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17
한스 페터 리히터 지음, 배정희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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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에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글입니다)

-언제고 ABE 전집 트라우마작 순위 투표를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 계획을 실행한다면, 1위가 무엇일까를 놓고 내기가 벌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참가하는 사람이나 기획하는 저나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가 1위가 될 거라는 건 알고 시작하는 일이니까요. 재미있어지는 건 2위부터의 결과일 겁니다. 제가 읽은 범위 안에서 꼽자면 [칼과 십자가], [여우굴], [형님], 그리고 이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정도가 순위권 후보가 아닐까 싶네요. ^_^;

어릴 때의 저는 확실히 [칼과 십자가]나,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보다 [여우굴], [형님],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를 더 견디기 힘들어했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별로 달라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는 '어릴 때 이런 걸 읽었었지' 하고 농담 삼아 [칼과 십자가]나,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후자의 책들은 좀처럼 입에 올리기가 꺼려졌습니다. 저는 아직 저 이야기들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이건 단순히 시대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먼 이야기라 일종의 로맨틱한 색채까지 깃들어져 버린 [칼과 십자가]나,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와 달리, 후자의 책들은 아직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가 제게 안겨준 씁쓸함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이건 명백히 같은 시대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종류의 책이니까요. 열 살 때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알았냐고요? 여러분도 알았을 겁니다. 요즘 애들도 알 걸요. 애초에 안네 프랑크와 같은 나이가 되기 전에 [안네의 일기]를 처음 읽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는 나라잖아요. 한국의 교육방법은 어떤 영문에서인지 어린애라도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계 없는 나라의 관계 없는 먼 옛날에 벌어진 일들을 꿰고 있게 만드는데:) 그것이 별로 안목을 높여 주는 것 같지 않아서 유감스러울 뿐이지요. 이 책에서 한 방편으로 제시하는 '알아야 한다' 의 반례로 제시할 수 있는 게 한국이란 나라의 경우일 겁니다.

다시 책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저는 열 살 이후 이 책을 다시 읽은 적이 없습니다. 거의 20년만에 다시 읽자니 여러 가지가 눈에 띄네요.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이렇게 에피소드 위주였는지 잊고 있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훨씬 더 연속적인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후반이 되면서 일화들 사이의 시간 간격이 좁아지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이야기는 한 소년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추억의 '장면들' 의 집합입니다. 친구 프리드리히 슈나이더와 그의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쓴 다음에 시간적 순서대로 늘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도록, 서술 자체에 가치 판단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 일화들은 작가가 주의 깊게 선택한 것일 터이고, 이 선택과 책 자체에는 가치 판단이 들어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작가의 그 전략은 유효합니다. 고의로 사건의 진행이나 인과를 빠뜨린 부분이 있는 서술은, 마치 이 기억이 우리의 기억인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읽고 나서 여기 묘사된 일상의 사소함이 얼마나 마음을 가득 채웠는지를요. 친구의 어머니 슈나이더 부인이 얼마나 작고 화사했는지도, 친구의 아버지 슈나이더 씨가 입학식 날 놀이공원으로 데려가 회전목마를 태워 주었던 것도. 자기네 민족의 전통에 따라, 사람들 앞에서 경전을 노래하고 어른이 되는 친구를 엿보았던 것도. 현실이 조금씩 조금씩 친구와 그 가족에게 가혹해지다가, 마침내 무슨 농담 같고 악몽 같은 파멸이 찾아왔을 때, 일상의 조각이 가끔 모습을 드러내고-놀이공원에 갔던 때의 사진, 뚜껑만 남은 만년필-그것은 상황의 비극성을 인식하게 하는 데 무엇보다 효과적입니다. 다시 읽어도, 기본적인 것을 잊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정말로 대단한 소설이에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깝다'는 것은 시간적 거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 보다 좀 더 참조하기 쉬운 형태의 은유라는 뜻도 돼요. 21세기의 한국에서 치료를 할 줄 안다고 사람을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형태의 반론이 나올 여지가 없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가, 어쨌든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만...
제가 사막 계시종교 세 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의심'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70년 전에 독일에서, 얼마 전의 한국에서 증명되었듯이 민중의 믿음은 때로 독입니다. 굶어죽을 지경일 때 눈앞에 나타난 메시아가 알고 보니 피에 주린 살인마더라 하는 패턴에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요! 영화였으면 뻔하다고 비웃었을 거면서! ;ㅁ;

Trivia
1. 새 버전은 낯선 유태인들의 문화에 대한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권말에 상세한 주석이 들어 있고 출전도 밝혀져 있습니다. 모처럼 쓸데없이 오지랍 넓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좋은 시도였습니다. 저는 이 정도로 책 구성을 칭찬하는 일이 드물어요! :]
 실은 권말에 30년대 초중반부터의 유태인 차별법령 연보가 실려 있는 걸 보고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웹상에는 법령 발표 시기에 기초하여 이 소설의 챕터들의 시간적 배경이 언제인지 연대를 구체적으로 밝혀 놓은 자료도 있기는 했습니다만...멋져.

2. 한국어판 제목이 원제를 충실히 번역한 데 비해, 프랑스어판, 스페인어판 제목은 '내 친구 프리드리히' 쪽인데요.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가 작품의 주제 뿐만 아니라 소재나 구성과도 일치하는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친구 프리드리히'라는 제목을 되뇌어 보면 괜히 감상적이 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군요. 어느 쪽이든 영문판 제목 [Friedrich] 보다는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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