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쪽빛그림책 2
이세 히데코 지음, 김정화 옮김, 백순덕 감수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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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책들은 가끔 '병원' 을 방문하고, 회색 띤 청색이나 탁한 오렌지색 커버를 쓰고 서가에 되돌아옵니다. 전 제 책도 고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책들의 이런 여행에 대해 궁금해 했던 사람들에게 이세 히데코의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는 좋은 선물이 될 겁니다.

 를리외르Relieur라는 건, 고서의 유지 및 보수를 위해, 낱장을 정리하고 표지를 꾸며 책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직업이라는군요. '책' 자체가 사치품이 아니게 된 현대에는, 위에서 언급했던 대량 생산된 대중적인 책의 수리보다는, 좀 더 개인적인 것이 를리외르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만(약간의 아이러니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가 횡설수설하는 것보다는 작가의 설명을 인용하는 것이 낫겠지요.

   
  를리외르는 유럽에서 인쇄 기술이 발명되어 책의 출판이 쉬워지자 발전한 실용적인 직업인데, 일본에는 이런 문화는 없다. 요즘에는 '특별한 한 권을 위해 제본하는 수공예적 예술' 이라는 아트 장르로 보고 있다.
이 일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출판업과 제본업을 겸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던 제본을 하는 직업이다. IT화, 기계화 시대에 접어들자 파리에서도 제본의 60공정을 모두 수작업으로 할 수 있는 제본 직인은 손에 꼽을 정도다.
 
   

 저 설명은 굉장히 어마어마하게 들립니다만, 이 책은 전혀 위압적이지 않습니다. 어린 소녀가 자신이 사랑하는 책을 살리기 위해 를리외르를 찾고 그의 작업을 지켜본다는 소박한 연출을 통해 이 책 장인들의 자부심도, 를리외르라는 직업의 대단함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섬세하고, 아름답고, 뛰어난 책이에요. 표지에도 쓰인 고상한 푸른 색으로, 소피와 를리외르 아저씨의 하루(사실은 이틀)를 아름다운 수채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책을 고칠 곳을 수소문하며 거리를 헤매는 소피와 공방으로 출근하는 노장인의 모습을 그림책의 양쪽 페이지에 배치한 깜찍하고도 위트 있는 묘사나, 묵묵히 일하는 를리외르의 곁에서 조잘거리는 어린 소녀의 묘사 등,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흐뭇한 웃음과 숨이 막힐 듯한 경이감을 동시에 자아냅니다. 이 그림책은 상당히 많은 페이지를 를리외르라는 직업과 그 작업 공정에 할애하고 있고, 어디서나 담담하고 예쁜 수채화 표현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낱장으로 흩어져 버린 식물도감은 소피의 이름을 표지에 단 아름다운 새 책으로 태어납니다. 소녀는 자기만의 식물도감에 애착을 쏟았고 식물학 연구자가 되었습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가장 놀라운 부분은 작가가 일본인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했는데...하긴, 생각해 보면 모든 이런 책은 일본인이 쓰는 거죠. (물론 농담입니다. ^ㅁ^; )  다만 이 한국판은 최초의 한국인 를리외르가 감수를 했고, 짧은 추천사도 싣고 있습니다.
 작가 이세 히데코는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친 를리외르라는 직업에 넋을 잃고 오랫동안 파리에 머물며 공방 주위를 맴돌았던 모양입니다. 숀 탠의 [도착] 도 그랬지만 이 그림책에서도, 도저히 아이들만을 위해 그린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아찔한 매혹이 느껴지는데-실로 어른의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 멋진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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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11-13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 요즘 저는 eppie님의 글 읽는 재미에 산다고 해도 정말이지 과언이 아니예요. 멋진 책이에요, 라는 끝맺음 덕에 저도 보관함에 넣습니다. 리뷰 정말 잘 쓰세요, eppie님.

eppie 2008-11-14 13:05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ㅠ_ㅠ 하지만 책은 정말 좋은 책이에요. 제 말재주로 충분히 전달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근래 좋은 그림책들을 많이 보았는데, 사진 찍기가 게을러서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어요.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17
한스 페터 리히터 지음, 배정희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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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에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글입니다)

-언제고 ABE 전집 트라우마작 순위 투표를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 계획을 실행한다면, 1위가 무엇일까를 놓고 내기가 벌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참가하는 사람이나 기획하는 저나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가 1위가 될 거라는 건 알고 시작하는 일이니까요. 재미있어지는 건 2위부터의 결과일 겁니다. 제가 읽은 범위 안에서 꼽자면 [칼과 십자가], [여우굴], [형님], 그리고 이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정도가 순위권 후보가 아닐까 싶네요. ^_^;

어릴 때의 저는 확실히 [칼과 십자가]나,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보다 [여우굴], [형님],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를 더 견디기 힘들어했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별로 달라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는 '어릴 때 이런 걸 읽었었지' 하고 농담 삼아 [칼과 십자가]나,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후자의 책들은 좀처럼 입에 올리기가 꺼려졌습니다. 저는 아직 저 이야기들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이건 단순히 시대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먼 이야기라 일종의 로맨틱한 색채까지 깃들어져 버린 [칼과 십자가]나,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와 달리, 후자의 책들은 아직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가 제게 안겨준 씁쓸함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이건 명백히 같은 시대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종류의 책이니까요. 열 살 때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알았냐고요? 여러분도 알았을 겁니다. 요즘 애들도 알 걸요. 애초에 안네 프랑크와 같은 나이가 되기 전에 [안네의 일기]를 처음 읽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는 나라잖아요. 한국의 교육방법은 어떤 영문에서인지 어린애라도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계 없는 나라의 관계 없는 먼 옛날에 벌어진 일들을 꿰고 있게 만드는데:) 그것이 별로 안목을 높여 주는 것 같지 않아서 유감스러울 뿐이지요. 이 책에서 한 방편으로 제시하는 '알아야 한다' 의 반례로 제시할 수 있는 게 한국이란 나라의 경우일 겁니다.

다시 책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저는 열 살 이후 이 책을 다시 읽은 적이 없습니다. 거의 20년만에 다시 읽자니 여러 가지가 눈에 띄네요.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이렇게 에피소드 위주였는지 잊고 있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훨씬 더 연속적인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후반이 되면서 일화들 사이의 시간 간격이 좁아지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이야기는 한 소년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추억의 '장면들' 의 집합입니다. 친구 프리드리히 슈나이더와 그의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쓴 다음에 시간적 순서대로 늘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도록, 서술 자체에 가치 판단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 일화들은 작가가 주의 깊게 선택한 것일 터이고, 이 선택과 책 자체에는 가치 판단이 들어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작가의 그 전략은 유효합니다. 고의로 사건의 진행이나 인과를 빠뜨린 부분이 있는 서술은, 마치 이 기억이 우리의 기억인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읽고 나서 여기 묘사된 일상의 사소함이 얼마나 마음을 가득 채웠는지를요. 친구의 어머니 슈나이더 부인이 얼마나 작고 화사했는지도, 친구의 아버지 슈나이더 씨가 입학식 날 놀이공원으로 데려가 회전목마를 태워 주었던 것도. 자기네 민족의 전통에 따라, 사람들 앞에서 경전을 노래하고 어른이 되는 친구를 엿보았던 것도. 현실이 조금씩 조금씩 친구와 그 가족에게 가혹해지다가, 마침내 무슨 농담 같고 악몽 같은 파멸이 찾아왔을 때, 일상의 조각이 가끔 모습을 드러내고-놀이공원에 갔던 때의 사진, 뚜껑만 남은 만년필-그것은 상황의 비극성을 인식하게 하는 데 무엇보다 효과적입니다. 다시 읽어도, 기본적인 것을 잊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정말로 대단한 소설이에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깝다'는 것은 시간적 거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 보다 좀 더 참조하기 쉬운 형태의 은유라는 뜻도 돼요. 21세기의 한국에서 치료를 할 줄 안다고 사람을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형태의 반론이 나올 여지가 없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가, 어쨌든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만...
제가 사막 계시종교 세 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의심'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70년 전에 독일에서, 얼마 전의 한국에서 증명되었듯이 민중의 믿음은 때로 독입니다. 굶어죽을 지경일 때 눈앞에 나타난 메시아가 알고 보니 피에 주린 살인마더라 하는 패턴에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요! 영화였으면 뻔하다고 비웃었을 거면서! ;ㅁ;

Trivia
1. 새 버전은 낯선 유태인들의 문화에 대한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권말에 상세한 주석이 들어 있고 출전도 밝혀져 있습니다. 모처럼 쓸데없이 오지랍 넓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좋은 시도였습니다. 저는 이 정도로 책 구성을 칭찬하는 일이 드물어요! :]
 실은 권말에 30년대 초중반부터의 유태인 차별법령 연보가 실려 있는 걸 보고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웹상에는 법령 발표 시기에 기초하여 이 소설의 챕터들의 시간적 배경이 언제인지 연대를 구체적으로 밝혀 놓은 자료도 있기는 했습니다만...멋져.

2. 한국어판 제목이 원제를 충실히 번역한 데 비해, 프랑스어판, 스페인어판 제목은 '내 친구 프리드리히' 쪽인데요.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가 작품의 주제 뿐만 아니라 소재나 구성과도 일치하는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친구 프리드리히'라는 제목을 되뇌어 보면 괜히 감상적이 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군요. 어느 쪽이든 영문판 제목 [Friedrich] 보다는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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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제작을 읽고 있으면 쥐포 구워 먹고 싶어지지 않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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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되는 문제점은?

-하이드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고, 제 방의 책장/침대 세팅을 공개합니다. 작년 이맘때쯤 찍은 사진이네요.


책장 세부



개인적으로는 이 여우스탠드를 놓을 수 있었다는 점이, 이 배치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이드테이블을 놓을 수 없는 방이라서요 ;_;





시마다 마사히코 영역.

...물론 지금은 혼란상이 제곱. 저 깔끔함은 이제 없습니다. 책이 이중으로 안 꽂힌 칸 찾기가 힘들어요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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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8-11-05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 제가 생각한게 바로 요런 모양이었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전혀 안 불안하군요. 사이드테이블을 없애고, 책장을 사이드테이블로 활용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네요. ^^ 오- 불끈. 저도 블라 세마리 있어요. 예전에 침대방 책장에 있었는데, 거실에 책장 들여놓으면서, 지금은 거실 책장에 있다지요. '블라는 책장에' 인가요? ㅎㅎ

eppie 2008-11-07 10:42   좋아요 0 | URL
이거 막상 해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실행하기 전까지 좀 고민이 많이 되는 배치지요. ^^; 저도 책장 하나 더 들이면서 에잇 하고 뚝딱 실행에 옮겨 버렸더니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실은 지금은 책에 치여 블라이스는 저 자리에서 철수, 친구네 작업실에 맡겨놓고 있습니다. 거기서 가끔 꾸물꾸물 옷을 지어 입히고 있는 중인데...나중에 완성되면 올릴게요. ^_^;

+...하이드님의 '꺄~' 귀여워요! ;ㅁ;

하이드 2008-11-05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마다 마사히코 영역을 따로 구분해 놓으신걸 보고 질문이요.
누군가 했더니, <무한카논> 시리즈 (최근에 나와서 눈여겨 봤거든요) 의 작가네요.
이 작가는..... 어떤가요?

eppie 2008-11-07 10:44   좋아요 0 | URL
음...스타일리시한 변태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도 아이돌(이랄까 노리갯감)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돌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듯한 점이 마음에 들어요. 싸인 뒤에 하트를 그려 준다든지...
글은 명백히 난잡하고, 시대착오적이고, 부끄럽습니다만, 좋아합니다.

카스피 2008-11-05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생각보다 책이 많이 없으시네요^^. 깔끔한게 보기 좋네요.저도 조만간 이사를 갈 예정인데 책을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네요.현재 살고 있는 옥탑방에 자그만한 창고가 붙어있어 이를 이용했는데 이사갈 예정인 곳은 그런 창고가 없어 고민입니다.정리하면 할수록 박스안에서 책이 계속나와 죽을 지경입니다. ㅜ.ㅜ

eppie 2008-11-07 10:51   좋아요 0 | URL
네, 필사적으로 일정량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가차없이 내보내곤 해요. 지금은 한동안 노력을 안 했더니 2중으로 겹겹이 꽂혀 있습니다. 어디선가 책 읽는 일감이 떨어져서, 정작 제가 사 놓은 책을 못 읽고 있었거든요. ㅜ.ㅠ
카스피 님은 진짜로 도서대여점 등에서 쓰는 이중 레일 책장을 삼면에 설치하셔야 하는 게 아닌지...^^;;;
 
[이벤트] 일상 토크쇼 <책 10문 10답>

1)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먹어보고 싶었던 음식을 알려 주세요.
-늘 먹을 것들부터 눈에 들어오고, 무엇을 먹었느냐가 가장 먼저 기억납니다. '제일' 을 뽑으라는 것은 너무한 처사예요. :<  


 우선, 엘리에트 아베카시스의 [일곱 방울의 피](원제 : 성전의 보물Le Tresor Du Temple)를 생각합니다. 비교적 최근에 읽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가깝고, 여기 등장하는 요리가 정말로 금시초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멉니다. 이 책의 주인공 일당이 우연히 들린 카페의 주인은, 자기네 메뉴는 성당기사단의 고대 메뉴라면서 Wusla ila l-habib를 언급하며 요리의 역사와 효능에 대해 길게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먹어보고 싶었던 것은 '가지 크림' 입니다. 재료는 구운 가지, 염교 두 개, 마늘 네 쪽, 붉은 후추, 씨를 제거한 검은 올리브 서른 개, 박하잎 석 장, 식초 한 숟갈, 올리브유 네 숟갈, 소금과 후추.

   
  "우선 껍질 여기저기에 구멍을 낸 가지와 고추를 잉걸불에 구워요. 그런 후 가지와 고추가 아직 뜨거울 때 껍질을 벗기죠. 절굿공이에 염교와 마늘, 박하와 올리브를 넣고 잘 빻아요. 그리고 가지와 고추를 넣고 전부 돌리면서 계속 빻는 겁니다. 조심조심 저으면서 기름을 아주 조금씩 흘려넣어요. 마지막으로 소금, 후추, 식초를 넣죠. "  
   

 상상 속에서 바게트 위에 올려 보았습니다. [아주 특별한 요리 이야기The Debt to Pleasure]에서, 차게 해서도 뜨겁게 해서도, 하루 이틀 묵어도 괜찮다는 라타투이유의 매력을 설파할 때와 비슷한 유쾌함이 느껴집니다.

 또, [일본대표단편선] 2권에 실려 있던 소설 두 편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의 [먹는 여자もの喰う女]와, 고노 다에코의 [뼛살]입니다.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먹는 여자]의 후사코를 사랑했습니다. 소설은 1948년작, 저는 '나'와 후미코가 데이트 도중에 먹는 돈까스와 도넛과 달걀초밥을 좀 아득한 기분으로 그려 보았습니다. 지금 먹는다면 분명히 맛은 없을 테지요. 그러나 그 아삭아삭한 튀김의 감각은 언제까지나 이상한 설렘으로 전해져 왔던 겁니다. 반대로, [뼛살]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듯한 싱싱한 굴의 이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굳이 굴 관자 부분의 살점을 긁고 있는 여주인공을 생각하면 어딘가 짜릿하게 조여드는 기분이 듭니다. 

 
 디저트가 필요하겠네요. 조안 해리스의 [초콜릿]에서-하지만, 영어 소설이라도 원제는 [쇼콜라Chocolat] 인데-비안 로셰가 만든 과자를 생각합니다. "천 송이의 꽃에서 딴 꿀에 재운 복숭아", 꿀과 브랜디에 재운 복숭아에 초콜릿을 입힌 것. 시럽에 재우거나, 굽거나, 조리거나, 아무튼 충분히 가공을 한 후에야 과일은 초콜릿과 어우러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과일을 내 주는 초콜릿 퐁듀는 재앙이라고 생각해요.

 

2) 책 속에서 만난, 최고의 술친구가 되어줄 것 같은 캐릭터는 누구인가요?
-술은 혼자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아치볼드 맥널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와 함께라면 절대로 조용히 마시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만...비단 맥널리 가의 요리사 혹은 집사의 솜씨나, 펠리컨 클럽 주인장의 솜씨일 안주를 탐내는 것은 아니랍니다. :D

 

 

3) 읽는 동안 당신을 가장 울화통 터지게 했던 주인공은 누구인가요?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의미에서, 실은 쿠르트 발란더가 아닐까 싶습니다. :] 이 캐릭터의 생활과 생각에 엄청나게 몰입해서 읽었으니까요. 저는 이 갑갑한 시리즈와 주인공인 쿠르트 발란더를 사랑합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라면 이런 넘들입니다.
-[첨탑]의 조슬린 신부. 이 사람에 대해서는 정말로 할 말이 많고도 많은데 그냥 침묵하는 쪽이 낫겠습니다. 이 책을 우연히 도서관에서 집어 와서 처음 읽었을 때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어스시 시리즈의 게드. 저 이 놈 싫어합니다. ㄱ- 사실 어스시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르 귄 팬도 있습니다) [아투안의 지하무덤]만 유일하게 건질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라고 게드가 삽질을 안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제발 말로 좀 해라...

4) 표지를 보고 책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표지는 책의 얼굴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표지/최악의 표지는 어떤 책이었는지 알려 주세요.
-우선 최악의 표지. 이거 너무 여기저기 자주 써먹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거만큼 웃긴 게 없었기 때문에...생각해 보면 이건 '최악' 인지조차도 미심쩍고, 그냥 장르가 다른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만...

아래 책의 원작이 뭔지 아시는 분?


정답은 커트 보네거트의 [제일버드Jailbird]입니다.


...진짭니다.

최고의 표지는 이것. 척 팔라닉의 [인비저블 몬스터Invisible Monsters] 표지 중 하나. 

 강렬하고 멋있죠.



5) 책에 등장하는 것들 중 가장 가지고 싶었던 물건은? (제 친구는 도라에몽이라더군요.)
-막나가자면 역시 [신들의 워드프로세서]에 등장하는 그 워드프로세서. :]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바로잡고 싶은 과거의 실책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네요. 기왕이면 잘 고쳐서 타임리미트는 해제된 버전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6) 헌책방이나 도서관의 책에서 발견한, 전에 읽은 사람이 남긴 메모나 흔적 중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이것도 너무 자주 써먹은 거 같기는 한데, 학교 도서관에 있던 존 노먼John Norman의 고르Gor 시리즈 중 한 권, [Assassin of Gor] 번역본 스캔입니다.


... 뭐랄까, 정말로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의 현장?

7) 좋아하는 책이 영화화되는 것은 기쁘면서도 섭섭할 때가 있습니다. 영화화하지 않고 나만의 세계로 남겨둘 수 있었으면 하는 책이 있나요?
-이미, 저런 생각을 품을 만한 책은 이미, 모두 영화화되었습니다. OTL 저는 대개 영화화를 좋아하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캐릭터들을 영상으로 보는 것은 즐겁습니다. 영화화 자체를 꺼린다기보다, 그 결과물의 퀄리티에 대해 불평이 심한 편입니다. 그러니까, '간절히 보고 싶은 것' 이 더 많아요.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자면...저는 [유니스의 비밀A judgement in Stone]을 영화화려는 시도에는 좀 거부감이 듭니다. 이 이야기를 문자미디어인 책으로 읽는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감상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La Cérémonie]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소설의 영화화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유니스에 해당되는 캐릭터가 원작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배우가 상드린 보네르 Sandrine Bonnaire입니다) 아예 다른 물건이라고 생각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요.

8) 10년이 지난 뒤 다시 보아도 반가운, 당신의 친구같은 책을 가르쳐 주세요.
-ABE 전집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기는 한데, 여기 들어 있는 책들은 도저히 빈말로도 반갑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오히려 지경사 소녀소설 쪽이 낫지 않을까요? 네, 세인트 클레어 시리즈(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가 있군요. 언제 펴더라도 사심없이 볼 수 있고, 즐겁습니다. [초원의 집] 보다 이쪽이 더 보기 편한 것 같군요.



9) 나는 이 캐릭터에게 인생을 배웠다! 인생의 스승으로 여기고 싶은 인물이 등장하는 책이 있었나요?
-가필드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니, 인생이 힘들 때는 못된 소리를 하면 된다는 기본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온 게 맞는 것 같아요. 존경합니다, 선사님!


10) 여러 모로 고단한 현실을 벗어나 가서 살고픈, 혹은 별장을 짓고픈 당신의 낙원을 발견하신 적이 있나요?
-낙원이라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의 낙원은 아니고, 어떻게 보아도 살기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거기 있고 싶어요. 그렇다면 그 곳은 제게는 낙원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닥, 내게 방 한 칸만 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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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11-03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풍성한 내용의 문답입니다. 추천을 아니할수 없어요.

eppie 2008-11-05 14:24   좋아요 0 | URL
추천씩이나! 감사합니다. ^^; 너무 길어진 것 같아서 좀 고민했는데...그냥 두길 잘 한 걸까요?

하이드 2008-11-03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문답을 다시 쓰고 싶을정도네요. 우와-

eppie 2008-11-05 14:25   좋아요 0 | URL
다시 올리신 문답 잘 읽었어요! 그 문답이 나오도록 일종의 뽐뿌가 되었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

보석 2008-11-24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이라면 역시 전 <초원의 집 시리즈>가 떠오르네요. 단풍나무 시럽을 눈 위에 떨어뜨려 굳힌 과자라던가, 보관을 위해 꽃봉오리를 빽빽하게 꽂은 사과라던가, 팬케이크에 소시지에...정말 먹을 것의 향연이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역시 계속 먹을 것에 대한 묘사가 나오죠. 물론 수용소인 만큼 그리 맛있을 것 같진 않지만요. 그 외에는 에 나오는 버터밀크라던가 <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에 그토록 나오는 진저에일...생각하니 끝이 없네요.
<노예들의 축제>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저렇게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졌을까요.ㅎㅎ

eppie 2008-11-25 10:17   좋아요 0 | URL
초원의 집 시리즈 중에서도 저는 구체적으로 [큰숲 작은집] 을...^^; 예전에는 거기 등장하는 고기들에 눈을 번뜩였는데 이제는 로라 어머니가 삶아주는 으깬 호박이나, 뼈가 하나도 섞이지 않게 큼직하게 잘라낼 수 있는 생선을 떠올리며 흐뭇해합니다. 아버지가 읍내에서 사가지고 온, 하얀 설탕을 묻힌 하트 모양 과자는 [초원의 집] 쪽이었던가요?

앗, 덧글 태그가 잘못 먹어서 버터밀크의 출처가 잘렸네요. 진저에일은 다 커서 먹어보고선 좀 실망했었더랬습니다. ^^; 그 시리즈에서는 대 실패랄까 재난이었던 요리지만 앤초비 토스트는 지금도 좋아하지요.

[노예들의 축제]는...노예제가 있는 고대-중세 같은 문명을 배경으로 한 SF(?) 고르 시리즈의 한 권인데, 저 덧글들은 아마 뭔가 화끈한(^^;) 걸 기대했다 실망한 청춘들의 원성인 걸로 추정되어요. ㅎㅎ

보석 2008-11-26 14:02   좋아요 0 | URL
버터밀크는 엘러리퀸의 <와이의 비극>에 나오죠. 독이 든 걸로..ㅎㅎ 확실한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옛날에 봤던 책에선 그랬어요. 먹고 죽을 뻔하지만 다행히 응급조치를 잘해서 살아나죠. 진저에일은 최근에 우리나라 회사에서(해태였나?) 나온 게 있어서 먹어봤는데 희미하게 생각냄새가 나는 사이다더군요;;; 실망했어요!

푸하하..화끈한 거..어떤 건지 알겠습니다. SM적인 요소가 가득한 에로소설을 기대했다 실망했군요.ㅎㅎㅎ

덧: 이거 좀 웃기네요..같은 소설인데 왜 와이를 Y로 하면 글자가 안 나올까요;;

eppie 2008-11-27 16:00   좋아요 0 | URL
어제 덧글을 보고서 갑자기 버터밀크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만드는 법을 검색하고 있었습니다. Orz 조금 만들어서 먹기는 이래저래 난감하네요. 서양인의 레시피는 자비가 없어요. ㅠ_ㅠ

실제로 저 고르 시리즈가 꽤 서구의 SM 씬에 많은 영향을 준 작품이고, 에로틱한 부분도 꽤 있는 걸로 알지만...저 청춘들이 기대하는 거 같은 종류는, 아마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

[Y의 비극] 이었군요. 음, 저는 웹상에서 책 제목을 표기할 때 습관적으로 < 대신 [ 를 사용하는데, < 를 사용하면 html 태그로 인식해서 내용을 잡아먹는 경우가 가끔 있더라고요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