그래도 프레이야님의 페이퍼 읽었어요. 저도 일흔 넘은 올리브가 남자의 전화를 받고 무지개 같았다고 했던 그 장면을 무척 좋아했어요. 올리브 키터리지는 정말 정말 좋아요, 프레이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