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원서 읽기 친구들과 오바마는 잠정적으로 보류하기로 했다. 꼭 다시 읽자고, 우리가 완독을 하긴 해야하지 않겠냐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나로서는 오바마를 다시 읽는 시점에서는 이번 기수엔 쉴게, 하고 싶은 마음같은 마음같은 마음... 우리는 다들 너무 읽기 싫어서 괴로워하는 오바마 를 제쳐두고 재미있어 보이는 로맨스 소설을 읽기로 했다. 함께 읽을 책을 정할 때 나 때문에 조건이 좀 더 까다로워지는데, 왜냐하면 나는 반드시 번역서가 있는 원서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원서를 그 자체로 읽을 수준이 안되고, 그래서 반드시 번역서를 본 후에 보기 때문이다. 책의 분위기를 알고 읽는게 더 낫다. 읽으면서 내가 완전히 뜻을 오해할까봐 쫄려.. 여튼 그래서 지금도 번역본을 먼저 훑고 그 후에 원서를 본다.
'조지 실버'의 《12월의 어느 날》을 우리는 함께 읽고 있다. 이제 겨우 2주차이고 그래서 초반을 조금 읽었을 뿐이다. 번역본으로 만난 책의 처음은 비호감이었다. 너무 산만한 느낌이었어.
'로리'는 호텔 프런트에서 근무하느라 크리스마스 즈음에 너무나 너무나 바쁘다. 이제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이하여 고향에 돌아갈 기대를 하며 마지막 근무를 하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탔는데 버스가 완전 만원 버스.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선 비듬이 떨어지고(정말?) 로리가 들고 있는 커피는 다 식었다. 이 소설은 2018년에 출간된 소설이고 작가는 영국 사람. 아직 코로나가 발병하기 전이라서 버스 안에 커피를 들고 탈 수 있었나보다. 그 만원버스 안에 커피라니. 나는 이런거 좀 민폐라고 생각해. 윽.. 어쩌면 주인공이 혼자 나래이션하는 책의 처음 부분에서 주인공의 성격이 나랑 잘 맞지 않아서 나는 이 책이 좀 산만하다, 별로일 것 같다 생각하게 된건지도 모르겠다. '로리'는 '세라'와 룸메이트이자 절친인데 늘 세라의 선택과 성격을 부러워한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로리랑 역시 안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로맨스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내가 그 소설의 등장인물이 되어서 같이 사랑을 해야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로리가 될 수 없다. 나는 어쩐지 세라가 될 것 같다. 원하는 걸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지 알고 그걸 해내는 사람. 자, 그렇지만 다시, 이 책에선 로리가 주인공이다.
그렇게 만원버스에서 고향에 갈 시간만 기다리며 지쳐 있던 로리는 이번에 정차한 역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타기를 기다리면서 바깥을 보다 버스 정류장에서 책을 읽는 남자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에게서 아주 강한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버스에서 내려 그에게 가고 싶다. 너무나 강한 느낌. 그리고 그 역시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을 거라 확신한다. 지금 이 감정, 이 느낌은 쌍방이다! 그녀는 내리고 싶지만 버스 안에 사람이 너무 미어터질 것 같아 버스가 다시 출발하기 전에 내릴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향해 눈빛을 쏜다. 타, 네가 타, 네가 타란 말이야. 남자는 그녀의 눈빛을 느꼈을까, 책을 가방에 넣고는 버스를 탈 채비를 하는데 버스는 출발하고 그들은 멀어진다.
그 후로 로리는 이 남자를 찾는다. 절친이자 룸메인 세라에게 이 일을 얘기한 뒤로 그들은 함께 이 버스보이를 찾는다. 혹시 저 남자일까, 저 남자는 아닐까?
나는 이 부분에서부터 할 말이 많아졌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물론 나는 처음 본 사람에게, 첫눈에 상대에게 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한 순간의 매혹 정도랄까. 그리고 그 한순간의 매혹은 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그 사람을 찾을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그렇게 첫눈에 반한 사람으로부터의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그런 경험 자체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내게 그런 경험이 있을 수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 첫눈에 상대에게 반한 적이 있다. 왜 없겠는가. 그러나 조금만 대화해보면 금세 차가워지게 되는 것이다. 자기 생긴 얼굴만큼의 지성과 감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그래도 얼굴이..'하면서 마음을 주기보다는 '얼굴이 저래봤자..' 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아아, 역시 나는 잘생긴 남자를 만날 수 없는 병에 걸려버린 것..
그러나 로리는 내가 아니고 로리도 내가 아닌 바. 로리는 뭔가 느꼈고 그 사람을 찾고 싶다. 새해 목표의 첫번째가 그 남자를 찾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또 나랑 갈라짐.. 새해 목표 남자찾기... 네.. 그런데 그 찾는게 뭐냐면, 무슨 광고를 한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나다니면서 사람들 얼굴 쳐다보는거다. 세상에. 어느 천년에 찾냐.. 찾긴 찾을 수 있냐. 그걸 찾는다고 할 수 있을까.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가 너무 가득해서 그를 찾지 못한다면 혼자 늙어가게 될거라는 생각도 하고 있다. 그렇게 찾기를 일년여, 이제 그를 포기하고 소개팅도 해보지만 남자들이 다 썽에 차질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무슨 소설인가, 로맨스 소설이다. 소설의 처음에 주인공에게 왜 강력한 만남을 주었는가. 결국 그를 찾게 만들려는 속셈이다. 무릇 이야기란 그렇게 진행되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우리는 이 초반, 그녀가 찾기를 실패하고 포기하게 되는걸 보면서도 그를 만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언제, 어떤 식으로 만나느냐는 우리가 예상할 수 없어도, 그녀와 그는 반드시 만날것이다, 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것은 로맨스 소설이니까. 왜? 그녀가 그를 만났으니까. 그녀와 그가 이제 서로를 보았고 존재를 알았다? 사랑이 시작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닌가. 이것은 로맨스 소설이니까. 그리고,
당연히 일년여 지난 시점에서 그들은 재회한다. 만나자마자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어떻게 만나느냐? 로리와 세라가 주최하는 조촐한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무려, 세라의 남자친구로! 유후~
그러니까 그렇게 찾아 헤맨 그 남자가 어느 순간 세라의 남자친구가 되어 있었고, 세라는 로리랑 절친이기 때문에 새로 사귄 남자친구가 아주 마음에 들고 그래서 결혼도 하고 싶고 그와의 섹스는 베리베리 굿이고..하는 얘기를 했던 터. 절친의 남친이니 소개 받는건 자연스런 일이고 아마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되겠지, 이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로리는(내가 '나는'이라고 또 써버렸다.. 나는 무엇이든 되려고 하는 빌어먹을 병에 걸려버렸어..) 남자도 소개받기로 했다. 파티 준비를 하고 손님들을 맞이하는데, 딩동, 드디어 세라의 남자친구가 왔고, 인사해~ 하는데 똭- 아니, 버스보이...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동공지진이 일어나지만 로리가 그를 알아봤음을 세라는 눈치채지 못한다. 왜냐하면 파티라서 술을 좀 마셨거든. 세라는 로리의 베프이고 세라는 새로운 남친을 뜨겁게 사랑해. 그런 세라는 바란다. 자신의 절친과 남자친구가 사이좋게 지내기를, 서로를 마음에 들어하기를. 그런 세라에게 '오 마이 갓 네 남친 나의 버스보이!' 할 수는 없다. 로리는 혼란스럽다.
나는 넘나 충격을 받아서, 아니, 그토록 애타게 찾아헤매던 내 이상형~~~ 왜 하필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나게 된거야 그토록 찾아 헤맬때는 없더니.. 이거 쿨의 노래인데.. 무튼, 그래가지고, 아니, 왜 하필이면 여기에서 당신은 나의 베스트프렌드의 남친으로 찾아온건가, 섹스도 기가 막히게 잘한다며 이놈아... 그걸 왜 내 친구랑 .. ㅠㅠㅠㅠㅠㅠㅠㅠ 아아 이제 어떡해야 하냐. 이 친구는 나에게 너무 좋은 친구이다. 게다가 이 친구에게는 못할 말이 없고 이 친구도 나랑 같이 친구는 한 번도 본 적없던 버스보이를 찾아헤매지 않았던가. 그런참에 이 놈이 그 놈이다! 하면 세라와 로리 사이.. 그 사이에 흐르게 될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친구라도 '어머, 내 남친이 네 버스보이? 오케, 그럼 너에게 양보할게!' 이럴 수도 없지않나. 이 남자 너무 좋아서 결혼까지 생각하는데. 너와 결혼까지 생각해쒀..
내가 여기까지 읽고 넘나 충격을 받아가지고 같이 읽는 친구들한테 어디까지 읽었냐 자꾸 체크했다. 친구들이 받을 충격을 내가 기다리고 있었어. 친구들아 너희들이라면 어떻겠니, 너희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쩔거야? 말하지 않은채로 친구와의 우정을 지킬래, 아니면 됐어 사랑이 최고야 섹스 고고씽! 할래? 아, 너무나 혼란스러워. 충격이다. 이건 진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충격일 것이야. 아마 갈등의 도가니탕 되시겠지. 그러나 나로 말하자면 고민없이 친구다. 나는 입닥치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 이 남자가 네 남친이 되었구나 할수없지, 하고는 그냥 여전히 세라와 베프로 지낼 것이다. 그것은 내가 우정을 그 무엇보다 큰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남자랑 사랑하는게 친구랑 다정하게 지내는 것보다 더 크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건 아마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서 선택과 결정이 달라질텐데, 내 경우에는 그렇게 갈등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물론 이런식으로 만나게 된게 아쉽고 놀랍지만,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남자에게 첫눈에 반하게 한 까닭이 있을 것이고, 그러나 친구의 애인으로 만나게 한 뜻이 다 있겠지. 내 운명의 흐름에서 무언가 말하기 위해 이런일이 벌어지는 거겠지. 나는 여전히 세라랑 친구친구~ 하겠어.
이게 책의 초반 원서로는 50페이지도 되기 전에 일어나는 일인데 나는 이 재회를 친구들이 읽으면 얼마나 놀랄까 싶어서 두근두근했단 말이야? 그러다 지금 번역본 표지를 보았고...
아니, 띠지 무슨 일이야...
<1년 전 크리스마스, 첫눈에 반햇던 그 남자가 내 친구의 애인이 되어 나타났다.>
라고 써있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미 띠지에서 어떻게 만나는지 다 알려줬는데, 나는 막 '친구들이 이거 읽으면 어떡하지, 얼마나 놀랄까' 이러면서 세상 쫄보가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나여...
나는 아직 이 책의 겨우 10프로를 번역본으로 읽었을 뿐이지만, 자, 10프로 읽고 나는 이 책의 결말을 짐작해보기로 한다. 후훗. 결말 짐작 여기다 써두고 완독한 후에 맞는지 아닌지 봐야지. 후훗.
자, 내가 생각하는 결말은요~
저기 위에 썼던 말을 다시 쓰자면, 그러나 로리랑 버스보이를 만나게 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버스 안에서 그리고 버스 바깥에서 서로를 보고 눈이 마주치게 했으며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그 일이 일어난 이유. 그리고 이것이 로맨스 소설이라는 데에 근거하여, 그들은 만나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 다만, 피 튀기는 막장흐름보다는, 로리도 그리고 버스보이도 상대를 알아보았으나 상대가 나를 알아보기를 원치는 않는 이 상황에서 그들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로리는 세라의 친구로, 버스보이는 세라의 남자친구로.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멈출 수 없을 것이고, 감추려 하지만 어떻게든 세라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로리의 버스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꼭 그래서라는 이유보다는 어쨌든 세라와 남자친구는 헤어질것인데, 그들이 헤어졌다고 해서 로리와 버스보이가 바로 연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무수히 긴 시간들이 놓일 것이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연을 이어나가면서, 로리는 또 로리의 연애를 하면서 살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더 어른이 되고 더 성숙하고 각자의 몫만큼 더 성장한 뒤에 이제 서로의 연인이 될것이다.
이렇게 짐작하고난 뒤에, 이 책의 시작이 2008년이었던 것을 기억했고 또한 2009년, 1년이 지난 시점에 드디어 서로 만나게 됐던바, 나는 이 책의 목차를 들춰본다. 내 짐작이 맞으려면 이 이야기는 먼 훗날까지 이어져야 하니까. 책의 목차를 보니 2008년에 시작한 이야기는 2017년에 끝나는 걸로 되어잇더라. 후훗. 내 짐작이 맞을 가능성 오십프로... 샤라라랑~
이 글은 이제 성지가 됩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 좋아한다. 한 명의 성인 어른이 다른 한 명의 성인어른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관계를 더 깊게 만들고 그것을 유지하고자 할 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각자 다르게 자라고 살아온 환경에서 나랑 많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익숙해지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어떤 것들은 도무지 내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있을테고, 그러나 상대가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나 자신에게 알려주는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가야만 관계는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로리와 버스보이가 십년간을 알아가게 된다면 그 시간들동안 각자에게 그리고 둘 사이에도 지극히 사소하고 때로는 큰 일들이 쌓일 것이다. 그런 일들을 맞이하는 자세 받아들이는 태도 그것이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또 그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는지를 서로 바라보면서 혹은 함께하면서 하는 연애는 기존의 연애들과는 또 다를 것이며 그 무게도 다를 것이다.
내가 짐작하는 결말과는 아주 다른 결말로 진행될지도 모르지만 십년여에 걸친 이들의 관계를 지켜보게 될것이 너무 흥미롭다. 십년간이나 알고 지냈다면, 십년간이나 이어지는 관계라면, 거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서로 상대를 내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이야. 그게 무엇인지 보는 것도 너무 흥미롭고 그렇게 나는 또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어있겠지.
다만 유감인 것은, 내가 영어를 쭉쭉 읽을 수 없다는 것.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빡치는데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너무 쉽게 자주 빡치고 있다는 거... 영어 실력 늘리자고 원서를 읽다가 성격이 포악해질 것 같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면서 나를 달래야겠다.
일요일에 1월 책구매 사진 올릴건데 어제 집에 갔더니 알라딘 박스 세개 쌓여있는 거 보고 내가 나 자신이 싫어져서... 이 미친 사람아 책 그만사! 하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으르렁- 일요일에 책 구매 사진 올릴거라는 예고를 하며 금요일의 페이퍼를 마친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