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는 좀 나이 든 여자와 십대의 어린 여자가 등장한다. 어린 여자(소녀)는, 나이 든 여자의 아들의 여자친구. 그런데 나이 든 여자가 보기에 이 소녀가 동네의 한 청년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녀는 그 사실이 못마땅하다. 그녀도 그 청년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 청년이 소녀에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을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녀는 어린 여자와 요트 항해를 하면서, 니가 그 청년을 좋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엄마투로 훈계하려 한다. 너는 어리니까, 라면서 그 어른 남자랑 묘한 관계가 되려는 것은 좋지 않다고 좋은 투로 얘기하려 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소녀를 위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신경쓰고 있는거다, 소녀를.
대수롭잖게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던 소녀가 요트안에서 머리를 부딪치고, 기분이 좋지 않다며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데도 그녀는 소녀의 말을 무시한다. 소녀로부터 그 청년을 만나지 않겠다는, 이상한 관계가 되지 않겠다는 확신을 듣고 싶다. 결국 소녀는 뇌를 다쳐 죽고 만다.
여자와 여자사이에는 남자들이 알 수 없는, 그러니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들이 흐르곤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체적으로 그 중간에는 남자가 있다. 여자가 남자에게 '저 여자가 신경쓰여' 라고 한다면 그건 그 안에 아주 미묘한 어떤 감정들이 숨어있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무슨 소리하는거야, 저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무신경한 남자들은 말을 하지만, 여자는 그게 아니다. 물론, 여자의 입장에서 그런 감정들을 입 밖으로 꺼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찌질해보일까봐 두렵다. 그런 미묘한 감정들을 잘 표현해내서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이 영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에서 그녀도 소녀에게 "너 당장 그남자에게서 떨어져, 나는 그 남자를 갖고 싶어!"라고 말하는 대신에 엄마인 듯, 어른인 듯 훈계하고 조언하는 걸 택한게 아닐까. 그런데 그 영화에서는 극단적으로 소녀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또 있다.
이 영화에서의 산드라 블럭은 휴 그랜트 회사의 변호사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 그녀는 이러저러해서 휴 그랜트의 회사를 떠나기로 한다. 자기 대신 맡아줄 변호사 '준'을 구했고, 루시는 준과도 사이가 좋다. 그러나 루시는 어느날 휴 그랜트와 준이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상태로 한 공간에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루시는 휴 그랜트를 사랑한다고 한 적이 없다. 게다가 휴 그랜트와 친하기는 하지만 연인 사이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 준에게 나는 그 남자를 사랑해, 너는 꺼져, 라고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사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니 좀 조심해 주겠니, 라고 말을 할 수도 없다. 이런 루시의 마음을 준이라고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겉으로 준과 루시는 계속 좋은 사이를 유지한다.
루시가 회사를 떠나는 날 짐을 싸는데, 준은 루시에게 농담을 한다. "스태플러는 회사것이지만 가져가는 걸 못본 척 할게요." 라고. 그러나 농담은, 상대도 받아들일 수 있고 함께 웃을 수 있을 때 농담이다. 루시는 그 말에 참았던 감정을 터뜨리면서 "10달러를 주고 이 스태플러를 가져가겠다!" 고 한다. 그러다 결국 루시와 준은 스태플러를 두고 싸우게 된다. 그때 그들이 싸운 이유가 정말, 스태플러 때문일까?
갑자기 이 두 영화를 떠올리게 된 건, 오늘, 비오는 아침 출근길의 내가 예민했기 때문이다.
비오는 출근길, 버스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버스의 뒷문에서 시작되는 두명 앉는 자리의 통로쪽에 앉아있었고, 내 옆의 창가쪽에는 어떤 청년이 앉아있었다. 버스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내릴때마다 가방이며 몸으로 자꾸 나를 치고 갔다. 사람이 많고 비도 오니 분주하여 그럴 수 있는 일이겠지만 오늘의 나는 사람들이 자꾸 나를 건드리는 것이 몹시도 못마땅했다. 그래서 내 옆의 청년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야, 너 저리 비켜, 거기 내가 앉을테니까! 라고.
물론, 그러지 않았다.
[투 윅스 노티스]를 떠올릴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누군가 내게 어느 학교를 졸업했냐고 물어오면, 혹은 전공이 뭐였냐고 물어보면 나는 진심으로 이런 대답을 하고 싶다.
"하버드 법대요."
혹은
"발레를 전공했어요."
라고.
그러나 뜬구름 잡는 소리다. 현실의 나는 공부를 못했고, 발레는 커녕 스티븐 시걸 닮았다는 소리나 듣는 걸. (엄마는 캐서린 제타존스라고 했어, 엄마는 캐서린 제타존스라고 했어, 엄마는 캐서린 제타존스라고 했어, 엄마는 캐서린 제타존스라고 했어..)
예민해지지 말자, 금요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