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장석 그 비밀과 추리
월장석 동서 미스터리 북스 8
월키 콜린즈 지음, 강봉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예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리뷰를 가져옵니다)

-'고전' 에 속하는 이 소설을 이제야 읽었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변명을 하자면, 워낙 지루하다는 평을 많이 들어서요.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지루하다는 평을 한 사람들의 다른 취향에 대해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감안했어야만 했어요. 그 사람들이 호평한 미스터리들(주로 엘러리 퀸의 작품)을 제가 좋아하느냐? 그럴 리가요. -_-; 제가 싫어하는 게 있다면 엘러리 퀸과 히가시노 게이고(와 제가 담은 김치-_-)... 그 점에 생각이 미쳐서, 시대정신을 고취할 겸 읽어 보았습니다.

 ...뭐야, 역시 재미있잖아. ^ㅁ^;
 
 가장 놀란 점은 이 소설(1868년작)이 얼마나 현대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요즘의 미스터리가 무척 복고적이 되어가고 있다고도 볼 수 있고요. [월장석]이 '탐정이 모든 진상을 파헤치는 무지막지한 일직선적 구도의 추리소설'로 가기 전의 과도기적 작품이며, 요즘 미스터리들이 지금까지 나온 여러 가지 새로운 기법을 시도해 가다가, 영문학의 귀엽고 우아한 기법(제인 오스틴의 조그만 수수께끼를 계승하는!)을 재발견하는 시기를 겪고 있다고 해석하면 대략 들어맞습니다. 무엇보다 첫 번째 화자이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베린더Verinder가의 집사 가브리엘 베터리지Gabriel Betteredge의 서술과 그 성격은, 디킨즈적 유쾌함을 넘어서서(윌키 콜린즈는 진짜로 디킨즈의 친구였다고 합니다.) 거의 라이트노벨적 현란함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순히 시대상에서 나온 거라고만 볼 수 없는 골때리는 서술이 너무 많이 나오기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친구(시대물, 빅토리아시대 상복 광. 한마디로 엄청난 변태)한테 '이건 시대상 탓일까? ' 라고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그냥 '나만의 세계' 아냐? "



 영문판 표지 중 하나.


..."집사쯤 되는 사람이 저따위의 '나만의 세계'를 가져서 어쩌려구 ;ㅁ; " 라고 항의했더니, 다시 "집사라는 직업이야말로 '나만의 세계' 그 자체일 것 같은데..." 라는 대답. 좋습니다. 항복합니다. 생각해 보니 그럴듯하더라구.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만장 일치로 이 책에서 가장 매혹적인 캐릭터로 베터리지를 지목할 겁니다. 파이프 담배와 [로빈슨 크루소]에 집착하며, 마님과는 계급을 넘어선(*넘어서지 않습니다) 우정을 유지하고 있고, 아름다운 메이드 딸을 두고 있으며, 탐정열에 들뜬 자신을 책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두근거리며 커프 경사Sergeant Cuff(*이 시대의 Sergeant를 그냥 '경사' 로 번역해도 될지 모르겠군요. 참고로 저 동서미스터리판에서는 '형사부장' 이었습니다)를 따라나서는 집사...현대적입니다, 심하게 현대적입니다! 설명만 보면 디킨즈 시대 캐릭터인지 라이트노벨 캐릭터인지 모를 것 같습니다.  


 또 놀란 점은-[북풍의 등에서] 이야기를 쓸 때 얼핏 언급했습니다만-이 책이 또 하나의 걸출한 캐릭터 드루실라 클랙Drusilla Clack 양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지금처럼 과학과 종교가 얼렁뚱땅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은 시대의 사람들은 어느 방향으로든 더욱 격렬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은 생각도 들고요(역시 [북풍의 등에서] 이야기를 쓸 때 슬쩍 언급했지만, 킹즐리를 높이 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열렬한 기독교인이자 '전도 몬스터'라고 표현해야 할 미스 클랙의 서술은, 자기 입으로 자기의 우스꽝스러움을 줄줄 털어놓게 만든다는 데서 잔혹할 정도로 통렬한 풍자의 기미를 담고 있습니다. 막무가내 전도꾼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이 이미 150년 전에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허탈한) 웃음이 나오더군요. 아 좀, 이 나라도 어떻게 안 되는 거야? ;ㅁ;

 전체적으로 담고 있는 정보의 양이 많고, 캐릭터의 조직도 훌륭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죠. 베터리지는 '상류 계급 취미'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품고 있습니다. 딱히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개 뭔가 할 일이 없을까 찾아다니는 일'로 이루어진 생활을 하는 지체 높은 분들Gentlefolks, 곧 '날마다 빈 약상자를 들고 나가 작은 양서류 및 곤충을 잡아와서 학대하는 박물학에 취미가 있는 도련님 및 아가씨들'에 대한 베터리지 식 재치있는 서술이 두 페이지 가량 이어집니다. 전문 인용하고 싶은데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여기 실린 원문이라도...


 그리하여 그는, 프랭클린 블레이크Franklin Blake와 레이첼 베린더Rachel Verinder에게 어디까지나 사랑과 존경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벌이는 행각만은 도저히 존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할 줄 아는 프랭클린씨'가 만든 용제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취가 풍겼고(It stank.), 저 두 사람이 못쓰게 만든 것은 '공평하게 말해 문밖에 없었습니다'. 그 문 장식의 도안은 그리핀, 새, 꽃, 큐피드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완성본을 본 가브리엘 베터리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 '그리핀이며 큐핏이며 그밖의 여러 꽃들과 다른 도안들이 수가 너무 많고 자세가 혼잡하여 다 보고 난 뒤에는 머릿속에 불쾌감이 언제까지나 남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보기에는 대단히 아름답다는 것을 나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리고 이 문짝이 완성되는 순간까지 그는 그들의 작업을 '문을 망치는 일' 이라고 지칭합니다!


뜬금없이 라파엘 작품이 등장하는 이유 : 베터리지에 의하자면 저 도안은 라파엘의 그림을 베낀 겁니다. 그리핀은 없지만 큐피드와 죄많은 아기천사 그림을 통해 참극의 현장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 봅시다. ^_^;

사건의 여러 면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서술시키는 방식은 제가 몹시 좋아하는 것이고, 탐정 말고 다른 캐릭터도 중시하는 점 역시 그러합니다. 미스터리를 시도했다고 해도 여전히 '사람' 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까닭인지, 제가 싫어하는 납작한 여성 캐릭터나 겉멋든 (역시 납작한) 탐정이 없습니다. 프랭클린 블레이크, 가브리엘 베터리지, 커프 경사, 에즈라 제닝스Ezra Jennings 네 사람은 모두 탐정이면서 자기만의 맹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고, 정확히 그런 인물이 볼 법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에 위화감이 없습니다. 집사 베터리지 씨부터 '모험물'의 겉멋든 젊은이 프랭클린 블레이크나 현대물이라면 분명 모에캐릭터가 되었을 에즈라 제닝스까지, 디킨즈와 이런 캐릭터 이야기를 주고받는 윌키 콜린즈를 생각하면 즐거워집니다.

 저는 메인 '트릭' 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분명 굉장히 미심쩍습니다만 고룡무협의 추리적 요소들도, 쿄고쿠도 이야기들도 그 세계 안에서 납득이 간다면야 아무튼 딴지걸지 않기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이니까요. 진정 여기서 무릎을 치게 할 대목은 그 행동이 '무엇으로 이어졌느냐' 이고, 그것은 논리와 우연과 기회라는 모순되는 개념이 하나 되어 피어나는 꽃입니다. 그리고 후배 미스터리 작가들이 한동안 쫓았던 것도 그 꽃이었지요.

Trivia
1. 동서미스터리의 악명높은 중역, 그 피해상이 격렬하군요. 상식적인 표기법에 들어맞게 써 놓은 이름은 '레이첼'과 '프랭클린 블레이크'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_-; '돌시이러'라니 심각하게 창의적입니다! (원문은 위에도 썼다시피 Drusilla)

2. 저는 4장 첫머리의 'dinner'를 '저녁식사'로 해석하면 7장까지의 시간감각이 터무니없이 이상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요크셔의 저녁이 칠순의 집사와 외국 여행에서 막 돌아온 사람이 저녁식사를 팽개치고 야외에서 낮잠을 즐겼다는 핑계가 통할 정도는 분명 아닐 텐데요. 게다가 저녁식사 시간에 도착한 것이 '4시간 일찍' 온 거라면 프랭클린 블레이크는 대체 원래 몇 시에 도착할 작정이었던 겁니까, 친척이라고는 해도 남의 집에!

3. '비둘기 알만한 루비'나 '물떼새 알만큼 커다란 다이아몬드'라는 게 어느 정도 현실감이 있는 사이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저 말은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한 도시인들에게는 이제 비유로써의 생생함마저 상실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_-;

4. 알라딘의 이 책 페이지에 실려 있는 어느 분의 2005년 1월자 리뷰는 좀 눈물겨웠습니다. 저어, 21세기에 출판되는 책은 모조리 21세기에 씌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_^; 게다가 심지어, 틀렸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도인들은 모두 고귀한 신념을 가진 '신사' 들이고 동시대 영국의 짐승들보다 훨씬 나은 존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_-;

5. 웹 여기저기에 원문 전문이 있습니다 : Project Gutenberg | Bibliomania

6. WILKIE COLLINS INFORMATION PAGES

 


 William Wilkie Collins (1824-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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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30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ppie 2008-06-04 15:46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일단 인사를 드리고...
댓글을 늦게 읽어서, 지금도 있는지 열심히 가 봐야겠군요. ㅠ_ㅠ 지난 번에 헌책방 검색을 돌렸을 때는 그 당시 찾던 것 중 이것만 없었는데(대신 스코트 오델의 [푸른 돌고래섬]을 구했습니다) 이번에 사야겠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시장미 2008-06-04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 유익한 페이퍼군요. 와우.. 눈 돌아가요 으흐

eppie 2008-06-05 12:58   좋아요 0 | URL
앗, 초면에 대뜸 단 덧글을 보고 와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

최상철 2008-07-2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홈피에 덧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까지 문스톤이 한자 그대로 월장석인줄 알았네요;; 이 글을 보자마자 놀랄만한 지식에 읽으면서 자꾸 깜짝깜짝 놀랩니다! 미처 제가 발견하지 못한 점까지 발견하셨네요. eppie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eppie 2008-07-29 14:42   좋아요 0 | URL
앗, 주제넘은 덧글을 달아 버린 건 아닐까 염려했는데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ㅜ.ㅠ 지식이라기보다는, 검색벽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니 대단한 것은 실은 상철님이지요. :] 저도 좀 더 젊은 나이에 [The Moonstone]이나 그 외 다른 재미있는 것들을 읽었더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답니다. 앞으로도 좋은 리뷰 많이 부탁드릴게요. ^_^

수아 2012-01-12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녕하세요ㅎㅎ 좋은 정보 많이 얻고가네요^_^ㅋ 우와
이 많은 걸 어떻게 정리하셨어요? 저는 못할텐데~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