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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사진 : royblumenthal@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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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좋아하지만 따로 리뷰를 쓴 적은 없는 작품이에요.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올리고 싶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이 [은가면]의 이야기는 꼭 겨울에 하자고 마음 먹은 바 있었으니까요. 셜리 잭슨의 [악의 가능성The Possibility of Evil] 이야기를 꼭 화사한 봄에 하고 싶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  


(원본사진 : royblumenthal@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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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스터리 장르에서 노부인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연약한 대신 오랜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직관의 소유자이기에 탐정 역으로 종종 등장합니다(마플 양, 스퀴데리 양, 휘슬러 부인, '어머니'). 그들은 가끔 그 육체적 연약함과, 여린 마음과, 여러 가지 이유로 가지고 있을 지 모르는 금전적 풍요로움 때문에 살인이나 강도의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너무 많고 사소하게 다루어지는 경우 또한 많아서 열거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또 가끔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외양을 가졌으나 내용물은 완전히 미쳐 있는 위험한 인물로 등장하기도 하지요(이것은 캐릭터의 성격상 언급하는 순간 스포일러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두 번째 항목을 좀 발전시킨 것이 [은가면]의 기초가 됩니다. 이 짧은 소설의 도입부에서 소냐 헤리스Sonia Herries 양은 머리가 새하얗고 심장에 문제가 약간 있기는 하지만, 강인한 턱과 바라지고 탄탄한 몸을 가진 '누군가가 위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존재로 그려집니다. 통상의 연약한 노부인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지만, 이런 헤리스 양이 아름답고 사악한 피조물들에게 생활을 침략당한 끝에 결국 삶 자체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집 다락방에 유폐되는 찜찜한 비극이 이 [은가면]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단편이 제가 아는 것만 해도 둘 이상 있습니다만, [은가면]이 그 단편들과 비교해 탁월한 점은 역시 그 '아름답고 사악한 피조물들'의 캐릭터가 너무나 말끔하게 설정된 점, 그와 더불어 아름다운 악마를 밤중에 집 안에 들여놓은 후 변화하는 소냐 헤리스의 심리상태를 은가면이라는 예술품에 맞대어 서술하는 솜씨가 넋이 빠질 정도로 훌륭한 점입니다.

 게다가 그 '아름다운 악마' 헨리 애봇Henry Abbott은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검고, 창백하고, 호리호리하고, 기품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의, 예술 작품을 보는 안목은 가졌지만 재능은 없는 화가의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그는 처음 소냐 헤리스의 집에 왔을 때 벽에 걸려 있는 은으로 만든 광대의 가면(소라트Sorat의 작품이라고 나오는데, 검색을 이리저리 해 봤지만 이 작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월폴의 창작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시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을 예찬합니다. - "은(銀)은 저 광대의 얼굴에 꼭 어울리는 소재예요. " 

 
(원본사진 : Yannic Meyer@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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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천히 흔들리고, 설레고, 기대하고,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소냐 헤리스의 감정을? 이 소설의 전개에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하게 몸을 움직이고, 낯을 붉히고, 쓴웃음을 짓고,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소냐 헤리스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문득 달이 차오르듯, 지금까지보다 한층 더 아름답게 빛나는 광대의 은빛 웃음을 돌아봅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냉혹하고 불쾌합니다. 소냐 헤리스는 모든 것을 잃고 광대의 웃음 속에 유폐됩니다. 그녀의 모든 아름다운 수집품들은 금전적인 가치로 환산되고 헨리 애봇은 마지막에 그녀의 작은 감옥으로 은가면을 가져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모든 가능성을 박살내는 선언이고요. 아, 정말로 찝찝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훌륭해요! 아직 안 읽으신 분께는, '굳이 찝찝한 이야기를 어째서 찾아 읽어야 하느냐'는 취향의 분이 아니시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Trivia
1. 번역된 휴 월폴의 소설은 좀처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만, 이 단편 [은가면]은 일단 동서미스터리북스의 [백모살인사건]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일본어 중역인 것 같지만요. 그 외에 예전에 삼천리에서 나온 [이것이 완전범죄다:사건편]에도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알라딘에 이미지가 없어서 곤란하네요-어느 책인가 하면, 표지에 '귀'가 그려져 있고 첫 번째 단편이 로드 던세이니의 "두 개의 양념병Two bottles of relish" 인 책입니다. 하서출판사의 [세계추리명작단편선]에도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2. 원래 이 작품은 휴 월폴의 단편집인 [All Souls' Night](1933)에 수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만...이 단편집은 구하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아마존에서는 어느 셀러가 중고를 $70.97에 팔고 있군요. 대략 이런 실정이라, 저는 원문을 여기서 읽었습니다.

3. 저 단편집의 제목 [만령절의 밤All Souls' Night]은 W.B. 예이츠의 시에서 따온 겁니다.

Midnight has come and the great Christ Church bell
And many a lesser bell sound through the room;
And it is All Souls' Night.
And two long glasses brimmed with muscatel
Bubble upon the table. A ghost may come;

단편집 서두의 인용문이 단편집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네요. :]

4. 이것저것 가면 사진을 올렸지만 이 작품 속에 등장한 가면은 저런 것(어느 것이든)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_^;  

5. Aunt Violet's Book MuseumHugh Walpole Bibliography에 [The Silver Mask]가 실려 있는 앤솔로지 목록이 있네요: 

-Blanche Colton Williams & Maxim Leiber's Panorama of Modern Literature (Heath, 1929)
-his collection All Souls' Night (Macmillan, 1933; Doubleday Doran, 1933)
-Dennis Wheatley's A Century of Horror Stories (Hutchinson, 1935)
-Ellery Queen's 101 Years' Entertainment (Little Brown, 1941)
-Boris Karloff's And the Darkness Falls (World Publishing, 1946)
-Herbert van Thal's Told in the Dark (Pan, 1950 wraps)
-Thomas Bertram Costain & John Beecrof's More Stories to Remember (Doubleday, 1958)
-Jack Sullivan's Lost Souls: A Collection of English Ghost Stories (Ohio University Press,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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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2-04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은가면이 번역되었군요.백모살인사건은 구 동서판이 있어 구매 안했는데 이걸 읽으려면 사야될지 고민되네요..

eppie 2009-02-06 14:15   좋아요 0 | URL
번역 자체는 제가 읽은지 15년이 되었으니, 아마도 그 전에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어라, "은가면"이 이번에 새로 나오면서 포함된 거였나요? [백모살인사건]은 한 권이 되기에는 살짝 짧은 분량이니까 구 동서판에서 들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위에 썼듯이, 삼천리의 [이것이 완전범죄다:사건편]이나 하서출판사의 [세계추리명작단편선]을 가지고 계시다면 "은가면"을 위해서 또 [백모살인사건]을 구매하실 필요는 없으실 듯합니다. ^^

카스피 2009-02-1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삼천리는 어딘가 있을텐데 한번 찾아봐야 겠네요^^

eppie 2009-02-17 09:50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 수집품 정도의 분량이 되면, 뭔가 생각날 때 찾아보는 것도 큰일이겠어요 ;ㅁ;
 


-한국에서 셜리 잭슨은 [제비뽑기The Lottery][힐 하우스의 유령The Haunting of Hill House]의 작가로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셜리 잭슨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계기는 이 [악의 가능성] 입니다. 1965년에 에드가상을 받은 이 단편은 한 문장도 더하고 뺄 틈이 없이 간결하고, 완벽하며 아름답습니다.

 스트레인지워스Strangeworth집안의 마지막 한 사람인 미스 아델라 스트레인지워스는 일흔 한 살의, 정정하다는 말이 무색할 지경인 노부인입니다. 그녀는 혼자 살며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도 장미를 가꾸고, 스트레인지워스 저택을 관리하고, 남는 시간에는 마을의 악덕을 정화하는 일에도 힘씁니다. 스트레인지워스 집안 자체가 이 작은 마을의 역사와도 같아서, 미스 스트레인지워스는 이 마을을 스트레인지워스 집안의 장미처럼 '나의 것' 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지요. 평생을 통틀어 마을 바깥에 나가 본 적이 거의 없는 미스 스트레인지워스에게 실제로 이 마을은 세상의 전부입니다.

 실제로 눈으로 보지는 못했더라도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악덕의 뿌리를 뽑기 위해, 미스 스트레인지워스는 위험한 일을 벌입니다. 그녀의 행동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소한 잘못을 바로잡기보다 오히려 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근원이 됩니다. 그리고 우연한 실수로 인해 폭발하게 된 사람들의 악의는 그 즉시 미스 스트레인지워스를 덮칩니다.


(사진 : Est Bleu2007 @ Flickr)

 '플레전트 가 스트레인지워스 저택의 장미꽃'으로 상징되는, 영원히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은 채 살아갈 것만 같던 초반의 마을 풍경-미스 스트레인지워스가 지키고 싶어했던 것-과, 악의 씨앗을 모두 뿌리 뽑고 싶어하는 미스 스트레인지워스의 행동, 그리고 그 결말까지, 이 세 가지 요소의 선명한 대비는 너무나 아름답고도 끔찍한 광경을 그려냅니다. 셜리 잭슨은 별로 어려운 말도 쓰지 않으면서 인간의 악의나 야만성의 정수를 짚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악의 가능성]은 그녀의 스완 송이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집필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죽음 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에 발표되었고, 그 해 에드가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실을 훑어봐도 놓치기 쉬운 고찰을 산뜻하게 잡아내는 것이 단편소설의 훌륭한 점 중 하나겠지요. [악의 가능성] 에서 다루고 있는 바는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서도 그렇게 먼 부분이 아니고, 누구나 근처에 비슷한 사람이 하나...아니 상당히 많이 있었을 겁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이 소설을 포함해서, 셜리 잭슨의 단편을 좀 더 많이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잊어버리기 딱 좋은 문화에 살면서, 제 정신을 유지하고 깨어 있기가 힘들 때는 남의 통찰력을 좀 빌릴 필요성이 있습니다.

Trivia
1. 점심으로 다이제스티브 비스킷과 우유를 먹으면서 썼습니다. 이 메뉴는 먹을 땐 배가 불러서 많이 먹을 수 없는 대신 세 시간만 지나면 죽을 정도로 배가 고파집니다. 점심으로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죠. :<

2. [악의 가능성]은 명지사에서 나온 [에드가상 수상작품집 II]에 실려 있습니다. 처음 읽은 지 10년이 넘는 걸 새삼 다시 읽고 포스팅한 이유는, 이번에 셜리 잭슨 단편집 [Just an ordinary day]를 구해서 마침내 이 소설을 원문으로 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제가 처음 본 저 번역이 얼마나 못력이었는지가 뼈저리게 느껴지네요. 일단 일본어판 중역의 혐의가 있고 말이죠. 하지만 이 앤솔로지의 구성은 좋습니다. 저는 리스 데이비스의 [선택된 것The Chosen One]의 음울한 분위기도, [세계를 속인 남자The Man Who Fooled the World]의 유머감각도 높이 치고 있습니다. [드리워진 커튼The Fallen Curtain]도 충분히 루스 렌델다운 찝찝한(=이 경우에는 '좋은') 단편입니다.

3. 지금까지 리뷰한 소설 중에서, 스포일러 안 하고 쓰기가 제일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4. 봄특집을 하나쯤 더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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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8-05-15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eppie이 이렇게 적어주시니 재미있을것 같네요.예전에 읽었지만 기억이 안나니 창고를 뒤져서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eppie 2008-05-30 11:46   좋아요 0 | URL
보름만에 덧글 : 재미있어요! ㅠ_ㅠ 사람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요물 같은 소설이에요.
 

(여전히, 작년 봄에 블로그에 썼던 글을 가져옵니다.)

-이 책에 대해 가장 간단히 설명하는 법은, '엘리스 피터스 추모단편집 [독살에의 초대]에 들어 있는 매혹적인 단편 [오빌리오? 클로디어!]과 같은 작가의, 같은 탐정이 등장하는 장편'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흠, 별로 간단하지도 않네요. 하지만 이 작가의 장편이 하나도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

 


이 이야기의 배경은 로마 시대, 막 황제가 후계자로 티베리우스를 지명하네 마네 하는 때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_=; (**) 암살과 쿠데타에 관한 규모가 크고 화려한 음모가 펼쳐지고 거기에 황제와 의원과 이민족 용병과 클라우디아가 얽혀듭니다. 우리의 클라우디아 세페리우스는 어떤 여자인가...빈민가에서 자라 부유한 포도주 상인과 결혼한 클라우디아는, 남편 세페리우스가 죽었을 때(***) 그가 매우 골때리는 방식으로 부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부동산이며 포도주 사업체며 많이 있지만 클라우디아는 그걸 팔 수 없어요. 그녀가 조금이라도 현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방식은 어쨌든 와인 매매를 잘 굴려서 이익을 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럴듯한 남자한테 그녀(와 세페리우스 포도주 사업)를 통째로 넘기는 대신에 클라우디아는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사업에 대한 지나친 열정이 위험한 음모에 클라우디아를 끌어들입니다.이야기는 그녀가 무역 사절단에 끼어 알프스를 넘으려는 데부터 시작합니다. 유니우스라는 이름의 켈트 족 보디가드와 드루실라라는 이름의 이집트 고양이를 데리고, 마차에서 흔들리면서 알프스 근처까지도 오지 않았는데 벌써 지독해지는 기후에 불평하면서. 그런데 신비로운 방식으로 낙반 사고가 일어나 일행은 고갯길에 갇혀 버리고, 그 와중에 클라우디아는 명백히 일행 중에 사고 이외의 방식으로 죽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전형적인 '범인은 우리 중에 있어' 상황입니다만, 대체 왜? 그 이유는 여기서가 아닌 멀리 떨어진 로마에서 찾아야 합니다.

한편 로마에서 우리의(...라는 말 여기는 붙이기 싫다 -_-;)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오르빌리오는 '대체 왜 그녀가 그런 미친 짓을 벌인 걸까'를 뇌까리며 클라우디아 닮은 여자(...)랑 붙어먹고 있습니다-위에 언급한 단편을 보시면 클라우디아와 오르빌리오에 대한 간략한 설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귀족이고 비밀 경찰이며 키가 크고 탄탄한 체격에 검고 윤기있는 고수머리에 잘생긴 얼굴의 소유자로, 클라우디아 세페리우스에게 끊임없이 껄떡댑니다.
...그런데.

제가 단편을 보면서 확연히 잘못 생각했던 게, 껄떡대는 건 오르빌리오 쪽이고 클라우디아는 그냥 귀찮아할 뿐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게 아닙니다. 그녀는 오르빌리오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인정하기 싫어할 뿐이지. 간신히, 아주 간신히 제가 싫어하는 둔한 여자 클리셰를 피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어머, 내가 왜 이러지...아, 아냐 그럴 리 없어! '만큼 싫은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많지만. ) 이유가 있으면 괜찮습니다. 엄마를 죽게 한 철천지 원수인데다 라이벌 기획사의 사장이라든지 하면 괜찮습니다만 '친구니까' 는 이유로 카운트하지 않습니다. ㄱ- 클라우디아한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요. : 그는 경찰이니까.

그래도 이 이야기는 굳이 말하자면 할리퀸 로맨스에 가장 가깝습니다. 네, (클라우디아가 오르빌리오의) 벗은 가슴을 쳐다보다가 '핫, 내가 지금 뭐하고 있담' 씬조차 등장합니다. 작가가 영국인이라는 사실은 압니다만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양키센스' 였습니다. 느끼합니다. 게다가 또 에브리씽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모든 것이 다 등장합니다 : 키 크고 잘생긴 검은 머리 귀족, 근사한 체격의 켈트 노예, 소년 티를 벗지 못한 군인, 오드아이, 푸른 눈이 날카로운 은발의 켈트족 사냥꾼, 비운의 죽음을 맞는 빨강머리의 켈트 소녀, 단정한 이목구비인데도 아름답다기보다 매섭다는 느낌이 드는 속물 로마 부인, 어디를 봐도 말랑말랑 폭신폭신하고 사랑스럽게 흐트러진 고수머리의 우리의 클라우디아, 그리고...크레타 인(아, 마이 스위트 일리오나 T^T).

차이점이라면 글쎄...이야기는 상당한 액션을 포함하고 있지만 오르빌리오는 클라우디아를 구하러 직접 달려가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는 로마인이니까요!(****)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소득이라면 역시 이 [Black Salamander]를 다 읽은 거라고 해야겠습니다. 한 줄에 세 개씩 모르는 단어가 나오는 비감한 사태를 휴대용 전자사전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 극복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읽은 보람은 과연 있었어요. 굉장히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이 시리즈야말로 번역되기를 강렬히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재미는 있는데 이 짓을 앞으로도 몇 번이나 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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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단편의 클라우디아에 매혹된 사람이라면 아마 장편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할 텐데, 어째서 시작이 첫권인 [I, Claudia]가 아니라 [Black Salamander]였나 하면...간단합니다. 그냥 앞 두 권이 품절이었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표지가 제겐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다시 봐도 정말...아...이건 좀 곤란합니다. OTL 읽긴 읽을 거지만 혹시 딴 버전 있나 좀 찾아봐야겠습니다. T^T


(**) 로마 정치에 관한 한 무감각, 방향성 없음을 차라리 자랑으로 삼고 싶어하는 제가 그나마 이 정도를 기억할 수 있는 건 다 래리 고닉의 훌륭한 책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새로 나오고 있는 것 같더군요. 지난 번 번역이 좀 더 못되처먹은 게 마음에 들지만 나왔을 때 사 두도록 합시다. =_=;



 

 

3권은 결국 원서를 샀습니다. 이제는 4권을 살까 말까 고민 중인 eppie.

(***)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의 나이는 'at the tender age of twenty-four' :]

(****) 사실은 달려갑니다.

Trivia
사실 제일 재미있었던 표현은 'nothing meatier than horseradish' 였습니다. 우와, 이 사람들 진짜로 '고기하다' 는 형용사를 쓰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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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읽고 블로그에 올렸던 리뷰를 꺼내옵니다.


  감상부터 말하라면 '뭐 이런 책이 다 있담' 입니다. 잡게 되면 이거 휙휙 넘기느라 다른 일을 전혀 못 하게 되기 때문에, 그걸 피하기 위해서 하루의 마지막에 아껴 보게 돼요.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3시, 4시를 넘기는 일이 왕왕 발생했으니...요 며칠 생활 리듬이 흐트러진 건 다 이 책 탓입니다. :(

구명뗏목에 실려 위스타드 해안으로 떠밀려 온 시체에서부터 출발한 사건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시체들의 국적은 라트비아인이었고,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온 진지하고 성실한 라트비아인 리에파 소령과의 만남이 발란더를 결국 라트비아의 리가로 이끕니다. 이번 책에서 발란더는 훌륭한 스파이입니다. 영화로 만들었을 때 대중적으로 가장 어필할 작품은 (제가 좋아하는)[Steget Efter]같은 변태물(...)이 아니라 이 [The Dogs of Riga]가 아닐까 생각해요. :D

따라서 마틴손이나 스베드베리 등 동료들의 등장은 상대적으로 적고 발란더의 라트비아 스파이 액션이 주를 이룹니다. 그래도 가끔가다 나오는 마틴손의 언행은 그 마틴손 캐릭터가 여기서부터 정립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뜸들러에 포에머에...^ㅁ^;) 가장 놀랐던 건 후의 작품에도 종종 언급되는 발란더의 이 라트비아 여행이 모든 동료들에게 비밀이었다는 점인데 하긴 경찰관이 가짜 여권으로 남의 나라에 가서 미행당하고 차 훔치고 사람 패고 총격전 일으키고 경찰서에 잠입했던 걸 어떻게 말하고 다니겠어요. 그래도 나중에 안-브리트한테는 말해 줘도 좋았을 텐데...말했던가?!

그 다음으로 놀랐던 건 리에파 소령이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점이었습니다. 근시에 작고 구부정한 헤비스모커라고 묘사되는데 왠지 [Steget Efter]의 영화판에서 스베드베리 역을 했던 사람이 이 캐릭터를 연기하면 좋을 것 같더군요. 리에파 소령은 성실함이 매력이 되는 종류의 캐릭터로 그의 성실성의 대상은 바로 라트비아와 라트비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 성실함이 그의 죽음을 불렀지요. 이 이방인에게 자신도 모르게 홀딱 반한 발란더는(...) 그의 죽음을 수사하기 위해 라트비아로 가서 리에파 소령의 아내를 만납니다. 이후에 계속 발란더의 걸프렌드로 등장하는 바이바 리에파와의 첫 만남인데, 솔직히 이후의 언급이 없었더라면 매번 하나씩은 등장하는 '이번 권의 여자' 중 하나(본드걸이냐...)로 생각할 뻔 했습니다. 계속 반했다고 껄떡거리기는 하는데 발란더...앞 권에서 아네트 브롤린 검사한테는 안 그랬냐...ㄱ-

그래도 바이바 리에파는 이론의 여지 없이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 시리즈의 특성상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마음의 눈으로 보면...^_^; 실은 발란더가 안-브리트 회그룬트의 타입에 질색하는 걸 보고 발란더 취향은 포동포동한 브루넷이구나 생각했었는데, 바이바 리에파가 두 번째 등장해서 '모피 모자'를 벗었다는 묘사가 등장하는 순간 어째서인지 메건 멀랠리Megan Mullally(라기보다 제가 그 순간 떠올린 것은 [윌 & 그레이스Will & Grace]에서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 캐런 워커입니다)가 떠올라 버려서 이후로 내내 좀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진지한 버전의 메건 멀랠리라면 좀 비슷할 거 같기도 한데...테크니컬 라이터이자 엔지니어를 연기하는 메건 멀랠리를 생각하며 하악하악 하는 건 저뿐인가요? 설마.

에...재미있었습니다. 정말로. 발란더가 처하는 곤란함의 강도도 높고(*) 상황의 혼란함도 장난이 아닌데도 의외로 선악의 구별이 확실한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드물게 끝이 상쾌했습니다. 발란더야 바이바 리에파한테 크러쉬하든 말든. (...) 다른 캐릭터들도 무척 매력적이고 헤닝 만켈은 대체 인간을 어디까지 관찰하고 다니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키리노 나츠오 이상으로 피하고픈 사람. -_-;


지도를 찾아봤더니 라트비아는 스웨덴에서 정말로 '바다 건너 바로' 로군요. 그런데 비행기로 가려면 헬싱키까지 갔다가 갈아타야 하다니...OTL 리가는 Baltic States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하는데 사진을 대강 보면 동유럽 구시가 특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발란더가 혼란스러워 했던 대로 대학도 실제로 여러 개 있다고 합니다.

위키페디아에 의하자면 리가는 일본의 고베, 미국의 프로비던스와 자매결연 도시라고 합니다. 스웨덴은? 스톡홀름과 노르쾨핑.
한국과 라트비아 사이에는 미미한 국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스웨덴 대사관이 라트비아쪽 업무까지 보고 있는 것 같군요. 외교통상부의 정보에 의하자면 라트비아에는 재외동포 7명, 구소련계 고려인은 약 200명 거주중이며 한국식당이 있다고 합니다. (...)

(*) 우리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다들 발란더가 뭔가에 말리는 걸 보려고 이 시리즈 보는 거 맞죠? ;ㅁ; 주인공을 이렇게까지 '일상적인' 난감함에 처하게 하는 시리즈가 또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까멘스까야나 모스 형사도 잡을 폼은 다 잡는데...척 팔라닉은 한 권씩이기라도 한데...T^T
솔직히 경찰서 문서실에서의 그 장면은 정말 좀 그랬습니다. 발란더...어디까지 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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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서는 스웨덴어고 제가 읽은 판은 영문판이라, 결코 '원서' 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카테고리에 넣은 건 마땅히 둘 데가 없어서일 뿐입니다!


  0. 발란더네 동네 이름 Skåne의 발음은 쇼네보다 스코네가 맞는 것 같습니다. 스웨덴어 sk의 발음이 가끔 sh+x이기는 한데 모음 å앞에서는 아니지요. 위키페디아에 걸려 있는 네이티브 발음을 들어 봐도, 쇼네라고 못 할 것도 없지만 스코네에 더 가깝게 들리지요. 그나저나 공부한다고 듣기도 듣고 발란더 시리즈 영화도 보았는데, 스웨덴 어 억양에는 참 적응이 안 되는군요.

사실 제일 놀란 건 스코네의 영문명, 영어 형용사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Scania, Scanian. 하긴, 지도를 봤더니 꽤 큰 지역이더군요.

하나 더, 전에도 얘기했지만 Ystad는 위스타드가 맞습니다.

아울러, 스웨덴어 r은 어말에 온다고 영어처럼 잦아들거나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쿠르트 발란데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들지만, 확정되기 전까지는 검색의 편의를 위해 발란더로 가겠습니다.

1. 위스타드 교외의 농가에서 농부 부부가 살해당합니다. 농부의 코는 잘려나가고 그 부인의 목 둘레에는 올가미가 걸려 있었지요. 전에없이 잔혹한 사건의 성격 때문에 센세이션이 일어나고...수사 과정에서 의외로 금전문제가 개입되어 있음이 밝혀집니다. 문제는 부인 쪽이 죽기 전에 남긴 말 한 마디("외국인")와 저 금전문제를 도저히 엮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어요.

2. 이 소설, 무지 찝찝합니다. 일단 저 사건의 축을 이루는 '잔혹함'에 대한 답이 끝까지 나오지 않거든요. 하지만 [Faceless Killers]는 발란더 시리즈의 시작으로, 이 시리즈를 통해 나타나는 헤닝 만켈의 시각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감이 옵니다. 이건 바로 쿠르트 발란더 개인이 현대 스웨덴(이라고 해도 이제는 벌써 10년도 더 전입니다만...) 범죄의 불가해성에 맞서는 시리즈가 아니었던가요. 그 시작으로 손색이 없다고 해야 할 겁니다. 문학적으로도 [한여름의 살인]에 뒤지지 않고요. 발란더의 촘촘한 고뇌가 읽는 사람에게 손에 잡힐 듯이 전해져 오지요. =_=;

3. 저는 발란더 시리즈가 쿠르트 발란더 개인의 타락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는 사실이 이 책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갱생기잖아! 이 책의 발란더는 정말로 찌질합니다. 모나가 막 떠난 참이라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하고, 모나를 떠나게 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고, 딸은 자기를 미워하고, 아버지는 노망나고, 음주운전하다 동료 경관에게 잡히고, 술 먹고 예쁜 유부녀 검사한테 치근덕대다 얻어맞고...아아.

후반의 전개가 거진 구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초반 상황이 비참합니다. 발란더, 참 많이 강해졌군요. 그저 무뎌진 건지도 모르겠지만.

4. 후반에서 너무 그립게 회상하기에 뤼드베리와 발란더 사이에 매우 다정한 무드라도 있었나...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건만. 그래도 저는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아버지 대신 경찰의 동료이면서도 아버지 같고 스승 같은 뤼드베리에게 마음으로 의존했던 발란더' 같은 걸 좀 상상했는데...=_=; 매우 심심한 형태로 나오기야 합니다. 뤼드베리가 암에 걸렸다는 걸 알고 그제서야 화들짝 하고 달려가서 비비적거리는 게 그야말로 발란더답다고밖에...
저런 상상을 하면서도, 뤼드베리가 직접 등장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즉, 더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 책이 끝날 때까지 살아있습니다. 반면 스텐 비덴은 처음부터 과거의 사람이군요!

5. 날씨가 이토록 가혹한 곳에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요. 사건은 1월에 시작됩니다만 아직 스코네에 눈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눈만은, 눈보라만은. 거의 한 권 내내 '아직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 의 연속입니다. 지옥같이 내려 모든 것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눈이 언제 오려나, 불안해하는 발란더의 기분은 수사 상황과도 같아서...그들이 마침내 범인을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리고 얼마 후 그가 완벽히 무죄임을 깨달았을 때.
스코네에는 눈이 내립니다.
아, 이 절망감.

...그리하여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은, "Still no snow. " 되겠습니다. 두 번째는, "위스타드로 돌아오는 길에 발란더는 토끼를 치었다" ...다시 한 번, 아, 이 절망감. OTL

6. 스웨덴어 소설을 영어 번역으로 읽다니 뭐하는 짓이냐는 생각이 중간중간 들었습니다만, 애초에 한국판이 중역임이 너무 명백해서요.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국에 안 나오면 영문판으로 보겠습니다. (린다 발란더 시리즈는, 좀 생각해 보고요 :D)
저 재미없고 쓸쓸한 표지가 이 시리즈에는 꼭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한국판 표지는 좀 너무 예쁜 감이 있지요. ^^; (아, 물론 한국판 표지도 좋아합니다. 초 아스트랄한 표지 그림 셀렉션...너무 좋아요.)

7. 깜박하고 말 안 했는데 이 소설의 발란더는 참 탐정 같습니다. =_=;
잠복...미행...카 체이스...세상에나.

8. 그리하여 뤼드베리가 범인을 쫓아 가혹한 밤을 보내고 얼굴이 말이 아니게 된 발란더에게 "자네 펀치드렁크가 온 복서 같군" 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저는 배우 Brendan Gleeson의 얼굴을 떠올리고 낄낄 웃었습니다. 예전에 친구랑 발란더 시리즈 가상 캐스팅 놀이를 했을 때 친구가 대뜸 발란더 역에 저 배우를 추천했었거든요. 저도 상당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오리지널 발란더' 로 알려져 있는 스웨덴 영화판의 Rolf Lassgård는 좀 너무 잘생긴 감이 있지요. :D

9. 딴 작품 얘기입니다만 폴 버호벤 감독으로 [한여름의 살인] 영화화가 계획됐다가 주저앉은 적이 있답니다. 우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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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8-04-16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ppie님 리뷰가 정말 ㅎㄷㄷ 입니다.
이 책의 원서는 스웨덴어고 제가 읽은 판은 영문판이라, 결코 '원서' 가 아닙니다→이 무슨 겸손의 말씀이십니까.제 입장에서는 당연히 영어도 원서일걸요.
저도 영어만 되면 원서로 읽고싶은 책들이 많은데 실력이 안되서 오로지 국내에서 번역되기만을 기다리는 책이 다수인데 언제 출간될지 모르겠네요.ㅠ.ㅠ
좋은 리뷰 많이 부탁드립니다^^


eppie 2008-04-24 13:13   좋아요 0 | URL
저도 번역이 안 되는 책들 중에 너무 읽고 싶은 게 많아서 한 페이지에 열번씩 사전 찾아가며 읽고 있습니다. ㅠ_ㅠ 이것도 한번 시작하니 나중에는 속도가 붙고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역시 제가 보고 싶은 작품이 번역되길 기대할 수 없는 제 수상쩍은 취향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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