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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시에이션 러브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책을 적게 읽은 것도 아닌데 여전히 저는 어떻게 별점을 절대평가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당장 팔아 버릴 정도로 실망한 책에는 분명히 별 하나를 줍니다만 그 외의 경우 제 별점은 혼란스럽고 난잡하기 그지없어서, '기대 이상' 이라는 이유로 별 넷을 과감하게 날리기도 하고 단순히 '기대했는데 괘씸하다'는 이유로 별 하나나 둘을 주기도 합니다. 이 난잡하고 혼란스러운 체계에는 별 다섯 개를 지독히 아끼는 것도 포함됩니다. 생각도 안 해 보고 별 다섯 개를 준 작품은 스티븐 킹의 [돌로레스 클레이본] 이나 헤닝 만켈의 [리가의 개들] 정도인데 그 외에는 달리 생각이 안 나는군요.  

 그러니까 [이니시에이션 러브]가 정말로 그렇게나 재미있느냐는 말을 들으면 저는 애매한 웃음을 비실비실 흘리며 질문자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열심히 고민하게 될 겁니다. 물론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재미가 있지는 않습니다. 저 별 넷은 칭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항의 표현이며 복잡하지만 매우 하찮은 장시간의 사고의 산물입니다.   

 이야기를 너무 모호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 리뷰의 스포일러 수준은 '띠지 및 뒷표지' 선을 유지하도록 애쓰겠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사용되는 종류의 트릭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여러 번 이런 종류의 트릭에 대한 짜증과 혐오를 표출해 왔습니다. 어딘가에서는 제가 '아, 그 XX트릭 싫어하는 블로거' 로 지칭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이니시에이션 러브]는 지금까지 읽어 본 이런 트릭을 사용하는 작품들 중에서는 제일 낫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제가 이 소설과 비교하고 싶은 다른 소설들의 제목을 늘어놓아도 좋을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그 제목을 늘어놓는 것만으로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이니시에이션 러브]가 처음부터 '당신을 속일 예정♡' 이라고-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하트가 꼭 붙어야 할 것 같습니다-과히 작지도 않은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는 종류의 소설이기는 하지만요.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을 무릅쓰고, 읽은 사람만 알도록 하는 지칭 방식을 사용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결국은 호기심의 문제입니다. 이런 종류의 트릭은 읽은 사람의 호기심을 다루는 데 실패하면 엄청난 분노를 부를 위험성이 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의 격찬을 받은 '그 난도질 이야기' 를 보고 엄청나게 분개했습니다. 그 작품의 트릭에 대한 감상은 '뭐 어쩌라고' 였습니다. 같은 작가의 '사이비종교 이야기'는 차라리 나았습니다. 호기심의 방향을 다루는 데 '그 난도질 이야기' 보다는 세련되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다른 작가의 '노인 등쳐먹는 이야기'는 세부가 마음에 들었고 진상을 알았을 때 피식 웃을 정도의 여유를 발휘할 수가 있었습니다. 업계 고전이 된 '찻잔으로 비밀문 따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습니다. '추리소설상에 응모하는 이야기'는 아직 판단을 보류하고 있습니다. '유괴사건과 사이비종교가 둘 다 나오는 이야기'는...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한심했어요.

 이 작품들에 대한 제 호오는 모조리, 문제의 트릭을 '내가 진짜로 궁금한 것과 얼마나 잘 연결시켰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니시에이션 러브]를 높이 평가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저는 그런 종류의 트릭은 이 정도의 이야기에 사용되는 것이 딱 좋다고, 이 정도 크기의 호기심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렇게 속일 작정이군'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아, 저는 덤불로 길을 잘못 들지조차 않았습니다) 속은 것에 화도 나지 않았고, 이야기 속의 한심한 청춘들이 몹시 못 봐줄 꼴을 보이고는 있었지만(오 80년대여, 오 버블이여) 견딜 만은 하더군요. 이 작품의 형식은 독자를 주인공들로부터 떼어내 거리를 두게 하는 데 탁월합니다. 몇 번이고 빙글빙글 비닐 레코드 판을 돌리듯 돌리면서-아니, 새장 속에 새를 넣기 위해 원반(Taumatrope)을 돌리는 데 더 가까우려나요.

 지금까지 읽은 북스피어 책 중 제일 낫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벌집에 키스하기]와 [나무 바다 건너기]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거였군요. :] 북스피어의 일서 번역본 중 제일 낫다고 정정해야겠습니다. 표지도 비교적 흉하지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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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7-17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반가워서 한걸음에 달려왔어요, eppie님.
그리고 읽다보니 eppie님의 문체랄까요, 여튼 eppie님 글의 분위기가 느껴져 한껏 더 반가워요. 꼭꼭 씹어 읽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이 리뷰를 읽고나니 '스티븐 킹'의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걸까요? 리뷰는 다른 책인데 말입니다. 얼른 보관함에 돌로레스 클레이본 넣어두어야 겠어요.

그리고,
이제 자주 리뷰 쓰실거죠, eppie님?
:)

라로 2009-07-17 17:26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저도 다락방님과 같은 마음으로 달려왔는데~~~~~~.ㅎㅎㅎㅎ
넘 넘 반가와요,,,,저두 기다렸답니다.=)

eppie 2009-07-19 14:45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nabee님 반가워요. ㅜ.ㅠ 앞으로 한동안은 좀 성실해질게요.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언제나 제가 자신있게 추천하는 책이에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는데...:)

보석 2009-07-17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건 다 알겠는데 '찻잔으로 비밀문 따는 이야기'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아, 궁금해. 비밀 댓글로 정답 좀...^^;; 다른 건 저도 다 읽었네요.(어쩌면 저 찻잔 책도 읽었는데 기억을 못하는 걸지도)
근데 이런 류의 트릭을 무척 싫어하시는군요. 하긴 제가 아는 분은 '노인 등쳐먹는 이야기'를 읽고 너무 분개해서 출판사에 항의전화까지 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류의 트릭은 읽은 독자를 어떻게 기분 좋게 속이냐가 관건인 듯해요.

리뷰하신 책보다 맛깔난 eppie님의 글솜씨가 더 흥미진진합니다.^^

eppie 2009-07-19 14:54   좋아요 0 | URL
'재미만 있다면야, 재미만...' 이라고 일단은 생각해요. ㅜ.ㅠ 이런 트릭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시도는 성공적이기가 상당히 힘들 거라는 건 이렇게나 읽지 않아도 충분히 유추 가능한 사실이고요. '노인 등쳐먹는 이야기'는 심지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추리소설상에 응모하는 이야기'는 헛갈림을 작품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수용한 점이 좋았는데 마지막에 붙은 설명이 좀 추레했던 점이 감점 요인이고요. '유괴사건과 사이비종교가 둘 다 나오는 이야기'는 심지어 이 트릭 자체보다도 다른 내용(이를테면 사이비종교의 의식)이 허름했던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문제의 '찻잔으로 비밀문 따는 이야기'는 아마 읽으셨는데 주요 플롯이 아니라 아이템이라서 잊으셨을 거예요. ^^;;;

2009-07-19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석 2009-07-20 12:06   좋아요 0 | URL
아, 역시 읽은 책이었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책보단 오히려 같은 작가의 '복잡한집 이야기'가 더 이 분류에 맞지 않나 싶어요. eppie님 생각은 어떠신지?^^

요즘 추리소설이 너무 '반전'에 연연하다가 오히려 재미를 잃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굳이 대단한 반전이나 속임수 없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요소는 많은데 독자로서 아쉬운 부분이죠.

eppie 2009-07-20 16:25   좋아요 0 | URL
그 작가의 작품은 '찻잔으로 비밀문 따는 이야기'와 '지하실에 파묻은 시체가 소실된 이야기'를 제외하면 (비교적) 인상이 흐린 탓에 확신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말씀하신 소설이 '액자구조에다 형제 이야기'라면-네, 분명히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앗 하는 사이 한 마디로 '사람'을 뒤바꾸는 트릭은 '찻잔으로 비밀문 따는 이야기'가 먼저고, 시리즈의 처음이고, 워낙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기도 하고요. :]

그보다 개인적인 이유로는, 후자의 경우 바꿔치기의 대상이 우리(독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잘 알고 있을 것을 가정하고 있기에 트릭보다는 팬 서비스의 느낌이 강하게 다가오거든요. ^^; 심지어 이쪽은 당했을 때도 그렇게 약오르지 않았어요!

2009-07-19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ppie 2009-07-20 16:29   좋아요 0 | URL
앗 여기로 찾아오실 줄이야! ;ㅁ; 반갑습니다.
이전 블로그 쪽은 잠시 운영계획(-_-)을 짜며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쓰고 싶을 때 너무 나불거려 버리니까 일 할 밑천이 남아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저는 취미를 일로 즐겁게 할 수 있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요. ㅜ.ㅠ 대신 너무 갑갑하면 책 리뷰는 이리로 올릴 터이니 가끔 들러주시면 기쁘지요 ;ㅁ;

영어로 번역된 소설...그러고 보니 이번 주문에서도 [피라미드]를 빠뜨렸어요. orz

enoia 2009-07-21 02:01   좋아요 0 | URL
이 블로그는 뭔가 검색-아마도 책 제목;;;-을 하다가 찾았었어요. 그 이후로 RSS구독하고 있지요. :)

피라미드.. 재미있어요. 팬 서비스 같은 느낌도 있지만. (아 뭔가 약올리는 기분; ) 참 스웨덴 사람을 어쩌다 만나게 되어서 물어봤는데 Kurt는 쿠르트와 컬트의 중간쯤 되는 발음(-_-;) 이더군요.

 
Just an Ordinary Day: Just an Ordinary Day: Stories (Paperback)
Jackson, Shirley / Bantam Dell Pub Group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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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Est Bleu2007 @ Flickr)  

 (역시 외서 코너가 없을 때 페이퍼로 올렸던 내용입니다만, 외서 리뷰로 다시 올리면서 번역본 관련 정보는 삭제했습니다. 이 정보들은 페이퍼 버전에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  

 한국에서 셜리 잭슨은 [제비뽑기The Lottery][힐 하우스의 유령The Haunting of Hill House]의 작가로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셜리 잭슨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계기는 이 [악의 가능성] 입니다. 1965년에 에드가상을 받은 이 단편은 한 문장도 더하고 뺄 틈이 없이 간결하고, 완벽하며 아름답습니다.  

 스트레인지워스Strangeworth집안의 마지막 한 사람인 미스 아델라 스트레인지워스는 일흔 한 살의, 정정하다는 말이 무색할 지경인 노부인입니다. 그녀는 혼자 살며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도 장미를 가꾸고, 스트레인지워스 저택을 관리하고, 남는 시간에는 마을의 악덕을 정화하는 일에도 힘씁니다. 스트레인지워스 집안 자체가 이 작은 마을의 역사와도 같아서, 미스 스트레인지워스는 이 마을을 스트레인지워스 집안의 장미처럼 '나의 것' 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지요. 평생을 통틀어 마을 바깥에 나가 본 적이 거의 없는 미스 스트레인지워스에게 실제로 이 마을은 세상의 전부입니다.

 실제로 눈으로 보지는 못했더라도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악덕의 뿌리를 뽑기 위해, 미스 스트레인지워스는 위험한 일을 벌입니다. 그녀의 행동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소한 잘못을 바로잡기보다 오히려 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근원이 됩니다. 그리고 우연한 실수로 인해 폭발하게 된 사람들의 악의는 그 즉시 미스 스트레인지워스를 덮칩니다. 
 


(사진 : Est Bleu2007 @ Flickr

 '플레전트 가 스트레인지워스 저택의 장미꽃'으로 상징되는, 영원히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은 채 살아갈 것만 같던 초반의 마을 풍경-미스 스트레인지워스가 지키고 싶어했던 것-과, 악의 씨앗을 모두 뿌리 뽑고 싶어하는 미스 스트레인지워스의 행동, 그리고 그 결말까지, 이 세 가지 요소의 선명한 대비는 너무나 아름답고도 끔찍한 광경을 그려냅니다. 셜리 잭슨은 별로 어려운 말도 쓰지 않으면서 인간의 악의나 야만성의 정수를 짚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악의 가능성]은 그녀의 스완 송이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집필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죽음 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에 발표되었고, 그 해 에드가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실을 훑어봐도 놓치기 쉬운 고찰을 산뜻하게 잡아내는 것이 단편소설의 훌륭한 점 중 하나겠지요. [악의 가능성] 에서 다루고 있는 바는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서도 그렇게 먼 부분이 아니고, 누구나 근처에 비슷한 사람이 하나...아니 상당히 많이 있었을 겁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이 소설을 포함해서, 셜리 잭슨의 단편을 좀 더 많이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잊어버리기 딱 좋은 문화에 살면서, 제 정신을 유지하고 깨어 있기가 힘들 때는 남의 통찰력을 좀 빌릴 필요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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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2-27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9살때쯤 미스터리를 섭렵(?)한 이후로 미스터리를 잘 안읽어서
잊고 지낸 분야였는데 님 덕분에 눈이 다시 뜨이네요~.ㅎㅎㅎ
셜리 잭슨,,,기억하겠습니다.

eppie 2009-03-10 12:54   좋아요 0 | URL
이쪽 장르를 계속 읽다 보면, 어느 장르나 실은 그렇겠지만...어릴 때는 그냥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다시 눈에 보여요. :] 아가사 크리스티는 나이가 들어야 맛을 안다고 하더니 정말 그래요. :]
 
The William Monk Mysteries: The First Three Novels (Paperback) - The First Three Novels : The Face of a Stranger/A Dangerous Mourning/Defend and Betray
Perry, Anne / Ballantine Books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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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고향과 가장 가까운 대륙에서, 모래바람과 자개색 구름에 둘러싸여.

(예전에, 이 소설 이야기를 페이퍼에 올릴 때는 알라딘에 외서 코너가 없었지요. 이 책이 알라딘 외국도서에 들어와 있기에 페이퍼에 올렸던 내용을 리뷰로 올려 봅니다. 개인적인 취향과 관련된 잡다한 이야기들은 페이퍼 버전에는 남아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삭제했습니다 :D)  

 솔직히 인정합니다. 이 작가의 소설에 흥미를 가진 것은 그녀가 피터 잭슨의 영화 [천상의 피조물]의 모델, 실제 그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불순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원체 스캔들과 가십에 약한 저입니다만, 변명하자면, 일부러 저걸 찾아 검색한 건 아닙니다. TV 시리즈 [MONK] 관련해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걸려든 거예요- '그' 앤 페리가 Monk라는 이름의 탐정이 등장하는 빅토리안 디텍티브 스토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냉큼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사 놓고서도 어쩐지 한동안은 읽을 기분이 안 나서...읽기 시작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읽기 시작했을 때, 이것은 흥미 위주로 슬쩍 건드려 보고 말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소설임을 깨닫게 됐지요. 주인공 윌리엄 몽크의 캐릭터에는 작품이 씌어진 시대를 초월하는 독보적인 맛이 있습니다. 자기 손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는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한편으로는 권력욕을 숨기지 못하고 젠틀맨처럼 옷을 입는 경찰관이라니, 대다수의 현대 작가들은 시대물을 쓴다 해도 부끄러워서라도 등장시키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말하는데 작가는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윌리엄 몽크는, 사고로 기억을 잃고 자신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그 기억상실은 이 책 내내 계속됩니다. 그는 자신이 경찰이라는 것도, 어떤 사건을 쫓고 있었는지도, 그 사건의 얼마만큼을 밝혀냈는지도,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도 모두 잊었어요. 그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숨깁니다. 그에게 대뜸 조셀린 그레이 소령의 살인사건을 떠맡긴 상관에게도, 부하에게도, 피해자 가족에게도. 그야말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더듬어 사건을 해결해야 합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는 상태로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맞닥뜨리는 동안 조금씩 그의 기술(기억이 아닌)이 돌아오고, 상관이 뭐라 하든 그는 훌륭한 전략을 가지고 사건을 뒤쫓고 있었어요. 새로 배치된 부하인 존 에번의 존경심이 그것을 증명해 주지요.

 사건 이전에 자신에 대한 탐색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물론 발란더 시리즈와 비슷하고, 그래서 마음이 끌리기도 했지만...백지의 탐정이라니 지나치게 공평합니다. 독자와 탐정이 똑같이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몽크가 어떻게 사건을 해결할 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는 꼼꼼한 조사를 통해 사건의 윤곽을 파악하는 탐정일 수도 있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짚어내는 탐정일 수도 있고, 정보원들에게 찔러 주는 돈과 적당한 폭력을 통해 자신만의 열쇠를 얻어내는 탐정일 수도 있는 겁니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결과적으로 셋 다 하기는 하지만요. :] 수수께끼의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을 때 그녀가(그녀 쪽은 명백히 몽크를 알고 있습니다) 적일지 친구일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을지 알 수 없고, 상관이 그를 신뢰하고 있을지 아니면 죽도록 미워하고 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기억을 잃었소' 라는 카드를 펼지 펴지 않을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야만 합니다. 도저히 기억할 수 없는 정보를 다시 얻기 위해서는 기억을 잃었다고 실토해야 하지만, 그건 곧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어떻게 보면 윌리엄 몽크는 이 기억상실을 통해 엄청난 기회를 잡은 셈입니다. 그는 군데군데서 엿보이는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출세에 눈먼)원래의 자신'에 대해 혐오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온갖 인간군상을 대할 때 그야말로 꼴리는 대로 내뱉습니다!

 사건의 진상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다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소재를 다룬 수없이 많은 미디어를 봐 왔기도 하지요. 살해당한 조셀린 그레이가 어떤 인물인가, 윌리엄 몽크가 어떤 인물인가 더듬어가는 과정에서 둘의 자연스러운 대조가 두드러집니다. 현명한 배치였어요.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조셀린 그레이는 윌리엄 몽크에게조차 부러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이기를 선택하고,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최후에 증명하게 됩니다. 온갖 장식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나면 몽크는 결국 닥터 그레고리 하우스 류의 고집스런 히어로입니다만, 역시 시대가 시대인만큼 그 온갖 장식적인 요소가 실은 더 재미있는 거지요. 세면대라든지 온갖 의무적인 자선 이벤트들, 살림이 쪼그라들면서 메이드 규모를 축소하는 양상, 전쟁에서 부상당한 그레이 소령의 지팡이 목록... :]

 작품은 긴장감에 차 있고 400페이지가 지겹지 않았습니다. 몽크의 게임은 훌륭했어요. 그러나, 물론 더 잘 한 것은 작가입니다. 이런 소설을 바로 시리즈의 첫 번째로 내놓을 생각을 한 작가의 악마같은 솜씨입니다. 앤 페리가 실제로 시리즈를 만들 의도로 이 작품을 썼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저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어요. 이것은 최소의 설명으로 캐릭터에 더없이 강렬한 존재감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본 아이덴티티] 가 그랬듯이.   

Dedicated to Ellis Peters
-엘리스 피터스 추모 단편집 [독살에의 초대Past Poisons]을 통해, 
 저는 수많은 다른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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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2-16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ㄷㄷㄷ 예삐님 원서를 읽으시나요?

eppie 2009-02-17 09:24   좋아요 0 | URL
네, 하염없이 목을 빼고 기다릴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나...도저히 번역될 것 같지 않은 것은 읽어요. 그냥 재미있을 거 같은 것도 읽고요. :]
 
미륵의 손바닥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윤덕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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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에 이르는 병]의 감상이 '뭔 상관이야' 였다면 이번 책의 감상은 '야임마' 정도 되겠습니다. 처음 [살육에 이르는 병]을 읽고서는 혀를 찼지만 그래도 그 속도감에 별 셋을 주었으나...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괘씸하여 별 둘로 깎았습니다. 별 하나가 아닌 것은 최소한 [살인의 해석] 만큼 무식하게 길지 않은 탓입니다.  

 그러니까 [미륵의 손바닥]의 별은 안전하게 처음부터 둘로 하겠습니다. 감상이 '야임마' 인 책에 별 둘을 주느냐...그것은 역시나 저답게도, 책의 디테일이 다소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즉, 오로지 쥬모우 비스크 돌을 데리고 다니는 경찰 정보원이나 신흥 종교 본부의 묘사가 심금을 울렸던 탓으로...:D 이 두 소설을 비교한다면 제게는 단연 이쪽이 낫습니다. 여전히 다소 비겁한 트릭을 주요 무기로 하고 있는 것은 같지만 최소한 그래야 할 '필요성' 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래도 이런 쪽 아이디어에 기울어 있는 소설은 제발 단편으로 해줬으면 싶은 소망은 여전하네요. 비슷한 짓을 곧잘 하는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에 제가 격하게 흠을 잡지 않는 이유는, 이 소설이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더라도 기본 형식 단위는 단편이기 때문입니다.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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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에 키스하기
조너선 캐럴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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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7년 5월 글입니다) 

   
  "촌스럽게. 제임스 본드라니. "
 "그땐 안 촌스러웠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이었어. "
 
   

 폴린 오스트로바는 죽었습니다-살해당한 여자의 망령에 사로잡힌 사람의 이야기라면 여러 장르에 걸친 여러 편이 존재하고,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겁니다. [블랙 다알리아]부터 [자루 속의 뼈]까지. 이 이야기는 [블랙 다알리아]를 물에 아주 엷게 탄 것 같기도 하고, 살짝 현실과 비현실의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스티븐 킹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애초에 작가 이야기를 스티븐 킹만큼 많이 쓴 사람이 또 있겠어요?

 중년의 작가 샘 베이어는 문득 자신이 10대였을때 시체로 발견된 여자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합니다. 정확히는 그가 '시체를 발견한 여자' 입니다. 파블리나 '폴린' 오스트로바는 크레인스뷰의 아이돌이었습니다. 빨간 머리의 사랑스러운 그녀는 똑똑하고, 정열적이고, 독립적이고 분방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걸레라는 카테고리에 넣을 수 없어서 당황했습니다. 때는 50년대.  

   
   요컨대 오십 년대 미국의 자그마한 소도시에서 자라났던 것이다. 어린 시절에 대해 그다지 할 말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별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기르는 사람도 없었고, 반항이라고 해 봐야 고작 쇠고기 찜을 꾸역꾸역 한 번 더 먹는 정도였으며, 마약은 은밀한 루머로만 존재했고,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면 당장 호모라고 낙인찍혔다. 우리는 잘하든 못하든 스포츠를 많이 했다. 친구들은 조, 앤서니, 존 같은 이름이었다. 우리가 꿈꾸거나 열심히 작업을 걸던 여자애들은 대부분 열일곱에 신체적 정점에 올랐다가 결혼하는 순간부터 자기 엄마랑 똑같아 보이기 시작하는 여자들이었다.   
   

 아아.
 잘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은 사실의 안개에 섞여, 픽션의 단맛이 쫙 스며듭니다. 이야기는 달콤했습니다. 가끔 샘의 딸 카산드라 베이어(아무리 생각해도 이 캐릭터는 없어도 좋았습니다.)의 존재와, 샘 베이어가 베로니카와 주고받는 대화가 읽는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는데, 베로니카 레이크의 캐릭터에 이르면 그냥 읽는 사람의 인내심의 한계를 부수고 이제는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묘한 평정상태를 가져다 줍니다. 이 작가의 여자 캐릭터에는 좀 문제가 있어요. 


 

 본문의 묘사를 보면 저렇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힘들지만 아니라고도 단정 못 짓겠습니다.실제로 샘 베이어는 닮았다고 한 마디 하기는 하는데, 입에 발린 말인지 농담인지 알 수가 없어요. 이 소설이 [블랙 다알리아]를 물에 엷게 탄 것 같다면, 이 소설의 히로인 베로니카 레이크는 '척 팔라닉 식 미친년'을 물에 엷게 탄 것 같습니다. 더 솔직히는 척 팔라닉 식 미친년을 소심한 오타쿠가 잘못 꿈꾸면 나올 것 같은 타입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프래니 맥케이브의 캐릭터를 보면 작가는 남자가 어떡하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지,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여자에 대해서는 그 경계가 어딘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뜯어보면 세부사항이 엄청나게 찌질한데도 이렇게 재미있다는 것은, 단순히 취향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이게 작가의 실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금 염려되는 것은 이 작가에게서 일종의 온다 리쿠가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크레인스뷰 3부작의 나머지 둘을 아무쪼록 빨리 보고 싶군요. 특히 프래니 맥케이브가 주인공이라는 [The Wooden Sea] 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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