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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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외진 미쓰세 고갯길에서 '요시노'라는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고 이 살인사건을 시점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작은 다분히 자극적인 '살인'이란 소재를 다루고 있으나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살인과 그 살인에 연관된 범인을 추적해 찾아내려 하거나 허를 찌르는 트릭과 능란한 솜씨로 독자들을 현혹시키는 데 중점을 두는 그런 소설은 전혀 아니었다.

신간으로 이 책이 나온 후 얼마쯤 지나서였을 것이다. 우연히 들어갔던 블로그에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읽었더랬다. 아마도 책이 나온 건 알았지만 냉큼 사서 읽을 수는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읽겠다는 마음은 단단히 먹고 있었던 터라 서평이 더 눈에 띄였는지도 모른다. 그 블로거는 아마 요시다 슈이치의 글을 흠모하는 광팬인 듯 했는데, [악인]의 초반을 읽으면서 이건 요시다 슈이치가 쓴 문체 같지 않다는 낯설음에 약간 당황했었다는,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작가 특유의 문체와 작가가 글로써 표현하고 있는 이야기의 힘에 크게 매료된 듯 역시 요시사 슈이치라며 흡족한 만족감을 글로써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보지 않은 책에 대한 호평의 글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될까 아님 독이 될까. 나의 경우, [악인]의 경우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도움이 됐다. 이야기을 읽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고 그야말로 몰입하며 이야기 자체에 그리고 책을 덮은 후에 밀려오는 감정의 파문들을 가만히 느끼며 무엇이 악인일까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의 작품은 고작 [7월24일 거리]만 읽어본 게 다지만 그 작품에 드러난 감정을 표현하는 작가의 글에 마음을 빼았겼던 것이 사실이다.그런 면에서 [악인]은 정말 작가의 역량이 발휘된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선악이라는 것. 정확히 말로써 설명하기는 힘든 부분인 것 같다. 인간은 전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존재이다. 모호하고 모순적인 존재이니까. 이런 인간을 전적으로 '악인'이라고 손가락질 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을 무엇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 이 세상엔 간절히 누군가를 만나고 연결되고 싶지만 혼자라는 감당하기 버거운 외로움이란 것이 허락된 사람들도 있다.

그 외로움이 '악'을 키워낸 발단이라면 소설 속에서처럼 현실에서도 외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런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이다. 우리 사회에 점점 외로움이 퍼져서 범죄가 많아진다는 논리가 영 틀린 소리는 아니니까 말이다. 

살인자인 유이치와 그런 유이치를 진심으로 바랐던 미쓰요를 보면서 자연스레 내가 당사자들이 된 듯 동화되었고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다양한 시점을 활용해서 사건의 중심인물과 주변부 인물들을 넘나들며 서술하면서도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고 있지 않은 작가는 마지막 큰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대체 누가 악인인가? 살인자라서 악인은 아니라는 것. 살인을 저지른 유이치를 두둔하는 말이 아니라 살인을 했으니까 악인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인을 안해도 인간은 얼마든지 악인이 될 수 있으니까. 나는 결코 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악인]은 무엇보다 인간 본성을 다루는 작품이다. 표면이 아닌 잘 드러나지 않는 우리들의 이면의 이야기 말이다. 작가는 훌륭히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는 노력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자연스레 축적된 나의 편견에 일말의 균열을 안겨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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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 나의 하반기 첫 영화의 시작은 브로크백 마운틴이었다.
너무나 게을러져서 영화와 관련한 어떤 리뷰나 짧은 페이퍼조차 쓰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

영화 내용도 연기도 음악도 너무나 좋았다. 잔상이 쉬 사라지지 않는 영화.
영화의 첫 시작을 알린 처연하게 들리는 기타 선율도 생각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 속에서 짧게 흐르던 ' I Don't Want To Say Goodbye - Teddy Thompson'
이란 곡이 가장 내 귀에 좋게 들려서 기억에 남는다.
이 음악을 영화보다 먼저 만나서 그런걸까.

허망하게 떠나버린 과거의 '히스 레저'를 더 이상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유일한 방법은 현재의 영화 속에서나 가능할까.
추억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따금 그리워지면 또다시 보게 될 영화.
그리움도 외로움도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현실은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부정못할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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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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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명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아무도 없지 않을까. 책은 전혀 읽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셰익스피어를 모를 수는 없을거다. '셰익스피어'란 이름과 주요작품의 제목만 줄줄이 읊어댈 줄만 알았던 내가 드디어 4대 비극에 첫번 째로 꼽히는 햄릿을 읽었다.

상식을 묻는 퀴즈 프로그램에서 단골로 나오는 질문 하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속하지 않은 것은?' 정답은 '로미오와 줄리엣'인 경우가 많다. 이런 질문을 볼 때마다 항상 나도 한번 4대 비극 작품을 모조리 한번 읽어봐야 하는데 했었다. 위대한 극작가. 흐른 시간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이란 아름다움으로 감동을 안겨주는 사람들은 정말 위대한 것 같다. 책제목만 알았지 어설프게나마 줄거리조차도 모호하게 알지 못했던 나의 무지가 왠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고전적인 작품이지만 전혀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읽을 만한 재미가 살아있는 작품이면서 대사의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하나. 시적인 아름다움과 간명하게 처리된 대사의 깔끔함이 공존하는 작품이었다. 본질적이고 포괄적인 작품으로 읽히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을 내가 얼마나 깊이 느꼈냈는지는 아리송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시간이란 개념과는 무관하게 왜 인구에 회자되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절실히 깨달았다. 맥없이 유명해지기란 불가능하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1601년의 작품을 2008년에 읽어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매력이 건강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햄릿이란 인물과 그가 가지고 있는 복수와 갈등들은 인간적인 보통 감정이 있다면 쉽게 공유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무엇보다 인공적이지 않은 점이 좋았다. 보통 인간의 감정선으로 느끼고 사유할 수 있는 매력이 생생한 희곡이었다. 사실 나의 범주에서 '책을 읽는다' 라고 말할 때 희곡을 염두해 놓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셰익스피어가 친근하면서도 멀게 느껴지곤 했었는데 햄릿을 시작으로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는 것만으로도 내 빈곤한 감성이 풍요로워지고 넓어질 듯한 느낌을 받는다. 명대사에 끌려 이 작품에 손을 댔더라도 그것만이 아닌 더 심오한 듯하나 거부감 없는, 기분좋은 묵직함을 경험할 수 있는 훌륭한 문학작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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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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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본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감상이 쉬 잊히질 않았다. 원작이 있는 영화인지라 활자 속에서 잭과 에니스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책에 손이 닿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브로크백 마운틴 단편을 펴고 읽어나갔다. 아,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를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연하고 쓸쓸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이야기. 원작이 워낙 훌륭하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 영화로 만들어질 매력이 충분했다. 글을 읽기 시작하자 영화 속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솔직히 와이오밍이란 지역에 대한 얄팍한 지식도 없었지만 소설집 속에 담긴 11개의 단편 속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광활함과 황량함이 와이오밍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듯했고 줄곧 그 느낌이 따라다녔다. 척박한 땅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이야기는 내겐 낯섦 그 자체였다. 똑부러지게 '~다' 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운 책들이 있다. 정말 느끼는 것은 이만큼인데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부정확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게 되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 단연 이 소설집은 그런 종류에 속한다. 소설마다 조금씩 느낌을 달리 하지만 공통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절제된 감수성이 인상깊었다. 생경하기도, 집중하지 않고 설렁설렁 읽는다면 개인적으로는 읽어내기가 수월한 소설은 아니었다.

목장, 카이보이모자, 휘몰아치는 거센 모래바람을 떠올리게 만드는 와이오밍이란 세계는 고된 삶과 허망하기도 위태롭기도 한 극단적으로 흐르는 삶의 여러 면들을 다채롭게 기존의 익숙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과 표현으로 경험하실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현실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이기도 한 이야기들. 외로움과 그리움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브로크백 풍경을 잊을 수는 없을 것만 같다. 브로크백 풍경 엽서와 한 몸처럼 서로를 안고 있는 셔츠 두 장의 조화를 바라보며 차오르는 고통스러운 눈물의 에니스를 잊기란 불가능하다.

완벽한 장편소설은 없지만 완벽에 가까운 단편소설은 읽을 수 있다는 글을 어디서 읽어본 것 같다. 그 말을 기억 속에서 찾을 수 있도록 만든 이야기가 여기 있다.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라는 말은 아프지만 진실이다. 누군가에나 위안이 되는 그 말 속에 담긴 거칠고 고통스러운 삶을 닮은 이야기는 불친절하지만 그야말로 현실 그 자체인 듯했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느낌을 받으실 수 있으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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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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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꿈꾸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어렸을 적에는 남들처럼 살았으면 하는 부러움으로 인해 빚어진 상상이 많았던 것 같다.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시간이 흘러 나이 먹은 만큼 상상조차 현실적으로 바뀌어가는 것도 같다. 조금은 모습을 달리하기도 하고 혹은 확장된 모습으로 우리가 자주 꿈꾸는 행복한 가정이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단란한 가정의 모습이란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하는 모습이 꼭 연출되어야만 한다. 아이가 없으면 뭔가 이상한. 결핍 상태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물론 요즘은 많이 바뀌었고 점점 더 바뀌어가는 추세지만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사는 생활이 무엇인지 나는 전혀 모른다. 전혀 무관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소설을 읽으며 깊은 공감까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공감이란 걸 떠나서 소설을 보면서 자연스레 내가 생각하고 희망하는 가정의 모습은 무엇인지 잠깐일지라도 소설은 내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게 만들었다.

굳건하게 자리잡힌 나의 가정에 대한 기대와 신념을 산산조각 내는 어떤 일이 본의 아니게 벌어진다면 난 그 일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게 될지. 아니 받아들일 수나 있을지가 내 스스로가 의문스러웠다. 헤리엇과 데이비드는 진실로 행복 그 자체인 가정을 꿈꾸지는 않았던 것 같다. 표면적으로 흡족하게 만족 상태를 나타내는, 흡사 많은 행복처럼 보이는 많은 아이들을 원했을 뿐이었다. 아이에 대한 깊은 사랑은 외면한 채. 분명 그네들의 '다섯째 아이'는 다른 아이였다. 그들의 아이라고 상상하지 못할 존재.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아이가 발단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전적으로 아이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않겠는가. 다섯째 아이의 존재가 모든 문제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아무리 귀한 존재라 해도 가정의 중심은 부부여야 한다. 그리고 각자가 품고 있는 가정에 대한 표본들이 다를 것이다. 단호하게 이것은 옳다고. 이것은 이래야만 한다는 생각의 위험성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본다. 허상은 손쉽게 깨진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평화로운 일상이 파괴되고 많은 부분 줄줄이 삶이 균열가더라도 상황 자체를 바꿀 수 없다면 인간의 적응력으로 또는 내면의 힘으로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는 행복을 파괴시키는 존재로 장애아가 등장했지만 각자의 행복을 위협하는 존재 또한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중엔 돈, 건강, 조화, 신뢰 등등도 있을 수 있겠고. 일부분만 금가도 전체가 깨져버리는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 다시 생각해봐도 아이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거다. 본질적이고 더 복잡한 문제는 부부 두 사람에게 있었으니까. 내가 진정 원하는 겉모습으로서의 가정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적으로 가족 간의 깊은 유대감과 돈독한 사랑이 있었으면 한다. 애석하게도 지금 나의 가정은 그런 모습이 아니기에. 훌륭한 소설과 '도리스 레싱'이라는 작가를 새롭게 경험할 수 있어서 내겐 값진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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