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좋아했다. 오랜 벗이 좋아하는 작품이라 했는데 처음 읽었을 당시에는 너무 부담스러웠더랬다. 이렇게까지 솔직할 일인가, 나는 별로… 했다가, 아마도 2015년? 2016년쯤? 그때 다시 읽었는데, 그 때 읽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은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이 되어 있었다. 당시 뜨거운 연애를 하고 있던 나로서는 아니 에르노의 모든 문장들을 내가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겪은 감정을 아니 에르노가 표현해줬네!
어린 나의 조카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사랑을 한다면, 그 때 아니 에르노의 책을 건네야지 라고 내심 생각도 했더랬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얘기를 다룬 책들도 좋아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니 에르노의 연애 혹은 섹스 얘기가 좀 시큰둥해졌다. 이렇게까지 남자를 좋아할 일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보는 비판 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내 기질 자체가 연애나 섹스에 과도하게 몰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아니 에르노 책은 이제 그만 읽어도 되겠다, 할 참에 아니 에르노가 무려 '젊은 남자'라는 제목의 책을 … 젊은 남자 라니. 이거… 비슷한 제목의 한국 영화 있지 않았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정재 이미숙 주연의 영화 제목이 젊은 남자인줄 알고 지금 찾아 봤더니 아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제목 <정사>였네.
《젊은 남자》에서 아니 에르노, 글쓴이이자 화자는 '50대의 여성' 이다. 그 여성이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편지를 썼던 20대 초반의 대학생을 만나 섹스를 하고 연애를 한다. 30년의 나이차가 그들에게 있다. 이 젊은 남자는 애인과 동거를 하면서도 오십대 연상의 여인을 계속해서 만나고 섹스를 한다. 어느 순간 연인과 이별하고 이제는 주말이면 연상의 여인이 남자의 집에 찾아간다. 그들은 함께 여행도 하고 그들이 연인처럼 보이는 걸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도 아니 에르노는 알바야~~ 한다. 젊은 여자와 늙은 남자 커플들은 수두룩하고 잘 보이는데 나라고 수치스러워할게 뭐람? 나 역시 동의한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젊고 예쁜 여자를 연인으로 혹은 아내로 둔 늙은 남자들은 부끄러워하거나 챙피해하기는 커녕 트로피삼아 어깨 힘 뽝주고 다니지 않나. 이것이 나의 능력이다!! 윽- 웩- 세상에 그런 남자 수두룩한데 뭐 아니 에르노라고 젊은 남자 애인으로 데리고 다니지 못할게 뭐야 마음대로 하삼~~
그러다가 만약 내가 누가 봐도 확연히 나이차이 나는 남자와 연인이 된다면, 나는 자연스레 거리를 활보할 것인가… 를 생각해봤는데, 할 것 같다. 못할게 뭐있어. 어쩌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어머 여자 나이가 훨씬 많은 것 같은데, 여자가 돈이 많은가?' 어쩌고 쑤군댄다 하더라도,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을 것 같다. 젊고 잘생기고 섹스 잘하는 남자랑 내가 다닌다면, 그런데 내가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탈코 ㅋ-, 제삼자야 쑥덕댄다 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왜냐면 나의 잘남은 화장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꾸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몸매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그걸 알고, 그러므로 당당하고, 꾸밈노동을 전혀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내 옆의 남자가 젊고 잘생겼다? 아니면 내 옆의 남자가 돈이 많다? 그가 어떤 외적인 조건을 가졌든, 그가 나랑 연인이라면, 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나를 선택하는 눈을 가졌다는 것. 캬- 그러니 그런 놈이 또 상대적으로 나이든 여자랑 다닌다고 부끄러워할 건 또 뭐람? 나를 좋아하는 젊은 남자라면 나랑 다닌다고 나의 나이나 주름살에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과 확신이 내게는 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꾸밈 노동, 개나 줘버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쁘게 보이기 위한, 혹은 예쁘게 되기 위한 모든 과정을 거부한다. 예쁨에 가치를 두는 것을 거부한다. 그건 그거고,
아아… 50대에 젊은 남자랑 이렇게 막 섹스가 가능하다니… 이건 아니 에르노니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니 에르노만 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나는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는 섹스를 '생각만 해도' 육체적 피로가 찾아와 버렸는데… 윽 안돼안돼 개피곤… 그런데 젊은 남자랑 툭하면 섹스하고 여행가고 그러는 걸 보면 어떤 연애와 섹스에 대한 열정만큼은 대단…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다. 바로 이 인용문으로부터 파생되어온 것인데,
우리 관계는 상호 이익의 관점에서 고려할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쾌락을 주었고, 다시 살아나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살아나게 해주었다. 내가 그의 여행 경비를 대고, 내게 시간을 덜 낼까봐 일을 찾지 말라고 했던 것은 그 거래의 규칙들을 정하는 이가 나인 만큼 더욱 공정한 계약이자 좋은 거래처럼 여겨졌다. 나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고, 지배의 무기들을 사용했다. -p.27
젊은 여성이 나이든 남자들을 만날 때 많은 경우 손가락질 받는다. 돈 보고 결혼했다는 식으로. 그런데 돈 보고 결혼하면 안되나? 나는 돈 없는데 너는 돈이 있고 그 돈을 나에게 쓰겠다면 뭐 할 수도 있는거 아닌가? 상대도 어차피 이 '젊은' '여성'으로부터 뭔가를 얻을 거 아녀? 아니 에르노가 말한 그러므로 '상호 이익의 관점'은 사실 대부분의 연인에게 있는 거 아닌가? 그것이 정서적 안정이든 육체적 쾌락이든 우리는 서로 뭔가를 주고 받으니까 관계를 유지하는 거 아닌가. 아니 에르노는 젊은 남자로부터 육체적 쾌락을 얻었고, 그를 만나는 모든 비용을 본인이 감당한다.
일전에 제니퍼 로페즈가 연하의 남자친구에게 매달 몇천만원의 용돈을 준다는 게 기사화되어 나온 적이 있었다. 제니퍼 로페즈는 엄청 돈이 많고 남자는 연하이고… 아마 그들 사이에도 어떤 상호 이익적 관점이 존재했을 것이다. 내가 연하의 남자와 연애할 당시 상대가 제니퍼 로페즈 얘기를 하며 '제니퍼 로페즈는 용돈으로 몇천만원씩 준다는데!!' 막 이러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당시의 내 애인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도 근근이 먹고 사는 사람이라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연애를 안하면 안했지 용돈 못주는 사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넘나 웃기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내가 저 인용문에서 꽂힌 건 아니 에르노가 '젊은' 애인을 만나는 비용을 자신이 전부 부담했다는 게 아니라,
'내게 시간을 덜 낼까봐'
였다.
그러니까 상대에게 일을 찾지 말라, 즉 돈을 벌지 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네가 안벌어도 내게 돈이 있다'보다 우선하는 게 있었다는 것이다.
내게 시간을 덜 낼까봐.
나는 이것이,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낯설었고, 앞으로도 별로 갖고 싶지 않은 생각이고, 다소 징그러웠다. '내게 시간을 덜 낼까봐' 라는 우려에서 오는 '내가 돈 쓸게'는, 역시나 집착으로 보이는 거다.
나는 내 연인이든 아니든, 내 친구든 아니든, 자기몫의 노동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내가 돈이 많다고 해도, 내 애인이 나보다 서른살 어려도-서른살 어리면 미성년자니까 스무살이라고 하자- 스무살 어려도-스무살도 너무 징그럽다 열 살로 하자- 열살이 어린 젊은 남자라고 해도, 그 남자가 나에게 미친 쾌락을 준다고 해도, 그 남자가 일을 하기를 바란다. 재벌이 되라는 것도 아니고 떼돈을 벌라는 것도 아니고, 여하튼 노동을 하고 돈을 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가진 고유한 재능,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뭐가 됐든, 노동하기를 바란다. 나를 만나 대화를 하고 맛있는 걸 먹고 섹스를 하는 일들은 그 노동들의 앞과 뒤, 어찌됐든 노동하지 않는 시간에 나를 만나기를 원한다. 오늘 노동 피곤해? 그러면 다음에 만나. 나는 이렇게 셋팅되어 있는 사람인데, 그런데 '나를 덜 만날까봐' 일하지마 라고 한다니! 나는 언제나 자주 만나자고 할까봐 신경이 곤두서는 사람인데. 이 감각-내게 시간을 덜 낼까봐-은 너무 낯선 한편, 내가 만나는 상대가 내게 그런 마음을 품는다면 도망치고 싶을 것 같다. 제발 나를 더 만나려고 하지도 말고 더 다가오지도 말고 집착좀 하지마라 ㅠㅠ
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집착 좀 안했으면 좋겠다. 너무 좋아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그거 진짜 싫어 정말 ㅠㅠ
너 나 덜 만나면 안되니까 일하지마, 라니. ㅠㅠ 너무 싫어 ㅠㅠ
그리고,
내가 노동에 너무 집중하나, 노동에 집착하나? 생각하다가, 오늘 아침 이른 출근길에 갑자기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다. 내가 나를 만나는 것보다 너의 노동에 집중하라고 하는 것, 내게 시간을 덜 낼까봐 전혀 염려하지 않는 것, 여행경비와 데이트비용과 너의 노동하지 않음에 치러야할 모든 비용까지 대겠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이 모든것은 어쩌면 내가 근근이 먹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 즉, 나는 아니 에르노만큼의 충분한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데에서 기인한게 아닌가 싶은거다. 그정도의 돈을 써도 언제나 통장에 잔고가 있다면, 나도 아니 에르노처럼 하지 않을까? 뭐 그건 아닐 것 같지만, 너 노동하지마 나한테만 신경써 , 라고 말할 때에는 그만큼의 충분한 경제적 능력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원하는 모든 소비를 해도 통장에 언제나 잔고가 있는 삶을 산다면, 굳이 노동할 필요가 있는가...
뭐, 그래도 나는 하기는 할 것 같지만(몸이 고생을 기억해) .
아, 아니 에르노에겐 충분한 돈이 있다!! 나는 그만큼의 돈이 없어!!
이런 깨달음이 오늘 출근하는 내 뒤통수를 갈긴 것이다!!!!!!!!!!!!
아무튼 나는 오늘도 근근이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겠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