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용은 몰랐지만 샘 스페이드란 이름과 몰타의 매가 맥거핀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봤지만 크게 곤란한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줄거리를 안다고 해도, 그게 전부는 말해주는 것은 아니니까. 글로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한낱 작은 정보에 불과할 뿐이다. 미리 조금 알았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읽다보면 샘 스페이드란 캐릭터가 워낙 강해서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단순하지 않게 복잡한 면을 잘 살려서 그런 거 같다. 확실히 착하지는 않다. 나쁜 매력이 있어. 그래서 끌리는 건가. 시작은 하나의 물건이었다. 그 하나로부터 비롯된 여러 사건들. 욕망에 취한 여러 사람들이 나온다. 사람 잡는 그 욕망이 문제지. 그렇게 값어치 있는 물건이라던, 값을 매길 수조차 어려운 진귀한 물건은 실체가 없다. 이 모든 게 다 헛소동이라니. 허상을 좇은 것이었다. 그 대가로 얻은 것이라면 무력함이 아닐까.아쉬움이 없을 만큼 좋았다기보다는 생생한 캐릭터가 맘에 들어 기억되는 이야기지 싶다. 스페이드는 마초적이고, 주관이 분명하고, 능수능란하다. 이게 그의 재능이다. 끝부분에 나오는 스페이드의 대사 부분을 눈여겨보면서 느꼈다. 거부하기 힘든 그만의 시니컬한 매력을. 난 시니컬한 사람 좋던데. 너무 반듯하고 밋밋하기만 하면 뭐든지 재미가 없다. 그게 사람이라면 더더욱. 뾰족한 면이 있다 해서 나쁜 건 아니라 생각한다. 사람은 여러 면을 동시에 갖고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여러 표정, 여러 얼굴, 여러 말투가 내 속에 같이 있다. 소설과는 별 상관없는 얘기만 늘어놓았다. 샘 스페이드란 이름으로 기억될 소설이다. 먹히는 캐릭터다. 한 방이 있는 캐릭터. 그래서 괜찮게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대실 해밋의 전집이라 해봤자 꼴랑 다섯 권밖에 안 되는 탓에 부담없이 순서대로 한 권씩 읽어나가는 중이다. 여지없이 사건은 벌어진다. 일련의 일어난 몇 개의 사건의 전말이 모두 어떤 공통점과 연관성을 가진 것인지는 끝내 밝혀지고 처리된다. 추리소설이나 탐정소설에 매혹되는 이유는 인간과 세상의 어둡고 잔혹한 면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난 그 점에 가장 마음에 든다. 명쾌히 사건이 종결된다는 점도 좋고. 현실 세계에선 시끄럽기만 하고 해결되지 않는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이야기를 접하면서 드는 생각은 인간의 정신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욕망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 욕망에서 비롯된 수많은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잘못된 행동들을 가능하게 만든 그 욕망이 새삼 서늘하게 느껴진다. 누구나 욕망이 있지만 그 욕망이 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확신하고 장담할 수가 없다. 어떤 일에 대해서든. 아차 하는 순간 경계를 넘어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게 인간이니까. 강해서 저지르는 범죄도 있겠지만 연약해서 저지르는 범죄도 있을 테니까. 한 개인의 뒤틀린 탐욕이 오염된 생각들과 많은 살인을 가능하게 했다. 미친 생각을 실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사건에 누구보다 가까이 있고, 사건 해결을 위해 행동도 적극적이지만 동시에 하드보일드적 태도를 지닌 그런 모습이 표현될 때 한층 매력적이다. 그는 이런 일을 잘 알고 있고 익숙하다. 탐정이란 전문가가 매우 특별나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그도 결국 생활인이긴 마찬가지다. 상황이 어렵게 흘러가더라도 그 안에서 다른 뭔가를 읽어내고 파악하는 능력을 보는 재미와 위트 있는 대사를 만날 수 있다. 안목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대실 해밋 식의 대사 치는 스타일이 몹시 마음에 드는데. 왜일까. 말하는 방식이 맘에 든다. 1권보다는 좀 덜 좋았던 게 사실이지만. 뭐, 매력이 다른 것일 뿐이다.
이렇게 사람 마음과 정신을 뒤흔들 줄이야. 소설을 읽는 이유야 여럿이겠지만 글을 읽음으로써 나는 보다 감정적으로 복잡해지고 어지러워진다. 이 기분이 싫지 않다. 내게 낯선 곳과 익숙한 곳, 모르는 세계와 아는 세계. 그 어느 곳이라도 우리는 갈 수 있기에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만나야 할 자기 자신에 대해 과연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만난 적이나 있을까. 이제껏 정말 자신과 마주하며 보낸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 많은 시간동안 난 대체 뭘하며 지낸 걸까. 의미 있는 시간을 추구해보지도 못한 채 이렇게 나이만 꾸역꾸역 먹었단 말인가. 한심하다.어떤 우연한 계기를 통해 주인공은 자신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실체를 비로소 알게 됐을 때의 그 충격과 당혹감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용기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난 그런 용가가 부족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없는 것 같다. 불현듯 떠오른 어떤 생각과 기억을 통해 뒤늦게 진실을 마주할 때가 종종 있다. 불편하기에 꺼려진다. 난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었다. 나를 잘못 알았다. 이제 심각해질 일만 남았구나.가식과 위선으로 위장한 삶이 깨어지고 무너질 때의 공포감이란 대단할 것이다. 제정신을 못 차릴 만큼.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꾸만 자문해보게 한다. 긍정적인 답변이 쉽게 안 나온다. 진실은 고통을 동반한다. 아프니까 우선 피하고 맘대로 왜곡시킨다. 그래야 내 맘이 편하니까. 남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진짜는 알지도 못하면서. 알아보려 시도하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나부터 제대로 알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우선인데 나부터가 거꾸로 살고 있다. 남의 이목이 여전히 신경쓰여서 머뭇대고 망설이는 일이 많다. 그러지 말아야지 만날 입으로만 그런다. 입만 살아서. 배우자도 자식도 없어서 모르겠지만 애정으로 선의로 잘 꾸려온 삶이라 자부한 자신의 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도 모자라 사라져버릴 순간에 놓여 있다면 나도 조앤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덜컥 겁이 날 테니까. 내면의 목소리 얘기를 자주 하지만 정작 듣기는 힘든 게 그 목소리다. 내가 먼저 들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하니까. 감춘다고 숨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외면하고 침묵해버리는 내가 있다. 가만히 생각해본다. 나는 나를 얼마나 잘못 알고 있을지. 또 얼마나 알고 있을지에 대해.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이해받고 싶은 심리가 있다. 너무 타인 중심의 사고를 지향했던 오류가 있었지 싶다. 후회되고 바로잡고 싶은 오류들이 생각나는 지금이다.
챈들러의 언급으로 대실 해밋이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됐다. 전집이 나왔을 즈음 기사를 접하고 내심 반가웠다.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하드보일드를 많이 접해보진 않았지만 충분히 알 수는 있었다. 사람들이 왜 그토록 흥미를 느끼는지를 말이다. 의문의 사건이 느닷없이 벌어지고 그 사건 뒤에 감춰진 진실을 밝히는 탐정이 등장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사실상 거부하기가 불가능하다.붉은 수확을 통해 하드보일드의 원형을 보았다. 여기가 시작점이구나 싶었다. 생각해보면 단순히 살인사건이 일어나서 흥미로운 게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기 전후의 사정을 밝혀내는 복잡한 과정 안에서 목격하게 되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 흥미로운 것이다. 모두가 반듯하고 깨끗할 수는 없지 않은가. 현실에 전혀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야기의 바탕은 현실에서 기인한다. 각각의 욕망과 입장이 다르기에 충돌할 수밖에. 적나라해서 불편하고 혐오스럽지만 그런 세상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니까. 내 안에 그런 모습이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추악하고 어둡고 비참한 세상 속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을 생각해본다. 어떻게 돌아가는 판인지 잘 알기에 섣부른 기대나 희망은 전혀 없다. 적절히 사람들을 사용할 줄 알고 이용할 줄 안다. 감정이란 군더더기는 최대한 배제한 채 묵묵히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일을 진행시킬 뿐이다. 멋지다. 누굴 만나도 당당한 그 자신감과 그 재치 넘치는 말솜씨. 역시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말을 잘해야 해. 누군가에게 받은 진한 인상이나 영향 중에 '말'만큼 직접적이고 강력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소설 속 대화 장면을 보며 톡톡히 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얼마나 배짱이 두둑하고 여유가 있고 안이 단단한 인물인지 대사를 보면 드러난다.탐정 소설을 읽는 목적에 알맞은 책이었다. 내가 바라던 바를 충족시켜준 이야기. 간결한 문장이 포착한 세계와 인간은 냉담하고 거칠었지만 난 그런 세계 속 이야기가 전혀 싫지 않다. 세계와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들이니까. 이상한 위안을 얻는달까. 소설은 실제보다 더 도드라지게 그린다는 게 다를 뿐이다. 차이를 이용할 줄 아는 똑똑한 매력적인 탐정 사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신, 마음에 들어요!
러시아 소설을 상당히 오랜만에 읽었다. 사실 쳐다보지도 않고 안 읽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인데. 아무튼 예전부터 읽기를 미뤄온 작품 중 하나였다. 초반에는 안 읽혀서 혼자 씩씩댔다. 이유는 모르겠다. 집중력이나 이해력 부족 탓이겠지. 소설의 주인공에게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그가 쏟아내는 감정과 사고의 파편들이 더러 버겁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복합적인 존재인지 살면서 실감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내 안에도 솔직히 털어놓지 못해서 그렇지 모순이 그득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현재 살고 있는 모습이 지하인과 흡사하다. 큰 문제일까. 음울한 이야기에 맘이 움직인다. 한마디로 꼬인 인물이라서 저런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름의 이유가 있고, 흐름이 있는 것이니까. 마냥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이런 인물 잘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 난 멘탈이 건강하지 않기에 잘 받아들였다. 오락가락하며 스스로도 힘들고 괴로울 것이다. 고민하면서도 통제되지 않는 자신이 한심하고 야속해지는 것이다. 이런 감정 익숙하다. 삶을 모르겠다. 직접 깨지며 부대끼며 살지 않아서. 그냥 소설을 보면서 자주 들었던 생각은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뭔가를 한다는 게 정말 어렵다는 점이다. 그 누군가엔 자신도 포함되니까. 떠올린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게 왜 그리 어려운 것인지. 젠장.행복한 캐릭터는 내게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예의바른 캐릭터는 사양한다. 많이 비뚤어졌다 해도 단단히 꼬였다 해도 난 이런 주인공이 마음에 든다. 그게 거부할 수 없는 그의 매력인데. 그의 모순, 탄식, 어쩔 수 없음에 공감하는 바이다. 실제론 이렇게 절절하게 세게 적나라하게 표현을 못하니까 내면에 갈등이 쌓이는 거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전제 하의 수기라면 나도 한번 써볼 수 있지 않을까. 망한 글이라도 괜찮겠지. 비공개라면 안전하니까. 주인공 못지않게 두서없이 떠들 수 있다. 내면의 짐을 내려놓는 것도 짊어지는 것도 똑같이 필요하다. 내부든 외부든 억압이 없을 순 없다. 자유로울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