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사진 : royblumenthal@Flickr)
정말로 좋아하지만 따로 리뷰를 쓴 적은 없는 작품이에요.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올리고 싶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이 [은가면]의 이야기는 꼭 겨울에 하자고 마음 먹은 바 있었으니까요. 셜리 잭슨의 [악의 가능성The Possibility of Evil] 이야기를 꼭 화사한 봄에 하고 싶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
(원본사진 : royblumenthal@Flickr)
미스터리 장르에서 노부인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연약한 대신 오랜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직관의 소유자이기에 탐정 역으로 종종 등장합니다(마플 양, 스퀴데리 양, 휘슬러 부인, '어머니'). 그들은 가끔 그 육체적 연약함과, 여린 마음과, 여러 가지 이유로 가지고 있을 지 모르는 금전적 풍요로움 때문에 살인이나 강도의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너무 많고 사소하게 다루어지는 경우 또한 많아서 열거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또 가끔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외양을 가졌으나 내용물은 완전히 미쳐 있는 위험한 인물로 등장하기도 하지요(이것은 캐릭터의 성격상 언급하는 순간 스포일러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두 번째 항목을 좀 발전시킨 것이 [은가면]의 기초가 됩니다. 이 짧은 소설의 도입부에서 소냐 헤리스Sonia Herries 양은 머리가 새하얗고 심장에 문제가 약간 있기는 하지만, 강인한 턱과 바라지고 탄탄한 몸을 가진 '누군가가 위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존재로 그려집니다. 통상의 연약한 노부인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지만, 이런 헤리스 양이 아름답고 사악한 피조물들에게 생활을 침략당한 끝에 결국 삶 자체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집 다락방에 유폐되는 찜찜한 비극이 이 [은가면]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단편이 제가 아는 것만 해도 둘 이상 있습니다만, [은가면]이 그 단편들과 비교해 탁월한 점은 역시 그 '아름답고 사악한 피조물들'의 캐릭터가 너무나 말끔하게 설정된 점, 그와 더불어 아름다운 악마를 밤중에 집 안에 들여놓은 후 변화하는 소냐 헤리스의 심리상태를 은가면이라는 예술품에 맞대어 서술하는 솜씨가 넋이 빠질 정도로 훌륭한 점입니다.
게다가 그 '아름다운 악마' 헨리 애봇Henry Abbott은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검고, 창백하고, 호리호리하고, 기품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의, 예술 작품을 보는 안목은 가졌지만 재능은 없는 화가의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그는 처음 소냐 헤리스의 집에 왔을 때 벽에 걸려 있는 은으로 만든 광대의 가면(소라트Sorat의 작품이라고 나오는데, 검색을 이리저리 해 봤지만 이 작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월폴의 창작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시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을 예찬합니다. - "은(銀)은 저 광대의 얼굴에 꼭 어울리는 소재예요. "
(원본사진 : Yannic Meyer@Flickr)
천천히 흔들리고, 설레고, 기대하고,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소냐 헤리스의 감정을? 이 소설의 전개에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하게 몸을 움직이고, 낯을 붉히고, 쓴웃음을 짓고,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소냐 헤리스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문득 달이 차오르듯, 지금까지보다 한층 더 아름답게 빛나는 광대의 은빛 웃음을 돌아봅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냉혹하고 불쾌합니다. 소냐 헤리스는 모든 것을 잃고 광대의 웃음 속에 유폐됩니다. 그녀의 모든 아름다운 수집품들은 금전적인 가치로 환산되고 헨리 애봇은 마지막에 그녀의 작은 감옥으로 은가면을 가져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모든 가능성을 박살내는 선언이고요. 아, 정말로 찝찝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훌륭해요! 아직 안 읽으신 분께는, '굳이 찝찝한 이야기를 어째서 찾아 읽어야 하느냐'는 취향의 분이 아니시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Trivia
1. 번역된 휴 월폴의 소설은 좀처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만, 이 단편 [은가면]은 일단 동서미스터리북스의 [백모살인사건]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일본어 중역인 것 같지만요. 그 외에 예전에 삼천리에서 나온 [이것이 완전범죄다:사건편]에도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알라딘에 이미지가 없어서 곤란하네요-어느 책인가 하면, 표지에 '귀'가 그려져 있고 첫 번째 단편이 로드 던세이니의 "두 개의 양념병Two bottles of relish" 인 책입니다. 하서출판사의 [세계추리명작단편선]에도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2. 원래 이 작품은 휴 월폴의 단편집인 [All Souls' Night](1933)에 수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만...이 단편집은 구하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아마존에서는 어느 셀러가 중고를 $70.97에 팔고 있군요. 대략 이런 실정이라, 저는 원문을 여기서 읽었습니다.
3. 저 단편집의 제목 [만령절의 밤All Souls' Night]은 W.B. 예이츠의 시에서 따온 겁니다.
Midnight has come and the great Christ Church bell
And many a lesser bell sound through the room;
And it is All Souls' Night.
And two long glasses brimmed with muscatel
Bubble upon the table. A ghost may come;
단편집 서두의 인용문이 단편집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네요. :]
4. 이것저것 가면 사진을 올렸지만 이 작품 속에 등장한 가면은 저런 것(어느 것이든)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_^;
5. Aunt Violet's Book Museum의 Hugh Walpole Bibliography에 [The Silver Mask]가 실려 있는 앤솔로지 목록이 있네요:
-Blanche Colton Williams & Maxim Leiber's Panorama of Modern Literature (Heath, 1929)
-his collection All Souls' Night (Macmillan, 1933; Doubleday Doran, 1933)
-Dennis Wheatley's A Century of Horror Stories (Hutchinson, 1935)
-Ellery Queen's 101 Years' Entertainment (Little Brown, 1941)
-Boris Karloff's And the Darkness Falls (World Publishing, 1946)
-Herbert van Thal's Told in the Dark (Pan, 1950 wraps)
-Thomas Bertram Costain & John Beecrof's More Stories to Remember (Doubleday, 1958)
-Jack Sullivan's Lost Souls: A Collection of English Ghost Stories (Ohio University Press,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