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버림받았다. 그 생각이 몸 안에 꽉 차올라 터져버릴 것 같은 순간이 오면, 김을 먹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김을 한 조각 입에 넣으면 찝찔한 맛이 혀에 감기면서 사정없이 나부끼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한번 먹기 시작하면, 바닥이 날 때까지 자꾸만 집어먹게 된다. 나는 버림받았다. 나는 집이 없다. 이 공간은 집이 아니다. 집이란, 지켜야 할 어떤 것들이 모여 있는 곳. 여긴 지켜야 할 게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그저 김 하나, 나 하나. 김 둘, 나 둘. (pp.50-51)
그러니까 언젠가 2월의 일요일 오전이었다.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집 앞에 가면 만나줄건가요? 라고 그가 물었다. 네, 그런데 너무 멀지 않아요? 그와 나의 집은 두시간도 더 되는 거리에 있었다. 네, 멀지요. 그런데 당신은 일요일에 주로 집에서 쉬고 싶어하니까 다른데서 만나자고 하면 안나올 것 같아서요. 하하 알았어요, 라고 말하고 나는 그를 기다렸다. 집 앞 지하철 역에서 그를 만나 차를 마셨고 밥을 먹으러 가는 길, 그는 나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걸으면서 무슨 얘기를 하다 그랬는지 우리는 김에 대해서 얘기했다. 김 먹고 키스하면 정말 기분 구린거 알아요? 내가 말했다. 아 그래요? 네. 아 정말 구려요. 몰랐어요! 예전에 김 먹고 온 남자와 키스한 적이 있었거든요, 김밥이었는지 김이었는지 아 진짜 키스하다가 뺨 때릴 뻔 했어요. 어디 감히 나를 만나는데 김을 먹고 와서 냄새를 풍기는지. 그러게요 그 남자 예의가 없네요 양치도 안한건가. 그러게 말이에요.
밥집에 도착했다. 우리는 샤브샤브를 먹었고 소주를 한병 앞에 두고 주거니 받거니 했다. 샤브샤브를 다 먹으면 밥을 볶아줬다. 밥 위에는 부스러진 김이 뿌려져 있었다. 그는 숟가락으로 김을 걷어냈다. 뭐하는 거에요? 내가 물었다. 김 먹고 키스하는거 싫어한다면서, 김 너 다 먹어.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야 이 자식아 갑자기 왜 반말이야, 라고 따지지도 못했다. 그저 그 어색하고 긴장된 순간을 어서 빨리 날려버리고 싶다는 생각 뿐.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웃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그때 내가 중얼거린 말이 뭔지는 모르겠다. 진짜 안먹어요? 응 나는 너랑 키스할거라니까. 아 근데 이 자식이 정말.. 어떻게 저러지?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저런 말을 하지? 나는 대체 밥을 다 먹고 식당 문을 나서면 그때부터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 진짜, 뭐 이런 놈이 다있지? 어떻게 그냥 집에 가게 하지? 아 정말 어떡해야 하지? 그리고 우리는 식당을 나왔다.
추석 선물로 김을 받았다.
김을 먹던 보라가 나오는 아프리카의 별이, 김을 먹고 키스했던 괘씸한 놈이, 아니 그보다는 사실, 나는 너랑 키스할거야, 라고 뻔뻔하게 말했던 남자쪽이 훨씬 더 많이 생각났다. 추석 선물로 김을 받아서.
김 하나 나 하나, 김 둘 나 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