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김밥을 한줄 먹으면서 『반짝반짝 빛나는』을 보고 있었다. 김현주와 김석훈은 영화를 보기로 했고, 영화를 본 뒤에는 상가집에 들르기로 했다. 그래서 어두운 색의 옷을 입어야 했다. 김현주는 극장에 도착해서 김석훈을 기다리고 있다가, 김석훈이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찾는 걸 보게 된다. 손을 흔들어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릴까 하다가 멈추고 그가 두리번거리는 걸 지켜본다. 잠시 후, 김석훈도 김현주를 본다. 그리고 잠깐 김현주를 보다가 다가온다. 그렇게 둘은 만났다.
그 순간에 손을 흔들기를 멈춘 김현주는, 김석훈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검정 양복을 차려입은 저 남자, 저 멋있는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찾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한껏 음미하고 있지 않았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때 검정색 양복을 입고 들어와 두리번거렸던 남자가 그 순간, 내게도 떠올랐다. 저 남자가, 저렇게 양복을 차려입고 두리번거리며 찾는 사람이, 그게 바로 나라고 나는 모두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가 먼저 기다린 적도 있었다. 저기 저렇게, 저 멋진 옷을 입고 저 남자가 홀로 앉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나라고, 바로 나라는 여자라고, 나는 그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을 툭툭 치며 말하고 싶었다. 저기 저 남자 보여요? 저 멋진 남자? 저 남자가 기다리는 여자가 바로 나에요. 나는 이제 저 남자 앞에 앉을거고, 저 남자와 이야기를 할거에요. 저 남자는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뛰어온적도 있어요. 알아요? 나는 확성기에 대고 빌딩의 옥상에 올라가 모두에게 말하고 싶기도 했다. 나는 먼훗날, 혹시라도 내게 손녀가 생긴다면, 그때 그 순간들에 대해 모두 말해주고 싶다.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주영한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에서 할머니가 그랬던 것 처럼, '시모네타 그레지오'의 책,『남자의 부드러움』의 할머니가 그랬던 것 처럼.
얘야, 잘생기고 근사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아니?
얘야, 잘생기고 근사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홀로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순간에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내가 말해주련?
그러나 우리 할머니는 이런 할머니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까 그 드라마를 같이 보고 있는데, 같은 장면을 보고 있는데 할머니는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어, 쟤는 왜 여자를 못보고 두리번거려? 차마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또 이러신다. 어, 왜 쳐다보고도 멀뚱멀뚱 있냐? 하아- 나는 이쯤에서 내 감상을 포기하고 샤워하러 들어간다. 온전히 내 감상에 푹 빠질수가 없다. 우리 할머니는 모든 씬마다 모르는것 투성이다. 나는 못된 손녀라, 대답은 우리 엄마에게 미뤄두고 도망친다. 그리고 책을 펼친다.
이 책의 100페이지를 조금 넘겨 읽고 있는데, 아마도 내가 읽은 에세이중에서 가장 좋은 에세이가 될 것만 같다. 나는 에세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나는 모두가 좋다고 말하는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도 별로였다. 뭘 느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달까.-이 책은 다르다. 어쩌면 나도 좋아하는 '백화점'에 대한 이야기여서 일까. 아니면 조경란의 글을 읽노라니 조경란이 내 친구 J 와 비슷하게 느껴져서일까. 나는 그녀의 이 에세이를, 이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읽어본 그녀의 소설 『혀』보다 더 좋아할 것 같다. 아, 그러나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게 아니고, 그녀는 두려움, 그리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 처음 만난 사람이거나 앞으로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을 만난 경우에도 나는 은근슬쩍 그렇게 물어보곤 한다. 물론 나도 그것에 관해 말해야 한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를 읽다가 혼자 웃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동시에 좋아하지 않는 것에 관해 쓰고 있었다. 롤랑 바르트가 좋아하는 것은: 샐러드, 치즈, 아몬드 파이, 지나치게 차가운 맥주, 손목시계, 만년필, 피아노, 커피, 사르트르, 포도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딸기, 정치와 성의 결합, 부부싸움 장면,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저녁시간.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동시에 좋아하지 않는 것'은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며 명백히는 무의미한 것' 이라고 말한다. (pp.47-48)
내가 좋아하는 것, 이런 것을 열거하며 이야기 나누다보면 즐거워지고 뜻밖에 친밀감 같은 게 생겨난다. (p.48)
그리고 조경란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것에 대해서도 말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에 관해, 처음으로 지금 떠올려보고 쓴다. 심야 통화, 숲, 호수, 비, 폭우, 남자의 눈물, 키위, 퍼fur, 고양이, 나리과科의 꽃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들. (pp.48-49)
읽다가 나도 문득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떠올려보고 싶어졌다. 얼마전에 Jude님의 페이퍼가 이 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 심야 통화, 문자메세지, 혼자서 백화점에 가있는 시간, 낮잠, 꿈, 핸드폰, 소주의 첫모금이 뱃속에 들어가는 것을 느끼는 순간, 와인을 마시고 온몸에 열이 오르는 순간, 그남자의 입술, 크리스마스, 여름, 복숭아, 조카가 내 품에 폭 안기는 순간, 묻지 않아도 말해주는 그남자의 private,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존중해주는 타인의 태도, 금요일밤, 토요일 하루, 커피, 조용히 혼자 앉아서 글쓰는 시간, 임지규, 유머, 예의, 예쁜 구두, 입술에 잡힌 물집,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는 느낌, 귀걸이를 빼는 순간, 마을버스를 타고 한강위를 지나치는 순간
내가 싫어하는 것: 스팸 문자, 카드 청구서, 내가 취한걸 인식한 순간, 취한 남자, 취한 여자, 사랑이란 이름으로 사생활을 침해하는 태도, 참외, 홍합, 굴, 병적인 무관심, 소란스러움, 좋거나 옳다는 이유로 행동을 강요하는 일, 땀냄새,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기 보다는 걱정만 한가득 하는 태도, 잘못을 남에게 먼저 떠넘기고 보는 태도, 과음한 다음날, 공휴일과 주말이 겹쳤을 때, 만신창이 상태일때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낯선 장소, 타인의 비밀을 떠벌리는 일, 고속버스, 바퀴벌레, 메탈이 몸에 닿아 가려울 때. 귀신영화, 그리고
일요일 밤, 일요일 밤, 일요일 밤, 일요일 밤!!!!! 너무 싫어!!!!!
다시, 백화점을 읽으러 가야겠다.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러니까 가끔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독서를 계속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