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6
토마스 만 저자, 홍성광 역자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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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부덴부로크 가의 사람들]이란 책꽂이에 꽂아둔 채 방치시켜 놓은 책들 중의 하나였다. 간단히 말해서 정말 의미없이 책꽂이 한켠에 놓여 장식의 역할만을 수행했었던 오래오래 묵혀둔 작품이었다. 당연히 읽어보려 두서너 번 시도했었더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강하게 느껴지던 초반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책을 덮고 팽개치고야 말았다. "나만 이런가?" 괴로워하면서. 

토마스 만의 명성만 익히 들었을 뿐 기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희박하다. 작품을 보기까진 몰랐던 사실,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것도 내겐 새로운 사실이었으니까. 더 말해 무엇하리. '부덴부로크 가'의 4대를 연대순으로 조망하며 한 가문의 탄생, 성장, 발전과 아울러 성공과 실패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며 끝내 쇠퇴의 길을 체험한 후, 과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까지의 과정을 밀도 높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솔직히 말해서 활자를 읽어내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동안 독서하면서 이렇게 많은 시간 할애해가며 낑낑거리며 읽어보긴 처음인 것 같다. 아무래도 작품이 씌여졌던 시대와 현재 내가 작품을 마주하고 본 시대의 차이가 작품에 대한 괴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리라. 그러나 전적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작품이었다면 감동도 없었겠지만 오늘과 동일하게 적용되는 공감대가 형성되기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고비만 넘으면 한결 수월해지는 법이라 힘들었지만 끝끝내 고전의 유익함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시민성과 예술성은 서로 반하는 성질의 것들이라 동일선상에서 팽팽히 대립하는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순전히 신분과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도, 또 내면의 자리한 예술성을 따라 살아가기도 힘든 것이 삶의 현실이다. 적절한 선에서 조화롭게 섞기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닐 것이다. 1,2대를 거쳐 3대인 토마스, 크리스찬, 안토니과 맨 마지막 세대인 4대인 하노까지 주변인물들과 촘촘히 엮어낸 이야기 중 일부분은 고루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집중력이 저하된 부분도 있었지만, 토마스 만이란 작가의 초기작으로, 오랜 세월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괜스레 명성을 얻는 고전이란 없으니까.

시민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갈등과 개인적 갈등이 맞물리면서 초래되는 몰락의 길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걸까. 감이 안 잡힌다. 때론 텍스트만 쫓아 읽기에도 급급할 때가 있다. 분명 초반부에는 그랬었다. 생각보다는 덜 어려웠고 재미있게 읽었다. 고전만이 줄 수 있는 시대착오적인 면에서 느낄 수 있는 부분의 진지한 재미도 있는 것이니까. 개인적으론 손사래를 치고 질색할 만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문학을 읽고 해석하는 역량이 부족해서 작품에 자리한 면면을 제대로 읽어낸 것 같지는 않지만 가치있는 고전을 접하고 막연하게나마 느꼈던 사실만으로도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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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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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김영하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나 내심 궁금했다. 그래서 [퀴즈쇼]를 읽었다. 주인공 이민수의 삶을 보면서 대한민국이란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20대 중의 한 명으로서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환경이란 상황이 꼭 같지 않아도 우린 얼마든지 닮아 있다. 내면의 생각과 감정이 닮으면 그만큼 동화되긴 쉬운 법이니까. 

아직 뭐 하나 똑 부러지게 해 놓은 일이란 없기 쉽고, 정말 내가 무엇을 진정 원하는지에 대해서도 아리송하고, 어떤 대상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끊어올랐다가도 금세 사그라들곤 하는, 지나가는 개나 줄 냄비근성을 가진 나, 내가 몸소 경험한 20대란 바로 이런 것이다. 아직은 정말 분불명하다. 생각나는 대로 써 놓고 보니 너무 부정적인 듯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내 삶을 고치기 위해서 정말 시작이란 것을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수단을 취하긴 했었던가. 정말 어쩔 땐 생각없이 멍청하게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그 헛헛함을 싫으면서도 열심히 노력하며 살지도 않는 자신이 불만스러울 때가 있다. 청춘이란 젊음에 대해 긍정적인 부분들도 생각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부정적인 것이 힘이 더 센 듯하다. 아마도 그건 내 근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20대 가지고 있는 '불안정'이란 공통분모에서 생기는 현상일 수도 있으리라.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정작 움직이고 변하는 건 없어 보인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 흡사하다.

뭐 하루이틀 얘기도 아니지만 '많이 배운 젊은' 백수들이 우리 사회문제로 인식된 지도 이미 오래. 이민수라는 인물의 목소리와 겹쳐진 작가의 의도가 무얼까 곰곰이 생각하며 읽었다. 그런데 좀 어렵다. 그러나 '김영하다운' 도시적 감수성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초반에 특히 온라인- 사이버 공간에 대한 예찬의 성격을 띤 대목들은 깊은 공감을 끌어내게 만든다. 모니터 너머의 그 무엇을, 그 이상을 마음속으로 품어본 적이 있다면 이민수와 서지원의 내면의 감정선을 따라가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김영하의 문학을 개인적으로 얼마나 이해하며 소화시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재미는 잘 알고 있다. 

주인공에 관한 몇몇 부분은 현실적으로 떨어지는 개연성 내지는 비현실성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상당 부분 참신하고 흥미로웠다. 작가가 말하는 20대 담론을 보면서 왜 이리 수긍이 가는 건지 원.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달콤한 동시에 씁쓸하기도 한 20대의 이중적인 면을 모르지 않는다. 이야기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손에 닿는 거리에 존재하는 가까운 친숙한 이야기처럼 느껴져 아무래도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야기를 읽는 만큼은 행복했다. 모든 걸 망각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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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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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라는 소설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들은 좋은 소리들이 있었지만 그다지 나의 관심을 끌지는 않았었다. 관심이 생기지 않아서 안 보고 있었던 소설이었다. 책을 고를 때, 유행처럼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남들도 많이 봤다던데. 재밌나보지?' 하면서 따라 읽게 되는 소설들 말이다. 따라쟁이도 잘만 하면 꽤 괜찮은 짓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 바다. 

책을 덮은 후에도 이야기의 여운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웠다. 이런 감동을 느끼고 싶어서 사람들은 책을 읽는 것이리라. 어쨌든 소설 속 등장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배경 자체가 좀 생소했던 것은 사실이다. 문화적인 배경이 달라서 왠지 재미가 떨어질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든 원인은 무엇일까. 그건 순전히 나의 편견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한다.

기억의 생명력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특히 유년시절에 관한 기억들은 더더욱 생명력이 질긴 것 같다. 여간해서 죽는 일이 없다. 신분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둘도 없는 단짝이었던 아미르와 하산. 우정이란 단어로 묶어두기엔 부족함이 느껴질 만큼 하산은 꾸밈없는 헌신으로 아미르를 진실히 사랑했다. 하지만 아미르는 그렇지 못했다. 역시 사랑의 무게는 똑같을 수 없는 건가. 1975년 겨울. 하산의 위험을 목격했으면서도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는커녕 겁이 나서 도망치기 바빴다. 물론 어린아이였으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마음의 병을 얻은 아미르. 솔직히 아미르의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도 과거에 저지른 죄란 경험이 있어 공감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누구에게도 한번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 숨겨두고 덮어둬서 남들은 아무도 모르지만 나만이 아는 내 과거. 남에게든 본인 자신에게든 속죄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문제가 아주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도 아미르는 여전히 마음속으로 충분히 괴로웠고 과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벗어나고 싶다고 벗어나지는 그런 차원의 문제는 아니니까. 그랬던 아미르가 마침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결심이란 용기를 내고 죄를 보상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나 또한 이런 모습을 배워서 내 과거를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 진정한 의미의 속죄가 무엇인지를 바바의 모습 속에서 아미르의 모습 속에서 배울 수 있었다.

세대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연싸움, 연쫓기의 전통도 인상깊었고, 거짓말과 배신, 비밀의 순환을 마침내 속죄함으로 끊어버린 후 비로소 자유함과 순수성을 회복하고 성숙해지는 아미르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이렇듯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요새 '속죄'란 단어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곤 한다. 아예 잘못 내지는 실수를 경험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어디 그게 쉬운 말인가.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소리다. 진정으로 잘못을 속죄하는 것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는 일일 것이다. 라힘 칸이 말했듯 '다시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한다. 그 점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아직 다 끝나지는 않은 것 같아서. 이런 아름답고 따뜻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잊을 수 없다. 시간이 흘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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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 신경림의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시
신경림 엮음 / 다산책방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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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선생님께서 엮으신 시집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 책을 읽을 마음은 아마 생기지 않았으리라. 시와는 무관하게 사는 나 같은 사람도 신경림 시인은 알고 있다. 간혹 방송에 출연하실 때 멀리서 바라보는 게 다지만 역시 시인은 달라!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생각도 표현하는 언어도 다르다는 점이 시인들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만드는 것일까.

학교에서 시험을 위해서 배우는 시를 제외하곤 개인적으로 내 스스로 시를 접해본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시는 어렵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시를 접한 방식 자체가 틀려서 그런 거 같다. 공부하듯 분석하고 해석하지 말고, 소리 내어 읽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일 텐데 말이다. 시에 대한 이해가 좁은 편인 나지만 마음을 흔들고 가슴을 적시는 시 앞에서는 감성이 자극되는 것이 사실이다. 둔감한 사람이라도 감성이 있는 한 다 느껴지기 마련이니까.

시인들의 이름이나 대표작도 모르거나 헷갈리기 십상이다. 꼭 알아야 할 의무는 없지만 기억할 수 있다면 삶이 더 풍요로워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선생께서 책머리에 쓰신 글 중에, 시를 즐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즐길 수 있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 이들은 남이 맛보지 못하는 삶의 즐거움을 하나 더 가지고 세상을 사는 셈이라는 말이 인상깊었다. 정말 기억해둬야 할 말 같다. 시를 대하기도 전에 난 항상 내 빈곤한 감성을 탓하곤 했다. 이번만은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며 천천히 음미하고 천천히 생각했다. 선생님께서 덧붙이신 간명한 해설의 힘으로 한결 수월하게 시를 느낄 수 있었다.

마음결이 미세하고 섬세한 사람들이 시를 쓰거나 시를 가까이 하는 것 같다. 무턱대로 어렵다고 치부해버리거나 시 자체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버리기에 안성맞춤인 시집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누군가를 절제된 감정으로 그리워하고, 강렬하게 저항하지만 언제나 차분한 어조로 저마다의 의미를 노래하는 시가 아름답다. '처음처럼'으로 인해서 시와의 멀어진 거리가 좁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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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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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역시 오쿠다 히데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이야기였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점이 책에 대한 관심과 집중도를 좀 더 높인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으니까.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읽으신 분들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매력은 재미만이 아니다. 내가 오쿠다 히데오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야기 자체와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뛰어나고 매번 재미와 더불어 공감과 감동을 선사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스무 살, 이라는 말이 싱그럽다. 실상은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다무라 히사오는 고향인 나고야에서 도쿄로 상경했다. 번듯한 구실이야 있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재수학원을 다녀야 했으니까.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좀 더 너른 공간으로 나가고 싶었던 이유가 진짜 이유였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야기는 다무라 히사오의 외관상 청춘의 정점인 딱 10년의 세월을 담아내고 있다. 20대 초반에서 30대를 맞이하기 바로 직전의 시기까지. 딱 그만큼만, 그것도 하루라는 일상으로 압축해서 말이다.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극적이기에 잊히지 않을 이야기들은 누구나 한두 개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삶이 극박하고 각박하더라도 그런 이야기들은 잊을 수가 없다. 세월이 아무리 지난다 해도 말이다. 평생의 추억으로 기억으로 품고 사는 것이다.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이어진 히사오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했고 너의 모습이기도 했다. 모두의 모습과 유사한 점을 가졌기에 이렇게도 공감하게 되는 걸까. 젊다는 특권을 가졌지만 그 특권을 사용하기에 여전히 주저하고 미적대는 모습을 가진 나. 뭔가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했으나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오래 지나지 않아서 곧 알게 되는 나이. 내가 생각하는 아니, 내가 경험한 젊음은 아직 이런 모습들 뿐이다. 꿈을 버리기엔 너무나 빠른 나이이고 아까운 나이이다. 그렇지만 실패를 두려워하고 제자리걸음만 하는 모습이라 스스로도 답답하다. 그렇다 해도 꿈꾸는 건 절대 멈출 수 없다. 나이로 규정짓는 청춘의 시기는 유한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청춘의 감정은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히사오가 그랬듯, 미숙했던 내가 점점 더 어른의 생각과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한다. 죽기까지 무한한 내적 성장을 이루는 내가 되고 싶다. 단편처럼 외따로 존재하는 듯하지만 이야기끼리 서로 맞물려져 하나의 연작소설이 만들어졌다. 소설을 보면서 덩달아 내 인생에 있어서 잊히지 않는 에피소드는 무엇이 있을까 하며 떠올려보았다. 다행이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가볍고 유쾌하면서도 진지함을 내포하고 있는 소설이 좋다. 그런 점에서 오쿠다 히데오가 단연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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