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의 신간이 나왔다는 걸 알았지만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었다. 먼저 번역되어 나왔던 작품 《맡겨진 소녀》가 내게는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얇은 분량이라 혹여라도 읽게 된다면 어느날 서점 가서 서서 읽고 와야지, 했었는데, 며칠전 나는 ㄷㅂㅁㄹ 님의 서재에서 이 책의 원서를 보게 됐고, 오오, 좀 예쁜데? 게다가 얇아? 하며 원서를 욕심내게 됐다. 그렇게 원서를 샀는데, 흐음, 번역본 없이 도저히 읽을 자신이 생기질 않아 에라이 모르겠다 번역본 사자~ 언제? 그건 좀 미루자..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친구를 만났다. 우리 둘 모두에게 낯선 동네였다. 그 동네에서 뷔페로 배부르게 밥을 먹고 레스토랑을 나선 우리는 너무 배부르니 좀 걸을까, 하게 되었고 그렇게 걷다 보면 강남 교보문고가 나온다는 걸 알게된 나는 '그러면 거기 가야지' 했더니 친구가 '나도 가자' 해서 함께 교보문고에 들어가게 됐다. 친구는 내가 재미있다고 한 책이 매대에 놓인 걸 보고 서서 조금 읽어보더니 '아 이거 완전 빨려들어가네 사야겠어' 하고 책을 한 권 집어들었고, 나는 망설이다 클레어 키건의 이 책을 샀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던 터라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이 얇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사기 전까지 이 책에서 막달레나 세탁소를 다루는 줄 전혀 모르고 잇었다. 남자가 주인공인데, 막달레나 세탁소 얘기가 나온다고?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질 줄을 몰라 책장을 넘기는데, 와, 정말 감탄했다. 구매자평에도 썻지만, '이 얘기를 이렇게 한다고?' 하는 놀라움이 절로 나오더라.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거대한 여성학대의 사건 앞에서 한 인간이 할 수 있었던 지극히 양심적인 삶에 대해서, 클레어 키건이 아주 아름답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당연히 그 일에 얽혀들고 싶지 않았던 사람의 마음과 걱정까지도. 어떻게 '나의 미래' 혹은 '내 자식들의 미래'가 걱정되면서도 질끈 눈을 감는 대신 이미 보았으니 나는 행동하겠다, 할 수 있는지. 그건 책에서도 표현되지만 그 자신이 그 전에 이미 누군가의 도움과 애정으로 지금을 살 수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받았던 사람이 결국 사랑할 수도 잇다는 말은 언제나 참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의 경우엔 참이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고, 설사 몰랐어도 책 뒷면에 작가가 그리고 역자가 막달레나 세탁소에 대해 소개했으니 이 책을 읽는다면 알게될텐데, 새삼스레 나는 내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와 막달레나 세탁소 부분을 다시 읽는다. 그 책은 '수 로이드 로버츠' 의 《여자 전쟁》이었다.
수 로이드 로버츠는 이 책의 제3장에서 막달레나 세탁소의 생존자와 인터뷰를 나눈다. 그리고 그 인터뷰 내용중에는 놀랍게도-아니, 놀랍지 않게도- 이런 부분이 있다.
다른 20명의 여자들과 함께 쓰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메리는 1층 창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룸메이트들과 그들을 감독하는 수녀들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래층으로 살금살금 기어가서 창문을 넘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바깥세상 구경을 못했어요. 내가 알던 거라곤 오직 수녀와 신부뿐인 세상이었죠." 한밤중에 길 한가운데에서 헤매다가, 메리는 신부의 집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문을 두드리자 남자가 나왔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남자에게 말했다.
"하이파크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막 도망쳐 나왔는데 도움이 필요해요." 그렇게 말했는데 신부가 다가와서 내 옆 의자에 앉더니, 내 무릎을 문지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자기 바지를 내리고 나를 강간했어요.
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거든요. 눈이 부을 정도로 펑펑 울면서 아프다고 외칠 뿐이어쑞. 다 끝내더니 그가 말하더군요. "이건 우리 둘 사이의 일이야. 6펜스를 줄 테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난 그저 널 도와주려는 것뿐이다." 그는 나에게 6펜스를 주고 문을 열더니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밖에서 대기하던 경찰차가 나를 다시 세탁소로 데려갔습니다. -p.80
자, 막달레나 어떤 곳인지 조금 더 들여다보자.
대체 아일랜드의 종교단체가 운영한 세탁소 체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걸까? 1767년 처음 문을 열었던 세탁소는 200년 이상 지속되어 마지막 세탁소가 1996년 문을 닫았다. '타락한 여자들'로 낙인 찍힌 여자 수만 명이 창피해하는 가족들과 위선적인 사제들에 의해 이곳으로 보내졌다. 도덕적 탈선으로부터 지역사회를 지킨다는 명목이었다. 단체의 이름은 예수의 추종자 가운데 한 명이자 '회개한 창녀'로 일컬어지는 막달라 마리아에서 비롯됐다.
여성의 성에 대해 성모마리아가 비현실적으로 엄격한 기준을 세운 이래 남성들은 이에 대비되는 '타락한 여자' 에 집착해왔다. 초기 기독교의 현자로 통하는 성 예로니모는 4세기에 "여성은 만악의 근원"이라는 글을 남겼다. 13세기에 발의된 교회법Canon laws은 여성 감금을 정당화했다. "추악한 육욕으로 인해 결혼의 침상을 내버리고 타락한 여성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종교에 귀의한 여성들이 있는 수녀원에 배속시켜 영구적인 고행을 하도록 해야 한다" 19세기 초 아일랜드에서는 이런 사상이 인기를 얻었고 대부분의 대형 세탁소가 이때 지어졌다.-《여자 전쟁》, 수 로이드 로버츠, p.86
아일랜드에서는 전통적인 아일랜드 도덕 관습에 조금이라도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 누구에게나 '타락한 여자'라는 꼬리표를 너무나도 쉽게 붙였다. 창녀는 물론이고 근친상간이나 강간 혹은 사고로 인해 임신하게 된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도 '타락한 여자'로 분류됐다. 어떤 여자들은 심지어 '예방 차원'에서 세탁소로 보내졌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수녀들은 외모가 특출하게 빼어난 소녀들을 '타락할 위험이 높다'며 세탁소로 보냈다. 메리 메릿은 아마 반항기가 지나치다는 이유로 세탁소에 보내졌고, 그것이 파멸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엄격하게 유지해야 할 필요와, 노동자를 공짜로 부려먹으면서 이익을 얻으려는 종교단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이들 세탁소는 그 정당성을 더욱 공고히 확보했다. -《여자 전쟁》, 수 로이드 로버츠, p.88
'우유니게, 이두루, 이민경' 이 지은 《유럽 낙태 여행》에서도 막달레나 세탁소는 언급된다.
섹스를 해서 즐거움을 누렸다면 아이를 임신해서 그 쾌락에 대한 죄를 치러야 한다는 이 가톨릭 관념에서 탄생한 끔직한 실례가 바로 ‘막달레나의 세탁소(The Magdalene Laundries)‘다. 막달레나 수용소라고도 불리는 이 시설은 "몸을 버린 여자들"에게 지낼 곳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진 가톨릭 시설로, 18세기(1765년)부터 20세기(1996년)까지 존속했다. 이 시기 아일랜드에서 여성들은 섹스를 했거나, 강간당했거나, 아기를 낳았거나, 아니면 그냥 너무 예쁘다거나 하는 이유로 납치당해서 이곳에 수용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더럽혀진 몸과 죄를 씻는다. 섹스를 하지 않았다 해도 "예쁜 사람은 필연적으로 오만해질 것이므로" 막달레나 세탁소에 끌려간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이 세탁소를 거쳐 간 여성의 수는 약 3만 명으로 추산된다. 1993년 이 시설 중 한 곳에서 시신 155구가 암매장된 묘지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막달레나 세탁소의 폐쇄성과 각종 문데에 대한 고발이 이어졌고 2013년에 국가 차원에서 사과문을 발표했다. 막달레나 세탁소를 운영해온 것은 가톨릭 세력이었지만 은밀히 국가의 지원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유럽 낙태 여행》,우유니게 外, 아일랜드, p.121
그런데 뜬금없이, 《여자 전쟁》의 이 막달레나 세탁소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을 만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만나다니, 정말 반갑지 않은 이름이다. 나는 그의 책 중 몇 권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아내를 경멸하고 정부를 두었던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는 타락한 여자들을 돌보는 보호시설 운영에 관여했다. 그는 '여성의 속죄를 위한 우라니아 코티지Urania Cottage for Redemption of Women'가 "질서와 꼼꼼함, 청결, 그리고 세탁, 수선, 요리 같은 모든 일상의 가사 임무"라는 덕목을 떠받쳐야 하며 그러면 비로소 구원의 길을 보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일랜드와 영국에서는 정신 업이 바쁜 세탁일이 영혼을 정화화는 공인된 방법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금지된 성교에 관여한 남자들을 찾아내고 처벌하는 데 이런 에너지를 쏟은 적은 없었다. -《여자 전쟁》, 수 로이드 로버츠, p.87
세상에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지만, 여성학대에 관여하지 않은 남자들 역시도 얼마 없는 것 같다.
후-
이 무거운 이야기가, 아주 소박한 사람과 만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이룬다. 너무나 놀랍지 않은가!
책을 샀다.
일전에 타미한테도 사준 것 같은데 이번엔 아가 조카에게 주기 위해 《안 돼, 데이비드!》를 샀다. 벌써부터 아가 조카랑 함께 읽을 생각에 설레인다. 아가 조카 내가 한 줄 읽으면 따라 읽게 시켜야지. 후훗.
《헤겔 역사철학 강의》는 책 읽을 때마다 변증법 나오는 통에 골치가 아파져서 샀다. 어휴 골치가 아파. 이거 읽으면 변증법 마스터 가능한 부분? 내가 이래서 오만년전에 이거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아무 생각 안나는 걸 보면 역시 다 틀린 부분?
《말, 살, 흙》은 2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라서 샀다. 아니, 공포의 권력을 읽은 다음에 뭐 무서운 게 없네요? 이 책도 지루하다면, 어렵다면, 그래봤자 지가 얼마나 더하겠어? 크리스테바 이겨? 세상에 크리스테바가 짱먹을걸?
《ABC 살인사건》과 《열차 안의 낯선 자들》모두 '피터 스완슨'의 《8가지 완벽한 살인》읽고 급박하게 주문 눌렀다. 아니, 원래 사려고 벼르던 책들이긴 한데 피터 스완슨이 '너 아직도 안삼? 사셈. 고고!!' 하는 바람에 그만...
《사라진 것들》은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비슷한 연령대의 두 알라디너가 극찬하는 바람에, 흐음, 나도 늙어가니까.. 하고 샀다. 어쩐지 읽기 싫은건 왜지? 아마도 내 나이듦을 자각하게 될 거란 생각 때문일까. 휴..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은 왜 제목 저렇게 해놔가지고 나 안보이냐. 내가 사놓고 내가 제목 몰라서 지금 사진 보고 제목 썼다. 제목 잘 보이게 만듭시다. 아, 제 노안 탓이라고요? 그렇다면 노안 온 사람도 볼 수 있게 만듭시다. 내가 노안 왔지만 책은 누구보다 많이 산다니까요?
그리고 이 두 권도.
너무 예쁘지 않나염? 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
아이쿠야, 다 쓴 줄 알았더니 책 한 권 빼먹었네.
사놓고 지금 알았다. 나 이 책 구판 가지고 있다는 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츠바이크 계속 당하네. 있던 책 또 사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휴 내 팔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할 수 없지.
다음엔 저 서울대 인문고전 시리즈 모은 거 사진 좀 찍어봐야겠다. 고작 5-6권 정도 밖에 안되는 것 같긴 하지만 ㅋㅋㅋ 완독한 것도 없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칸트 절반 읽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만 총총.
아 오늘도 명품 페이퍼를 작성하고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