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달'의 세계

달과 6펜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유명해서 친근한 문학 작품 중의 하나인 '달과 6펜스'를 이제서야 읽었다. 워낙 알려진 작품이라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라는 점만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사실 난 고갱의 그림 몇 점만 알고 있었을 뿐, 고갱 개인이 살아냈던 삶의 모습은 거의 알지 못했다. 나의 관심은 고갱 쪽보다는 고흐였으므로. 이야기가 고갱의 삶을 전적으로 답습한 내용으로 채우고 있지 않아 현실감은 좀 떨어질지는 모르나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제3자의 시선을 통해서 '달'의 세계로 표현되는.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사로잡힌 한 화가의 영혼의 세계로 이야기는 우리를 안내한다.

안정된 직업도, 안락한 삶도, 처자식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다 내팽개치고 어느 날 집을 나가버린 사람이 있다. 집을 나간 이유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고 그가 답한다면 보통의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이 이런 답변을 듣고 일으키는 첫반응은 일단 말이 안되는 소리에 기가 막혀 터져나오는 헛웃음이 아닐까 싶다. 다수가 그런 길을 걸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중간에 걷던 행로를 바꿔 전혀 새로운 길을 택하는 사람이 엄연히 현실에서 존재하고 있고,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는 점은 사실이다. 스트릭랜드는 타인의 시선이나 비판 혹은 인정은 관심에도 없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 세계에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냉소로 가득찬 인물이다. 이런 사람이 실제로 내 주변에 있다면 난 이런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를 사로잡은 열정이 그가 한 모든 행동들의 결과로 납득될 만한 것인지는 아직도 아리송하다.

'달'과 '6펜스'라는 두 상징으로 구분되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스트릭랜드는 '달'을 선택했다. 달을 선택해서 그는 외관상 고통스러운 부족한 삶을 살았지만 동시에 열정적인 사람이 되어 그림을 끝까지 그릴 수 있었으며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한 예술가가 되었다. 이야기는 예술가의 삶 내지는 예술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선을 긋고 기준을 세우고 원칙들이 가득한 '6펜스'의 세계에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달'의 세계. 무엇이 옳은가는 큰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창조의 본능을 가진 사람들이 온갖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그만두지 못하는 예술가가 되는 이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절대적인 기준이란 건 사실 없는 게 아닐까. 강렬한 무엇이 영혼을 사로잡으면 평범한 사람도 예술을 하게 되는 것일까. 예술이란 세계가 신비롭게 느껴진다.

김영하표 영화이야기

김영하 이우일의 영화이야기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마음산책 / 2003년 2월

연장 소설만 읽었더니 좀 지루한 기분이 들어 좀 쉬어가는 의미로 산문집을 집어들었다. 일종의 휴식처럼. 독서에도 독자 나름의 책보는 방식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소설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소설만 읽어서 별 재미를 못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난 산문집을 본다.

김영하가 보거나 쓴 영화이야기는 어떻까 싶은 마음에 읽었는데, 김영하의 다른 책처럼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예전의 읽었던 수준의 재미와 감동. 평이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난 그를 언제나 일정 이상의 재미는 보장하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각각의 영화를 소재로 쓴  단편적인 글들을 엮었다. 영화이야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영화이야기라고 하니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레 비평을 떠올렸던 것일까. 기실 어떤 글은 영화 얘기는 별로 언급하지도 않고 약간의 언급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불만은 없다. 정말 그의 다양한 사고를 읽는 것만으로도 책을 보는 시간만큼은 읽는이로 하여금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주절주절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김영하. 이 작가는 글을 재미있게 쓰는 작가다. 재미뿐만이 아닌 여러 분야에 걸친 지식도 풍부한 사람이고. 글을 보면 작가의 모습이 보이는 법 아닌가. 얼핏이라도.

제목만 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익숙한 영화가 많았다. 작가 나름의 감상과 영화와 관련한 이해의 글을 읽었더니 더러는 보고픈 마음이 생기는 영화도 생겼다. 허나 게을러서 언제쯤 보게 될지는 아리송하다. '이야기'로 '영화'를 만난 시간이었다. 명랑하게 통통 튀는 작가 특유의 유연한 생각을 알 수 있어서 이번 산문집도 만족한다. 책을 읽는다는 생각보다는, 놀이처럼 논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집어들고 있기에는 딱이다. 그런 성격에 맞는 책이다. 금세 읽어버려서 그런지 벌써 기억이 가물거린다. 취약한 나의 기억력, 걱정된다. 지금 유쾌한 글이 필요하시다면, 이 책 어떠신가. 괜찮게 읽히는 책이다. 중간에 끊어서 읽어도 전혀 부담없는 영화얘기. '영화'보다는 '이야기'가 더 주를 이루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이야기가 주인공이고 영화는 조연인 셈이다.

잭 블랙과 유쾌함!

스쿨 오브 락 - 할인행사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 잭 블랙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3월

영화보기를 좋아하지만, 자주 접하는 편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도 못 본 경우가 허다하거나 뒤늦게서야 겨우 찾아보는 나는야 뒤북치는 스타일. '스쿨 오브 락'도 그런 맥락에 속하는 영화일 터. '잭 블랙' 얼굴만 알았지, 연기는 처음 봤는데 진심으로 그는 배우다. 정말 연기 잘하는 배우. 이 영화에 잭 블랙이 빠졌다면 어땠을까? 뭐 다른 배우가 나름 잘 해낸다 쳐도 그를 능가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락'이라는 음악 장르를 소재로, 듀이라는 이상한 선생님과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가 유쾌하게 펼쳐진다.

아무리 가짜라지만 선생의 본분은 망각한 채, 가르치라는 공부는 안 가르치고 락의 계보를 가르치는 이 선생. 열정적으로 락의 정신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는 모습을 바라보다가도 음악이라는 예술이 듀이에게 얼마나 큰 삶의 의미가 주는 강력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듀이는 위대한 것이 아닐까. 밴드에서 쫓겨났을 지언정, 음악을 포기하지는 않았으니까. 어떤 식으로도 새 밴드를 조직해 대회에 나갈 궁리를 했으니까 말이다. 어떤 필요나 논리에 의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닌 진짜 선택을 하는 듀이. 아이들과 듀이가 함께 하는 아기자기한 모습이나 설정들도 정말 재밌고 좋았다.

함께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진짜 사람을 즐겁게 하는 거구나 싶었다. 아이들과 함께해서 단연 더 돋보이는 신나는 영화가 바로 요 '스쿨 오브 락'이다. 잭 블랙이 보여주는 원맨쇼 같은 영화. 그의 과장된 표정과 몸짓 연기는 날 웃게 만든다. 이만큼 잘하는 사람도 드물지 싶다. 연기도 음악도 스토리도 다 마음에 든다. 왠지 기분이 꿀꿀한 날. 이 영화를 본다면 기분전환은 확실하다. 영화보면서 정말 잭 블랙이 '락'을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사실이 그랬다. 진정 연기로만 표현한 것은 아닌 것이다. 신나는 음악 영화를 원하는 분들께, 강추!

삶이라는 실타래

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달의 궁전'의 리뷰를 보자 이 책이 궁금해졌다. 기실 '폴 오스터'란 이름은 전혀 낯설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마주한 책의 느낌은 한마디로 낯섦이 주는 기분좋은 새로움이었다. 난 폴 오스터의 다른 작품을 단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다른 작품과 비교하는 것도 불가했다. 그런 나의 관점에서 보기에 그래도 이런 이야기라면 아마도 많은 독자들에게 상당히 괜찮은 이야기라고 인정받을 만하지 않을까 싶다. 흔하게들 말하는 이야기꾼이라는 말을 듣기에 정말 부족함이 없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책 읽는 시간이 값진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이야기는 삶이라는 예측할 수 없는 운명과 삶을 이루고 있는 많은 우연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이 책을 간단히 정의내리는 말인 '삶의 현실과 비현실의 훌륭한 혼합'이란 평은 꼭 알맞는 말이다. 이야기는 맨 처음 다소 불행한 포그의 삶으로 시작된다. 그 이야기는 포그와 에핑의 만남, 에핑과 솔로먼 바버의 만남, 솔로몬 바버와 포그의 만남으로 이루어지고 그 만남으로 인해 이전의 포그의 삶이 또다른 삶으로 회귀하는 과정까지의 이야기가 자세하고 세밀하게 빈틈없이 꼼꼼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야기가 조리가 있고 세련되서 책을 덮고서도 감탄의 소리가 쉬이 그치지 않았다. 내 취향에 부합하는 소설이었기에, 내 기대치를 능가했던 이야기에 가까웠던지라 마음에 쏙 들었다.

정도와 모습을 달랐더라도, 에핑-솔로몬 바버-포그로 이어지는 유전이란 숙명으로 존재했던 공통의 굴곡진 인생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삶이라는 운명이 대체 어떤 것일까 싶었다. 무수히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방식 대로 펼쳐왔던 삶과 운명이라는 주제로 이처럼 교모하게 짜임새 있게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 같다. 그래서 작가라는 사람들이 대단한 거겠지만. 이 책의 만남을 필두로 아무래도 폴 오스터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서 읽게 될 것 같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각각의 개인인 세 사람의 세 가지 이야기를 하나의 삶이라는 이야기로 엮어내는 역량이 뛰어난 폴 오스터. 이 작가, 많이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슬프지만 따뜻한 도쿄타워!

도쿄 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도쿄타워>에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건만, 예기치 않은 감동을 받았다.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이 주는 사실성이란 장점에서였을까.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작가 본인의 이야기라는 건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대면했을 때, 한번 읽어봐야지 하고 나중을 기약하게 만들었던 첫번 째 이유가 됐을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엄니'의 모습은 나의 '엄마'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하다. 보통의 '엄니'의 삶이라는 것이 자식을 위하는 희생으로 가득 하고, 자신의 삶과 자식의 삶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책을 보며 다시 한번 깊이 그 사실을 보았다. 그 큰 사랑의 고마움을 알지만 쑥쓰러움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매번 나중으로 미루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 같다. 이것 또한 후회를 만드는 일일 텐데. 너무 받은 게 많아서.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기 쉬웠고, 해준 것이 많은데도 못 해준 것만 서운해 철없이 행동하는 나의 모습이 자꾸자꾸 떠오르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반성했다. 언젠가 나도 사랑하는 부모를 떠나보내는 가슴 찢어지는 이별의 슬픔을 경험하게 되는 그런 날이 반드시 찾아올 텐데, 이런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무섭도록 불안해지고 가슴이 아려온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가족의 형태는 다양하다. 좀 빈 공간이 보이는 가족도 있고, 다복한 가족의 모습도 있을 테다. 겉모습은 제각각이건만 자식을 향한 '엄니'들의 생의 모습은 시간이 흘러도 비슷비슷하게 닮아 있다. 이야기는 슬픈 것이 사실이나  그 슬픔이 슬픔 자체만을 띄지 않아서 좋았던 것 같다. 소설은 명랑함으로 유쾌한 면이 살아 있어서, 지루하다거나 무겁지 않아서 좋았다. 

릴리 프랭키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을 통해서 작가가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던 바는 소박하지만 아주 기본적이고 중요한 메시지다. 다른 어떤 책보다 실질적으로 나의 '엄마'를 생각하게 했던 점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자식의 관점에서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닌, 한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바라보게 하는 '엄니'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왠지 가슴 한켠이 먹먹해짐과 동시에 숙연해졌다. 부모가 된다는 것. 자식을 낳고 키우는 책임을 어느 정도 끝내면 젊었던 부모는 늙고 병들게 된다. 모두가 해당되는 이야기다. 남의 이야기지만, 결코 남의 이야기만을 될 수 없는 이야기. 뭉뚱그렸던 감정을 잡을 수 있었고, 충분히 공감하고 감동받을 수 있었다. 슬퍼더라도 왠지 가슴은 푸근하고 따뜻해지는 이야기, 이것이 도쿄타워를 바라보는 나의 감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