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의 기억
크리스티나 슈바르츠 지음, 공경희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열광은 대체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요? 이거야말로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아아, 비극은 좋은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리어 왕]의 진짜 이야기가 몰살엔딩이라는 걸 알고서 열광했습니다. 인간이 너무나 쉽게 운명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게 하는, 촘촘히 짜여진 오해의 굴곡들은 정말 탐욕스럽게 들이마실 수밖에 없는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극의 존재는 인간이 오해가 이해만큼 유용한 개념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증거입니다. [맥베스]에서 [제인 에어]를 지나 [프렌즈] 까지, 오해의 무게와 관계 없이 사람들은 언제나 오해에 열광할 수 있습니다.  

 여기 또 훌륭한 오해물(^_^;) 이 있습니다. 몇 년간 볼까말까 고민했던 책입니다. 이것도 역시 이유는 같아요, 한 사람의 열광적인 오해물 팬으로써, 너무 낚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 뒷표지만 봐도 19세기 소설 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드라마틱 픽션의 온갖 요소-드라마 퀸이거나 아니면 아예 제대로 미친 여주인공, 실패한 연애, 온갖 종류의 청교도적 압박, 법적 위험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친(때로는 넘기도 하는) 아동 학대, 형제나 자매 간의 애증, 아무튼 온갖 종류의 기형적 애정을 포함한 가족관계-가 모조리 다 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의 뒷표지를 인용해 보죠. Behold!  

   
 

 1919년 삶의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어버린 아만다, 루터교의 엄격함으로 무장하고 평생을 살아온 부모 밑에서 숨막힐 듯 살아온 여인. 그래도 부모를 위해 기꺼이 희생했고, 한 남자를 알게 되면서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결국 그에게 농락당하고 어린 시절에 살던 그리운 집으로 돌아온다. 거기엔 어릴 적부터 그녀가 사랑하고 보호해온 여동생이 있다.
 두 사람의 끈질긴 자매애가 다시 시작되지만, 어느 날 그들만이 살던 섬에서 숙명의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행방불명된 동생이 시신으로 발견되고 아만다는 동생이 남긴 딸 루스를 제 딸로 여기며 또 다시 모든 걸 바쳐 사랑하고 루스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르기만 할 것 같던 루스는 자라면서 자꾸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지고... 

 
   

...이쯤 되면 위풍당당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저 지나치게 수다스러워 보이는 소개가 스포일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 내용은 거짓말을 좀 보태 말하면 첫 페이지에 다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미스터리는 꽤 질이 좋습니다. 어쩡쩡한 추리소설보다도 낫다고 해야 할 정도예요. 등장 인물의 행동 동기에 의문이 가는 법도 없고, 원서 뒷표지에 인용된 US Weekly의 Francine Prose의 "(A) gripping psychological thriller"라는 말이 딱 맞는 표현이겠지요. 요즘은 유행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서술 트릭이 어느 정도 들어 있습니다만, 고의로 요점을 빠뜨리고 있다는 인상은 주지 않고 매끄럽게 잘 넘어가는 것이 큰 장점입니다. 설명해야 할 부분과 설명하지 말아야 할 부분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도 장점이고요.

 묘사나 캐릭터, 어느 쪽도 훌륭합니다. 요즘 헐리우드 스릴러 스타일로 씌어진 소설이에요. 후반부의 거친 30년대 처녀 루스의 묘사도 훌륭해서, 거의 모든 비극의 히로인 속성을 갖춘 아만다와 강렬한 대비를 이룹니다. 서브 캐릭터들도 좋습니다. 죽은 마틸다는, 마치 여동생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인간으로 만든 것만 같습니다. 마틸다가 막 태어났을 때, 아만다가 '이 아이는 내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대목은 그야말로 정곡을 찔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매관계엔 확실히 좀 그런 게 있습니다. 아만다의 삶도 고통스러웠지만 아만다나 루스 역시도 그들의 삶에 끼어든 타인을 상당히 괴롭히고 있기에, 평소라면 공감할 수 없을 캐릭터인 칼 뉴먼의 심경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서 오웬스는 구도상 없어서는 안 될 캐릭터인데 다소 무색무취인 감이 있습니다만, 이런 남자주인공도 나름대로 좋군요. 그래, 요트를 가진 놈이 꼭 북구의 신 같은 타입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ㄱ-
실제 위스콘신 출신인 작가의 공을 들인 위스콘신 농장 묘사도 좋습니다-특히 먹을 것 이야기가. 로러 잉걸스 와일더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몇십년 후 버전이네요. 가장 좋았던 건 궁상맞게도 '티가 나지 않게 부서진 크래커를 골라서 포도 잼에 찍어 먹었다' 는 부분이었습니다. :]

Trivia
1. 알라딘의 원제 표기가 틀렸군요. 'Drowning Ruth' 가 맞습니다. 지금은 고쳐졌습니다.
2. 저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찍은 물건인데, 미국에서는 오프라 쇼가 띄운 2000년도의 수퍼 베스트셀러였다고 합니다. -_-;
3. Heeney Family Photo Album | Wisconsin Historical Society | Ellsworth Pioneer School Girls' Club | The Plummer farm in 1919
4. 웨스 크레이븐이 영화로 만들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아무 말이 없군요. 앞으로도 없겠죠. (...)
5. 지금까지 읽은 이 출판사 책 중에 제일 나은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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