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그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그렇게 변하지 않는 감정으로 꿈꾸고 바라보는 대상이 있다면 그건 내겐 소설이지 싶다. 쓰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쓰지는 않는다. 쓸 수 없으니까. 재능도 근성도 없는데 어떻게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내가 나를 아는데. 읽는 것이 불만족스러운 것도 아니고. 작가란 직업에 호기심이 있는 편이다. 모든 창작자들에 대한 경외심도 있고.예술이란 게 순전히 재능으로만 풀어지는 것이 아니란 걸 안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출중한 재능이 있다 해서 술술 써지는 것도 아니고. 실패해도 인내하고 끝까지 다시 시도해서 마침내 달성하는 태도가 핵심이다. 글쓰기든 삶이든. 쟁쟁한 소설가들의 인터뷰를 찬찬히 읽어내려가면서 난 무엇을 기대했던가. 어떤 힌트를 바랐던 것일까. 글을 쓴다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든다. 정확한 문장과 표현을 위해 쓰고 지우고 고치고 또 고치는 그 지난한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견디는 작가들의 경험담을 듣자 자연스레 비교가 되는 것이다. 매일매일 대충 게으르게 흘려보내는 내 삶과 말이다. 무엇을 깊이 추구하지도 사랑하지도 탐구하지도 않는 내가 한심해지는 거다. 왜 이 모양이지? 당장 뜯어고쳐도 모자를 판에 왜 변하지 않고 정체된 삶을 계속하는 걸까. 좋은 인터뷰를 보면 확실히 배우는 것도 깨우치는 것도 있다. 배운 게 있지만 내 삶에 연결이 돼야 진짜 배운 것이 될 텐데. 머리와 가슴으로 감동했으나 실천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보통 신중하고 깊어서는 이런 훌륭한 작품을 쓰지 못하겠지. 알아서 쓰는 게 아니라, 쓰기 위해 공부하고 알아야 하는 작가들의 겸손함이 크게 와 닿는다. 경험도 관찰력도 상상력도 빈약해서 남들에게 보여주고 인정받는 글은 쓰지 못하겠지만 나 혼자 쓰는 글쓰기는 할 수 있을 텐데. 근데 그것도 쉬운 건 아닌 것 같다. 타인의 시선이 없어도 혼자 묵묵히 한 글자씩 써내려가는 게 무진장 어려운 거더라. 내가 나를 의식하니까. 존재할 법한 그럴듯한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의미와 표현으로 마음과 세상을 보고 느끼게 해주는 작가들이 있어 다행이다. 이런 재미를 알아서, 느낄 줄 알아서 정말 다행이다.
생각해보면 윤일병 사건을 뉴스로 접한 충격의 여파가 이 책을 끝까지 붙잡게 만들었다. 경악했고 불편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특히 사회면을 장식하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을 볼 때마다 매번 뜨악한 기분이 된다. 인간이란 존재가 대체 무엇이며,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지 자못 궁금해졌다. 사회심리학은 이런 궁금증을 풀어주는 학문이었다. 관련 지식과 정보가 없기도 했지만 이미 수십 년 전에 교도소 모의실험을 통해 시스템과 상황이라는 사회적 힘의 위력을 밝혀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난 이제서야 어렴풋이 인식하기 시작했건만.개인의 기질 탓으로 빚어진 문제가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개인은 사회적 동물로서 사회적 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나쁜 시스템이 낳은 나쁜 상황에 놓인 개인과 집단은 엄청나게 나쁘고 이상한 미친 짓을 할 수 있게 된다.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환경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내면에 단단한, 확실한 것을 가져야 그나마 덜 흔들리며 살 텐데. 인간성에 새로운 이해가 더해지면서 편향된 시각이 조금은 균형이 잡히는 듯하다. 양면적 진실에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나 심층적인 분석의 글은 난해하지 않고 분명하다. 범죄의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면 인지하고 최대한 조심하며 사는 수밖에 없겠다.살다보면, 아니 살면 살수록, 점점 더 악에 대해 왜 그런 것인지. 어떻게 그런 것인지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보게 되는 것 같다. 스탠퍼드 교도소 모의실험 전 과정과 실제 아부그라이브 교도소가 겹쳐지고 맞닿아 있는 지점에서 발견되는 의미들이 크다. 단순히 싫다고 거부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 생각보다 훨씬 더 인간은 수동적이고 취약하다. 이 점을 잊지 말자. 뒤늦게나마 새로 알게된 지식과 통찰로 인해 사뭇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사고도 해가며 독서할 수 있었다. 미친 짓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깨우치는 것이 모두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 같다. 어리석은 미친 짓거리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더욱 말이다. 자주 교만해지는 마음이지만, 금세 망각하는 정신이지만, 책에서 배운 바를 온전히 이해해서 내 삶에 약간이라도 적용하고 싶다. 각성하고 경계하자. 이면을 마주하니 생각이 복잡해진다.
스토리텔링을 거부하는 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할 것이다. 책을 읽고난 뒤, 그 생각은 더 뚜렷해졌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입으로, 글로, 영상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전하고 소비하고 즐기는 행위는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지고 있다. 그 매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스토리텔링이 담당하고 있는 여러 유익한 기능들이 존재해왔기에 인류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양산하는 것이다. 단순한 재미만은 아니다. 모든 이야기엔 메시지가 담길 수밖에 없고 사람들은 끝끝내 영향받길 바란다. 대다수 사람들은 책, 드라마, 영화보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간접체험이란 대리만족이기도 하며,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가닿을 수 없는 세계와 마음에 대한 공감이기도 하다. 불완전한 것들에 마음이 끌리고 기운다. 세상 속 만물이 각각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내가 처한 상황과는 상관없이 딴 세상으로 가볼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 매혹적이다. 상상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 없으니까. 경계가 소용없으니까.스토리텔링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책이다. 현학적이지 않게 적당히 분석적인 글이 장점이다. 어렵지 않아 술술 금세 잘 읽힌다. 다양한 사례를 제공하고 있어 주장을 뒷받침하고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그러라고 쓴 글이겠지만. 이야기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니 새삼 이야기의 위대함에 그 힘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 가치를 비로소 알게 되었달까. 이야기가 사람들을 얼마나 쥐락펴락 하는지. 그러면서도 그 사실에 불쾌해하는 사람은 없으니 신기한 노릇이다. 날 혹하게 만드는 이야기에 깜짝 놀라고 정신 못 차려도 좋다. 약간은 감당하기 버거운 이야기로 날 여지없이 흔드는 이야기에 몰입하고 반응하고 싶으니까. 난 그걸 재미있어 하는 사람이니까.
처음부터 책을 좋아하진 않았다. 반드시, 어쩔 수 없이, 꼭 읽어야만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책을 읽지 않았다. 솔직히 싫었다. 피했다. 읽는 재미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책이란 사물은 나와는 분명 상관없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변화가 생겼다. 그럴 만한 일이 일어났다. 그게 계기라면 계기. 결론적으로 나쁜 일이었는데 그로 인해 어쨌든 난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됐다. 크게 잃고 그 대신 작지만 새로운 재미를 얻었다. 그 재미가 상당하다는 걸 알아버렸다. 점점 좋아지는 게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큰 재미는 어쩌다 한 번씩만 있어도 족한 것. 작은 재미는 주로 책을 통해 얻는다.안목도 없고 깊이도 없다. 아직은. 책을 읽는다 해서 삶에 엄청난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생기지도 않았다. 초창기 잠시 기대를 해본 적도 있었는데 헛된 바람이었나 보다. 바라는 것 없이 그냥 읽는다. 그냥 읽는 행위 자체가 좋은지 모르겠다. 소위 독서 내공 있으신 분들의 이야기는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 서평을 쓰며 밥벌이 하는 이의 고충을 느끼면서도 한편 글을 웬만큼 잘 쓰니까 그런 직업도 가능한 거지,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부러워하나 생각해본 적이 있다. 외모적으로 잘나고, 똑똑하고, 성격 좋은 사람도 물론 부러워하지만 곰곰 생각해본 결과 그중에 제일은 ‘표현력’이었다는. 말이든 글이든 언어감각이 좋은 분들이 마냥 좋아보이는 거다. 내 눈에는. 갖고 싶은데 없으니까 그런 거겠지. 나도 안다.서평집이지만 시종일관 재미진 에세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가볍게 진지하다. 책에 관한 책이다. 나보다 책을 훨씬 많이 읽었고 아는 사람의 경험담은 언제나 꽤 재미있다. 배우는 것도 닮고 싶은 것도 자연히 생긴다. 덕분에 읽으면 좋을, 구미를 당기는 몰랐던 책을 알게 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아무래도 독서 자체에 대해 떠올려보게 되더라. 알고 싶고, 느끼고 싶고, 배우고 싶어서 책과 같이 하는 거다. 내겐 책이 필요하다. 내가 떠나지 않는 한 책이 날 먼저 배신하고 버릴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평등한 관계랄 순 없지만 나는 이 관계가 마음에 들고 오랫동안 원만하게 유지해나가고 싶다. 더 열심히 더 재밌게 읽어나가자고 스스로 다짐하게 만드는 이유는 뭘까. 알 수 없다. 책을 건지든 다짐을 건지든 자극을 건지든, 뭘 건지기는 건졌다. 두루두루.
장르를 막론하고 직업으로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동경을 가지고 있다. 꼭 업이 아니더라도 취미로 꾸준히 뭔가를 쓰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난 그러지 못하니까. 문학 중에서 단연 소설을 좋아하고 즐긴다. 시보다는 덜 난해하니까. 소위 고전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쏟아지는 찬탄의 말들을 보며 동감할 때도 전혀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동감할 땐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동감하지 못할 때 왠지 느껴지는 약간의 불편함이 분명 있다. 내가 책을 잘 이해하는 못한 것처럼, 잘 읽어내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꼭 동감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서평의 영향을 충실히 받는다. 서평은 도움과 방해의 기능을 동시에 강력히 뿜어내고 있다. 읽는 순간 뭔가가 생겨버리는 거 같다.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선입견이 너무나 쉽게 생성된다. 책에 담긴 수많은 악평을 보며 내심 안심이 되기도 했다. 다른 평이 틀린 평이 될 수는 없다는 걸. 개중엔 틀린 평이 더러 있을 수 있겠지만. 쉬우면 재미가 없듯이 똑같으면 재미가 없는 법이다. 사람도, 모양도, 표현도, 똑같지 않기에 재미를 느끼지 않는가. 서평도 같은 맥락이다. 단순하게 표현된 것부터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것까지 눈으로 평들을 읽으면서 미소 짓기도 끄덕이기도 했다. 악평의 역할이 나름 있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화려한 치장은 벗겨내고 누가 뭐라 하든 알맹이를 내 시선으로 보고 생각하고 표현하고 처리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뭔가의 개입이란 곳곳에서 이루어지니까 말이다. 서평가의 직업 의식이랄까. 윤리 의식이랄까. 지키고 살려면 여간 피곤한 게 아닐 것 같다. 이 책의 묘미라면, 글로 사람이든 작품이든 까는 다양한 화술을 구경하는 재미다. 신랄함에 있어서 심한 수준인 것도 있었지만 난 당사자가 아니니 웃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정리가 된다. 사라질 것은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질 테고 남겨질 것은 그럴 만한 이유를 단 채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악평도 그렇게 남았다. 서평가라면 모름지기 떳떳하게 쓸 일이고, 작가라면 꿋꿋하게 쓰는 게 정답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