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생이 되고나서부터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미친듯이 영화를 빌려다 봤더랬다. 영화가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유명한 영화도 보고 그러다 볼 게 없어지면 사람들이 모르는 별로 잘되지 않은 영화도 봤다. 비디오만 빌려보는 것뿐만 아니라 당시에 주말이면 해주던 주말의 영화나 토요명화도 봤었다. 토요일 비슷한 시간대에 kbs 랑 mbc 에서 영화를 보여줬었는데 항상 신문에서 줄거리를 보고 어떤걸 볼까 선택한 뒤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놓치기 싫어 녹화해놓고 보고는 했었다. 더빙되었고 또 많은 장면이 잘리기도 했을텐데 그때는 그 영화가 왜그렇게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때 텔레비젼에서 보았던 영화들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영화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메릴 스트립' 주연의 <폴링 인 러브> 였다. 우연히 만나게 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들이 우연히 스친 장소가 뉴욕의 '리촐리 북 스토어' 였고, 나는 그들이 서점에서 만나 부딪치고 서로가 구입한 책이 바뀌었던 이 스토리를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스물아홉이 되어 처음 뉴욕으로 여행갔을 때 그 리촐리 북 스토어를 다녀왔더랬다.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네.
그보다 더 인상깊었던 영화는 '카트린 드뇌브' 주연의 <사랑할 때와 이별할 때> 였다. 남배우도 유명했던 배우같은데 싶어 지금 검색해보니 '크리스토퍼 램버트'라고 한다. 아마 나랑 비슷한 또래는 다 아는 배우일것 같다. 이 영화는 일하다 만난 연상의 여인과 가수인 젊은 청년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영화이다. 여자는 남편과 사이가 안좋고 자식들도 있었는데 새로이 사랑에 빠진 이 청년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어느날 그에게 이별을 말한다. 그녀와 이별하고 괴로웠던 청년은 그녀를 잊을 수가 없어서 만나달라고 그녀에게 전화를 한다. 그녀는 알겠다고 하고 그를 만나러 집밖으로 그를 만나러 나왔는데, 그는 그녀를 기다리다가 그녀가 혼자 나오지 않음을 그녀가 자신의 가족들 모두와 함께 나오는 걸 보게된거다. 그리고 바로 그 때, 그 역시도 이 관계가 정말로 끝난 것이라는 걸 인지한다. 나는 이 영화의 이 마지막 장면을 정말 좋아한다. 어떤 쓸쓸함과 고독함과 뭐 그런게 다 담긴 것 같아서 말이다. 가족들 모두를 데리고 오는 걸 보는 그 때,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가족들 모두와 함께 나온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70대의 남자 피아니스트인 '비톨트'는 공연 때문에 만나게 된 40대의 여자 '베아트리스'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음, 그가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빠진 것이니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건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한 번 공연을 주최한 후 그에 대해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그가 그녀에게 연락하고 만나자고 하고 그녀를 좋아한다고 하니 자꾸 마음이 쓰이기는 한다. 그러다가도 이 노인이 나에게? 라고 생각하며 어느 순간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그를 만나고 싶어졌고 흐음, 그런데 우리는 이상한 관계는 아니잖아 싶어서 남편에게도 이 일을 얘기하고 우리 별장에 휴가갈 때 그도 부를까? 묻는다. 남편은 괜찮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을 만나고싶다고 계속해서 말하는 그에게 그러면 우리 별장으로 오라고 한다.
"'발데모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에요. 남편과 나는 10월에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일이 다 끝난 후에 우리와 합류하시겠어요? 집이 널찍해요. 당신만의 독자적인 공간을 갖게 될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주세요. 베아트리스 올림."
그가 답장한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러나 나는 가족의 친구가 될 수는 없어요. 비톨트 올림."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가족의 친구는 유명한 폴란드 소설 제목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폴란드의 베르테르‘라고 부른답니다." -p.85
바로 이 부분이었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나는 영화 [사랑할 때와 이별할 때]가 생각났다. '가족의 친구는 될 수 없다'고 말하는 부분. 비톨트가 원한건 그녀 가족의 친구가 아니었다. 그녀의 연인이었지. 그녀와 개인적인 관계를 원했던거지 가족과 다 아는 사이가 되고자 함이 아니었다. 예전에 존 쿳시의 소설을 몇 권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 등장해서 '꼭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성향을 보여준다고. 이 책에서도 그랬다. 비톨트는 자신이 원하는 대상이 그녀라는 걸 분명히 알고 그리고 그녀만을 원한다. 다른 관계가 아니라, 다른 식으로가 아니라. 그저 그녀와 일대일로 만나기를 원하는거다. 나는 그가 70대이지만, 사실, 사랑 이야기로 몰입이 잘 되지 않는 대상이긴 햇지만, 그렇지만 '나는 가족의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부분이 너무 좋았다. 나는 그렇게 분명하게 의사표현을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분명한 관계, 분명한 의사표현. 애매한 표현은 애매한 관계로 이어진다. 그러나 분명한 표현은 분명한 관계가 될 수 있다. 그 끝이 어떻게 되든 말이다. 나는 가족의 친구가 될 수는 없어요, 라는 문장이 왜이렇게나 좋은지 모르겠다.
그는 폴란드인이었다. 그녀는 스페인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의 언어인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고 그녀는 그의 언어인 폴란드어를 할 줄 모른다. 그들의 대화는 영어로 이루어지고 둘다 영어가 아주 유창했던건 아니라서 간혹 그녀는 그의 말이 어떤 뜻인지 곰곰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녀는 이 관계를 지속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와 며칠을 함께 지내고 차갑게 그와 헤어지는데, 그에게 물을 수 없는 상태에서 그가 그녀를 상대로 시를 썼다는 걸 알게 되고 그걸 갖게 된다. 시는 한두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폴란드어로 써진 그 시를 모른다. 알고싶다, 그런데 모른다, 그에겐 물을 수 없는 상황이다. 자, 어떡하지. 그녀는 그 시를 읽고 싶다. 그가 도대체 나를 상대로 무슨 시를 쓴걸까.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녀는 이 시를 번역해줄 사람을 수소문한다. 그렇게 결국 폴란드어에서 스페인어로 번역해줄 사람을 찾아 번역을 의뢰한다. 상대는 시를 번역해본 적은 없어서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번역해준다. 그녀는 한두편만 번역해 듣고 비용에 대해 합의하고 그리고 다른 시들 모두의 번역을 부탁한다. 번역해주는 사람은 '나는 이걸 번역해줄 수는 있지만 이 시에 담긴 뜻에 대해서까지 번역할 순 없어요, 그건 당신의 몫이에요" 라고 말한다. 그래, 그 시에 담긴 뜻은 베아트리스가 알아채야 한다.
아아, 이래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를 알아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일지 어떤 언어를 쓸지 어떻게 알고 단지 모국어만 한단 말인가. 외국인과 사랑에 빠질 가능성을 생각하며 영어만 공부한다는 건 또 얼마나 시야가 좁은가. 생전에 5개국어까지는 마스터하자고 생각한 나였지만, 그 안에 폴란드어가 없었기 때문에, 아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내가 폴란드 남자랑 사랑에 빠지게 될지 또 어떻게 알아?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것. 그가 폴란드어로 시를 써놓고 사라지면 어떡하지. 그러면 나 역시도 번역해줄 사람 찾아서 돈 주고 딜해야 되는데, 아아 물론 당장 읽고 싶은 마음에 일단 그 방법을 쓰기는 하겠지만, 결국엔 폴란드어를 배우는게 궁극적 답이 아닌가. 그 왜, 그 뭣이냐, 휴 그랜트 나오는 영화... 거기서 보면 다른 나라의 여성과 사랑에 빠져서 콜린 퍼스가 그 나라 말을 배우려고 하지 않나. 알고보니 그녀도 콜린 퍼스의 말을 배우려고 하고 있었고. 하여간 언어가 통해야 뭐가 돼도 되지 않겠는가. 그가 쓴 시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내가 그 언어를 알고 직접 읽고 직접 번역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지. 물론 그 글의 장르가 시.. 이니만큼 내가 폴란드어를 '할 줄' 안다고 해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자, 다시,
그녀는 스페인어를 하고 그는 폴란드어를 하고 그 둘은 서로 영어로 의사 소통한다. 그리고.
그들은 나머지 시간에 같이 있을 때면 말이 없다. 그녀는 보통 말이 없는 편이 아니다. 친구들과 같이 있으면 말이 많고 수다스럽다. 그런데 폴란드인에게서는 사소한 말이라도 냉기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속으로 언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폴란드인이거나 그가 스페인인이라면 보통 커플처럼 더 쉽게 얘기할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스페인인이라면 다른 남자일 것이다. 그녀가 폴란드인이라면 다른 여자일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다. -p.119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ㅋ ㅑ ~ 존 쿳시.. 한 부분이 여기이다. 소주 한 잔 들이켜고 싶은 부분. 와인이어도 상관 없다. 너무 좋지 않나. 그녀가 폴란드인이거나 그가 스페인인이라면 당연히 더 쉽게 얘기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가 스페인인이라면 다른 남자일 것이다. 그녀가 폴란드인이라면 다른 여자일 것처럼 말이다.
우앙 완전 뿌잉이다. 너무 맞는말인데 그래서 너무 근사하지 않나요. 왜냐하면 정말 그렇잖아. 내가 당신의 모국어를 쓰는 사람이라면 혹은 당신이 나의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대화는 더 잘 진행될 것이다. 말이 없는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의 모국어를 쓰는 사람이라면 혹은 당신이 나의 모국어를 쓰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일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렇게 서로를 보고 있지 않았을 수 있다. 한 공간에 있는 일이,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일어나리란 보장은 없다. 우리가 하필 인생의 이 시점에 만나고, 또 만나고 싶어지게된 건, 당신이 폴란드인이어서 내가 스페인인이어서이다. 운명의 흐름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가 70대라는 사실 그리고 그녀가 40대라는 사실 앞에서 또 할 수 있는 것들의 많은 부분들이 뒤틀린다. 그가 70대이기 때문에, 그들이 앞으로 더 만나게 될 확률은 그가 20대일 때보다 적다. 반드시 그런건 아니지만, 자연스런 흐름대로라면 어쩔 수 없다. 그의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너무 늦게 왔고 너무 멀리 살았다. -p.223
이게 바로 작가가 하는 일인것 같다. 책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버리는 일. 더이상 어떻게 이 사랑을 더 잘,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 늦게 왔고 너무 멀리 살았다.
때로는 정말 너무 늦게 오고 너무 멀리 산다. 정말 미칠것 같은 문장이다. 돈까스나 먹어야겟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