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니시에이션 러브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책을 적게 읽은 것도 아닌데 여전히 저는 어떻게 별점을 절대평가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당장 팔아 버릴 정도로 실망한 책에는 분명히 별 하나를 줍니다만 그 외의 경우 제 별점은 혼란스럽고 난잡하기 그지없어서, '기대 이상' 이라는 이유로 별 넷을 과감하게 날리기도 하고 단순히 '기대했는데 괘씸하다'는 이유로 별 하나나 둘을 주기도 합니다. 이 난잡하고 혼란스러운 체계에는 별 다섯 개를 지독히 아끼는 것도 포함됩니다. 생각도 안 해 보고 별 다섯 개를 준 작품은 스티븐 킹의 [돌로레스 클레이본] 이나 헤닝 만켈의 [리가의 개들] 정도인데 그 외에는 달리 생각이 안 나는군요.
그러니까 [이니시에이션 러브]가 정말로 그렇게나 재미있느냐는 말을 들으면 저는 애매한 웃음을 비실비실 흘리며 질문자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열심히 고민하게 될 겁니다. 물론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재미가 있지는 않습니다. 저 별 넷은 칭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항의 표현이며 복잡하지만 매우 하찮은 장시간의 사고의 산물입니다.
이야기를 너무 모호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 리뷰의 스포일러 수준은 '띠지 및 뒷표지' 선을 유지하도록 애쓰겠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사용되는 종류의 트릭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여러 번 이런 종류의 트릭에 대한 짜증과 혐오를 표출해 왔습니다. 어딘가에서는 제가 '아, 그 XX트릭 싫어하는 블로거' 로 지칭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이니시에이션 러브]는 지금까지 읽어 본 이런 트릭을 사용하는 작품들 중에서는 제일 낫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제가 이 소설과 비교하고 싶은 다른 소설들의 제목을 늘어놓아도 좋을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그 제목을 늘어놓는 것만으로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이니시에이션 러브]가 처음부터 '당신을 속일 예정♡' 이라고-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하트가 꼭 붙어야 할 것 같습니다-과히 작지도 않은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는 종류의 소설이기는 하지만요.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을 무릅쓰고, 읽은 사람만 알도록 하는 지칭 방식을 사용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결국은 호기심의 문제입니다. 이런 종류의 트릭은 읽은 사람의 호기심을 다루는 데 실패하면 엄청난 분노를 부를 위험성이 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의 격찬을 받은 '그 난도질 이야기' 를 보고 엄청나게 분개했습니다. 그 작품의 트릭에 대한 감상은 '뭐 어쩌라고' 였습니다. 같은 작가의 '사이비종교 이야기'는 차라리 나았습니다. 호기심의 방향을 다루는 데 '그 난도질 이야기' 보다는 세련되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다른 작가의 '노인 등쳐먹는 이야기'는 세부가 마음에 들었고 진상을 알았을 때 피식 웃을 정도의 여유를 발휘할 수가 있었습니다. 업계 고전이 된 '찻잔으로 비밀문 따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습니다. '추리소설상에 응모하는 이야기'는 아직 판단을 보류하고 있습니다. '유괴사건과 사이비종교가 둘 다 나오는 이야기'는...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한심했어요.
이 작품들에 대한 제 호오는 모조리, 문제의 트릭을 '내가 진짜로 궁금한 것과 얼마나 잘 연결시켰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니시에이션 러브]를 높이 평가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저는 그런 종류의 트릭은 이 정도의 이야기에 사용되는 것이 딱 좋다고, 이 정도 크기의 호기심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렇게 속일 작정이군'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아, 저는 덤불로 길을 잘못 들지조차 않았습니다) 속은 것에 화도 나지 않았고, 이야기 속의 한심한 청춘들이 몹시 못 봐줄 꼴을 보이고는 있었지만(오 80년대여, 오 버블이여) 견딜 만은 하더군요. 이 작품의 형식은 독자를 주인공들로부터 떼어내 거리를 두게 하는 데 탁월합니다. 몇 번이고 빙글빙글 비닐 레코드 판을 돌리듯 돌리면서-아니, 새장 속에 새를 넣기 위해 원반(Taumatrope)을 돌리는 데 더 가까우려나요.
지금까지 읽은 북스피어 책 중 제일 낫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벌집에 키스하기]와 [나무 바다 건너기]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거였군요. :] 북스피어의 일서 번역본 중 제일 낫다고 정정해야겠습니다. 표지도 비교적 흉하지 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