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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ㅣ 쪽빛그림책 2
이세 히데코 지음, 김정화 옮김, 백순덕 감수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9월
평점 :
-도서관의 책들은 가끔 '병원' 을 방문하고, 회색 띤 청색이나 탁한 오렌지색 커버를 쓰고 서가에 되돌아옵니다. 전 제 책도 고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책들의 이런 여행에 대해 궁금해 했던 사람들에게 이세 히데코의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는 좋은 선물이 될 겁니다.
![](http://pds6.egloos.com/pds/200807/31/82/a0008982_4891cba27043e.jpg)
를리외르Relieur라는 건, 고서의 유지 및 보수를 위해, 낱장을 정리하고 표지를 꾸며 책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직업이라는군요. '책' 자체가 사치품이 아니게 된 현대에는, 위에서 언급했던 대량 생산된 대중적인 책의 수리보다는, 좀 더 개인적인 것이 를리외르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만(약간의 아이러니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가 횡설수설하는 것보다는 작가의 설명을 인용하는 것이 낫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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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리외르는 유럽에서 인쇄 기술이 발명되어 책의 출판이 쉬워지자 발전한 실용적인 직업인데, 일본에는 이런 문화는 없다. 요즘에는 '특별한 한 권을 위해 제본하는 수공예적 예술' 이라는 아트 장르로 보고 있다.
이 일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출판업과 제본업을 겸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던 제본을 하는 직업이다. IT화, 기계화 시대에 접어들자 파리에서도 제본의 60공정을 모두 수작업으로 할 수 있는 제본 직인은 손에 꼽을 정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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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설명은 굉장히 어마어마하게 들립니다만, 이 책은 전혀 위압적이지 않습니다. 어린 소녀가 자신이 사랑하는 책을 살리기 위해 를리외르를 찾고 그의 작업을 지켜본다는 소박한 연출을 통해 이 책 장인들의 자부심도, 를리외르라는 직업의 대단함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섬세하고, 아름답고, 뛰어난 책이에요. 표지에도 쓰인 고상한 푸른 색으로, 소피와 를리외르 아저씨의 하루(사실은 이틀)를 아름다운 수채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http://pds6.egloos.com/pds/200807/31/82/a0008982_4891cb899f094.jpg)
책을 고칠 곳을 수소문하며 거리를 헤매는 소피와 공방으로 출근하는 노장인의 모습을 그림책의 양쪽 페이지에 배치한 깜찍하고도 위트 있는 묘사나, 묵묵히 일하는 를리외르의 곁에서 조잘거리는 어린 소녀의 묘사 등,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흐뭇한 웃음과 숨이 막힐 듯한 경이감을 동시에 자아냅니다. 이 그림책은 상당히 많은 페이지를 를리외르라는 직업과 그 작업 공정에 할애하고 있고, 어디서나 담담하고 예쁜 수채화 표현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http://pds9.egloos.com/pds/200807/31/82/a0008982_4891cbe7f29f0.jpg)
낱장으로 흩어져 버린 식물도감은 소피의 이름을 표지에 단 아름다운 새 책으로 태어납니다. 소녀는 자기만의 식물도감에 애착을 쏟았고 식물학 연구자가 되었습니다.
![](http://pds9.egloos.com/pds/200807/31/82/a0008982_4891cec0ee9b0.jpg)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가장 놀라운 부분은 작가가 일본인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했는데...하긴, 생각해 보면 모든 이런 책은 일본인이 쓰는 거죠. (물론 농담입니다. ^ㅁ^; ) 다만 이 한국판은 최초의 한국인 를리외르가 감수를 했고, 짧은 추천사도 싣고 있습니다.
작가 이세 히데코는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친 를리외르라는 직업에 넋을 잃고 오랫동안 파리에 머물며 공방 주위를 맴돌았던 모양입니다. 숀 탠의 [도착] 도 그랬지만 이 그림책에서도, 도저히 아이들만을 위해 그린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아찔한 매혹이 느껴지는데-실로 어른의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 멋진 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