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먹고 시장을 한바퀴 돌고 오려고 집을 나섰는데, 핸드폰에 이어폰을 꽂아보니 내가 재생했던 음악이 자동으로 화면에 떴다. 그 노래는 '수지'의 <yes no maybe>였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은 기억이 없는데 이 노래가 뜨는 걸 보면, 아마도 금요일에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들었던 노래가 아닌가 싶다. 그 날 여자 둘이서 소주 네 병을 짧은 시간안에 마셔버리고 기억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는데, 아마도 그 사라진 동안에 재생해서 들었던 음악인 것 같다. 그래서, 시장을 돌면서 그 노래를 다시 들었다.
오랜만에 들으니 첫 부분의 가사가 귀에 확 꽂혔다. 어쩌면 이 가사 때문에 나는 이 노래를 폰에 넣고 다니는건지도 모르겠다.
받지마 알잖아
목소릴 들으면
분명히 내 맘이
또 다시 흔들려
크- 진짜 명가사다. 다들 살면서 저런 일을 경험해보지 않았을까. 목소리만 들어도 내가 흔들려버리는 것.
내게도 똑같이 저런 일이 있었다. 물론 수지와 나의 차이라면, 수지는 '받지마' 라고 했지만 나는 고민없이 받아버렸다는 것 ㅋㅋㅋㅋㅋ 아니, 나는 그런데 흔들릴지 모르고 받았는데 받으니까 흔들렸다. 그래서 수지의 저 노래를 들을 때, 맞아, 그러니까, 흔들릴 줄 알았으면 받지 말았어야 했던건데.. 라고 뒤늦게 깨달아버렸달까. 그러나 그 날 받았던 내게 후회는 없고 다시 시간을 돌려도 나는 기어코 받고야 말것이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내가 안녕을 말했더랬다. 그와의 관계를 끊지 않는게 내가 가장 원하는 바였지만 끊어내지 않는다면 내가 더 힘들 것이었다. 내가 나를 존중한다면, 내가 나를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그에게 안녕을 고하는 일이었던 거다. 내가 나를 위해서는 그에게 안녕을 말하는 게 맞아. 안녕을 말하면 아프겠지만 안녕을 말하지 않고 계속 그를 붙잡고 있다면 아마도 더 아플거야. 이만큼 아프냐 이거보다 더 아프냐 중에 선택한다면, 이만큼 아픈게 낫다. 나를 지키자, 라고 생각하고 나는 그에게 안녕을 말했고,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남동생을 끌어안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더랬다. 그렇게 대성통곡을 하고 그를 털어내자, 여기서 손을 놓는게 맞는거다 나를 다독이며 그렇게 지내고 있었는데,
일주일이었나 열흘이었나, 며칠 뒤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니!! 우리 이제 연락하지 않기로 했는데!! 라는 생각도 잠시, 나는 끊어질새라 얼른 그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를 통해 건너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데, 아, 안되겠다, 안되겠어,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어, 나는 안되겠다, 그냥 그를 받아들이자, 그리고 더 아픈걸 선택하자. 그와 안녕하고 이만큼 아프느니 그와 안녕하지 않고 차라리 더 아프자, 나는 이제 그에게 안녕을 말할 수 없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에게 어떻게 안녕을 말해, 끝장이다, 하고 무너져버렸던 것이다. 아아.. 그래서 수지의 저 노래만 들으면 어김없이 그 오후의 통화가 생각난다. 아아, 나는 틀렸어, 끝장이야, 했던 그 때가. 크- 아니, 금요일에 왜 저 노래 들었지?
금요일에는 거래증권사 부장님과 술을 마셨다. 진작부터 마시자고 내게 청했었는데 코로나 거리두기로 인해 미뤄오던 터였다. 막상 만나고 보니 부장님은 3월에 그리고 나는 4월에 코로나를 앓았더라. 부장님은 나보다 나이가 적었는데 연신 내게 예전부터 꼭 만나고 싶었다면서 만나고나서도 나를 너무 좋아해주셨다. 그 때 나눈 이야기들을 여기에 다 적을 순 없지만, 나는 그 만남이 있고난 후 내가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 자꾸 생각해보게 됐다. 20년 이상 직장일을 하면서 아주 자주, 내가 하는 일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에 대해 생각했었고, 결국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때면, 역시 언젠가 이 일은 그만둬야 할것이고, 나는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는 쪽으로 가야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 지글러와 반다나 시바를 읽곤 했던 거였다. 나는 좀 더 나은 세상, 인간들이 덜 아프고 덜 고통스러운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금요일의 부장님도 그렇고 또 주변 젊은 여성들도 그렇고, 이렇게 오래 일해오는 내가, 여기서 단단히 자리하고 있는 내가, 그 존재 자체로 힘이 되고 있다고 얘기한다. 나는 그저 보통의 학교를 나와 보통의 직장을 다니는 보통의 사람일 뿐인데, 나보다 젊은 여성들, 특히나 일하는 여성들이 보기에는, 그저 존재 자체로 힘이 되는 멋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내게 어김없이 말로 표현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한편, 내가 더 위로 올라갈 수 있기를 바랐다. 임원이 되어서 지탱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멋있어지려고 애썼던 사람도 아니고, 전문직에 종사하지도 않고, 연봉이 많지도 않고, 특출나게 잘난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이 나이에 직장에서 이 정도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젊은 여성들에게 힘이 되고 있었다. 사람마다 타고나는 재능이 있다는데 왜 나는 없는걸까, 에 대해 수천번도 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젊은 여성들이 내게 멋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헤어스타일이 멋있어서도, 옷입는게 멋잇었어도 아니고, 그저 나는 평범한 1인일 뿐인데, 직장생활을 이렇게 하면서 이 자리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러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아주 멋지게 보이고 있었고 힘이 되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성실을 재능이라고 말할 때마다 할 말 없어서 그냥 하는 말 같은 걸로 여겼었는데, 최근에 젊은 여성들과 대화하고 난 뒤에야, 내가 가진 재능은 성실이며, 이 성실이야말로 내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매일 아침 눈뜨고 밥을 먹고 회사를 다니고 틈틈이 책을 읽고 그렇게 차곡차곡 살았는데, 그랬더니 인생의 지금 이 시점에서 널 보면 힘이 난다는 그런 말을 듣게 된것이다. 아, 나는 정말 .. 잘 살아오고 있구나. 늘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나를 묻고 또 묻고 살았는데, 이만큼 지내고보니 의미가 있었다.
며칠전에는 친구의 생일이라 선물을 보냈다. 나는 친구에게 선물을 보내면서 말했다. 나 연봉 조금이지만 올랐거든, 그러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내가 다 사줄게, 라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원래도 나는 돈을 좋아했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거지만, 이빨 없는 외할머니가 드실 수 있는 크리스피크림 도넛을 박스로 사면서, 아 돈 버는 거 진짜 짱이야, 라고 생각했다. 조카들 데리고 오므라이스 먹으러 가면서 돈버는게 최고다! 생각했다. 친구에게 선물을 보내면서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라고 말하면서, 계속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젊은 여성들이 너의 존재 자체가 힘이야, 라고 내게 말하는 걸 들으면서, 역시 계속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심, 작년에 '내년 6월까지만 일하고 때려쳐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더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다. 다른 젊은 여성들에게 보여지기 위해서라도 내가 여기 더 있어야겠구나. 그리고 할머니 살아계실 때 도넛 더 사드려야지. 우리 아가 조카 어제 집에 놀러와서 내 지구본 뽀개먹었는데, 지구본 새로 사놓을려면 돈 벌어야지. 그리고, 책을 사기 위해 돈 벌어야지! 그래, 책을 샀다 이 말씀.
껄껄..
왜요, 제가 여성학 전공자처럼 보이세요? ㅋㅋㅋㅋㅋ 왜요, 제가 도나 해러웨이에 진심인걸로 보이세요? ㅋㅋㅋ 나 어쩌냐 진짜. 아 저 앞에 시나몬롤은 내가 만든건데, 요즘 베이킹 통 안하고 있다가 세상에 시나몬롤 파는 곳을 찾을 수가 없어서 걍 내가 만들었다. 시나몬롤 좋아해서 예전에 스타벅스에서 종종 사먹었는데 거기 단종된 지 오래. 시나몬롤 파는 전문점들이 있긴 하지만 내 주변에 없고, 그렇다면 나는 시나몬롤을 먹지 못한채로 살아야 하는가? 아니다, 내가 만들어 먹으면 된다. 어제 오전 내내 시나몬롤과 치아바타 만들었다. 으하하하하. 구할 수 없으면 만들어먹어라!
도나 해러웨이 파고들기 위해 입문서를 두 권 샀다. 지금 위 링크의 두번째 읽기 시작했는데 얇고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잔뜩 쫄아있었는데 심지어 재미있어. 도나.. 당신은 천재입니까? 라고 계속 감탄하며 읽고 있다.
도나 해러웨이 팟캐 듣다가 허유선의 책 <소크라테스 씨,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요?>도 샀다. <필로소피 유니버스>는 여성 철학자들의 이야기인데, 너무 궁금해서 샀다. 뭐가 됐든 공부를 시작하면 결국 철학으로 닿게 되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얼마전에는 한 친구가 내게 '너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철학자야' 라는 얘기를 해주더라. 어쩌면.. 나는 철학자인가? 여튼 도나 해러웨이를 진심으로 읽어보겠다. 아니, 이제 이 입문서들 읽기 시작하면 본편인 <해러웨이 선언문>은 언제 읽지? 도나 해러웨이, 내가 파고 들겠다. 그리고 나는 이만큼만 읽고 확신하는데, 아무도 내게 비교하라 이르지 않았지만, 나 혼자 알아서 비교해서 말하자면, 버틀러보다 도나 해러웨이가 이천배쯤 좋다. 사실 버틀러는 안좋다.
<섹슈얼리티는 정치학이다> 이런 책, 너무 읽고 싶지 않나? 뜬금없이 인도의 여성들에 대해서도 읽고 싶어서, 언제 읽을지는 모르면서 <인도여성>을 샀다. <권력과 교회>의 저자는 강남순을 비롯한 여러명인데, 어떤 얘기를 하나 궁금하다. 나는 어린시절 오래, 아주 열심히 교회를 다녔던 사람이다. 교회에서 반주도 했었고 주일에는 일찍 가서 주보를 나눠주기도 하고 친구들 전도하기에도 힘을 썼더랬다. 작지 않은 교회였는데 어른들까지 다 나를 알았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시간들이 너무 후회가 되고 내 인생에서 들어내고 싶은 기억이 되어버렸다. 어린아이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뭘 알고서 그렇게 했을까. 그것은 어떤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모습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 게다가 내가 만난 한국남자의 전형은 교회에 다 모여 있었다. 목사, 전도사, 교회오빠 까지. 나는 아주 어릴적부터 교회에서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아이 이면서도 폭력에 노출됐었고, 내가 아니더라도 그 안에서 숱한 권력을 목격했더랬다. 폭력과 권력은 교회와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하고, 그건 그것이 '교회'여서 그런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안다. 어디나, 남자들이 모인 곳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발생했을 뿐. 그럼에도 그 안에 많은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교회와, 종교와, 권력 그리고 폭력의 관계가 궁금하다.
<아이폰을 위해 죽다>는 일전에도 다른 책에서 애플이 동남아 노동자들의 죽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읽은 바 있는데, 이 책의 저자들이 중국인인걸 보면 더 노골적이고 사실적으로 썼을 것 같아 읽어보려고 샀다. 읽어보기도 전부터 한숨이 난다.
그런데, 아마도 밑줄을 박박 그어 읽게될 것 같아 새책으로 주문한 <인도여성>의 상태가 아주 엉망진창이다. 반품되어 온 책을 지하에 처박아뒀다가 누가 산다니까 꺼내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책이 내게 도착했다. 책 상태를 보자.
맨 밑에 저 도장은 또 뭐야. 표지도 색이 바래고 본문도 색이 바랬다. 너무 엉망진창이라서, 이건 중고로 사도 <중>일것 같은데, 어떻게 새책을 주문했는데 이런게 온건지.. 교환하기 넘나 귀찮아서 그냥 읽긴 하겠지만 기분이 매우 더티해졌다. 너무 더티한 책이 와서 기분도 더티.. 바꿀까, 하다가 됐다.. 책은 내용이 중요하다, 하고는 걍 읽을라고 뒀는데, 아니 그런데 너무 엉망인 '새책'이다 ㅠㅠ 중고도 이렇게 오면 빡쳐요, 알라딘아...
정찬은 다른 소설집도 한 권 가지고 있는데 아직 읽지는 않았다. 그런 참에 한 권을 더 사버렸네? 만약 정찬을 읽게 된다면 이 책, <두 생애>를 먼저 읽게 될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 내가 꼭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산 건 아니고, 여튼 좋을 것 같아서 샀다. (응?) 그리고 허연의 산문집은, 내가 허연 시인의 시를 너무 좋아해서 산문 읽어볼라고 샀다. 사실 시인의 산문을 읽고 좋았던 적은 거의 없는데 ㅎㅎㅎㅎㅎ 허연은 좋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감... 안좋으면 어떡하지. 이참에 허연의 시 중 내가 좋아하는 시를 한 편 두고 가겠다.
오십 미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너머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 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페이스풀 플레이스>는 신간 미스테리인데 책을 받아들고 나서 저자 '타나 프렌치'의 이름이 낯익어, '내가 이 작가 책을 뭔가 읽은 것 같은데' 하고 작가소개를 보니 <살인의 숲>을 읽었더라. 아아, 예전에는 작가 이름 딱 대면 작품명이 술술 나왔는데, 이제는 '어어, 이 작가.. 나 읽은 것 같은데..' 이렇게 된 것은.. 나이탓인가?
<하멜른의 유괴마>는 자궁경부암 백신부작용을 다룬 미스테리인데, 얼마전 <면역에 관하여>를 읽은 터라, 어떤 내용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비판적 읽기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다. 사실.. 남동생한테 미스테리 빌려줘야 되는데 최근에 읽은 게 없어서... 얼른 뭐라도 읽어야 된다 ㅋㅋㅋ 페이스풀 플레이스 읽기 시작했다. 껄껄.
지금 또 내게 책들이 오고 있고 그리고 또 사고 싶은 책이 있어서 장바구니에 담고 있다. 아아, 인생이란 무엇인가. 끊임없는 지름의 연속인가.
어제 와인 마시면서 <어쩌다 사장> 김혜수 편을 보는데, 라면과 우동이 먹고싶더라. 점심에 또 우동 먹어야 되나. 하하하하.
도나 해러웨이 뽜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