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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ie on My Mind (Prebind)
Garden, Nancy / Bt Bound / 1999년 10월
평점 :
품절


 두 번의 쓴웃음을 짓게 됩니다. 대한민국에서 90년대 이전에 의무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을 무엇보다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미국의 보수성일 겁니다. 어렸을 때 미국 관련 미디어를 접하면서 그런 당혹스러움을 맛본 적이 없으셨나요? 이러한 혼란은 저 나라가 기본적으로 기독교 국가라는 점 이외에도(호머 심슨도 일단 교회에는 갑니다), 하나로 정의하기에는 인구가 너무 많다든지 나라가 너무 크다든지 하는 데서 유래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혼란은 이 나라가 그 모든 걸 다 쑤셔담고 있기에는 너무 작다는 데서 유래하는 것 같고요. 

 어쨌든,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도저히 80년대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종류의 갑갑함과 야만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려내는 호모포비아의 면면이 아무리 무지하고 야만적이고 찌질해도 현대 한국의 현실보다는 훨씬 관대하다는 데서 두 번째 쓴웃음을 짓습니다. 

 이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이 좀 닭살이 돋을 정도로 일반적인 로맨스의 정석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후반의 'inquisition' 이 씁쓸하게 부각됩니다. 명문 사립 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인 소녀 라이자Liza와 이탈리아 인 이민자 가정의 소녀 애니Annie의, 운명적이고 문학적이면서 달콤한 러브 스토리거든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는 무려 미술관이고 그 때 애니는 무려 자작곡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건축가 지망생인 것 같지만 실은 몽상가인 라이자는 다소 격한 기질의 소유자에다 예술적인 감성이 풍부하고 역시 몽상가인 애니에게 단숨에 빠져들게 됩니다. 둘의 로맨스는 내내 기사 판타지 혹은 아서 왕 판타지를 동반하며...방과 후의 데이트, 여름에는 바다, 크리스마스에는 서로 '우연히' '매우 비슷한 느낌의' 반지를 선물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게이라니! " 하고 고민하는 종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애니는 물론이고 라이자도, 좀 흔들리기는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좀 지나칠 정도로 침착하고 확고한 자신감을 보여 줍니다. 일단 사랑하기로 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느낌으로, 둘은 서로에게 빠져듭니다. 그러나 이 바보스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찌질한 악의에 의해 갑자기 냉혹한 현실과 만나게 됩니다. 그 결과 라이자는 '법정보다는 종교재판 같은' 학교 청문회에 서게 돼요. 

 작가는 이 연인들에게 그렇게 가혹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해피 엔딩이에요. 둘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다시 만나고,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변 캐릭터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라이자의 멘토들은 학교를 떠나야 했고, 샐리 자렐Sally Jarrell의 지나치게 교화되고 상처받은 영혼은 아마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아오는 데 긴 시간이 걸리겠지요.  

 이 책은 2007년에 번역되었습니다만,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라는 제목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네요. '내 마음의 애니' 라는 말을 중얼거릴 때 드는 작고 절실한 울림과 비교해 보세요. 원서로는, 제가 가진 책은 현재 품절인 것 같고 25주년 기념 페이퍼백이 나와 있는데, 표지가 참 예쁘고 현대적입니다만 제가 갖고 있는 일레인 노먼Elaine Norman이 그린 1992년작 그림의 우울한 표지가 더 마음에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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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2-22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소녀,소녀를 사랑하다를 읽었어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찌질한 악의, 네, 그렇지요.

eppie 2009-02-24 14:29   좋아요 0 | URL
그런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아요. 자신과 다르다는 것만으로 진심으로 남의 불행을 바랄 수 있는 사람이...

다락방 2009-02-24 16:58   좋아요 0 | URL
다들 잊고 있는거죠.
다른 사람이 불행해진다고 해서 내가 더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예요.

라로 2009-02-2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어 판의 제목은 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려고 한게 아닐까 생각되네요~.^^;;;
님은 저 책을 번역하신다면 제목을 어떻게 하시겠어요????ㅎㅎ

eppie 2009-03-10 12:52   좋아요 0 | URL
위에 썼던 대로 '내 마음의 애니' 겠지요. ^^; 한국어 같지 않다는 지적이 들어오면 '내 마음 속의 애니' 나...
 
추억의 학교 우리문고 9
조반니 모스카 지음, 김효정 옮김 / 우리교육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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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ABE 전집 1권 [나의 학교 나의 선생]을 2004년 새로 출간된 버전으로 읽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 별 두 개는 원작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 집으면 짧게는 반나절에서 길게는 반평생까지 우울해지는 것으로 유명한 ABE 전집의 책들 중에도 트라우마 걱정 없이 남에게 권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들이 가끔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나의 학교 나의 선생]입니다. ABE 전집을 고분고분 순서대로 읽어제꼈던 저는 가장 먼저 읽은 [나의 학교 나의 선생]을 예나 지금이나 사랑하고, 저 전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책 [추억의 학교]는 아닙니다.

이 책의 원제가 '추억의 학교Ricordi di scuola' 라고 해서, 이 소설의 가치가 '추억' 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추억이냐가 문제지요. ABE 전집에서 [나의 학교 나의 선생]을 꺼내 읽을 때, 생각하면 좀 아득해지는 것 같은 상황들조차도 결과적으로는 행복하게 넘어갈 수 있게 했던 것은 작가 조반니 모스카 선생의 다소 뻔뻔하고 따뜻한 유머감각이었습니다.

새 책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물론, 문체가 바뀌었습니다. '합니다' 대신 '한다' 로 바뀌었습니다. 좀처럼 이런 종류의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저도, 이 작품에는 '합니다' 체가 어울린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문체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새 판에서는 유머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가 힘들다는 점입니다. 아래 인용문은 ABE 전집 판에서도 제가 상당히 좋아했던, '옛날 시험문제와 요즘 시험문제의 차이' 대목의 도입부입니다만 새 버전에서는 이렇습니다.

   
  (...) 교사 생활을 한 지 이십 년이 지난 뒤에도 교사들은 모두 똑같다. 모두 똑같은 패션의 넥타이를 구입한다. 벤젠 냄새를 풍기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똑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아이네아스는 어린 아들 아스카니우스와 함께 테베레 강 하구에 상륙했다' 혹은 '로렌초 씨는 지름 14미터의 둥근 지붕을 가지고 있는데, 그 지붕을 구리판으로 덮으려고 한다' 등등.
그러나 나이 든 교사들만 그렇게 말한다. 젊은 교사들의 수학 문제엔 여러 사람과 장소가 등장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공책에 이렇게 적는다. '늙은 옷감 장수가 48미터의 천을 산다.' 혹은 '고모가 돌아가셨다. 잔네토와 루이지노는 한 송이에 0.05리라 하는 꽃을 가져가려고 한다. 잔네토는 1리라를, 루이지노는 50첸테시모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런 말도 있다. 늙은 옷감 장수는 길고 하얀 수염을 기르고 있다. 그런데 그가 깃털이 아름다운 앵무새를 어깨에 놓는 걸 누가 방해할까? 아이들은 그러므로 앵무새를 상상한다. 늙고 착한 상인의 상점에 행복하게 들어가서 앵무새를 쓰다듬으면서 문제를 푼다.
 
   

문제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저는 위 문장들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저는 조반니 모스카가 저런 문장을 썼다고 믿고 싶지가 않습니다.

 
모스카 선생님과 아드님들.


이 책에는 ABE 판에는 없던 챕터 세 개가 더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린 이유는 알겠어요. 아마 '비교육적' 이라서일 겁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그러니까 젊은 시절의 조반니 모스카 선생이-대학 입시 준비를 하면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장면 따위가 나오거든요. :] 그 부분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어요.

하지만 이 책에는 '저의' 모스카 선생님이 없습니다.
덕분에 다시 이탈리아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참 공부를 안 했더니 원제를 보고 겨우 사전 없이 무슨 뜻인가 알 수 있고, 위키페디아 첫부분 한두 줄을 이런 뜻인가 넘겨짚고, 이걸 읽어보고 어느 장면인가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의 쪼렙이 됐지만...이 책을 원문으로 읽고 싶다는 소망은 여전합니다.

Trivia
1. 물론 이 책에는 그런 종류의 아주 끔찍한 애들은 나오지 않습니다. 미화라기보다는 생략이라고 생각해요.
2. 늙어서 다시 보니, 이렇게까지 눈물나는 이야기였던가 싶은 부분이 꽤 있었습니다. (안토니오 가르비니 선생님 ;ㅁ;)
3. [나의 학교 나의 선생] 하면 역시 이 분 빼고 갈 수는 없지요. : ] 다들 기억하시죠?


 
Camillo Benso, conte di Cav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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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2008-11-24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발췌하신 부분을 보니 확실히 어색하네요. 느낌이 다릅니다, 달라요! 자칫하면 꽤 우울할 수 있는 이야기까지 참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재미있는 책이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갓 부임한 선생님이 문제아 반을 맡아서 큰 파리를 종이총으로 잡는 걸로 아이들의 존경을 얻는 이야기라던가, 국가에서 요구하는 자격 때문에 시험을 치는 노동자 아저씨들의 시험을 감독하게 된 선생님이 슬쩍 힌트를 주는(?) 그런 이야기가 기억이 나네요. 다시 읽고 싶어요.^^ 근데 새로 나온 책은 사야 하나 고민이 되네요.

eppie 2008-11-25 10:07   좋아요 0 | URL
내용이 저 짝인데도 다시 내 줄 계획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어서, 좀 난감합니다. ㅠ_ㅠ 그냥 ABE 판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봐요. 저도 그 자격시험을 보러 온 노동자 아저씨들 이야기가 굉장히 좋았는데요. 노처녀 선생님 이야기도 좋았죠. 마르티넬리의 금화를 돌려받으려고 여선생한테 공작(?) 하는 얘기는 예나 지금이나 좀 씁쓸하지만...가르비니 선생님(저축한 돈으로 말을 한 마리 사고 싶어했던 그 분이요)이야기같은 아예 슬픈 이야기랑은 다른 종류의 씁쓸함이 있었어요. 그래도 보석 님 말씀대로, 전체적으로 분위기 조절이 잘 된 책이었죠.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쪽빛그림책 2
이세 히데코 지음, 김정화 옮김, 백순덕 감수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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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책들은 가끔 '병원' 을 방문하고, 회색 띤 청색이나 탁한 오렌지색 커버를 쓰고 서가에 되돌아옵니다. 전 제 책도 고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책들의 이런 여행에 대해 궁금해 했던 사람들에게 이세 히데코의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는 좋은 선물이 될 겁니다.

 를리외르Relieur라는 건, 고서의 유지 및 보수를 위해, 낱장을 정리하고 표지를 꾸며 책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직업이라는군요. '책' 자체가 사치품이 아니게 된 현대에는, 위에서 언급했던 대량 생산된 대중적인 책의 수리보다는, 좀 더 개인적인 것이 를리외르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만(약간의 아이러니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가 횡설수설하는 것보다는 작가의 설명을 인용하는 것이 낫겠지요.

   
  를리외르는 유럽에서 인쇄 기술이 발명되어 책의 출판이 쉬워지자 발전한 실용적인 직업인데, 일본에는 이런 문화는 없다. 요즘에는 '특별한 한 권을 위해 제본하는 수공예적 예술' 이라는 아트 장르로 보고 있다.
이 일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출판업과 제본업을 겸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던 제본을 하는 직업이다. IT화, 기계화 시대에 접어들자 파리에서도 제본의 60공정을 모두 수작업으로 할 수 있는 제본 직인은 손에 꼽을 정도다.
 
   

 저 설명은 굉장히 어마어마하게 들립니다만, 이 책은 전혀 위압적이지 않습니다. 어린 소녀가 자신이 사랑하는 책을 살리기 위해 를리외르를 찾고 그의 작업을 지켜본다는 소박한 연출을 통해 이 책 장인들의 자부심도, 를리외르라는 직업의 대단함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섬세하고, 아름답고, 뛰어난 책이에요. 표지에도 쓰인 고상한 푸른 색으로, 소피와 를리외르 아저씨의 하루(사실은 이틀)를 아름다운 수채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책을 고칠 곳을 수소문하며 거리를 헤매는 소피와 공방으로 출근하는 노장인의 모습을 그림책의 양쪽 페이지에 배치한 깜찍하고도 위트 있는 묘사나, 묵묵히 일하는 를리외르의 곁에서 조잘거리는 어린 소녀의 묘사 등,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흐뭇한 웃음과 숨이 막힐 듯한 경이감을 동시에 자아냅니다. 이 그림책은 상당히 많은 페이지를 를리외르라는 직업과 그 작업 공정에 할애하고 있고, 어디서나 담담하고 예쁜 수채화 표현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낱장으로 흩어져 버린 식물도감은 소피의 이름을 표지에 단 아름다운 새 책으로 태어납니다. 소녀는 자기만의 식물도감에 애착을 쏟았고 식물학 연구자가 되었습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가장 놀라운 부분은 작가가 일본인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했는데...하긴, 생각해 보면 모든 이런 책은 일본인이 쓰는 거죠. (물론 농담입니다. ^ㅁ^; )  다만 이 한국판은 최초의 한국인 를리외르가 감수를 했고, 짧은 추천사도 싣고 있습니다.
 작가 이세 히데코는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친 를리외르라는 직업에 넋을 잃고 오랫동안 파리에 머물며 공방 주위를 맴돌았던 모양입니다. 숀 탠의 [도착] 도 그랬지만 이 그림책에서도, 도저히 아이들만을 위해 그린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아찔한 매혹이 느껴지는데-실로 어른의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 멋진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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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11-13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 요즘 저는 eppie님의 글 읽는 재미에 산다고 해도 정말이지 과언이 아니예요. 멋진 책이에요, 라는 끝맺음 덕에 저도 보관함에 넣습니다. 리뷰 정말 잘 쓰세요, eppie님.

eppie 2008-11-14 13:05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ㅠ_ㅠ 하지만 책은 정말 좋은 책이에요. 제 말재주로 충분히 전달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근래 좋은 그림책들을 많이 보았는데, 사진 찍기가 게을러서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어요.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17
한스 페터 리히터 지음, 배정희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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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에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글입니다)

-언제고 ABE 전집 트라우마작 순위 투표를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 계획을 실행한다면, 1위가 무엇일까를 놓고 내기가 벌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참가하는 사람이나 기획하는 저나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가 1위가 될 거라는 건 알고 시작하는 일이니까요. 재미있어지는 건 2위부터의 결과일 겁니다. 제가 읽은 범위 안에서 꼽자면 [칼과 십자가], [여우굴], [형님], 그리고 이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정도가 순위권 후보가 아닐까 싶네요. ^_^;

어릴 때의 저는 확실히 [칼과 십자가]나,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보다 [여우굴], [형님],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를 더 견디기 힘들어했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별로 달라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는 '어릴 때 이런 걸 읽었었지' 하고 농담 삼아 [칼과 십자가]나,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후자의 책들은 좀처럼 입에 올리기가 꺼려졌습니다. 저는 아직 저 이야기들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이건 단순히 시대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먼 이야기라 일종의 로맨틱한 색채까지 깃들어져 버린 [칼과 십자가]나,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와 달리, 후자의 책들은 아직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가 제게 안겨준 씁쓸함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이건 명백히 같은 시대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종류의 책이니까요. 열 살 때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알았냐고요? 여러분도 알았을 겁니다. 요즘 애들도 알 걸요. 애초에 안네 프랑크와 같은 나이가 되기 전에 [안네의 일기]를 처음 읽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는 나라잖아요. 한국의 교육방법은 어떤 영문에서인지 어린애라도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계 없는 나라의 관계 없는 먼 옛날에 벌어진 일들을 꿰고 있게 만드는데:) 그것이 별로 안목을 높여 주는 것 같지 않아서 유감스러울 뿐이지요. 이 책에서 한 방편으로 제시하는 '알아야 한다' 의 반례로 제시할 수 있는 게 한국이란 나라의 경우일 겁니다.

다시 책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저는 열 살 이후 이 책을 다시 읽은 적이 없습니다. 거의 20년만에 다시 읽자니 여러 가지가 눈에 띄네요.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이렇게 에피소드 위주였는지 잊고 있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훨씬 더 연속적인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후반이 되면서 일화들 사이의 시간 간격이 좁아지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이야기는 한 소년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추억의 '장면들' 의 집합입니다. 친구 프리드리히 슈나이더와 그의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쓴 다음에 시간적 순서대로 늘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도록, 서술 자체에 가치 판단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 일화들은 작가가 주의 깊게 선택한 것일 터이고, 이 선택과 책 자체에는 가치 판단이 들어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작가의 그 전략은 유효합니다. 고의로 사건의 진행이나 인과를 빠뜨린 부분이 있는 서술은, 마치 이 기억이 우리의 기억인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읽고 나서 여기 묘사된 일상의 사소함이 얼마나 마음을 가득 채웠는지를요. 친구의 어머니 슈나이더 부인이 얼마나 작고 화사했는지도, 친구의 아버지 슈나이더 씨가 입학식 날 놀이공원으로 데려가 회전목마를 태워 주었던 것도. 자기네 민족의 전통에 따라, 사람들 앞에서 경전을 노래하고 어른이 되는 친구를 엿보았던 것도. 현실이 조금씩 조금씩 친구와 그 가족에게 가혹해지다가, 마침내 무슨 농담 같고 악몽 같은 파멸이 찾아왔을 때, 일상의 조각이 가끔 모습을 드러내고-놀이공원에 갔던 때의 사진, 뚜껑만 남은 만년필-그것은 상황의 비극성을 인식하게 하는 데 무엇보다 효과적입니다. 다시 읽어도, 기본적인 것을 잊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정말로 대단한 소설이에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깝다'는 것은 시간적 거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 보다 좀 더 참조하기 쉬운 형태의 은유라는 뜻도 돼요. 21세기의 한국에서 치료를 할 줄 안다고 사람을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형태의 반론이 나올 여지가 없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가, 어쨌든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만...
제가 사막 계시종교 세 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의심'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70년 전에 독일에서, 얼마 전의 한국에서 증명되었듯이 민중의 믿음은 때로 독입니다. 굶어죽을 지경일 때 눈앞에 나타난 메시아가 알고 보니 피에 주린 살인마더라 하는 패턴에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요! 영화였으면 뻔하다고 비웃었을 거면서! ;ㅁ;

Trivia
1. 새 버전은 낯선 유태인들의 문화에 대한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권말에 상세한 주석이 들어 있고 출전도 밝혀져 있습니다. 모처럼 쓸데없이 오지랍 넓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좋은 시도였습니다. 저는 이 정도로 책 구성을 칭찬하는 일이 드물어요! :]
 실은 권말에 30년대 초중반부터의 유태인 차별법령 연보가 실려 있는 걸 보고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웹상에는 법령 발표 시기에 기초하여 이 소설의 챕터들의 시간적 배경이 언제인지 연대를 구체적으로 밝혀 놓은 자료도 있기는 했습니다만...멋져.

2. 한국어판 제목이 원제를 충실히 번역한 데 비해, 프랑스어판, 스페인어판 제목은 '내 친구 프리드리히' 쪽인데요.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가 작품의 주제 뿐만 아니라 소재나 구성과도 일치하는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친구 프리드리히'라는 제목을 되뇌어 보면 괜히 감상적이 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군요. 어느 쪽이든 영문판 제목 [Friedrich] 보다는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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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임의 비밀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6
로버트 오브라이언 지음, 최지현 옮김 / 보물창고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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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은 '그러나 그 다음에' 일 겁니다. 작품 내부에서 일어났던 의견 충돌이나 분쟁도, 실제로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채 이 모든 것을 읽은 사람이 생각할 '그 다음' 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네, 이 책은 좀 가혹할 정도로 독자에게 생각할 것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 찜찜한 이야기는 피츠기븐 씨네 채소밭에서 시작됩니다. 원제의 '프리스비 부인'은 남편 없이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씩씩하고 생활력 강한 들쥐 부인입니다. 프리스비 가족은 겨울을 피츠기븐 씨네 채소밭 아래에서 보내고, 날이 충분히 따뜻해지면 냇가의 여름 집으로 옮겨갑니다. 날이 따뜻해지면 밭을 파헤쳐서 씨를 뿌리게 되니까요. 그런데 미처 여름 집으로 옮겨갈 만큼 날씨가 따뜻해지기 전에, 프리스비 부인의 아들 티모시가 폐렴에 걸리고 맙니다. 그 해는 봄이 빨라 피츠기븐 씨는 슬슬 트랙터를 정비하고 있고, 프리스비 부인은 애가 탑니다. 무리해서 이사를 하면 티모시를 잃겠지요. 날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다가는 온 가족이 다 죽을 지도 모릅니다!

이쯤 되면 처해 있는 위기상황의 무게가 다릅니다. 프리스비 부인은 어떻게든 아이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방법을 생각하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젊은 까마귀와의 우연한 만남이 프리스비 부인을 현명한 올빼미에게로, 그리고 한 동네에 살면서도 교류가 없었던 시궁쥐들에게로 이끕니다. 프리스비 부인은 그들이 *특별한* 쥐라는 것을 이미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들의 비밀은 평범한 들쥐 프리스비 부인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그들은 NIMH라는 기관의 실험실에서 도망쳐나온 쥐들로, 문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익숙한 이야기지요. 이제 (실험)쥐와 인간은 개와 인간만큼이나 친숙한 관계입니다. [니임의 비밀] 이야기는 대략 [앨저넌에게 꽃을Flowers for Algernon][핑키와 브레인Pinky and the Brain]의 사이 정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마 한쪽에 좀 더 가깝기는 할 겁니다.) 이 관계의 가장 극단적인 버전은 물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고요.

이분들 기억하시죠?

 이 책에서는 상당히 많은 쟁점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검색에서 눈에 띄는 이 책 리뷰들하고는 의견이 좀 달라서요...^^; 저는, 이 책에서 얼핏 보아 가장 눈에 띄는 동물실험 이야기는 그냥 맥거핀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물실험의 당위에 매달리게 되면 다른 많은 것들을 놓칩니다. 스무 마리 시궁쥐와 두 마리 들쥐가 얻게 된 '지성'을 다루는 방식이나, 이 쥐들의 탈주에 대한 NIMH의 대응에서는 어느 정도 분명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니코데무스와 제너 일행의 대립도 마찬가지고요. 이 책은 윤리와 억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도 여성학적 비판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프리스비 부인도 니코데무스나 저스틴도 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마음 아픈 정치성을 접어두더라도 이 책은 훌륭한 작품입니다. 까마귀의 등에서나 처음 장미덤불 아래로 내려갔을 때 프리스비 부인이 겪는 모험담은 환상적이며, 올빼미와 마주했을 때의 분위기도 그렇습니다. 훌륭한 판타지와 적절한 캐릭터 구현입니다. 프리스비 부인은 정말로 사랑스런 여성이며 니코데무스의 세부 설정도 그렇습니다. 다만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저스틴인데 이놈도 역시 정의롭기 짝이 없어서요. 쥐인데도 정신이 번쩍 드는 푸른 눈일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의 두 마리가 누구였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은 작가의 행동은 재치가 있습니다. 이것도 NIMH라는 이름만큼이나 눈가리고 아웅인 것 같지만요.

 NIMH의 스물두 마리 중에서 절반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쏜 밸리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을 것이고, 프리스비 부인의 아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또 그 길을 이어갈 겁니다. 어릴 때 이걸 읽지 못한 것은 분합니다. 이 이야기를 마음 한구석에 담아 두고 있었다면 자라면서 마주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훌륭한 생각의 실마리가 되었을 테지요. 참고로 그 때 이 책의 번역본이 존재하지 않아서 읽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이 1972년작이고, 저보다 5년 이상 연상인 사람이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다고 했으니 찾아서 읽으려면 읽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연이 닿지 않았을 뿐이죠.

Trivia
1. 이 작품은 [니임의 비밀The Secret of NIMH]이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설정은 좀 다른 것 같은데, 프리스비 부인이(그림체를 감안하면) 아주 귀엽습니다. 열성적인 팬페이지 Thorn Valley에서 스크린샷을 보실 수 있습니다.

2. 근래 본 책 중 이 정도로 더스트 재킷 까버리고 싶었던 책은...



3. 수수께끼의 기관 NIMH는 작자의 의도나 뭐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가 맞겠지만, 그래도 이걸 확정된 듯이 본문에 써버리는 데는 문제가 좀 있다고 생각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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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8-0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작년 여름, 우리 아이들과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라 반갑네요~ 이런 심도 있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지만요~ ^^ 고베여행후기에 낫토라고 알려주셔서 감사 인사 드리러 들렀어요. ^^

eppie 2008-09-11 16:50   좋아요 0 | URL
한동안 바빠서 서재에 들리지 못했었습니다. 뒤늦게라도 댓글을 남겨놔요. ㅠ_ㅠ 댓글 보고 여기까지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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