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작가에 대하여 쓴 잠자냥 님의 글을 읽고 나도 살짝 말을 보태보기로 한다.
내 경우엔 얼마전 필립 로스에 대한 단발머리 님의 페이퍼에 댓글을 달기도 했지만, 필립 로스의 글에 감탄하는 쪽이다. 필립 로스가 좋으냐 고 물어보면 확신을 가지고 네! 라고 할 순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뛰어난 작품 《휴먼 스테인》을 읽고 감탄과 동시에 원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전이나 후에 읽었던 그의 작품들, 《울분》, 《에브리맨》, 《죽어가는 짐승》, 《포트노이의 불평》을 읽을 때만 해도 필립 로스에 대한 별 감정이 없었으나, 휴먼 스테인은 달랐다. 그 작품은 굉장히 뛰어나고 인간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모순적인지 궤뚫고 있는데, 동시에 작품을 통해 그가 얼마나 페미니스트를 우습게 보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뛰어난 작품에서 이렇게 뛰어난 문장들로, 이렇게나 글을 잘 쓰면서, 그러면서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그려놓다니. 그가 그 책에서 그려놓은 페미니스트는 이 세상이 페미니스트에 가진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한 전형적인 바로 그 인물이다. 성평등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기 많은 남자 교수의 사랑을 받지 못해 절망하는 여자. 그 작품을 읽을 때 나의 내적 갈등이 폭발했더랬다. 너무 잘 썼는데 그런데 왜 페미니스트를 … 그때만 해도 나는 그를 싫어한다, 그의 작품을 안읽는다 쪽으로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왜때문에, 《네메시스》를 읽었는가!!
물론 사람마다 글을 읽는 기준이 다르고 취향도 다르니, 필립 로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네메시스에 대해 좋게 평하지 않을 수 있다. 인상적이지 않은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안다. 나도 그 작품이 '내가' 읽었기 때문에 엄청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네메시스는, 나를 들켜버린 책이었다. 책에서 그가 보여주는 주인공의 성별은 남자였지만, 책 전체에서 남성적인 분위기가 넘쳐나지만, 그런데 그 남성이 나였다. 나는 그 남성이 남성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보편적 인간, 그러니까 '강한 신념을 가진' 보편적 인간으로 읽힌 거다. 즉, 나로 읽혔다는 거다. 아주 강한 신념을 가진, 그리고 신념대로 살려고 하는 바로 나.
필립 로스에게 감탄한 건, 그런데 그 '신념대로 살려고 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선한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약자의 편에 서려고 하는' 이 흠잡을 데 없는 꼿꼿한 인간이,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선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신념은, 그러니까 그것이 좋고 긍정적이고 선이라 해도 결코 선한 결과로 흐르지는 않는다는 냉정한 인간사를 그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옳은 신념 지키다가 똥되어버렸달까.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그걸 다 읽은 후에 내가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가
어쩌면 타협이 옳은 것이 아닌가
이런 고민을 숱하게 하게 된것이다. 나는 이런 책이 좋은 책이라고 믿는다. 책장을 덮고 나서 잊혀지는 그런 책이 아니라, 책장을 덮고 나서도 아 쉬바 인생 뭐야, 인간 뭐야, 사는거 왜 이래, 어떻게 살아야 돼 막 이런 후폭풍을 가져오는 책이 나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네메시스는 내게 정말 너무 좋은 책이었고, 그래서 필립 로스를 미워할 수가 없다. 야속하긴 하지만. 아니, 친페미니스트 적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타인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가. 나 자신도 내 마음대로 안되는데. 내가 내 마음대로 됐으면 나는 슈퍼모델 … (먼 산)
나 역시 어떤 책을 잘 읽고 좋아했다고 해서 그 작가에게 개인적으로 호감이 생긴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어떤 작가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는 작가는 여럿인데, 그렇다고 그들과 만나고 싶다거나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고 싶다거나 하지도 않는다. 다만, 계속 써주었으면 하는 작가가 또 있지. 그게 누구냐면, 바로바로,
리 차일드!!
나는 잭 리처가 너무 좋다. 잭 리처가 소설적 재미가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 잭 리처가 불의를 보면 이를 악물도 뛰어드는 사람이라서 좋고, 어린아이 괴롭히는 사람에겐 바로 응징하는 사람이어서도 좋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센데, 그 힘을 약자를 괴롭히는데 쓰는 게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는 데 쓰는 사람이라서 좋다. 잭 리처는 소설 속에서 나를 실망시키는 일이 별로 없는데, 그러니까 그가 역마살이 있어가지고 (응?) 책마다 다른 지역을 가고, 그렇게 가끔 섹스도 하지만, 아니 다 큰 어른이 뭐 이 사람하고 섹스할 수도 있고 저 사람하고 섹스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내가 잭 리처가 왜 좋냐면, 책을 읽다가 '으, 이 여자랑도 섹스하면 너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너 좀 싫어질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면, 놀랍게도 그 여성과는 섹스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잭 리처의 윤리 감각이면서 동시에 리 차일드의 윤리 감각 이라고 생각한다. 그 감각을 가진 작가라면, 책을 더 써도 된다고, 계속 써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파고 싶은 작가는 한나 아렌트 이다.
오래전부터 한나 아렌트가 말한 '사유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라는 구절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내게 와닿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내가 삶을 살면서 점점 깨닫게 되는게 있었으니, 멍청하고 게으른 건 악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생각하지 않고 멍청한 것, 그리고 게으른 건,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멍청한 건 악이다, 무지는 죄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한나 아렌트의 구절이 훅 온거다. 아,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게 그것이겠구나!! 물론 한나 아렌트를 그 자체로 존경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스승을 능가해버린, 청출어람의 본보기인 한나 아렌트라는 존재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지 않았어도 이미 많은 여성들에게 롤모델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스스로 잘난 점이. 스스로 똑똑하고 스스로 잘나고 스스로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한 것만으로 한나 아렌트를 좋아했는데, 그런데 그런 사람이 사유하지 않는 것은 악이라는 말을 하다니! 내가 한나 아렌트의 책을 모으는 것은 바로 그 이유다. 그러니까,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다보면 결국 내가 가진 생각들과 놀랍도록 일치하지 않을까, 한나 아렌트가 하는 말을 내가 모르는 바가 없지 않을까 싶어진 거다. 물론 어려운 단어, 어려운 문장은 어렵겠지만, 한나 아렌트의 주장들을 내가 이해하는 순간 나는 한나 아렌트와 결합(?) 하지 않을까 싶어지는 거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를 이번 생에서 파보고 싶다.
그럼 이제 퇴근 준비 해야겠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