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연을 쫓는 아이]라는 소설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들은 좋은 소리들이 있었지만 그다지 나의 관심을 끌지는 않았었다. 관심이 생기지 않아서 안 보고 있었던 소설이었다. 책을 고를 때, 유행처럼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남들도 많이 봤다던데. 재밌나보지?' 하면서 따라 읽게 되는 소설들 말이다. 따라쟁이도 잘만 하면 꽤 괜찮은 짓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 바다. 

책을 덮은 후에도 이야기의 여운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웠다. 이런 감동을 느끼고 싶어서 사람들은 책을 읽는 것이리라. 어쨌든 소설 속 등장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배경 자체가 좀 생소했던 것은 사실이다. 문화적인 배경이 달라서 왠지 재미가 떨어질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든 원인은 무엇일까. 그건 순전히 나의 편견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한다.

기억의 생명력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특히 유년시절에 관한 기억들은 더더욱 생명력이 질긴 것 같다. 여간해서 죽는 일이 없다. 신분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둘도 없는 단짝이었던 아미르와 하산. 우정이란 단어로 묶어두기엔 부족함이 느껴질 만큼 하산은 꾸밈없는 헌신으로 아미르를 진실히 사랑했다. 하지만 아미르는 그렇지 못했다. 역시 사랑의 무게는 똑같을 수 없는 건가. 1975년 겨울. 하산의 위험을 목격했으면서도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는커녕 겁이 나서 도망치기 바빴다. 물론 어린아이였으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마음의 병을 얻은 아미르. 솔직히 아미르의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도 과거에 저지른 죄란 경험이 있어 공감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누구에게도 한번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 숨겨두고 덮어둬서 남들은 아무도 모르지만 나만이 아는 내 과거. 남에게든 본인 자신에게든 속죄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문제가 아주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도 아미르는 여전히 마음속으로 충분히 괴로웠고 과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벗어나고 싶다고 벗어나지는 그런 차원의 문제는 아니니까. 그랬던 아미르가 마침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결심이란 용기를 내고 죄를 보상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나 또한 이런 모습을 배워서 내 과거를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 진정한 의미의 속죄가 무엇인지를 바바의 모습 속에서 아미르의 모습 속에서 배울 수 있었다.

세대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연싸움, 연쫓기의 전통도 인상깊었고, 거짓말과 배신, 비밀의 순환을 마침내 속죄함으로 끊어버린 후 비로소 자유함과 순수성을 회복하고 성숙해지는 아미르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이렇듯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요새 '속죄'란 단어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곤 한다. 아예 잘못 내지는 실수를 경험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어디 그게 쉬운 말인가.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소리다. 진정으로 잘못을 속죄하는 것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는 일일 것이다. 라힘 칸이 말했듯 '다시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한다. 그 점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아직 다 끝나지는 않은 것 같아서. 이런 아름답고 따뜻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잊을 수 없다. 시간이 흘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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