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머릿속으로 당신에게 말해요.
마흔살의 올리브는 '그저 키와 덩치가 큰 여자일 뿐이었다'. (p.382)
그저 키와 덩치가 큰 여자일 뿐인 올리브지만 어느날 낯선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걸 느끼게 되고, 결국 그 느낌은 사랑으로 이어진다. 남자가 자신을 '그런식으로' 뚫어지게 쳐다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잠깐 기억을 더듬어본다. 낯선 남자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을 '못' 하는거지 설마 한번도 없어서 기억이 '안'나는건 아니겠지. 못하는걸거야, 언젠가는, 누군가는 나를 뚫어지게 본 적이 있었을거야, 아마 그랬을거야.
이 키와 덩치가 큰 여자 올리브는 성격도 그렇게 다정하지도 않고 일면 포악스런 면까지 가지고 있다. 아, 나는 올리브가 자꾸만 나 같다. 나는 키는 크지 않지만 덩치는 크니까. 나는 대학시절 별명이 '스티븐 시걸' 이었으니까. (스티븐 시걸을 모른다면 검색창에 검색해보세요.) 게다가 내 성질도 포악하니까.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뚫어지게 쳐다보는 남자가 있고, 같이 도망가자고 하는 남자가 있다. 오! 마치 내 일인듯 설레고 기쁘다. 올리브가 나보다 낫다. 도망치자고 하는 남자가 다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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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도망치자고 하면 하겠어?" 사무실에서 같이 점심을 먹는데 그가 조용히 물었다.
"응." 그녀의 대답이었다.
그는 점심 때 늘 즐기던 사과를 먹으며 올리브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늘밤 집에 가서 헨리한테 말하겠어?"
"응." 올리브가 말했다. 마치 살인 계획을 세우는 것 같았다.
"내가 그러자고 안 한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군."
"응."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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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가 커도 그리고 포악스러워도, 남자가 도망치자는 데 '응' 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이때의 올리브는 마치 순한 양 같다. 아마 눈을 반짝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라면 날 잡아먹어도 좋아, 라는 듯이 대답하지 않았을까. 도망치자고 하면 하겠어? 응.
이 부분을 읽다가 친구한테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나도 누군가 이렇게 도망치자고 하면 도망치고 싶다고. 그곳이 섬이든 어디든. 그러자 친구는 도망치더라도 알라딘에 페이퍼는 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섬으로 도망치면 인터넷이 안될테니까 페이퍼를 쓸 수가 없다고 했고, 친구는 그럴거면 도망치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남자라면, 그러니까 이를테면 농사도 잘 짓고 고기도 잘 잡아오는 남자라면, 그렇다면, 기꺼이 도망치겠다고 했다.
물론, 도망치지 않고 바로 여기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 쯤은 나도 안다. 그런데 여기서 아무도 나랑 안 지낼라고 하니까... ( '') 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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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한 번도 키스하거나 서로를 만진 적이 없었다. 도서관 옆의 조그만 칸막이 사무실로 각자 들어가면서 가까이에서 나란히 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날 그 말을 한 후로, 올리브는 어떤 공포심과 때때로 참기 힘든 열망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힘들어도 참는 법.
아침까지 잠들지 못하는 밤도 있었다. 하늘이 밝아오고 새들이 지저귈 때에야 침대에 누운 몸에 긴장이 풀렸고, 올리브는 마음을 가득 채운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바보 같은 행복을 멈추지 못했다.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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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것은 올리브의 뒤척이는 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힘들어도 참는 법. 같이 정말 도망친 것도 아닌데, 도망치자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올리브의 가슴엔 열망이 가득 차있다.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아침까지 뜬눈으로 지샐 정도로. 오른쪽으로 돌아 눕고 왼쪽으로 돌아 눕고를 반복했겠지. 올리브의 그 밤은 길었겠지. 정말 도망친것도 아닌데 행복해서, 그리고 또 슬프고 아파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겠지. 그때의 올리브라면 아마 미친듯 실실 웃었다가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가 했겠지.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왜, 왜, 도망치지도 않을거면서, 그러면서, 그러면서 왜 도망치자고 하는거야. 이 빵꾸똥꾸야.
그리고 일흔넷의 올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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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후, 올리브는 잭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 점심이나 하러 가시려우?"
"나는 저녁이 더 좋은데요." 잭이 말했다. "저녁 약속이 있으면 종일 고대하게 되잖아요. 점심은 헤어지고 나면 아직 하루가 많이 남지만."
"그럽시다." 올리브는 해가 지면 바로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는 것은 그녀에게는 사실 자정을 훨씬 넘기도록 깨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p.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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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덩치가 크고 포악스런 올리브는 이토록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사실은 자정을 훨씬 넘기도록 깨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면서 그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려고 한다. 그에게는 말하지 않으면서. 아마 그는 모르겠지만 그녀로서는 대단한 결심이잖아. 하룻밤을 그저 포기하는 거라고. 잭 때문에, 당신 때문에.
당신은 모르겠지. 당신은 자꾸만 내 자신이 스스로 정한 룰을 깨게 한다는 걸. 그것이 내가 정한 룰이라 말한 적 없으니까. 나는 사실 밤 열시가 넘으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당신은 모르겠지. 그러니 그 밤이 어떤 의미였는지 당신은 알 수가 없겠지. 당신 때문에 자꾸만 내 룰이 깨져.
일흔넷의 올리브는 마흔의 올리브처럼, 그러니까 도망치자는 말을 들었을 때 처럼 열망을 품고 밤을 지새우지는 않겠지만, 그렇지만 설레임은 다시 찾아왔을것이다. 처음엔 저 남자는 뭐야, 싶었던 잭이 이제 올리브의 삶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나이, 일흔 넷이었다.
마흔에 나를 뚫어지게 쳐다봐 줄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면, 그리고 일흔넷에 '종일 고대할' 저녁을 먹자고 말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면, 아, 세상은 정말이지 아름다운거라고, 그러니까 한번 살아볼만한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은 이토록 활기차고 아름다운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