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일상 토크쇼 <책 10문 10답>

1)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먹어보고 싶었던 음식을 알려 주세요.
-늘 먹을 것들부터 눈에 들어오고, 무엇을 먹었느냐가 가장 먼저 기억납니다. '제일' 을 뽑으라는 것은 너무한 처사예요. :<  


 우선, 엘리에트 아베카시스의 [일곱 방울의 피](원제 : 성전의 보물Le Tresor Du Temple)를 생각합니다. 비교적 최근에 읽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가깝고, 여기 등장하는 요리가 정말로 금시초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멉니다. 이 책의 주인공 일당이 우연히 들린 카페의 주인은, 자기네 메뉴는 성당기사단의 고대 메뉴라면서 Wusla ila l-habib를 언급하며 요리의 역사와 효능에 대해 길게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먹어보고 싶었던 것은 '가지 크림' 입니다. 재료는 구운 가지, 염교 두 개, 마늘 네 쪽, 붉은 후추, 씨를 제거한 검은 올리브 서른 개, 박하잎 석 장, 식초 한 숟갈, 올리브유 네 숟갈, 소금과 후추.

   
  "우선 껍질 여기저기에 구멍을 낸 가지와 고추를 잉걸불에 구워요. 그런 후 가지와 고추가 아직 뜨거울 때 껍질을 벗기죠. 절굿공이에 염교와 마늘, 박하와 올리브를 넣고 잘 빻아요. 그리고 가지와 고추를 넣고 전부 돌리면서 계속 빻는 겁니다. 조심조심 저으면서 기름을 아주 조금씩 흘려넣어요. 마지막으로 소금, 후추, 식초를 넣죠. "  
   

 상상 속에서 바게트 위에 올려 보았습니다. [아주 특별한 요리 이야기The Debt to Pleasure]에서, 차게 해서도 뜨겁게 해서도, 하루 이틀 묵어도 괜찮다는 라타투이유의 매력을 설파할 때와 비슷한 유쾌함이 느껴집니다.

 또, [일본대표단편선] 2권에 실려 있던 소설 두 편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의 [먹는 여자もの喰う女]와, 고노 다에코의 [뼛살]입니다.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먹는 여자]의 후사코를 사랑했습니다. 소설은 1948년작, 저는 '나'와 후미코가 데이트 도중에 먹는 돈까스와 도넛과 달걀초밥을 좀 아득한 기분으로 그려 보았습니다. 지금 먹는다면 분명히 맛은 없을 테지요. 그러나 그 아삭아삭한 튀김의 감각은 언제까지나 이상한 설렘으로 전해져 왔던 겁니다. 반대로, [뼛살]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듯한 싱싱한 굴의 이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굳이 굴 관자 부분의 살점을 긁고 있는 여주인공을 생각하면 어딘가 짜릿하게 조여드는 기분이 듭니다. 

 
 디저트가 필요하겠네요. 조안 해리스의 [초콜릿]에서-하지만, 영어 소설이라도 원제는 [쇼콜라Chocolat] 인데-비안 로셰가 만든 과자를 생각합니다. "천 송이의 꽃에서 딴 꿀에 재운 복숭아", 꿀과 브랜디에 재운 복숭아에 초콜릿을 입힌 것. 시럽에 재우거나, 굽거나, 조리거나, 아무튼 충분히 가공을 한 후에야 과일은 초콜릿과 어우러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과일을 내 주는 초콜릿 퐁듀는 재앙이라고 생각해요.

 

2) 책 속에서 만난, 최고의 술친구가 되어줄 것 같은 캐릭터는 누구인가요?
-술은 혼자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아치볼드 맥널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와 함께라면 절대로 조용히 마시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만...비단 맥널리 가의 요리사 혹은 집사의 솜씨나, 펠리컨 클럽 주인장의 솜씨일 안주를 탐내는 것은 아니랍니다. :D

 

 

3) 읽는 동안 당신을 가장 울화통 터지게 했던 주인공은 누구인가요?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의미에서, 실은 쿠르트 발란더가 아닐까 싶습니다. :] 이 캐릭터의 생활과 생각에 엄청나게 몰입해서 읽었으니까요. 저는 이 갑갑한 시리즈와 주인공인 쿠르트 발란더를 사랑합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라면 이런 넘들입니다.
-[첨탑]의 조슬린 신부. 이 사람에 대해서는 정말로 할 말이 많고도 많은데 그냥 침묵하는 쪽이 낫겠습니다. 이 책을 우연히 도서관에서 집어 와서 처음 읽었을 때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어스시 시리즈의 게드. 저 이 놈 싫어합니다. ㄱ- 사실 어스시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르 귄 팬도 있습니다) [아투안의 지하무덤]만 유일하게 건질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라고 게드가 삽질을 안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제발 말로 좀 해라...

4) 표지를 보고 책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표지는 책의 얼굴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표지/최악의 표지는 어떤 책이었는지 알려 주세요.
-우선 최악의 표지. 이거 너무 여기저기 자주 써먹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거만큼 웃긴 게 없었기 때문에...생각해 보면 이건 '최악' 인지조차도 미심쩍고, 그냥 장르가 다른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만...

아래 책의 원작이 뭔지 아시는 분?


정답은 커트 보네거트의 [제일버드Jailbird]입니다.


...진짭니다.

최고의 표지는 이것. 척 팔라닉의 [인비저블 몬스터Invisible Monsters] 표지 중 하나. 

 강렬하고 멋있죠.



5) 책에 등장하는 것들 중 가장 가지고 싶었던 물건은? (제 친구는 도라에몽이라더군요.)
-막나가자면 역시 [신들의 워드프로세서]에 등장하는 그 워드프로세서. :]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바로잡고 싶은 과거의 실책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네요. 기왕이면 잘 고쳐서 타임리미트는 해제된 버전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6) 헌책방이나 도서관의 책에서 발견한, 전에 읽은 사람이 남긴 메모나 흔적 중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이것도 너무 자주 써먹은 거 같기는 한데, 학교 도서관에 있던 존 노먼John Norman의 고르Gor 시리즈 중 한 권, [Assassin of Gor] 번역본 스캔입니다.


... 뭐랄까, 정말로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의 현장?

7) 좋아하는 책이 영화화되는 것은 기쁘면서도 섭섭할 때가 있습니다. 영화화하지 않고 나만의 세계로 남겨둘 수 있었으면 하는 책이 있나요?
-이미, 저런 생각을 품을 만한 책은 이미, 모두 영화화되었습니다. OTL 저는 대개 영화화를 좋아하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캐릭터들을 영상으로 보는 것은 즐겁습니다. 영화화 자체를 꺼린다기보다, 그 결과물의 퀄리티에 대해 불평이 심한 편입니다. 그러니까, '간절히 보고 싶은 것' 이 더 많아요.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자면...저는 [유니스의 비밀A judgement in Stone]을 영화화려는 시도에는 좀 거부감이 듭니다. 이 이야기를 문자미디어인 책으로 읽는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감상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La Cérémonie]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소설의 영화화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유니스에 해당되는 캐릭터가 원작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배우가 상드린 보네르 Sandrine Bonnaire입니다) 아예 다른 물건이라고 생각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요.

8) 10년이 지난 뒤 다시 보아도 반가운, 당신의 친구같은 책을 가르쳐 주세요.
-ABE 전집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기는 한데, 여기 들어 있는 책들은 도저히 빈말로도 반갑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오히려 지경사 소녀소설 쪽이 낫지 않을까요? 네, 세인트 클레어 시리즈(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가 있군요. 언제 펴더라도 사심없이 볼 수 있고, 즐겁습니다. [초원의 집] 보다 이쪽이 더 보기 편한 것 같군요.



9) 나는 이 캐릭터에게 인생을 배웠다! 인생의 스승으로 여기고 싶은 인물이 등장하는 책이 있었나요?
-가필드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니, 인생이 힘들 때는 못된 소리를 하면 된다는 기본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온 게 맞는 것 같아요. 존경합니다, 선사님!


10) 여러 모로 고단한 현실을 벗어나 가서 살고픈, 혹은 별장을 짓고픈 당신의 낙원을 발견하신 적이 있나요?
-낙원이라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의 낙원은 아니고, 어떻게 보아도 살기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거기 있고 싶어요. 그렇다면 그 곳은 제게는 낙원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닥, 내게 방 한 칸만 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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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11-03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풍성한 내용의 문답입니다. 추천을 아니할수 없어요.

eppie 2008-11-05 14:24   좋아요 0 | URL
추천씩이나! 감사합니다. ^^; 너무 길어진 것 같아서 좀 고민했는데...그냥 두길 잘 한 걸까요?

하이드 2008-11-03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문답을 다시 쓰고 싶을정도네요. 우와-

eppie 2008-11-05 14:25   좋아요 0 | URL
다시 올리신 문답 잘 읽었어요! 그 문답이 나오도록 일종의 뽐뿌가 되었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

보석 2008-11-24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이라면 역시 전 <초원의 집 시리즈>가 떠오르네요. 단풍나무 시럽을 눈 위에 떨어뜨려 굳힌 과자라던가, 보관을 위해 꽃봉오리를 빽빽하게 꽂은 사과라던가, 팬케이크에 소시지에...정말 먹을 것의 향연이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역시 계속 먹을 것에 대한 묘사가 나오죠. 물론 수용소인 만큼 그리 맛있을 것 같진 않지만요. 그 외에는 에 나오는 버터밀크라던가 <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에 그토록 나오는 진저에일...생각하니 끝이 없네요.
<노예들의 축제>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저렇게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졌을까요.ㅎㅎ

eppie 2008-11-25 10:17   좋아요 0 | URL
초원의 집 시리즈 중에서도 저는 구체적으로 [큰숲 작은집] 을...^^; 예전에는 거기 등장하는 고기들에 눈을 번뜩였는데 이제는 로라 어머니가 삶아주는 으깬 호박이나, 뼈가 하나도 섞이지 않게 큼직하게 잘라낼 수 있는 생선을 떠올리며 흐뭇해합니다. 아버지가 읍내에서 사가지고 온, 하얀 설탕을 묻힌 하트 모양 과자는 [초원의 집] 쪽이었던가요?

앗, 덧글 태그가 잘못 먹어서 버터밀크의 출처가 잘렸네요. 진저에일은 다 커서 먹어보고선 좀 실망했었더랬습니다. ^^; 그 시리즈에서는 대 실패랄까 재난이었던 요리지만 앤초비 토스트는 지금도 좋아하지요.

[노예들의 축제]는...노예제가 있는 고대-중세 같은 문명을 배경으로 한 SF(?) 고르 시리즈의 한 권인데, 저 덧글들은 아마 뭔가 화끈한(^^;) 걸 기대했다 실망한 청춘들의 원성인 걸로 추정되어요. ㅎㅎ

보석 2008-11-26 14:02   좋아요 0 | URL
버터밀크는 엘러리퀸의 <와이의 비극>에 나오죠. 독이 든 걸로..ㅎㅎ 확실한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옛날에 봤던 책에선 그랬어요. 먹고 죽을 뻔하지만 다행히 응급조치를 잘해서 살아나죠. 진저에일은 최근에 우리나라 회사에서(해태였나?) 나온 게 있어서 먹어봤는데 희미하게 생각냄새가 나는 사이다더군요;;; 실망했어요!

푸하하..화끈한 거..어떤 건지 알겠습니다. SM적인 요소가 가득한 에로소설을 기대했다 실망했군요.ㅎㅎㅎ

덧: 이거 좀 웃기네요..같은 소설인데 왜 와이를 Y로 하면 글자가 안 나올까요;;

eppie 2008-11-27 16:00   좋아요 0 | URL
어제 덧글을 보고서 갑자기 버터밀크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만드는 법을 검색하고 있었습니다. Orz 조금 만들어서 먹기는 이래저래 난감하네요. 서양인의 레시피는 자비가 없어요. ㅠ_ㅠ

실제로 저 고르 시리즈가 꽤 서구의 SM 씬에 많은 영향을 준 작품이고, 에로틱한 부분도 꽤 있는 걸로 알지만...저 청춘들이 기대하는 거 같은 종류는, 아마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

[Y의 비극] 이었군요. 음, 저는 웹상에서 책 제목을 표기할 때 습관적으로 < 대신 [ 를 사용하는데, < 를 사용하면 html 태그로 인식해서 내용을 잡아먹는 경우가 가끔 있더라고요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