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근처에는 아주 맛있는 순댓국을 파는 곳이 있다. 나는 그동안 먹은 순댓국집 중에서 이곳을 제일 우선으로 치는데, 밥도 맛있고 순댓국도 맛있고 깍두기며 오징어젓까지 다 맛있다. 너무 맛있어서 점심에도 곧잘 가고 저녁에도 곧잘 간다. 여기를 순댓국집의 최고로 치는 직장동료 K 와 퇴근후에 들러 소주를 두 병 시켜 각 1병씩 자기 앞에 두고 우리는 술을 마시기도 자주다. 여기 너무 좋아, 너무 맛있어, 반찬까지 다 맛있어, 그리고 깔끔해! 하며 좋아하지만, 이곳의 치명적 단점이 있었으니, 밥의 양이 적다는 것. 때로는 공기밥을 추가해서 먹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공기밥 두개를 싹싹 비워먹게 되지는 않아서(한숟갈 가량 남기게 된다) 참 이래저래 거시기하다.
어제 점심에도 K 와 이곳에 갔다. 전날 같이 술을 마시고 '내일 점심에 순댓국 먹으러 가자' 말해두었던 터다. 눈누난나 즐겁게 순댓국집에 가 각자의 순댓국을 마주하고, 정식(순대+고기 접시)하나 추가하고, 결국 공기밥도 추가하면서, 우리는 캬~ 소주만 있으면 진짜 딱인데! 하였지만, 평일낮, 우리는 직장인, 우리는 월급쟁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순댓국을 맛있게 먹고 반찬들을 먹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럴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K 와 나는 순댓국을 먹으면서 '아저씨같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뜨거운 국물 먹고 가만 조용하고 싶은데 너무나 저절로 크~ 하게 되어버리는 것. 나도 이거 안하고 싶어 ㅠㅠ 하면서 K에게 말했더니 K 도 그렇다는 거다. 자기도 안하고 싶은데 자꾸 하게 된다고. 나 역시도 의지로 그걸 참아보려고 했지만, 일단 국물이 들어갔다 하면, 크~ 하고 나오는 것이 모든 의지를 다 때려부숴버려. 나는 K 에게, '회사 다니면서 점점 아저씨화 되어가' 라고 말했다.
그렇다.
아저씨화 되어간다.
나는 아저씨가 되고 있다.
지금처럼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서 조신하지 못하게 크~ 하는 것도 그렇고, 술을 마시고나도 어김없이 크~ 하게 되는 거다. 진짜 안하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다. 한 번은 삼겹살 집에서 소주랑 삼겹살 먹는데 직원분이 오셔서는, '너무 맛있게 드셔서 저도 먹고 싶네요' 하신 적도 있다. 제가 … 너무 아저씨 같죠?
게다가 음주 후에 땀흘리기! 이것도 내가 알아버린다.
왜 드라마 보면 전날 과음한 배나온 아저씨들이 다음날 근무시간인데도 싸우나 가서 땀 흠뻑 빼는 장면이 더러 나오지 않나. 나는 싸우나에서 빼진 않지만, 전날 과음하면 땀을 빼야 개운해지는 그 기분을 안다. 그런거 모르고 싶은데 안다. 너무 잘 안다. 남동생 결혼하기 전에 일요일 아침이면, '어제 술마셨으니 땀 빼러 가자' 하고 곧잘 일자산에 가곤 했었다. 하아- 아저씨화 되어간다, 아저씨화. 그 때도 나는 점점 아저씨화 되어간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정말 아저씨가 되었어.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배나온 아저씨들이 전날 과음하고 싸우나에 앉아있는 장면, 그거 성별만 그대로 바꾸면 내 것이 된다. 배 나온 다락방이 전날 과음하고 땀을 …
그러다 문득 '그렇다면 그것이 왜 아저씨'의 특징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아저씨들이 하는 걸 내가 하고 앉았나?
그것은 아저씨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말이냐면, 오랜 직장생활, 반복된 음주, 그리고 반복된 과음은 결국 국물과 소주에서 크~ 를 하게 만들고 결국 땀을 빼게 만든다는 거다. 왜 소위 숙취가 깨기 위해서는 술똥 싸야 한다고 하지 않나. (여러분 알쥬?) 술땀도 흘려야한다. 그러니까 알콜로 지저분해진 나의 모든 배설물들 어떻게든 내보내야 해. 이것은 남자만의 특징이 아니라는 거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야. 여자들도 술 많이 마시면 땀도 흘리고 똥도 싸야되는데, 그간 왜 그것이 아저씨들의 특징처럼 보였느냐, 그건 남자들이 더 많이 직장에 다니면서 술을 마시기 때문이지.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여자들도 직장 다니면서 과음하고 다음날 땀을 뺀다!! 그것은 아저씨들만의 것이 아니야!! (근데 이거 아닌것 같아, 그만해 …)
-어제는 정신없이 바빴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바빴고 야근도 좀 했다. 와 너무 바빴어. 요즘 회사가 큰 변화를 앞두고 있어 너무 정신이 없다. 그와중에 며칠전에는 거래처 들어오라 해 미팅했는데, 어쩌다보니 내가 상석에 앉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상석에 앉는 것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요구사항을 얘기하고 막판에 내가 기한까지 정해주는데, 그 날짜는 … 하고 상대들이 머뭇대는데, '일단 정해두자고요. 변경을 하더라도 일단 날짜를 픽스해놔야 일정을 그에 맞춰 착착 진행할 거 아닙니까!' 했고 그러자 미팅에 참석중인 다른 분들이 맞습니다, 하면서 다들 달력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나만 혼자 여자였다. 어제 임원이 불러 회사 조직 개편 때문에 부른 자리에서 나 혼자 여자였고. 임원이 뭔가 물으셔서 골똘히 생각한 뒤에 '그거 답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생각 좀 해볼게요' 라고 답하고 나서도 그렇고, 일한다는 것이 되게 뿌듯해질 때가 있다. 그 속을 알고 들여다보면 사실 되게 사소하고 별거 아닌, 때로는 우습게 여겨지는 일이라해도, 어느 순간 어떤 대답을 하고 어떤 질문을 하고 그리고 어떤 액션을 취하느냐를 깨달으면서 일하는 나에게 뻑갈 때가 있다. 졸라 멋져 …
매일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하루종일 앉아있다 퇴근하는 노동이 지겹다고, 이제 정말 이거 그만하고 싶다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생각하지만, 그러나 내가 지금 뭔가 잘하고 있다, 좀 짱인데? 이런 순간 역시, 일이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회사 구조가 달라지면서 내 일이 더 많아질 것이고, 그리고 회사 눈치가 나에게 좀 더 막강한 책임을 지우려고 하는 것 같은데, 지금 당장 그 일이 닥치기 전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내 자존감은 내가 벌어들이는 돈이 지켜주는 것이며 동시에 내가 순간순간 내리는 결정들과 내가 하는 방어들이 지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도망치고 싶은 건 사실이다. 도망치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회사를 오는 게 아니라 집 안에서 창밖을 보며 커피나 마시고 싶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그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 커피를 사기 위해서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 크~ 술을 안마실 수가 없고, 아저씨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며칠전에 SNS 를 통해 <전지적 참견시점>에서 유병재와 이국주가 러브라인을 탔다는 걸 봤더랬다. 유병재가 이국주에게 플러팅을 했다는데, 나 갑자기 플러팅이 너무 보고 싶은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아 플러팅 궁금하다, 그러고보니 내가 플러팅과 거리가 먼 삶을 그동안 살았군, 후훗, 하면서, 그렇다면 남의 플러팅이나 볼까, 하고 전지적 참견시점을 플레이했다. 유병재가 이국주의 어머님 별장에 찾아갔는데, 찾아가면서 자기 고향 특산물인 젓갈 셋트를 사갔더라. 여튼 K 는 '그게 플러팅이라기엔 좀 약하지 않아요?' 할 정도로 뭐 대단한 플러팅은 나온게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 호감있는 사람들 사이의 플러팅 재미있지, 하면서 보다가, 아 그러나 나란 여자 어쩔 수 없어, 어리굴젓에 꽂혀버렸다.
그러니까 유병재는 양세형과 함께 이국주 어머님 별장을 방문했고, 거기서 별장에 평상을 조립해준 뒤에 다같이 그 평상 위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 거다. 이 때 유병재가 사온 젓갈을 조금씩 맛보기로 했는데, 양세형이 어리굴젓을 먹더니 너무 맛있다고 그걸 흡입하는 거다. 보는 입장에서 '아니 선물은 이국주 어머님께 들어온건데 자기가 저렇게 다 먹어버리면 실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리굴젓에 푹 빠져서 먹고 먹고 또 먹는거다.
그러자, 얼마나 맛있길래 저렇게 정신없이 먹을까, 어리굴젓 … 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굴… 내가 정말로 안좋아하는 먹거리인데 …
그렇다. 나는 굴을 잘 못먹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안된다. 남들이 아무리 신선하다고 해도 나는 비리기만 하다. 향도 싫고 맛을 느낄 수 없으며 식감도 싫다. 굴을 익히면 어떠냐고? 더 싫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굴국밥 굴전 다 싫다. 안먹는다. 나는 조개 미역국도 안먹는다. 조개맛이 느껴지면 증맬루 별루가 되어버려. 조개류와 새우류에 알러지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심한 건 아니고 몸 상태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데, 알러지 때문이 아니라 그냥 싫다. 내 생각엔 내 몸에 잘 안받는 줄 알고 내가 싫어하나 싶다. 그래서 내가 먹고 싶지 않은 것중의 하나가 굴인데, 그런데 어리굴젓 완전 흡입하는 양세형을 보니 어디, 나도 한 번? 이렇게 되어버리는거다. 흐음.
그렇지만 아빠도 젓갈을 별로 안좋아하시고, 내가 딱 하나만 먹어보고 싶은데, 샀다가 다 남기면 … 그렇게 고민고민을 하게된거다. 이러다 헤밍웨이 반복 아닐까 …
헤밍웨이의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헤밍웨이가 굴에 화이트 와인을 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약한 금속 맛과 함께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생굴을 먹으면서 금속 맛이 차가운 백포도주에 씻겨 나가고, 혀끝에 남는 바다 향기와 물기를 많이 머금은 굴의 질감이 주는 여운을 즐기는 동안, 그리고 굴 껍데기에 담긴 신선한 즙을 마시고 나서 상쾌한 백포도주로 입을 헹구는 동안, 나는 공허감을 털어 버리고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p.15)
내가 저 부분 읽고 완전 미치게 굴을 먹고 싶어서, 반드시 굴에 화이트와인을 먹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더랬다. 어떡하지, 이거 이렇게 먹고 싶은데! 그러자 친구들이 그럼 먹자고 했다. 그래서 당시에 무려 통영까지 가서! 시장에 가 직접 굴을 사고! 그리고 화이트와인과 마셨는데, 아 헤밍웨이여 … 나는 한국의 다락방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굴 한개 먹었나 두 개 먹었나. 난 역시 굴 안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먀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된것이다. 나 때문에 굴 샀지만 내가 굴을 잘 안먹는 … 친구들아, 그 일에 대해 여전히 두고두고 감사해!!
아무튼 이런 전력이 있으므로, 내가 어리굴젓을?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
그래서 가장 작은 걸로 사서 하나 먹어볼까, 엄마 드신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엄마도 잘 안드시면 어리굴젓 좋아한다는 K 줄까 … 막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K 와의 술자리에서 이 얘길 하니 K 가 빵터져서,
"부장님 지금 플러팅 보고 싶어 전참시 봤다고 애기하셔서 플러팅 얘기 나올줄 알았더니 어리굴젓 얘기만 하고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는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면서 이영자 같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참시에서 남들이 다 유병재랑 이국주 엮으려는데 이영자 거기에 별 관심이 없고 어리굴젓과 이국주 어머님이 만드신 허파볶음 얘기만 하는거다. 다음엔 이국주가 유병재네 집에 가면 어떻겠냐는 얘기 멤버들이 하니까, 이영자는 또 어김없이 유병재네 어머님이 잘하시는 요리를 대며, 그것과 허파볶음이 아주 잘어울릴거라고. 로맨스에 관심 1도 없으신 분 ㅋㅋ 멤버들이 왜 먹는 얘기만 하시냐니까, 사랑은 별거 아니라고 끝나버리는 거라고 하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도 내가 이영자인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플러팅 보려고 틀었다가 어리굴젓에 꽂혀버린 나여 …
오늘 출근길에 엄마는 "그래서 어리굴젓 주문했어?" 물으셨다. 내 갈등을 말씀드렸던 바다.
"아니."
"제일 작은 걸로 시켜봐. 그리고 하나만 먹어보고. 나머지 엄마가 먹을게."
나는 알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어리굴젓을 딱 하나만 먹어보고 싶기에 주문을 망설이고 있다. 아, 어리굴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