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하나의 작은 우주

금요일에 영화를 보기 위해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는 내게 어떤 책을 읽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필립 클로델'의 『브로덱의 보고서』를 읽고 있다고 말했다.

 

 

 

 

 

 

 

 

 

 

 

 

 

 

이 책은 필립 클로델의 전작들처럼 '전쟁후의 사람들'을, '전쟁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쟁이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전쟁이 파괴하는 건 마을이고 나라이지만, 그들의 파괴가 더 오래 지속되는건 그 마을 속, 그 나라안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삶이다.

 

우리 중 아무도 그의 본명을 물어보지 않았다. 딱 한 번 시작(市長)이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이제는 영영 알 수 없게 됐다. 때를 놓쳤다. 오히려 잘된 일인지 모른다. 진실이란 손모가지를 분지를 수도 있고 도저히 끌어안고 살기 힘든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헌데 우리 대부분이 원하는 것은 그저 살아 나가는 것이다. 가능한한 고통스럽지 않게. 그것이 인간이다. (p.10)

 

필립 클로델은 그의 소설에서 언제나 전쟁이 가져온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를 -커다랗고 외형적인 상처가 아니라 작고 사소하게 개개인의 삶에 스며들어버린, 그래서 계속 가지고 가야 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그 상처들 틈틈이, 또 그 상처의 전과 후에,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도 놓치지 않고 얘기해준다. 그들이 사는 삶은 얼마나 반짝거렸는지를.

 

"무슨 일이니, 브로덱? 악마라도 본 게냐?"

그녀는 나의 두 손을 잡고 얼굴을 바싹 대고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은 초록색으로 무척 아름다웠고 홍채 가장자리에 금박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때 눈은 나이가 없다고, 사람은 어린아이의 눈을 간직한 채 죽는다고, 어느 날 세상을 향해 연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세상을 놓지 않던 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죽는다고 생각했다. (p.55)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의 눈이 아름답다는 걸 깨닫기도 하는 사람들에게, 전쟁은 무슨짓을 한걸까.

 

 

필립 클로델은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감정을, 그 은밀함을 그냥 넘기지 않아주어 무척 좋다. 그점이 고맙다. 그는 그 소중한 순간을 슬픔이 가득한 곳곳에, 늘, 놓아둔다. 그의 글이 가슴이 아프면서 아름다운 이유다.

수용소에서 개처럼 다루어지다가 살아 돌아온 남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 한 노인으로부터 먹을것과 잘 곳을 도움받게 된다. 맛있는 것을 먹고 편히 잘 수 있었고 며칠간 쉬면서 건강도 좀 좋아졌다. 그런데 남자는,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가까스로 그 말만 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겨우 같은 문장을 한 번 더 반복했지만 누가 나를 기다리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에멜리아의 이름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이름을 내 안에 워낙 꽁꽁 숨겨둔 탓에, 자칫 입 밖에 냈다가 잃어버릴까 두려웠다. (p.95)

 

노인은 '떠나온 곳에 돌아가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p.95)고 말하지만, 그러나 돌아가겠다는 그에게 배낭을 건네준다.

 

전날 밤, 다시 길을 떠날 생각이라고 이미 말했기 때문에 노인은 문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회색 면포에 가죽 끈이 달린 배낭을 내게 건넸다. 그 안에는 커다란 빵 덩어리 두 개와 베이컨, 소시지, 옷가지들이 들어 있었다.

"가져가시오." 그가 말했다. "당신 몸에 맞을 것이오. 내 아들 거였는데 그 아이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요.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갑자기 손에 받아 든 배낭이 엄청나게 무겁게 느껴졌다.

(중략)

"청이 있는데." 그가 덧붙였다. "그 아이를 용서하시오‥‥‥. 그들을 용서해 주시오‥‥‥. "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pp.96-97)

 

남자가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곳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모습 그대로 기다리고 있지 않음을 보지 않는게 나았을까? 남자가 수용소에서 개처럼 네 발로 바닥을 기고 핥았던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는데, 그런데, 이제, 그에게 남은건 무엇일까.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지금도 무슨 생각을 해야 할 지 판단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바로 이런 것이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에 대해 수용소가 영원히 승리하고 있는 부분같다. 죽어 나간 사람도 많지만 나처럼 그곳에서 빠져안오 사람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이미 더럽혀진 부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타인을 볼 때마다 그들의 눈길 속에 자신을 몰아세우고 고문하고 죽이려는 욕망이 들어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우리는 영원한 희생양이 되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동이 트는 아침은 뛰어넘어야 할 또 하나의 긴 시련이고 해가 지는 저녁이 되어야 이상하게 안도감을 느끼는 생물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 안에는 실망과 불안의 누룩이 들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말살된 인간성의 기념물이 되었고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다. (p.176)

 

그에게 어떻게, 무슨말로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아니, 자신을 '아물지 않는 상처'라고 지칭하는 사람에게 위로가 가당키나 한가. 수용소에 끌려갔던 것도 네발로 기었던 것도 사람이고, 그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네 발로 기라고 명령한 것도 사람이다. 폭력을 당한 것도 사람이고 폭력을 행한 것도 사람이다. 그들 모두가 함께 살고 있다. 인간은 약한 존재다.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당장 내가 살기 위해서 폭력에 가담하기도 하고, 그 폭력의 광기에 휘말려 자신이 하는 짓을 제대로 인식도 하지 못한채로 몽둥이를 휘두르기도 한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 자꾸만 자신을 짓눌러와 끊임없이 불편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것도 인간이고, 그래서 그런 자신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이란 종국에는 모질지 못한, 모질어질수 없는게 아닐까. 어느 순간 그들은 자신이 저질렀던 나쁜짓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은 내가 당했던 짓에 대한 괴로움보다 그 크기가 더 작지 않다. 이 책속에서 남자가 당한 일들, 남자의 여자가 당한 일들, 마을의 이방인이 당한 일들도 가슴 아프지만, 남자가 한 순간에 저지른 그러나 어쩔 수 없었던 일에 대해서도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당신은 그 일을 절대로 잊을 수 없겠군요, 어떡하죠, 라고 묻고 싶지만, 그러나 이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가.

 

 

더이상 신을 믿지 않는 이 마을의 신부는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고 있었다. 그것이 신을 믿지 않으면서 계속 신부로 있어야 하는 이유다.

 

"이제는 네가 신을 믿지 않는다는 걸 알겠다만, 네게 도움이 될 만한 고백을 하나 하지. 뭔고 하니, 나도 이제 신을 눈곱만큼도 믿지 않는다, 이거야. 난 아주 오랫동안, 수십 년 동안 신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수십 년 동안 신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같았어. 이런 저런 신호를 통해, 나에게 떠오르는 생각을 통해, 내가 하는 행동을 통해 신이 나에게 대답을 주는 것 같았지. 신이 영감을 주는 것 같았어. 그런데 그게 다 끝장났어. 이젠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영원히떠나 버렸다는 것을 알아. 어차피 둘 다 똑같은 얘기지. 그러니까 우리는 혼자다, 이 말이야. 그래도 난 점방을 지키고 있다. 제대로는 못 꾸려 가도 어쨌든 망하지는 안았잖아. 그 누구한테도 해 끼치는 것 없잖느냐. 내가 이 연극을 그만두면 지금보다 훨씬 더 외롭고 지금보다 훨씬 더 버려진 것처럼 느낄 늙은 영혼들이 있거든. 내가 하는 공연이 그들에게 그나마 힘을, 계속 살아나갈 힘을 주거든. 단 하나, 내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원칙이 있어. 비밀의 원칙, 고해성사의 비밀 보장 원칙이야. 그게 나의 십자가야. 그걸 지고 있는 거다. 그건 내가 끝까지 지고 갈 거아." (p.161)

 

 

남자는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는 나쁜일들에 관계되어 버렸다. 그가 이방인이 아니라 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았다면 그는 그녀에게 일어날 나쁜 일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계속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그 갓난 아기엄마의 물통에 손대지 않았다면 그는 그것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과거를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이랬다면, 혹은 저러지 않았다면, 하는 것들이, 이미 그 일들이 일어난 후인 현재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무의미한 가정들. 그러나 그는 '상처'일지언정 인간이기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아내와 아이를 지킬것이고, 이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 다른곳으로 가서 다시 삶을 살아볼 것이다. 매 순간이 사랑으로 가득차지는 못하겠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만, 그는 아내의 눈동자와 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어가며 또다시, 또한번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것이다.

 

우리를 갉아먹고 우리를 파괴시킬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죽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다. (p.188)

 

고통스러운 과거를 묵묵히 이겨내면서 괴로운 순간들을 참아내면서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것도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을 견디고 인내하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건 아닐까.

 

 

친구에게 필립 클로델은 우리가 함께 본 영화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의 감독이라고 말했더니, 그 영화 정말이지 무척 좋았다고, 자신도 그의 책을 읽어보겠다고, 책 제목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읽었던 그의 책 『무슈린의 아기』, 『회색 영혼』을 이 책과 함께 알려주었다. 그러나 아직 내가 읽지 못한 그의 책중에는 『아이들 없는 세상』도 있다.

 

 

덧붙여, 이 책의 눈에 띄는 오타 몇 개만 지적하자면,

 

49페이지, 설명할 수 있을 만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없었다 → 보이지 않았다, 로

293페이지, 확실한 치료약이라고 것을 압니다 → 치료약이라는 것을 압니다 로 바꿉시다. 개정판이 나온다면 수정되겠지만,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올 수 있을까? 2010년 4월에 나왔는데 내가 가진게 여전히 초판 제1쇄인데 말이다.

 

 

 

 

페이퍼를 쓰다보니 아홉시가 넘었길래 으응? 왜 남동생이 개그콘서트를 보지 않는거지? 라고 잠깐 갸웃했는데, 오오, 오늘이 화요일이구나. 일요일이 아니구나. 연휴동안 너무 술을 마셨더니 이젠 온 몸의 어디를 찔러도 술이 새 나올 것 같다. 내일 회사갈 생각을 하니까 답답하다. 이제 나는 또 무얼 기다리며 살아가나. 출근하자마자 수요일이라는 사실, 그것 하나로 위안을 삼아야 하나. 시간은 잘도 흐르는구나. 아...직장생활한지 십년도 넘었는데 왜 여전히 다음날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은 늘 나를 압박하는걸까. 왜 이런걸 극복해내지 못할까. 쿨해지고 싶은데. 흥, 출근따위, 라며 무시해버리고 싶은데.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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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2-01-25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폭력.
저도 오랫동안 끌어왔던 책을 오늘에야 마치며 폭력이란 단어를 생각했어요.

다락방 2012-01-25 08:48   좋아요 0 | URL
오르한 파묵의 책 리뷰 쓰신것 읽었습니다,드림아웃님. 드림아웃님께서 읽으신 그 책도 다섯명 화자의 시선으로 진행되는가 봐요. 제가 읽은 오르한 파묵의 책 [내 이름은 빨강]도 여러 화자의 시선에서 진행되었는데 말이죠. 등장인물들 이름이 어려웠는데, 드림아웃님의 리뷰를 읽으니 그 책도 마찬가지인가 봐요.

필립 클로델의 전작을 읽고 좋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이 책을 펼치기 전에 좋을까? 하고 갸웃 했었는데 오, 역시 좋았어요.

dreamout 2012-01-25 20:37   좋아요 0 | URL
회색 영혼. 좋았어요.
그를 이렇게 계속 읽어 주는 분들 있어서 좋아요.

다락방 2012-01-25 22:39   좋아요 0 | URL
저는 드림아웃님이 지금보다 훨씬 훨씬 더 자주, 많이 리뷰를, 페이퍼를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moonnight 2012-01-25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출근해야죠ㅠㅠ 책은일단보관함에넣고요;; 몇시간후-_-;출근한다는사실이믿기지않아요흑ㅠㅠ 그나마위로는 수요일부터시작한다는건데.. 다만내일은지옥의수욜이될듯해요 무셔-_-;;;; 늦었지만^^; 설잘보내셨나요 사랑하는 다락님^^

다락방 2012-01-25 08:49   좋아요 0 | URL
전 이미 출근했어요, 문나잇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밤사이 눈이 내려 쌓였더군요. 오늘까지도 연휴인 사람들이 많은지 출근길의 버스안에도 지하철안에도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아아아아 나는 그런데 왜 꾸역꾸역 가고 있는가, 하는 원망이 물씬 ㅠㅠ
자자, 기운내서 또 사흘, 열심히 일해봅시다, 문나잇님.

레와 2012-01-2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 연휴동안 [회색영혼]을 들고만(!) 다녔는데, 다락방은 또 다른 필립의 책을 읽었네요. ㅎㅎ

다락방 2012-01-26 13:55   좋아요 0 | URL
연휴전부터 시작한 책이었는데 가까스로 연휴내에 끝냈어요. 연휴에 의외로 책을 못읽었어요. 아니 의외가 아니지 조카랑 놀기도 해야했고 술도 마셔야 했고..이럴거란걸 알고 있었으니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