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은 아빠 생일 27일은 엄마 생일이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 여동생네 집으로 갔다. 여동생은 엄마의 생일로 모이는 것이니 파티 분위기를 제대로 내야 한다며 음식을 준비했다. 금요일 밤부터 육전과 꽂이를 만들고 토요일 오전엔 잡채도 해놓았다. 제부는 미역국을 끓이고 수육을 만들었다. 토요일, 안산에 도착한 엄마와 나 그리고 남동생은 조카들을 데리고 마트에 갔다. 조카들이 원하는 게임 놀이를 사주고 과자를 사줬다. 아가 조카 입힐 내복도 몇 벌 샀다. 엄마랑 나는 산책을 하자며 걷기를 택했고 남동생은 조카들을 데리고 먼저 짐을 들고 들어갔다. 엄마와 나는 일단 제과점에 가 숫자초를 사기로 했다. 마트의 제과점엔 없더라. 나는 SPC 불매를 한 지 몇 개월 된 터라 파리바게트는 안가고 싶었는데, 그 동네에 숫자초를 살 수 있는 제과점이 거기밖에 없는거다. 하는수없지. 우리는 각자 다른 숫자로 네 개를 사야했는데, 그렇게 파리바게트에 도착해 숫자초를 사려고 보니 한 개에 800원 씩이나 하더라. 아빠 엄마의 생일파티를 할 거라 초는 반드시 필요했는데 800*4=3,200원.. 아무리 생각해도 800원은 너무 비싸. 그래도 초는 있어야 되는데... 하고 망설였는데 엄마는 '다이소에서는 쌀텐데' 하시는 거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엄마에게 일단 나가자고 했다. 우리는 초를 사지 않고 제과점 밖으로 나왔다.
어디에나 다이소는 있지. 나는 지도를 눌렀다. 있긴 했는데 거리가 멀었다. 엄마는 길을 안다고 하셨다. 지도 없이 갈 수 있겠네? 엄마는 그렇다고 했다. 엄마,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음.. 30분? 엄마 걸음으로는 20분? 좋아, 일단 근처 천냥백화점 먼저 가보자. 거기에 갔는데 숫자초는 없다고 했다. 하는수없이 우리는 다이소에 가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 공원 걷기로 했던 거니까 대신 다이소를 갔다오자, 엄마랑 나는 그렇게 쇼부를 쳤다.
나는 다이소를 싫어한다. 다이소의 그 너무나 환한 분위기도 싫고 그 저렴한 물건들이 싫다. 나는 가급적 다이소 물건을 사고 싶지 않다. 그게 뭐가 됐든 가급적 다이소가 아닌 곳에서 사고 싶다. 멀티탭도, 마스크도, 포스트잇도, 과자도. 나는 다이소의 물건들을 사기가 싫다. 그렇지만 숫자초라면 얘기가 다르다. 일단 가기 전에 다이소에 숫자초를 파는지 검색 먼저 해보자 싶어 했더니 팔더라. 모든 숫자가 한 개씩 들어간 초셋트가 1,000원이었다. 3,200원에 살 수 있는 걸 1,000원에 사면서 게다가 우리가 걷고자 하는 목표까지 해낼 수 있을 터였다. 엄마와 나는 걷기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걸었다.
엄마의 걸음은 빨라서 엄마한테 좀 천천히 걷자고 말하고 한참을 걸어 드디어 다이소에 도착했다. 다이소에 사람이 너무 많았고 그 특유의 너무나 하얗고 환한 분위기가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고, 숫자초를 찾는데 보이질 않아 직원에게 물어보니 파티 코너로 나를 안내했다. 다행히 천원에 숫자초를 사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초를 사오고나자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고, 우리가 여섯시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엄마, 우리 좀 빨리 걸어야겠어, 다들 우리를 기다릴텐데.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엄마 걸음 속도로 걸으라 했다. 내가 맞출게, 하고. 나는 엄마 걸음을 맞추기 위해 뛰다가 걷다가 뛰다가 걷다가 했다. 다섯시 반쯤 되었었고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붉었고 아름다웠다. 아, 너무 좋네. 안산은 해지는 풍경이 유독 아름다운 곳인가. 고층 아파트가 이렇게나 많은데 그 아파트들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런데 날은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볼은 시렵고 빨리 걷느라 몸은 열이 났다. 저녁 되니까 추워지네, 엄마랑 나는 더 속도를 냈다. 어느 순간, 나는 웃기 시작했다.
"엄마, 그거 알아? 이렇게 추운데 열심히 걷다 보니까 이유를 알 수 없는 웃음이 나는거? 꼭 내가 미친사람 같은 그런 웃음이 나."
엄마는 안다고 하시면서 같이 웃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웃으면서 빨리 걸었다. 나는 간혹 느리게 뛰기도 했다. 한여름 땡볕에 걸으면서도 미친사람 같은 웃음이 나곤 했는데, 바로 그 순간 그 미친것같은 웃음이 또 나와서, 이런게 러너스 하이.. 뭐 그런거랑 같은걸까? 생각도 했다. 그렇게 먼 길을 20분만에 걸어 집에 도착하니 내 양 볼이 빨개져 있었다. 식구들 모두 내 볼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빠께 영상통화를 했다. 아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병원에 계신 아빠는 당신 생일 전에 퇴원해 함께 파티하는 걸 바라셨는데, 아빠의 퇴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난 주엔 연속 이틀간 수혈도 받으셔야 했다. 수혈에 우리 가족이 얼마나 놀랐는지! 아빠가 낫고 있긴 한건지 초조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의료진과 통화를 해보면 신체적인 상태는 나아지고 있노라 했다. 그런데 아빠는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시고 무엇보다 자꾸 나쁜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다.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게 해드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케익에 초를 꽂아놓고 모든 식구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마치자 아빠가 우셨다. 아빠가 우는 걸 보니까 아빠 왜울어, 하면서 나도 눈물이 났고, 여동생도 울먹였고, 엄마도 울먹였고, 제부도 '어휴 나는 왜 눈물이 나' 하면서 눈물을 닦았다. 지금은 이렇게 화면으로 축하하지만 낫고 오면 제대로 다시 파티를 하자고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했다. 통화가 더 길어지면 모두 눈물바다가 될 것 같아 그쯤에서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새로운 케익을 또 꺼내어 거기엔 엄마 생일 초를 꽂았다. 모든 식구들이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고 노래를 불렀다. 엄마는 초를 끄셨다. 그 순간, 나는 '지금 이순간은 엄마가 참 행복하겠다' 생각했다. 이 순간 만큼은 엄마가 다른 걱정 없이 행복하겠다, 하는. 촛불을 끈 엄마는 고맙다고 음식하느라 수고했다고 하시며 우리와 같이 여동생 부부가 준비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맛있게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웃다가 남동생과 나는 조카들과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오목을 두고 알까기를 했다. 원숭이 떨어뜨리기도 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게임도 했다. 밤이 깊어가는데 조카들의 웃음 소리가 너무 커서 여동생은 이러다 민원 들어온다고 연신 우리를 말렸다.
다음날 집에 가서는 단톡방에서 어제 조카들하고 함께 놀아서 너무 즐거웠어, 조카들도 좋았겠지, 했더니 여동생은 안그래도 우리 가고 나서 다음엔 어떤 게임을 하자며서 의논하더라 했다. 그리고 우리 잃어버린 트럼프 카드도 찾아보자, 했다고. 나는 몇해전에 트럼프 카드로 도둑찾기 하는 걸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어 곧잘 즐기곤 했었는데, 이번에 아이들이 카드를 어디다 놨는지 못찾는거다. 아이들에게도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어제 저녁, 나는 밀푀유 나베를 끓여 엄마와 와인을 한 잔 마시면서 어제 좋았지,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 좋았던 시간들은 그런 식인것 같다. 어떤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사소한 순간이라도 그저 함께 하는 것.
지난주엔 정말 많은 책이 도착했고 책탑이 어마어마해졌다.
《디어 마이 그래비티》, 《한나 아렌트의 작은 극장》은 읽고 백자평 썼다.
《한나 아렌트 철학 전기》는 무려 다정한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책. 책의 뽀대가 상당하다. 단독 촬영을 해보았다.
진짜 있어보이는 책이다. 이걸 나의 한나 아렌트 책장 칸에 꽂아 보았다. 이 책을 꽂는 바람에 그 칸에서 무언가 빼야했고, 두 권은 페데리치 안녕, 굿바이..
아아.. 너무 근사하지 않나요. 이걸 꽂아두고 너무 좋아서 선물해준 친구에게 행복하다고 말했다. 행복이 절로 나오는 그림 아닌가.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행복하지만, 부족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까지 꽂아두면 더 근사할 것 같지 않나욤? 그래서 사야겠다. ㅋㅋ 한 칸을 그냥 죄다 한나 아렌트로 만들어야겠어. 에바 일루즈와 마사 누스바움, 다른 칸으로 옮겨줄게요. 그런데 페데리치.. 그 다음에 어디다 뒀지? 흐음. 저기 어딘가에 있을 거다. 여하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까지 꽂아두면... 전체주의의 기원도....인간의 조건도................ 아아, 나의 욕심이여!! 그런데 정말 뽀대나겠쥬? 뽀대에 살고 뽀대에 계속 살고...
《페미니즘 이론과 비평》은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1월의 도서라 샀다. 근데 사놓고 보니 또 비평인거라.. 다락방의 미친 여자 를 2개월간 읽었는데 또 비평이라니.. 순서를 좀 바꿀까, 하다가 너무 임박하여 바꾸면 대혼란이 일어날 것 같아서 그냥 가는 걸로. 이건 제가 미리 더 넓게 살피지 못해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 미안합니다...
그래도 읽어봅시다! 목차를 보니 읽은 책이 몇 권 보이네요. 후훗.
《걷기의 인문학》은 솔닛이 사고 싶었다기 보다는 '걷기'가 사고 싶었다. 나는 걷기가 너무 좋고 더 좋아지고 그래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 편하다. '걷자'고 했을 때 기꺼이 그러자, 고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런데 나는 나만큼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실 잘 만나지 못해서.. 주로 혼자 걷습니다. 그런데 혼자 걷는 거 너무 또 좋다. 걸을 때 무한히 펼쳐지는 나의 사고. 나는 걸으면서 머릿속으로 글을 쓰는것 같다. 그래서 걷기에 대해 누군가 해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여러 책을 놓고 고민하다가 솔닛으로 골랐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책과 내적 경쟁하다 솔닛으로 결정! 그런데.. 그냥 걷기 예찬도 살까? 흐음..
《피가 흐르는 곳에》는 오랜만에 스티븐 킹 읽고 싶어서 샀다. 그런데 사서 꽂아두려다 보니 사놓고 안읽은 스티븐 킹이 좀 많길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괜한 짓을 했구나 돈지랄 했어 싶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 뭔가 읽고 싶다면 살 생각을 말고 책장을 먼저 살펴보도록 해, 나여..
《8개의 철학 지도》는 다정한 알라디너로부터 선물 받았다.
나는 도움을 받기 위해 친구를 사귀지는 않는다. 그러나 친구를 사귀다 보면 도움을 받게 된다. 8개의 철학 지도라는 책은 내가 존재도 몰랐던 책인데, 그런데 받고 나니 너무 좋은 거다. 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모르고 지나갔을 것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너무 짜릿해지는 거다. 크- 너무 좋지 않나요? 행복은 그런데에서도 온다.
《발트3국》은 최근에 에스토니아 가고 싶어서.. 사봤다. 나란 사람...
《천재를 키운 여자들》은 품절도서인데 중고에 떳길래 잽싸게 득했다.
《언어가 삶이 될 때》는 '언어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던 터라 다른 사람이 언어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어 샀다. 정확히는 언어 라기 보다는 언어학 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는 구매자평 썼다. 금세 읽히는 책이다.
《트래블로그 발트3국》은 위에 쓴 것처럼 에스토니아 가보고 싶어서 샀다. 주말에 검색해봤더니 에스토니아는 직항이 없더라. 설연휴는 나흘인데 오며가며 하루씩 제하고 나면 고작 이틀을 머물게 될 수 있을텐데, 음... 이건 좀 더 생각해보자. 에스토니아 가보고 싶네요.
나는 여행 프로그램 보는 걸 좋아하고, 보면서 와 세상에 저런 데가 있네, 저런 걸 눈앞에서 실제로 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같은 걸 곧잘 생각하고 그래서 '그러면 내가 직접 가보자!' 하게 되는 거다. 여행을 떠나는 가장 편한 방법은 혼자 가는 거다. 일정과 속도와 입맛과 목적을 모두 다른 사람과 맞추는 것은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곳에 내가 원하는 시간에 가서 내가 원하는 속도로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혼자여야 한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러다가도 어느 여행지에 대해 보노라면 '그런데 저기만큼은 누군가와 함께 가고 싶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대표적 여행지가 아이슬란드 이다. 아이슬란드 만큼은 내가 혼자 가고 싶지가 않다. 아이슬란드는 혼자 가고 싶지 않고, 그런데 같이 갈 사람을 구할 수 없다면, 그러면 나는 평생 아이슬란드를 못가는가? 라는 물음이 이내 찾아들고, 그러면 '그건 안되지..'가 되어버려, 결국은 아마 또 혼자가 되지 않을까.. 하하하하하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은 친구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시 몇 편을 소개했는데 좋아서 오랜만에 떨리는 마음으로 구매한 시집이다. 어쩐지 아주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키스할 때 꼭 눈을 감는 건 아니다. 다들 그렇지 않나요?
《앰》은 킴 투이의 신간이다. 이미 킴 투이의 다른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번 책도 마땅히 사야했다. 그렇게 나의 킴 투이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현재진행중. 두둥-
베트남에 가서 베트남어로 쓰여진 킴 투이를 찾아보고 싶다. 정작 킴 투이는 베트남어로 쓴 게 아니지만..
아이고 빠뜨릴 뻔했네.
《벗겨진 베일》도 다정한 알라디너로부터 선물 받았다.
이 책을 사기가 망설여진다는 나의 글에 후다닥 선물해주신 것.
아.. 인생.. 내가 겁나 매력적인 존재임에는 틀림없는 듯? ㅋㅋ
워터프루프 북이라고 해서 물 한 번 끼얹어 볼까 하다가 그러진 않았다. ㅋㅋ
아침이 좋다.
이른 아침이 좋다.
오늘도 사무실에 도착해 정원 문을 열고 나가 해가 떠오르는 아침을 맞이하는 게 좋았다.
아, 나는 이게 진짜 너무 좋아! 했다.
어떤 것들은 그 존재만으로 기쁨과 행복을 준다.
내겐 책장에 꽂힌 책들이 그렇고
아침이 꼭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