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그가 힌트를 주는 방식

을지로 전주집 삼겹살집에서는 파절이 위에 계란 노른자를 띄워준다. 계란 노른자를 젓가락으로 톡- 터뜨려서 파절이와 함께 섞고, 그 파절이와 함께 구워진 삼겹살을 먹으면 한없이 고소하다. 익힌 콩나물과 양념한 부추무침도 함께 내어주는데, 그것들까지 삼겹살과 한데 구워, 상추에 고기며 마늘, 파절이, 콩나물과 부추를 넣고 쌈을 싸면 한 입 가득이다. 때때로 너무 커서 숨이 넘어갈 것도 같다. 그런데 그 맛이 일품이라, 나는, 도무지 그 삼겹살집을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추운 겨울날, 외출하기 전, 집에 홀로 있는 시간이 조금 됐다. 내게는 드문 시간. 속이 허했고, 그보다는 마음이 허했다. 나는 계란 두개를 꺼내 계란후라이를 한다. 당연히 반숙으로 한다. 접시에 건져 내어 소금을 살살 뿌리고 포크를 들어 노른자를 톡- 터뜨린다. 그리고는 접시를 턱까지 갖다 대고 후루룩- 계란을 마신다. 흰자는 물론 포크로 찍어서 오물오물 씹는다. 입안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톡 터지는 계란 노른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다. 

여기, 외롭고 추한 한 영혼이 나처럼 계란 반숙을 좋아한다. 그가 좋아하는건 삶은 계란 반숙. 계란 반숙은 그에게 마치 우주와 같다. 

   
  "반숙은 달걀 그 이상이지. 내게는 하나의 작은 우주라네. 작은 우주 말이야." (p.20)  
   

 현실에서의 소심한 영혼인 나와, 책 속에서의 잔인한 영혼인 그가 반숙을 좋아한다.   

 

 

 

 

 

 

 

 

이 책속에는 외로운 영혼들이 등장한다. 타인을 사랑할 줄 모르는 외로운 영혼과 타인을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영혼. 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외롭고, 누군가를 사랑해도 외로운걸까. 

   
  원래도 뭘 그리 많이 드시는 양반은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을 때가 많았어. 그냥 내게 손짓을 해 보이시면 차려놓은 상을 그대로 물리기 일쑤였어. 아니, 어쨌든 사람이 물과 공기만 마시고 살 수는 없는 거잖아! (p.67)   
   

 

마을의 검사 데스티나의 집에 마을의 여선생이 살게 되면서, 검사는 물과 공기만 마시고 살 수 있는지 실험이라도 해보려는 것처럼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한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그녀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 걸 기대하는 것 뿐. 

   
  일요일에 아가씨가 외출을 하려고 하면 그녀와 우연히 마주친 척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셨어. 어쩌다가 만난 것처럼 보여도 그게 다 우연이 아니었다니까. 적절한 시점을 기다렸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박차고 나가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야. (p.68)   
   

이 책은 정말 너무 슬프다. 격하게 어느 한 순간 슬프게 하는게 아니라 읽는 내내 줄곧 슬프다. 한명 한명의 외로움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얇은 책인데도 책장은 쉽게 넘어가질 않는다. 이 책을 읽는데 예상하지도 못하게 시간이 걸린다. 바로 밑에 쓰여지게 될 인용문에서는 아, 한숨이 가득 나온다.  

"나도 기억이 안 나. 더 이상 내 안에 그 얼굴이 없어.... 가끔씩 그 얼굴을 찾아보려 애쓰면 다가오는 듯하다가 지워지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그럴 때면 내 뺨을 때리고 나 자신을 꾸짖어." 

"바보, 왜 그러는데?" 

"우리가 사랑할 때의 그녀 얼굴이 더 이상 생각이 안 나니까. 난 개새끼야."  

조세핀은 어깨를 으쓱했다. 

"개새끼도 성자도,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완전히 시커먼 것도 없고, 완전히 새하얀 것도 없어. 있는 건 회색뿐이야. 인간들도, 그들의 영혼도, 다 마찬가지지. 너도 회색 영혼이야. 우리 모두처럼 빼도 박도 못할 회색이지." 

"말이란 것도 전부...." 

"말이 네게 뭔데?" (p.122) 

죽은 아내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는 자신의 뺨을 때리고 개새끼라고 한다.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오래 함께 있고 싶고, 설사 헤어진다고 해도 나를 잊지 않아줬으면 하지만, 나를 언제까지고 기억해주고 추억해줬으면 하지만, 나를 잊었다고 해서,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스스로를 원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뺨을 때린다거나, 자신에게 개새끼라고 욕을 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나 따위, 그래, 잊어도 된다. 대신에 당신은 더 행복해지기를.  

필립 클로델이 하고자 하는 말들을 내가 이해하지 못할게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도 삶은 예측 불허인 모양이다. 

인생이란 참 기이하다. 삶은 예측 불허다. 분별할 만한 틈도 주지 않고 한데 뒤엉키고, 은총의 순간인가 싶으면 피비린내 나는 순간이 닥친다. 늘 그런 식이다. 인간은 길가에 놓인 작은 조약돌 같다. 기나긴 세월 동안 한자리에 박혀 있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느 떠돌이의 우연한 발길질에 냅다 날아가는 조약돌. 그런 돌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p.153) 

필립 클로델의 다른 작품 『무슈린의 아기』에서도 전쟁 때문에 아파야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필립 클로델은 자꾸만 얘기하고 싶어한다. 전쟁이 사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를. 이 책에서도 그는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행복이란 게 별것 아니다. 가끔은 실 한 가닥, 팔 한쪽에서도 행복을 얻는다. 전쟁, 그것은 꼬리가 머리에 붙은 괴물이다. 그래서 전쟁은 팔 병신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내로도 만든다. (pp.156-157) 

필립 클로델이 하는 모든 말들에 귀를 기울여야지. 그는 허투로 말하질 않는다. 그가 하는 이 말, 가슴 시린 말, 공감 되는 말, 공감되서 가슴 시린 말, 당신이 내게 답장이 뜸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당신을 알 수가 없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결코, 알 수가 없다. 벚꽃은 지고 진달래가 지천이다. 볕이 좋다. 그래도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낸다는건 여전히 춥기만 하다. 

답장이 왜 그렇게 뜸했을까? 시간이 없어서? 장소가 마땅찮아서? 아니면, 그럴 마음이 없어서? 타인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아도,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녀가 바스티엥을 사랑했듯이 그도 리지아를 사랑했을까? 아마 그랬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결국 나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p,232)

  

 

외롭고 쓸쓸하며 내다 버리고 싶은 기분들이 수시로 찾아드는 봄날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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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젠 무얼 기다려야하나.
    from 마지막 키스 2012-01-24 22:12 
    금요일에 영화를 보기 위해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는 내게 어떤 책을 읽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필립 클로델'의 『브로덱의 보고서』를 읽고 있다고 말했다.                이 책은 필립 클로델의 전작들처럼 '전쟁후의 사람들'을, '전쟁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쟁이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그것이 어떠
 
 
2010-04-25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6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5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6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6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7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Forgettable. 2010-04-25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나 울었으나 누구도 자기가울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불이 타고 성의 누각이 내려앉고 여인들의 치마가 벗겨지고, 대가리가 깨져 쏟아져 나오는 뇌수를 한 손으로 싸맨 병사들이 알 수 없는 곳으로 걸어가고, 그리고 피를 토했다.
자, 그러니 꿈을 꿔봐."

"창을 잡고 대열을 이루는 순간부터, 가차 없이 어깨나 등으로 떨어지는 채찍을 느낄 때부터, 그들은 본능적으로 전사가 되었다. 개인의 회한과 슬픔은 무의미했다. 북소리가 심장 소리에 맞춰 천지를 뒤한들며 둥둥 울린다. 수십만의 심장이 한꺼번에 뛰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울음을 터뜨리며 이를 닥닥 마주쳐 떨고 있는 소년 군병의 창끝 위로 포성이 울린다."

이 두 부분은 제가 요즘 한참 사로잡혀 있었던 [소현]의 구절이에요. 전쟁에 관한 묘사 중 가장 제 마음을 울리고 충격을 주었던 구절이죠. 필립 클로델이 말하는 전쟁의 아픔에 대한 구절을 보자, 그냥 이런 전쟁의 아픔도 있다고 알려드리고 싶어서;

전쟁은 너무 무섭고 아프고 슬퍼요.

그리고 타인의 마음뿐만 아니라 나는 내마음도 잘 모르겠어요.

다락방 2010-04-26 11:45   좋아요 0 | URL
전쟁은 무섭고 아프고 슬퍼요. 그건 뽀님이 인용하신 것 처럼 전쟁 그 자체만으로도 그렇고, 그것이 한 개인에게 스며들어도 그래요. [소현]에서의 전쟁은 서사적이고, [회색 영혼]에서의 전쟁은 서정적이네요. 그렇게 서로 아파요.

뽀님은 지금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모르겠나요?

나는 내가 낯설어요.

Alicia 2010-04-25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자기전에 이런 글을 읽다니. 가슴이 막 시려요.. 이루 말할 수 없이 시려요.
다락방님 책임져요 엉엉..

다락방 2010-04-26 11:45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쓰기 전의 저와 이 글을 쓰는 동안의 제가 시렸어요. 아마도 그래서 이게 알리샤님이 읽기에 시린 글이 되었나봐요.

어쩌죠?

다음날 아침이 밝았으니 기분이 좀 나아졌나요?

레와 2010-04-25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안에 반숙이 된 달걀 맛이 고스란히 느껴져요.

그리고 삶은 계속 됩니다 ..

다락방 2010-04-26 11:46   좋아요 0 | URL
그리고 삶은 계속 되고, 이 계절에, 젠장맞을 비염이 다시 찾아올 것 같아서 전 좀 두려워요. 끙 ;;

... 2010-04-26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올해의 봄은 왜 이다지도 내다 버리고 싶은 기분들이 수시로 드나든답니까! 벚꽃들은 왜 그다지도 빨리 진답니까!
달걀 반숙하나 먹으면 기분이 나아질까요?

다락방 2010-04-26 11:47   좋아요 0 | URL
정말로요. 정말로 벚꽃이 피는지도 모르게 져버렸어요. 전 벚꽃구경 가지도 못했는데, 진달래라니.

반숙 하나로는 기분이 나아질 순 없겠죠. 반숙 두개로도 안되요. 내다 버리고 싶은 기분은, 음, 반숙 두개로도 안될 것 같아요.

뭔가 획기적인 방법을 찾으면 제가 다시 알려드릴게요, 브론테님.

아포지 2010-04-26 14:17   좋아요 0 | URL
음.. 인간이 된 남자가 약이 아닐까요?

다락방 2010-04-26 14:34   좋아요 0 | URL
아, apouge 님, 뭔가, 이미 저를 파악해버리신 듯한 엄청난 내공이 느껴지는데요!!

sweetrain 2010-04-26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흰자와 노른자가 섞인 계란 요리만 먹어요. 그냥 반숙이나 후라이는 먹지 못해요.

9년 전에 엄마가 암으로 죽었을 때 저는 열아홉살이었고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었는데,
엄마가 죽은지 일년도 안 돼서 엄마 얼굴을 잊었어요. 잊으려고 애썼던 것도 아닌데
그냥 너무 쉽게 잊었어요. 가끔씩은, 엄마 웃는 얼굴 떠올려 보고싶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아요.
하지만 얼굴은 기억 못해도, 언제나 엄마를 사랑해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엄마가 살아있을 때, 그 때로 돌아간다면, 그 땐 어땠을까.
돌아간다고 해도, 그 때의 우리와 같겠죠. 저는 아침에 5분만 더 자게 해달라고 징징댈거고,
왜 매일 반찬이 똑같냐고 투정할거고, 엄마는 아침 밥을 새 모이만큼만 퍼줄 거고요.
(늘, 엄마가 아침 밥을 조금만 주는게 불만이었거든요...)

그리고, 좋은 곳에도 가셨을 거고, 항상 지켜봐 주실 것도 같아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은데, 말로 표현이 안 되네요.
머릿속에서 뭔가 매듭처럼 엉켜 있는 기분이에요.

다락방 2010-04-26 11:50   좋아요 0 | URL
남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이 살기 편하라고, 어쩌면 그들은 잊혀져주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얼굴이 잊혀지고 또 상대에 관한 기억들조차 잊혀진다고 하더라도 네, 사랑했던 기억은 희미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아침밥을 스스로 덜어 먹나요? 원하는 만큼 먹고 있어요?

봄을 잘 견디도록 해요!

치니 2010-04-26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엉, 다락방님.

다락방 2010-04-26 11:50   좋아요 0 | URL
울지마세요, 치니님. 엉엉

L.SHIN 2010-04-26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을 사랑할 줄 모르는 외로운 영혼과 타인을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영혼.
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외롭고, 누군가를 사랑해도 외로운걸까."

이것만큼 내 마음을 잘 표현해준 말이 있을까.

다락방 2010-04-26 11:52   좋아요 0 | URL
점심시간이에요, L.SHIN 님.
점심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조금 덜 외로운 오후를 보내시구요! :)

섬사이 2010-04-27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하기가 어려워요. 추천을 꾹 누르는 걸로 마음을 대신하고 가요..

다락방 2010-04-27 11:44   좋아요 0 | URL
세상엔 말하기 어려운게 참 많아요, 섬사이님.

기억의집 2010-04-27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방금 을지로 전주집 검색해 봤어요. 락방님이 도저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고 하는 곳. 하핫
그 곳에서 삼겹살을 집어 먹으면 위로주 한잔 마시면
외로움도 싸악 가시겠는데요^^

다락방 2010-04-28 09:43   좋아요 0 | URL
오, 기억의집님. 전주집이 검색이 되든가요?
낡고 허름한 곳이라 새로운 사람이 찾아오기에는 좀 어려운 장소에요. 좁디 좁은 골목에 위치하고 있죠.

전 일단 지금 숙취부터 해결해야..끙 orz

기억의집 2010-04-28 15:04   좋아요 0 | URL
네 검색되요. 정확한 검색은 아니지만 을지로 3가에 있는 거 맞죠!
숙취?!!!!
점심은 콩나물국으로!

2010-04-28 0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8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8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licia 2010-04-28 10:39   좋아요 0 | URL

ps. <미필적고의에 의한 여름휴가> 도 봤어요. How beautiful! 그리고 다락님도 뷰리풀! ♡

다락방 2010-04-28 13:18   좋아요 0 | URL
아이고, 부지런하기도 하지!! 말도 잘 듣는 알리샤님 ♡

2010-05-07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07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