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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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고, 매료되었고, 이번에는 설득되었다!!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 모두 <트러블과 함께 하기>에 나왔던 사고와 개념들의 발생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트러블과 함께 하기>의 kin은 <사이보그 선언>에서는 결연집단(affinity group)으로 언급되고, "카밀 이야기"의 플롯의 재료들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비롯한 여러 페미니스트 SF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30, 78-83).

또 <트러블...>에서 나오는 "촉수사유"는 화이트헤드 철학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모든 명사는 문어보다 발이 더 많이 달린 동명사"(123).


<반려종 선언>의 마지막 장에서 해러웨이는 시공간 스케일(time-space scales)의 다층성에 주목한다(193-194, 235). 페르낭 브로델 같다. 

(1) 지구와 자연의 시간대인 가장 긴 진화적(evolutionary) 시간 스케일, (2)개인이 면대면으로 만나는 타자들과 의미를 생산하는 가장 짧은 개인적(personal) 시간 스케일, 그리고 (3) 그 중간의 역사적(historical) 시간 스케일. 

이 서로 다른 스케일을 지닌 시간의 층들이 바로 우리의 "두터운 현재(thick now)"를 이루는 것이다(277).


5장 "품종 이야기"는 앞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역사적 시간 스케일을 두 가지 견종의 역사에 대한 신화와 추정되는 실제(?) 역사를 상상력을 동원해 함께 실뜨기해낸다. 

여기에서 역자는 scale을 "척도"로 번역하였는데, 독자들이 그것을 시간의 다층성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스케일"로 그냥 음차하든가, 정 번역하고 싶었다면 "규모"로 직역하거나, "길이"로 의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이 시간의 다층성을 이해하면, <트러블과 함께 하기>에 나오는 "쑬루세" 이야기를 보다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개 품종 이야기와 시간의 다층성 이야기를 통해서 해러웨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236쪽에 나오는 말에 나는 그것의 핵심이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개 키우면서 사는 백인 중산층 사람들(개인적 시간대)은 그들의 조상이 그 개의 조상들을 동원하여 정복하고 파괴하고 만들어낸 것들(역사적 시간대)의 현재적 귀결에 책임감, 곧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을 갖고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316). 

"소중한 타자"로 번역된 것, 곧 "함께 살며 서로에게 의미를 갖는 타자"와의 부분적 연결 안에 거주하는(inhabiting) 우리는 나와 타자가 이렇게 존재하게 만든 유산들에 대해 깊게 성찰해야 하고, 함께 살 만한 세계를 다시 만들기(reworlding)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236, 276). 


이것이 나와 타자가 함께 추는 나선형의 춤, 존재론적 안무, 더불어 되기(becoming-with, 274)인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구체적인 것"을 "포착의 합생"("the concrete" as "a concrescence of prehensions")으로 기술했다. 그는 "구체적인 것"을 "실제의 사건"으로 이해했다. 실재(Reality)는 능동태 동사이며, 모든 명사는 문어보다 발이 더 많이 달린 동명사처럼 보인다. 존재자들은 서로를 향해 뻗어나가며 "포착"이나 파악을 통해 서로와 자신을 구성한다. 모든 존재자는 관계에 선행해 존재하지 않는다. "포착"에는 결과가 있다. 세계는 운동 속의 매듭이다. 생물학적 결정론과 문화적 결정론은 모두 잘못된 곳에서 구체성을 구성한 사례들이다. "자연"이나 "문화"와 같은 잠정적이고 부분적인 추상 범주를 세계로 착각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잠재적 결과를 선행하는 기초로 오해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미리 구성된 주체나 객체는 없으며, 단일한 근원이나 단일한 행위자, 최종 목적과 같은 것은 없다. 주디스 버틀러의 표현을 빌리면 "잠정적 기초"밖에 없다. - P122

기호와 육신, 이야기와 사실. 내가 태어난 집에서는 이 생산적인(generative) 커플이 별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둘은 항상 왈왈거리면서도 떨어질 줄 몰랐다. 성인이 된 내 안에서 문화와 자연이 내파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내파가, 명사로 유통되지만 사실상 동사인 반려종을 말하거나 그 관계를 직접 살아갈 때보다 더 큰 폭발력을 발휘한 적은 없다. 요한 복음의 "말씀은 육신이 되었다"는 말의 뜻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기사 마감 5분 전, 베어스가 2점차로 지고 있는 9회말 2사 만루 투 스트라이크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P138

어원학적으로 팩트(사실)는 이미 이루어진 수행, 활동, 행위, 간단히 말해 업적을 일컫는다. 팩트는 과거분사이며, 이미 한 것, 끝난 것, 고정된 것, 입증된 것, 수행된 것, 성취된 것을 뜻한다. 팩트들은 마감을 지켰기 때문에 다음날 신문에 실린다. 픽션(서구)은 어원학적으로 팩트와 매우 가깝지만, 품사와 시제가 다르다. 픽션은 팩트와 마찬가지로 활동을 일컫지만 가장이나 속임수뿐 아니라 형태를 만들고 구성하며 발명해내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픽션은 현재분사에서 유래했고, 진행 중이며, 아직 문제로 남아 있고, 마감되지 않았으며, 사실과 어긋날 가능성이 남아 있고, 아직 진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만간 알게 될 것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동물들과 함께 살고, 그들/우리의 이야기에 거주하면서 관계의 진실을 말하려 애쓰는 것, 진행 중인 역사 속에서 공존하는 것. 이게 바로 반려종의 일이며 반려종에게 가능한 최소 분석단위는 "관계"다.
- P139

trope: 수사 -> 비유
figure of speech: 문형 -> 비유(어)
- P140

141: 5: 방향이 -> 의도가
141: 13: 취향도 -> 흥미(관심)도

육신과 기표, 몸과 말, 이야기와 세계, 이 모두가 자연문화 속에서 결합된다.
Flesh and signifier, bodies and words, stories and worlds: these are joined in naturecultures.
메타플라즘은 실수나 헛디딤, 몸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비유를 의미할 수 있다. ...
의미의 전도, 소통 중인 신체들 간의 자리 이동, 개형, 개조, 진실을 말하는 방향 선회. 나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들만 말한다. 컹.
Inverting meanings; transposing the body of communication; remolding, remodeling; swervings that tell the truth: I tell stories about stories, all the way down - Woof. - P141

나는 <반려종 선언>에서 소중한 타자의 관계 맺음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짝을 이루는 이들은 이 관계를 통해 육체와 기호 모두에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다. 뒤에 나오는 진화, 사랑, 훈련, 종류 및 품종과 관련된 이야기는 인간이 이 행성에 자신과 함께 출현한 무수히 많은 종과 더불어 시간, 신체, 공간의 그 모든 척도 속에서 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볼 때 도움이 된다. 내가 제시하는 설명은 체계적인 형태로 되어 있지는 않다. 그 대신 색다르고 시사적이며 신중하기보다는 과격하고, 명석판명한 가정보다는 우연한 근거(contingent foundations)를 따른다. 여기서 개는 반려종이 이루는 거대한 세계에서는 하나의 행위자에 불과하다. - P146

이 선언이나 자연문화의 삶에서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마릴린 스트랜선이 말한 "부분적 연결"을 찾고 있다. 이와 같은 연결 속에서는 자기 확실성이라는 신의 속임수나 불사의 성체(deathless communion)을 택할 수 없고 반직관적인 기하학 및 부적합한 번역이 필요하다. - P147

3행 이후:
인간주의적 기술 예찬론자들은 가축화(가축으로 길들이기)를 남성 한부모의 혼자 낳기의 전형적인 행위(the paradigmatic act of masculine, single-parent self-birthing)로 묘사하는데, 이는 마치 남성이 그의 도구를 발명(창조)하는 것처럼, 남성이 가축화를 통해 자신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가축은 인간의 의도를 그 몸 안에 체현한 것, 곧 자위행위가 개의 몸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남성은 (자유로운) 늑대를 잡아 (복종하는) 개를 만들고 그로써 문명의 가능성을 수립했다. 그렇다면 헤겔과 프로이트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견이라고 보면 될까? 개를, 길들인 동식물 전체의 상징으로 만들고 인간의 의도에 복종하게 만들되, 점차 진보할 것인지 타락할 것인지는 각자의 취향에 맡기면 될 것이다. 심층생태론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문화로 추락하기 전에 있었다는 야생의 이름으로 혐오하기 위해 기꺼이 믿는다. - P150

6행: 늑대를 동경하던 개들 -> 개가 되고 싶었던 늑대들 (wolf-wannabe-dogs) - P152

개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생물학적인 것으로 보면서 목축 및 농경 사회의 출현처럼 인간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는 문화적 변화라고 본 뒤 공진화 사례에서 제외하는 것은 실수다. 나는 인간 유전체가 적어도 개와 같은 반려종이 감염되는 병균에서 유래한 분자적 기록을 매우 많이 간직하고 있으리라고 추측한다. 자연문화에서 면역계는 사소한 부분이 아니다. 사람을 포함한 유기체가 생명을 유지할 가능성을 결정하고 함께 살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규정하기 때문이다. 인간, 돼지, 가금류, 바이러스 사이에 공진화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인플루엔자의 역사를 상상하기 힘들다. - P155

네덜란드의 환경여성주의자인 바버라 노스케는 고기를 생산하는 "동물-산업복합체"의 스캔들로 우리의 시선을 돌린 사람이기도 한데, 동물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SF에 나오는 "다른 세계"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애컬리는 튤립의 중요한 타자성/차이들(significant otherness)을 흔들림 없이 지지했던 경험을 곱씹으며 노스케의 주장을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튤립은 중요했고, 바로 이 점이 둘 모두를 바뀌게 했다. 애컬리 역시 튤립에게 중요했다. 이 중요성은 언어적이든 아니든 모든 형태의 기호학적 실천에 특유한 헛디딤을 통해서만 읽어낼 수 있다. 오인(misrecognition)은 극히 드물게 발생하는 적중의 순간만큼 중요했다. 애컬리의 이야기에는 몸으로 부대끼는 세속적 사랑에서 경험하기 마련인 것, 즉 육감적(fleshly)이면서도 의미를 생산하는 세부 사항이 매우 많이 나온다. - P160

남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신경증적 환상이다. 반면, 골치 아픈 조건들을 맞춰가면서 사랑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친밀한 타자를 더 잘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별수없이 겪게 되는 우습고도 비극적인 실수들은, 그 타자가 동물이건 인간이건 또한 무생물이건 간에 내 존경심을 자아낸다. 애컬리와 튤립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 P161

헌과 개릿은 한 꺼풀만 벗기면 피로 맺어진 자매다.
이 근친 교배의 핵심은 두 사람 모두 개가 자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핀다는 점이다. ... 방법에 관한 한, 행동주의 조련사와 헌 사이에 중요한 견해차가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하지만 대부분의 반려종 관계에서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넘어 이루어지는 "소통"이다. 상황 속의 부분적 연결이 중요하며 (Situated partial connection is what matters;) 그 결과로 개와 인간이 실뜨기 놀이(game of cat‘s cradle) 속에서 함께 출현한다. 놀이의 이름은 존중이다. 좋은 조련사는 중요한 타자성(significant otherness)의 기호 아래 반려종으로 관계 맺는 훈련을 한다. - P176

아담은 범주 노동으로 일을 간편하게 처리했다. 대꾸가 돌아올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고 그를 그로 만든 것은 개(dog)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 그대로 그를 창조한 신(God)이었다. ... 그 모든 말들은 철학적으로 미심쩍을 수는 있어도 누군가가 자신과 함께 일하는 동물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계속 의식하기 위해서는 이 말들이 필요하다.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누구인가는 영원한 질문으로 남을 것이다. - P177

핵심은 타자나 자신에 대해 알 수 없지만, 관계 안에서 누구와 무엇이 출현하고 있는지를 항상 질문하는 것이다. [The recognition that one cannot know the other or the self, but must ask in respect for all of time who and what are emerging in relationship is the key. -> 타자나 자신을 알 수 없지만, 관계 안에서 누가 그리고 무엇이 출현(창발)하는가에 대해 언제나 존중심을 갖고 물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종과 관계 없이 진정한 사랑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다. - P177

신학자들은 "부정의 방식으로 신을 아는 것"(the "negative way of knowing" God)의 힘을 이야기한다. 존재하는 것 또는 존재하는 자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서는 유한한 존재란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곧 [온전한 존재] 그 자신의 자아의 투사물이 아님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한 "부정적인" 앎의 종류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나는 개에 대한 앎, 특히 훈련 같은 하나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면서 개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을 이해할 때 이 신학적 고려가 설득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 관계가 사랑이라고 부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종 안팎에서 맺어진 모든 윤리적 관계는 관계-속의-타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께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 - P178

반려 "동물의 행복": 노력, 일, 가능성의 충족을 통해 얻는 만족의 능력. ...
반려동물의 다양한 소질은 훈련이라는 관계적인 일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헌(Hearne 1991)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이와 같은 행복은 근본적으로 "적중(getting it right)", 곧 성취를 통한 만족을 위해 노력하는 윤리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개와 개를 다루는 사람은 훈련의 노동 속에서 함께 행복을 발견한다. 이것은 창발한 자연문화의 사례다.

이와 같은 유형의 행복은 탁월함을 열망하는 것, 범주적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존재자가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탁월함에 도달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관련된다. 모든 동물이 비슷한 것은 아니다. 각 동물이 지닌 구체성 - 종류와 개체의 구체성 -이 중요하다. 추구하는 행복의 구체성이 중요하며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창발해야 한다. 헌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제퍼슨적인 행복을, 짝을 이룬 유한한 존재로서 동물-인간이 번영하는 것으로 번역해낸다. - P180

관례적인 인본주의는 사이보그 이후 탈식민의 세계에서 소멸했지만, 제퍼슨적 견본주의는 아직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헌은 토머스 제퍼슨을 개집으로 불러들이면서 분리된 채 앞서 존재하는 범주적 정체성이 아니라 헌신적인 관계에 권리의 기원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개는 훈련 과정에서 특정 인간에 대한 "권리"를 확보한다. 개와 인간은 관계를 통해 서로에 대한 "권리"를 구축한다. 이 권리는 존중, 배려, 반응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헌은 개 복종 훈련을 개가 인간에게 권리를 주장할 권력을 강화하는 장소로 서술했다. 자신이 키우는 개에게 진심으로 복종하기를 배우기란 주인에게 벅찬일이다(Learning to obey one‘s dog honestly is the daunting task of the owner). ... 이런 권리는 상호소유(reciprocal possession)에 기반한 것으로 해체되기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권리 요구는 파트너 모두의 삶을 바꾼다 - P181

다른 이와 나누는 애정, 헌신, 솜씨에 대한 열망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비키 헌이 말한 의미에서의 훈련 같은 애정 행위는, 연쇄를 이루며 창발한 다른 세계들을 배려하는 애정 어린 행위를 낳는다. 이것이 내 반려종 선언의 핵심이다. 나는 어질리티를 그 자체로 특정한 선이자 더 세속적일 수 있는 방편의 하나로 경험한다. 즉 좀 더 살만한 세계를 만드는, 모든 규모에 속한 소중한 타자성이 요구하는 바에 더 민감해지는 것이다. 늘 그렇듯, 문제는 세부에 있다. 연결 고리도 세부에 있다. ... - P191

훈육된 자발성(disciplined spontaneity)라는 모순어법을 목표로 ... 개와 조련사 모두가 활동을 익혀야 한다. 일관성 없는 세계에서 일관성을 충분히 지님으로써 육신 속에, 경주 속에, 코스 위에, 존중과 응답을 빚어내는 공동 존재의 춤에 참여하는 것이 과제다. 그리고 모든 척도에서, 모든 파트너와 함께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기억하는 것. - P193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역사적 자연문화를 통해 피레니즈와 오시 세계에서 백인 중산층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이 개들의 일로 유지되던 목축경제가 파괴한 초원 생태와 삶의 방식을 다시 상상하는 데 참여할 의무가, 아직 명쾌하게 규정되지는 않았어도 확실히 있다는 점을 나의 몸으로 느낀다. 나 같은 사람들은 함께 사는 개들을 통해 토착민의 주권, 목축 경제 및 생태적 생존, 육류 산업 복합체의 급진적 개혁, 인종 정의, 전쟁과 이주의 귀결, 기술문화의 제도와 맞닿게 된다. 헬렌 베란의 표현을 빌리면 "함께 잘 지내는 것(getting on together)"이 필요하다. "순종"인 카엔과 "잡종"인 롤런드, 그리고 내가 우리 서로를 만질 때, 우리는 우리를 있게 해준 개들 및 사람들과 연결된 관계를 우리의 육신 속에 체현한다. - P236

나와 땅을 함께 쓰는 이웃인 수전 코딜의 감각적인 그레이트 피레니즈인 윌렘을 쓰다듬을 때, 나는 애견 전시회 및 다국적 목축 경제뿐 아니라 새로운 서식지로 이주된 캐나다 회색 늑대, 경제적 가치가 높아진(??, upscale) 슬로바키아 곰, 국제 복원 생태학을 만지게 된다. 우리에게는 온전한 개(the whole dog) 못지않게 온전한 역사적 유산이 필요하다. 이 모두가 결국 온전한 반려종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색다른 일도 아니겠지만, 이와 같은 온전한 존재들(wholes)은 부분적 연결로 구성된 비유클리드적 매듭이다. 그러한 유산에 대해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그 안에 거주함으로써, 우리는 놀이가 선사하는 창조적 은총을 희망해볼 수 있다. - P236

이들이 즐기는 성적 유희는 생식으로 연결되는 이성애적 짝짓기 행동과는 무관하다. ... 여기서 우리는 순수한 다형적 도착성을 발견한다. ... 내게는 에로스처럼 보인다. 아가페는 분명 아니다. ... 카옌과 윌렘이 발산하는 젊음과 생기는, 정숙을 유도한다는 생식샘 절제술은 물론, 이성애가 재생산을 위한 것이라는 헤게모니를 우스운 것으로 만든다. ... 하지만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존재론적 안무다.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물려받은 몸과 마음의 역사로부터 빠져나와 발명해내고, 그들을 그들로 만들어주는 육체적인 동사로 다시 만들어낸, 생명력 가득한(vital) 놀이다. 이 게임을 발명한 것은 그들이다. 그리고 이 게임은 그들을 새로 만든다. 다시 한번, 메타플라즘. 우리는 이 중요한 말이 지닌 생물학적 맛을 언제나 다시 음미한다. 이 말은 필멸의 자연문화 속에 육신으로 만들어져 있다. - P238

인류세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해 생겨나고 있는 것은, 상황 속에서 복합적인 역사를 통해 구성된 행위의 그물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모습과는 다를 수 있고, 달랐을 수 있죠. 하지만 사람들은 말이 갖는 힘 때문에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종이 정말로 인간 본성에 맞춰 이런 일을 한다고 믿습니다. 이건 경험적으로 사실이 아니죠. - P293

저더러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자본세(Capitalocene)를 고르겠네요.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단어죠. ... 자본세에 대한 대응은 살과 피 안에, 특정 상황에, 복잡한 역사들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체계적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

자본주의는 단순히 종의 행위가 아닙니다. ... 자본주의는 절대 하나의 사물이 아닙니다. 뭣보다도, 배우 복잡한 역사적 체계의 현상이죠. 시공간적으로 역사가 매우 다양하고 균일하지 않아요. 18세기 중엽과 증기기관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요. 플랜테이션 체계가 확실히 더 근본적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요 - P294

이 문제를 농경의 발명, 심지어는 플라이스토세 Pleistocene의 수렵인, 아니면 지구상 현생 인류 Homo Sapiens sapiens의 출현, 그런 것들과 동등하게 다루는 심층생태론자를 한편에 두고, 인간을 화석연료를 사용하며 내연기관을 쓰는 존재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다른 편에 두고, 인류세가 무엇인지 논쟁을 하게 만들 수는 없어요.

마르크스주의 정치생태학자인 제이슨 무어가 좋은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지구형성 요인으로서 자본주의의 복잡성은 15세기의 인도양 연안 무역 지대를 살펴보지 않으면 생각하기 시작할 수조차 없어요. 무역 지대와 부의 축적 지대, 플랜테이션 농법의 발명, 동식물과 미생물, 사람들의 이동, 그리고 16세기 강 연안의 삼림 파괴 같은 세계형성 과정들 말입니다. 인류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바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이분법적 시간 개념으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첫 문장조차 꺼낼 수가 없어요. - P295

무역 지대와 부의 축적 지대, 플랜테이션 농법의 발명, 동식물과 미생물, 사람들의 이동, 그리고 16세기 강 연안의 삼림 파괴 같은 세계형성 과정들 말입니다. 인류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바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이분법적 시간 개념으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첫 문장조차 꺼낼 수가 없어요. 지난 200년간에 관해 이야기하든가, 아니면, 아시잖아요, 종의 탄생 시기에 대해 말을 하든가. 그 다음 차례는 심층생태론을 지향하는 사람들과 화석연료 경제만 걱정하는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는 일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시공간의 복잡성이 잘못 설정되니까요. 이 점에서는 자본세의 개념이 낫습니다. - P296

그리고 자본세는 동물, 식물, 인간 - 그리고 미생물(왜냐면, 보세요, 자본의 역사와 관련해서 발효와 질병은 근본적이고 중요합니다. 발효 문제를 빼고 2차 대전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 들 중 어떤 집단이, 어쨌든 자본세에서의 행위자들은 최소한으로 말해도, 상황 속에 있는 식물, 동물, 인간, 미생물,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의 안팎을 가로지르는 다중적 층위의 기술들인 거죠. 아주 어설프게나마 자본세에 대해 생각을 해보면 인류세와는 아주 다른 배역들이 나오게 됩니다. - P296

유진 스토머와 파울 크뤼천은 탈색된 산호초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다가 암석, 물, 대기에 인간 활동에서 비롯된, 인간이 야기한 과정이 새겨진 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다음 차례로 지구물리학자들이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서 지층 형성과 관련된 값들이 새로운 지질시대를 명명하기에 충분한 수치인지 전문적이고 엄밀한 기준에 맞춰 판단합니다. 인류세는 백악기와 고제삼기를 가르는 K-Pg 경계(스콧 길버트)와 같은 경계 사건인가, 아니면 하나의 지질시대인가, 아니면 더 큰 지질학사적 범주인가?

우리가 나눠야 하는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빈대 잡다가 초가 삼간 태우지는 않을 겁니다. (So I don‘t want to toss out the baby with the bathwater, you know;) - P299

저는 인류세라는 용어가 본래 의도보다 너무 많은 걸 함축하기 때문에 차라리 그 말을 쓰지 않는 편이 나았으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용어를 그렇게 정한 마당에, 2016년에 조사위원회가 보고서를 내면 지질학자들이 인류세를 공식 용어로 채택했으면 좋겠네요. 주요 현안에서 시급성을 더 잘 짚어낼 뿐 아니라 이 담론적 물질성 안에서 작동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자본세가 강한 담론적 물질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실제로 연구하는 기관이 없지요. 미국에서는 자본주의를 언급할 수조차 없어요.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반역 행위로 받아들여지죠. 정말로, 웬만한 곳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에요! - P299

크리터는 생태계다.

지구상의 어떤 크리터들도 그 외부에 있지 않고, 크리터들은 그 자체가 생태계인 걸로 이해되고 있어요. 다른 것이 아닌, 특정 생태계의 건강을 증진하겠다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생태계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동료/반려자들이 여기 있어야 하고 누구는 있어서는 안 되는가? ...
핵심은 생명정치에 관한 한, 생태계 배치라는 이 문제가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생명 게임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끝. 다른 게임은 없어요. 개체 더하기 환경이 아니죠.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되고 역사적으로 역동적인 접촉 지대로 이루어진 생태계의 그물들만 존재합니다. ... 저는 가끔 이런 내작용적(intra-active)이고 회절하는(diffractive) 복잡성을 지질-생태-진화-발생-역사-기술-심리적 공제작 (GeoEcoEvoDevoHistoTechnoPsycho sympoiesis)이라고 부르죠! 이 계열은 자체적으로 펼쳐졌다 다시 접혀듭니다. - P307

DH: 나는 진흙으로 되어 있고, 그 진흙다움은 진행형입니다 (I am of the mud, the muddiness is ongoing). 세계되기(worlding), 공제작(sympoiesis) ...
CW: 진창(the muddling) ...
DH: 정말로, 저는 진창이에요. 그리고 진창 속에 있죠. 그래서 "진창 속에서 계속 되는대로 해나가기 (muddling along)"는 사유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거예요. 이렇게 우리가 기호학적 육신성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우로보로스, 곧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안에 있는 어떤 순간(계기, moment) 같은 거예요. 이 말은 요한의 "육신이 된 말씀"에 있는 신학적인 냄새 때문에 그 말을 피해서 대신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기호학적 육신성, 이 "물질적 기호학", 기호학적 물질, 그것의 분리불가능성을 일컫는 것이죠. - P345

우로보로스를 포함해 촉수를 뻗은 존재들로 가득한 진흙 속에서, 아니면 진창 속에서, 뱀은 언제나 자기 꼬리를 삼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완성의 형상으로 여겨질 수 있지요. ... 뱀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전체론(holism)의 형상으로 쓸 수가 없어요. 하지만 물질적 기호, 육체적 기호 작용이 부정의 방식과 만나는 특별한 형상으로 간주할 수 있죠. 우로보로스적인 성질과 같은 것이 있는데요, 나사에서 촬영한 지구 전체 사진이든, 살아 있는 지구에 관해 러브록이 주장한 가이아 가설의 변형(라투르가 설득력 있게 논의한 것처럼 잘못된 해석이죠)이든, 지구 전체의 형상을 그릴 수 없다는 걸 염두에 두게 되죠. 지구 전체는 어떤 형태로든 없어요. 더 오랜 전통을 따라도 마찬가지고, 우주 시대에 좀더 가까운 방식이어도 마찬가지고요.
CW: 그래서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거군요. - P346

행위자-네트워크의 질문들과 관련해서는 둘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정말 많죠. 음, 기호학이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너무 환원적(reductive)이에요. ...
퍼스 전통의 기호학이죠. 사실 그 측면에서 브뤼노와 이자벨은 프래그머티즘의 유산에서 수렴합니다. 제 생각에 브뤼노는 상황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현재의 조합에서 생각하는 데 중요한 자원들 일부에 대해 저항감을 보였던 것 같아요. 푸코가 그 중 하나고, 맑스가 또 그렇죠. 페미니즘 전통 전체도 그렇지만 이제 변하는 모습이 보여요. 브뤼노는 페미니즘 사유는 훨씬 더 많이 인식하게 되었고 궁금해하지만, 그 성과물을 자신의 주장이나 형상화에 활용하는 건 아주 힘들어 했던 것 같아요. 이제 페미니즘 글들은 훨씬 더 많이 인용하지만, 막 실제로 사용하기 시작한 정도예요. 그런데 왜 그럴까요? 저는 그 사연 전체를 알지는 못해요. - P360

저는 브뤼노를 매우 가까운 친구이자 대화 상대로 생각합니다. 한때 브뤼노는 "부엌 싱크대 증후군"이라고 부른 것 때문에 저한테 몹시 화가 났어요. 제가 갖고 싶은 걸 모조리 다 집어넣어버리고 말았거든요! 하지만 브뤼노는 훨씬 신중하게 생각하죠! 저보다 진창에는 덜 빠져 있는 것 같네요. - P361

나의 툴루세는 필멸의 구성체가 서로에 대해, 서로와 함께 위태로운 관계에 있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회절하는 그물망의 그 모든 시간성, 특수성, 물질성으로 된 무수한 촉수들이 발산하는, 땅의, 지속적 힘의 카이노스(-세, -cene)입니다. 카이노스는 섬유질이 두텁게 뭉친 "현재"의 시간성으로, 고대의 것이며 아니기도 합니다. 크툴루세는 있었고, 지금 있으며, 다가올 현재입니다. 크툴루세는 끝없이 회절되는 시공간입니다. 이런 힘들은 모두 테라에서 솟아오릅니다. 이 힘들은 파괴적/생성적이며 쉽게 다룰 수 없습니다. 힘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매우 무서운 힘일지도 모릅니다. 그 재출현은 섬뜩한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건이 속한 장르는 희망이 아니고 도전적인 응답-능력, 책임일지도 모릅니다. 대지의 힘은 도발을 일삼는 어리석은 자들을 죽일 것입니다.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이 어리석은 자들의 영령은 끝을 모르는 파괴의 촉수에 갇힐 것입니다. - P363

지하에서 생성하고 파괴하는 이 힘들은 (라투르와 스텐저스의) 가이아의 킨입니다. 이 힘들은 어머니가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고 죽을 운명인 메두사, 뱀과 같은 고르곤입니다. 그들은 위를 올려다보는 자들, 스스로를 인류라 부르는 사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위를 올려다보는 자들은 방문하는 법,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법, 고통을 주지 않고 호기심을 추구하는 법을 전혀 모릅니다. 인류세에서 지하의 존재자들은 바다, 육지, 대기, 물에서 산업, 초이동, 자본화를 추구한 이들의 오만함이 야기한 이중의 죽음을 가속화하거나 그 과정에 가담할 수 있습니다. 인류세에, 촉수가 달린 이는 핵이며 탄소 섬유입니다. - P364

지하의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과 잡다하게 뒤섞인 채 더불어-되기를 해가는 인간 거주자들을 아우르며 땅에 속하는 모든 이들에게 스며들 수 있습니다. ... 이 모든 존재는 살고 죽습니다. .... 툴루세는 "홀로세"였고, 홀로세이며, 그 재출현 - 지속 - 으로 가득찬 것일 수 있습니다. 홀로세는 야생적이고, ... 언제나 진화하는 생명체들에게는 늘 풍족합니다. 위험하고 뒤죽박죽인 툴루세는 우리의 고향 세계, 테라의 시간성입니다. - P365

회복, 부분적 연결, 재출현에 관심을 기울이는 우리는 모두 촉수의 뒤얽힘 속에서 모든 것을 우리 식으로 재단하고 묶으려 애쓰지 않으면서도 잘 살고 잘 죽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촉수는 감각기관입니다. 촉수에는 침이 박혀 있습니다. 촉수는 세계를 맛봅니다. 인간 거주자들은 촉수의 생물군계(holobiome) 안에서 그것을 이루고, 인류가 연소시키고 추출하는 시간은 한때 균류의 물질성 및 시간성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연대하던 숲과 농장 그리고 산호초가 있던 곳에 놓인 단작 플랜테이션 지대 및 점균의 판과도 같습니다.

인류세는 짧을 것입니다. 인류세는 시대라기보다는 K-Pg경계(백악기-고제3기의 경계)와 같은 경계 사건입니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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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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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들이 많은, 아이러니가 살아 있는, 무지개빛 생애사. 훌륭한 아스케시스, 닮고 싶고 따라 하고 싶은 부러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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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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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시간보다 리뷰를 쓰는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책 속에 담긴 층들이 여럿 있었고, 매력적인 아이러니들을 정리해내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정말 재미있는 이 책에 대한 별 재미없는 리뷰다. 처음에 책을 읽으면서 든 인상은 <빌리 엘리어트>의 게이 버전쯤 되나보다 싶었는데, 이 책을 게이 청년의 노동자계급 탈출기만으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그 안에는 더 큰 이야기와 심오한 통찰이 담겨져 있다. 이 책에서는 개념과 경험, 또는 사회적 질문과 개인적 질문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직되어 주체화/예속화 또는 재생산의 서사가 구성된다. 덜 여문 글쓰기는 보통 추상적 이론의 일반성을 전제하고, 그것을 입증하거나 반증하는 경험적 사례들을 제시하며 글을 전개한다. 그러나 에리봉은 이론과 현실이 둘 중 하나일 때에는 그 어느 것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1. 가족의 굴곡, 또는 노동계급의 우경화?

1953년생인 디디에 에리봉은 이 책을 50대 중반인 2009년에 출판했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 열여섯에 낳은 에리봉의 어머니를 버리고 27세의 나이로 2차대전 당시 독일로 가서 일을 했던 외할머니의 젊은 시절이나 독일 점령 치하에서 먹을거리를 구하러 다니던 아버지의 얘기부터 나오니 대략 육칠십 년 정도에 걸친 한 가족의 역사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외할머니가 종전 후 삭발당해 곤욕을 치렀으리라는 상상의 장면은 독일군과 관계를 가졌던 여성들에게 조리돌림식 모욕주기를 하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장면 그대로이다(84-85). 여기까지라면 딱히 인상적일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여성들의 성적 일탈을 처벌하면서, 그리고 그렇게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력을 재확인하면서 남성적인 힘 속에서 부활하였다고(86).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거시적 설명은 곧 미시적 개인 서사로 미끄러져 넘어간다. “그녀는 독일군과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때까지의 삶보다 좀더 나은 삶을 보장받고자 했던 것일까? 이 두 가지 설명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서술이 이 책에는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이 단죄했던 외할머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정말 그것은 명확한 의식적 결정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그냥 그 상황에 내가 속하게 되었을 뿐인가, 그것도 아니면 지나고 나서 재구성한 기억일까? 이처럼 에리봉은 사건을 재구성할 때 일견 같이 있을 수 없는 이유들의 공존 가능성, 양가성(ambivalence), 자아 내부에 존재하는 구조화하는 양극성에 문을 열어놓는다(182, 184). 그리고 나 역시 그래왔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에리봉은 가족을 전략들의 총체”(104)라고 하면서, 부르주아들에게는 가족이 사회관계자본이며 또 그것의 획득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것이지만, 노동자 계급에게 가족은 정상적 가족과는 거리가 먼 부정적 자본일 뿐이고, 긍정은커녕 지우기 바쁜 관계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론적 일반화와 현실 간의 괴리, 그리고 현실들의 차이가 늘 고려된다. 재생산, 규범화, 주체화, 예속화 등의 개념은 이 다채로운 삶들을 재현하기에는 부족한 제한된 도구일 뿐이다. 신부들의 아동성추행, 자신이 못 이룬 계급상승의 꿈을 에리봉에게 투사하면서도 아들의 영어 시 암송이 자신을 모욕한다고 느껴 발끈하는 어머니, 늘 일을 더 많이 하는 어머니의 공장 출근이 불안해서 시빗거리를 찾아 근처 카페에 잠복하는 아버지, 자연스레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형, 저 멀리 제3세계가 아니라 자신들의 일상생활에서 감내해야 하는 비루함들에 대해 항의하고 거부하는 것을 좌파와 동일시하는 민중들의 공산당 지지, 그리고 이 와중에 가족들은 아무도 안 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계급탈출을 꿈꾸다가 트로츠키주의 활동가가 되면서 자신의 가족이 체현하고 있는 즉자적 계급과 책에서 읽은 대자적 계급 간의 괴리로 번민하던 에리봉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시간이 흘러 에리봉은 묻는다. 이들이 반이민주의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에 투표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토마 피케티가 이제는 브라만 좌파가 지배하는 고학력 정당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낀 민중들의 소외감에서 그 이유를 찾았듯, 에리봉 역시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을 잃어버린 데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과거 이들의 공산당 지지는 소련과는 하등 상관없는 것이었고, 제도권으로부터 존재 자체가 체계적으로 배제된자신들을 정의롭게 대변하던 이들에 대한 지지였다(48). 그러나 오늘날 좌파 정당과 지식인들은 피치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통치자의 언어로 생각하고 말한다. 과거에는 피지배자와 피억업자라고 인식했던 이들을 그저 배제된 자들’, 불안정성 증가의 피해자, 사회적으로 탈락한 빈민들로 호명할 뿐이다(170). 이 브라만 좌파의 호명은 민중이라는 세계 내 존재를 모욕당한 존재로 열등화한다(233). 민중에게 이 브라만 좌파는 상인 우파와 똑같은 저 위에 저 멀리 있는 다 똑같은 놈들에 불과하다. 에리봉은 노동자들의 국민전선 지지를 결국 자신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서민층의 호소, ... 한때 자신들을 대표하고 방어하던 자들에 의해서까지 짓밟히고 있다고 느끼는 이들의 존엄성을 수호하려는 호소로 해석한다(151).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먼저, 정당이다. 이 정당의 근본적 역할은 바로 현실에 대한 정치적 지각 양식과 이론적 틀을 구축하기, 다른 관점들을 제공하고, 다시 한 번 새롭게 좌파라고 불릴 만한 미래를 스케치하기이다(174-175).

 

에리봉의 성찰이 훌륭한 점은 자신의 실존적 배반을 인정한다는 것이다(30). 그는 이 문제, 오늘날 열등화된 주체의 구성 및 그에 수반되는 자기 침묵과 자기 고백사이의 복잡한 관계의 구성을 자신 역시 외면해왔음을 인정한다(23). 그의 푸코 전기는 성적 규범화를 통해 열등화, 비체화된 자신의 정체성에 기반하였고, 이는 자신을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인 민중 계급의 열등화와 사회적 소속을 어둠 속으로 밀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곧 자신을 노동자의 아들이 아닌 게이 어린이로 주체화했던 것이다(31). 따라서 이 책은 자신이 마음의 구석 안 보이는 곳 어딘가에 쑤셔 박아 두었던, 어쩌면 훌훌 벗어던지고 싶었던 출신성분에 대한 용기 있는 조명이다. 50대 중반에 이른 어떤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야 쓸 수 있는 자신, 가족,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완숙했기 때문에 쓸 수 있었지만, 이 책을 썼기 때문에 비로소 완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쓰고 출판한 것이 아스케시스 자체인 작업이다.

 

2. 게이 청년의 지방 노동계급 탈출기라는 다소 뻔한(?) 이야기

에리봉의 성장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세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가부장제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지방 노동계급 가정에서 성장한 유년기, 게이 정체성을 인식하고 출신성분 세탁을 위해 노력하던 청년기, 그리고 노력과 행운의 결합으로 자포자기했던 꿈을 이루게 된 장년기로 나눠보자.

 

1) 유년기

일찌감치 결정된 사회적 운명을 지고 태어났지만, 어린 디디에는 자신의 욕망을 아버지와 닮지 않으려는 것에 투여한다. 때로는 아버지와 낚시를 하면서 유대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시간 낭비로 생각하며 책을 읽고 싶어 한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외할아버지를 좋아하면서도, 유리창을 닦는 그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누가 볼까 전전긍긍한다.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정치적으로는 노동자들 편이었지만, 그 세계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견디기 힘들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벽에 병들을 던져 깨고, 한 번뿐이지만 어머니 역시 무언가를 던져 아버지의 갈비뼈를 금가게 한다. 부모는 노동자이면서 비참함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지만,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온갖 소비재를 열렬히 욕망하면서 새로 산 물건의 비싼 가격들을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2) 청년기

이 즉자적 계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디디에는 발버둥친다. 노동자 부모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아버지 말에 따르면 신부들이나 읽는” <르 몽드>뿐만 아니라, 맑스와 트로츠키를 읽는다. 역설적으로 맑스주의가 노동자계급 자식의 사회적 탈동일시기제였던 것이다. 자신을 인민의 아방가르드로 간주하며, “실제의 노동자들에게서 더 잘 멀어지기 위해 노동계급을 예찬했던 것이다”(100). 에리봉은 이 아이러니를 직시한다. “자기의 귀속과 변형 과정, 정체성의 구성과 거부 과정은 내 안에서 언제나 서로 연계되어 있었고, 뒤얽혀 있었으며, 서로 맞서 싸우며 제약하는 것이었다”(109).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 진학을 위한 고등학교에 진학한 에리봉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혐오했던 [그 부르주아들의] 세계에 역설적이지만 잘 적응했다”(182). 교육체계로부터 축출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을 가족의 세계로부터 구출한다. 운동선수가 아니라 심미주의자의 길을 택하고, 자신이 적극적으로 동의한 폭력을 자신에게 행한다. “진정한 수행(修行, ascése) ... 자신에 대한 교육, 더 정확하게는 과거의 내 존재를 만든 학습으로부터의 탈피를 경유하는 재교육”(187). 소위 정당한 문화에 대한 자발적 저항을 계속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굽힌다. “저항은 나를 잃는 길이었고, 복종은 나를 구하는 길이었다”(190).

 

그 와중에 멋진 이름을 가진 부유층 친구와 우정을 나눈다(192, “은 이름의 오역이다). 친구는 배우고 싶다는 갈망을 가르쳐주었고, 디디에는 그를 닮고자 열망했다(193). 친구는 디디에에게 책에 대한 취향을 갖게 했고, 둘은 영화와 소설 이야기를 함께 하고, 디디에는 친구의 필체까지 따라 하고, 각자의 필명을 짓는다. “중요했던 것은 열광이었고, “내용은 그 다음이었다”(197). 이 우정 덕택에 에리봉의 학교 문화에 대한 자발적 거부가 문화 일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거부로 귀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각자의 길을 간다. 친구는 히피의 길을, 에리봉은 트로츠키주의자의 길을...

 

에리봉이 진학한 랭스대학 철학과는 그의 지적 열망을 전혀 채워주지 못했고, 파리에 대한 선망을 더 키우게 된다. 그동안 주체의 자유를 강조한 사르트르에 매료되었다는 것도 역설적이다. 그의 석사논문은 사르트르에 관한 것이었는데, ‘역사를 부정한 레비-스트로스와 푸코를 비판했다는 것이 재미있다(216).

 

게이 정체성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지만, 그 이후에는 선택이 이어진다. “절반은 트로츠키주의자로, 절반은 게이로쪼개진 에리봉은 맑스주의 안에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사회적 탈동일시 기제였던 맑스주의 자체가 이제는 벗어야 할 외투가 된다. 게이처럼 규범에 편입되지 않은 이들에게 어디서 어떻게 사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이들은 공간과 시간을 계속해서 옮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며, 이에 맞게 그 능력을 키워야 했다(245). 어떤 행운이 이 열망을 실현시켜 그는 파리지앵이 될 수 있었다(217). 게이라는 오염된 정체성은 푸코의 저작들에 대한 남다른 독서로 그를 이끈다(252-254).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푸코와 타자에 대해 글을 쓰는 사르트르가 에리봉에 의해서 오묘하게 결합된다(254).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 사르트르와 푸코는 에리봉이 자신을 재발명하고 과거를 재조명하는 데에 버팀목 역할을 했다. 그리고 수치심은 자긍심으로 변화한다(256).

 

3) 장년기

에필로그는 참 인상적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자 어떤 우연과 호의에 의해 모든 것이 이뤄진다. 물론 여기에는 하고 싶은 것을 꾸준히 했던 자신의 아스케시스가 존재했다. 애초에 계획했던 중등교원 자격도 얻지 못하고, 박사논문도 쓰지 못한다. 스물다섯 살 무렵 방황하던 중 만난 게이 친구의 친구가 <리베라시옹>에 근무하였는데, 그 친구와 말이 잘 통했고, 그 친구는 기사를 부탁한다. 그 때부터 에리봉의 비상은 시작된다. 계단형 발전의 어떤 도약이 일어난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다 잘 안 돼서 좌절하였을 때 그 기회가 왔고, 에리봉은 그 기회를 꽉 붙든다. 부르디외, 뒤메질, 레비-스트로스, 푸코와 인터뷰를 하며 개인적 친분을 쌓게 된다. 취재원과의 불가근불가원의 거리를 지키는 단순한 기자가 아니라, 친구이자 조력자가 된 것이다. 부르디외에게도 푸코에게도 그는 중요한 사람이 된다. 푸코 사후 뒤메질은 에리봉에게 푸코의 전기 집필을 넌지시 제안하였고, 이 훌륭한 제안자가 세상을 떠난 후 출판된 푸코 전기는 세계적인 히트를 친다. 그리고 단지 푸코 위인전기가 아니라, 푸코의 사상을 신보수주의 반혁명에 대한 대항담론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대담집, 전기 작가에서 이제 그는 또 한 계단 올라서서 자신의 이름으로 게이와 소수자에 대한 책들을 출판하며, 유럽, 남미, 미국에서 강의를 하고 여러 상을 받는다. 그리고 아미앵대학의 사회학과 교수가 된다. 어둑해질 무렵 불안을 잊으려 파트너를 찾아 거리를 어슬렁거렸을 스물다섯 게이 청년이 포기했던 미래가 이렇게 현실이 된다.

 

3. 매개자로서의 맑스주의와 정당

맑스주의는 에리봉의 성장에 유용한 것이었다. 그를 노동자계급으로부터 탈출시키는 사회적 탈동일시의 기제였지만, 탈출이 완료되자 벗어던지는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역설의 역설이다. 책에서 배운 대자적 계급이 현실의 즉자적 계급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고, 에리봉으로 하여금 진짜 노동자들은 볼 엄두도 못 내는 어려운 철학 책으로 이끌었으며, 나중에는 둘로 쪼개진 자기 중에서 트로츠키주의자 에리봉을 버리고, 게이 에리봉을 택한다. 이것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에리봉이 이 책을 통해 이론과 정당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케 할 어떤 이론-실천 복합체라는 매개자의 재등장을 염원한다는 점이다. 그는 자크 랑시에르를 겨냥하며, 노동자 계급이 본성상 좌파적이고 따라서 이들의 자생적 지식에 기반한 비판과 변혁의 전망을 도출해내는 것은 지식인 특유의 사고방식을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171). 이러한 주장은 얼핏 보면 의식성의 외부 도입 테제와 전위정당의 역할을 강조한 레닌의 주장과 무척 유사해보인다. 그러나 그가 염원하는 이 새로운 좌파 정치의 지침은 젊은 날의 트로츠키주의를 포함한 과거의 맑스주의와는 다른 실천철학일 것이다. 어떤 궁극적인 전복해방도 존재하지 않는다(258). 무언가 전복시켰다 해도 그것은 약간의 자리 이동을 만들어낼 뿐이고, 이전의 모순을 다 해결하지도 못하며, 새로운 모순을 만들어낼 것이다. 인민의 자생성과 해방의 전망에 대한 의존 없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끝나지 않는 전투를 사고하고 그에 복무할 수 있도록 만드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정당, 그것은 어떤 것일까? 재등장하는 매개자(reappearing mediator)”에 대한 염원은 카르멘의 대사를 떠오르게 한다. Love comes and goes, and then comes back. 그러나 사랑이라는 어떤 행운은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그냥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 온 사랑도 떠나간 사랑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4. 아스케시스, 그리고 친구가 준 행운

이 책에서 나를 가장 매료시켰던 것은 에리봉이 자신의 존재의 원칙으로 삼은 아스케시스(askesis)이다. 푸코가 말년에 주목했던 개념인 아스케시스는 자기연마”(성의 역사3), “자기수련”(주체의 해석학), ”자기수양“(비판이란 무엇인가 / 자기수양)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수행(修行, ascése)으로 번역된다. 사실 권력에서 통치성에 이르는 푸코의 1970년대 작업들에 비해 말년의 연구에 관심이 덜 했는데, 이는 기독교적 금욕주의(asceticism) 이전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그의 연구가 내 삶과 무관하게 느껴졌기 때문였다. 그런데 에리봉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부단한 아스케시스 과정으로 형상화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묻어 놓았던 또 다른 자기에 대한 자기의 작업“, 곧 아스케시스 작업을 수행한다. 자기는 구원을 위해 억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 수양, 연마, 수련을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나가는 작업 중인 작품이다. 안주하고자 하는 이에게 아스케시스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삶을 도모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면 변신을 위한 아스케시스를 시도해야 할터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나를 만드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나의 어떤 부분과는 단절하고, 어떤 부분은 더 키우는 일일 것이다. ”우리의 과거는 여전히 우리의 현재다. 따라서 우리는 표명되고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재표명되고 재창조된다 (무한정 재착수해야 하는 과업처럼)“(257).


그러나 아스케시스는 혼자서 도를 닦아 진리를 깨우치는 것은 아니다. 친구가 필요하다. 에리봉은 자신이 잘 나서 또는 혼자만의 각고의 노력으로 자수성가했다고 떠벌이지 않는다. 책을 읽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함으로써 문화 일반에 대해 접근하는 고유의 길을 알게 해준 히피 친구, <리베라시옹>에 기고를 부탁한 친구의 친구, 보수화된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근무하게 된 자기 때문에 그 정치적 성향을 알고 있음에도 인터뷰를 하고 원고를 보내준 부르디외, 푸코 전기의 집필을 권해준 뒤메질, 이 모든 이들이 없었다면 에리봉의 아스케시스는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친구들의 역할은 행운을 전해줄 수 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교류해야만 자신의 기준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다. 무엇에 복종할 것인가,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때로는 복종이 나를 구하고, 때로는 저항이 나를 지키는 것이지만, 그 둘 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 햄릿의 고뇌 끝에 내리는 결정이 과연 단독적인 것인가? 혼자만의 선택과 결정은 세상에 없다. 선택의 순간에 옳아 보였던 결정은 그 후에는 후회할 어떤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잘못된 선택을 한 시점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 선택 이후의 행보의 문제였을까? 선택의 순간에도 그 후의 과정에도 친구는 필요하다. 따라서 아스케시스에는 쉰우지아가 수반되어야 한다.

 

에리봉 덕에 푸코 말년의 작업의 진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아스케시스, 혹은 이미 해온 아스케시스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 것인가?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이 오랫동안 잊고 살던 질문을 다시 꺼내들게 한 책이다.

 

5. 애도와 화해

에리봉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와 닮고 싶지 않았고, 그와 같은 세상에 속하고 싶지 않았고, 그 세계를 떠난 후 절연하고 살았다. 그런 그가 이 책을 마무리지으며, 그 때까지 읽지 않고 남겨뒀던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변경 지방의 결말부 -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의 심장마비 소식을 듣고 기차를 타고 돌아가던 중 부고를 듣는 장면 - 를 읽으며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나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께서는 이제 많은 것을 잊으신 듯 행복해 보이고, 나도 이제 그게 좀 편하다. 그런데 당신의 모습에는 아직도 내가 닮고 싶지 않은 것, 나의 존재와 반대되는 것 특히, 신앙과 정당 이 있다. 살아있는 이와의 절대적 화해는 죽은 이에 대한 애도보다 어렵다.

 

리뷰를 다 썼는데도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 층들이 많은, 아이러니가 살아 있는, 무지개빛 생애사이다. 훌륭한 아스케시스, 닮고 싶은 삶이다. 즐겁게 읽고 힘들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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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4-06 12: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리 정말 잘 하셨는데요. 저도 정리가 정말 너무 어렵고 잘 안 됐어요. 워낙 심오하고 여러 결의 통찰이 담겨 있어 그 통잘을 내식으로 제대로 소화하려면 저도 뭔가 공부를 더 해야 가능하겠다는 생각, 내가 내 삶을 객관화해서 세상에 내어 놓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구나, 싶은 준거점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사적 경험을 공적 시선으로 철저히 해부, 해체하고 해석한 보고서인데 왜 중간중간 눈물이 났던지...아,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라 말이 길어졌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에로이카 2022-04-06 13:19   좋아요 2 | URL
blanca님 안녕하세요? 네, 독자가 누구이든 자기를 돌아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할 말이 있게 만드는 좋은 책이지요.
 
현자와 목자 : 푸코와 파레시아
나카야마 겐 지음, 전혜리 옮김 / 그린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Synousia

"함께 사는 것", "공재(共在, 함께 있음)", "사제동행" 등으로 번역된다.


나는 수누지아(sunousia)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리스어의 영어 표기이고, 아마 "쉰우시아(synousia)"가 맞는 한국어 표기법인 것 같다. 플라톤의 『편지들』 중 「일곱째 편지」에서 논의되었고, 푸코는 이를 1982~83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자기와 타인의 통치1983년 2월 16일 강의에서 다뤘다.    


가장 직접적인 정의는 아래 밑줄긋기의 174쪽, 각주 31번 참조.

나머지는 이 대화의 맥락.


[신플라톤주의 전통(플로티노스, 포르피리오스, 아우구스티누스)과 달리], 플라톤은 이러한 신적인 것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더불어 진실을 향한 길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 P121

플라톤은 ... 대화의 길, 디알렉티케의 길만이 진실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이 사랑의 변증법에서의 세번째 단계인데, 젊은이나 사랑하는 자나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상대와 진실을 더불어 사랑하는 주체로서 행동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에게 젊은이와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 모두가 주체가 되어 진실에 이르는 길을 나아가는 비의를 가르친다. ...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진실에 이르는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가 진실에 이르는 길에 스스로 참가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그것이 젊은이와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의 ‘공동생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P124

푸코는 플라톤이 이 대화편들에서 사랑의 문제 속에 진실의 문제를 근본적인 문제로서 도입했다고 지적한다.
<향연>과 <파이드로스>는 상대방의 자유와 ‘환심을 사려는 행위‘에 맞추어진 만들어진 연애술로부터 주체의 금욕과 진리[진실]를 향한 공동의 접근에 관심의 초점이 놓여진 연애술로의 이행을 보여 준다.[<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p. 278]

푸코는 이 자기 제어 자체가 윤리적 파레시아의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곱째 편지>에서는 진실이 책에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밝혀져 있다. 함께 사는 삶에서, 진실은 영혼 속에 머무른다. 진실은 말해지는 말 속에, "영혼 속에 쓰인 말"(<파이드로스>, 276a)로서만 나타난다.
플라톤은 진실을 위한 존재론적 조건이 충족되는 최고의 장이 에로스의 장이라 여기고 있다. 이 에로스는 성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신체적 관계를 포기하고 타자를 진심으로 배려함으로써 타자와 함께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P125

서로 바라보는 행위 속에서 사람은 주체임과 동시에 객체가 된다. ... 나를 보는 눈은 내가 보는 눈이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소크라테스는 제안한다. 바라보는 상대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이다.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가, 그리고 자신의 얼굴에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눈동자가 비춰지고 있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133a).

여기서 주체인 눈동자는 살아있는 인간 안에서 객체인 자기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자기‘를 인식하려 한다면 자기 자신의 영혼으로 다른 영혼을 들여다 보고 거기서 자기를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말, 로고스이다. "그러니까 나와 너의 말(로고스)를 사용해서 혼으로 혼을 상대로 서로 교제"(130d)해야 한다.
영혼이 자기이고 주체라는 것은 영혼이 타자의 영혼과 ‘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의 영혼을 개입시키지 않고서는, 영혼은 자기를 인식할 수 없다. - P150

푸코는 플라톤이 철학과 그 외 학문간의 차이를 중시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다른 학문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이것을 암기하여 자신의 지식으로 삼는 것이 습득의 길이다. 이에 비해 철학은 실천(프라그마)이며 공동생활(쉰우시아스)이라 여겨지고 있다. 푸코는 이 쉰우시아스라는 표현이, 함께 사는 것이자 거의 성적인 관계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는 데 주목한다. (각주 31: 푸코의 1983년 2월 16일 강의. ‘함께 사는 것‘을 원래 의미로 갖는 쉰우시아는, 보통 사회적 교류를 의미하지만 성교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1269c에서 ‘남성 상호 간의 교섭‘, 즉 소년에 대한 남성의 ‘쉰우시아‘라는 말을 사용하며, 플라톤은 <향연>, 206c에서 ‘남녀의 성교‘에 ‘쉰우시아‘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진리는 이 생활 속에서 램프의 불이 타는 것처럼 영혼 속에서 빛나며, 쓴다는 행위도 이 공동생활의 일부로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 P174

철학에서의 진리 개념은 책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것은 푸코가 이제까지 다루어 온 파레시아의 실천적 개념과 공통되는 요소이다. - P174

플라톤은 철학 행위가 진리를 보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실천으로서 나타냈다. 이 실천에서 진리는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영혼 속에 머무르는데, 이것은 친구와의 대화에서, 말 속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했던 대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영혼 속에 그 진리의 램프를 타오르게 하기 위한 행위이며 그 자체가 진리를 말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진리가 진리로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거의 언제나 진리의 부재를 보이는 것으로 대화를 끝내곤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는, 이를테면 ‘용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리‘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푸코가 주목하는 바는, 플라톤이 이 서신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친구와의 대화라는 실천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자로 쓰여진 책에서가 아니라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진리가, 자기와 타자의 진리가 살 수 있는 것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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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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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몸이 바뀌면, 걷는 것도, 소리 내는 것도, 먹고 맛을 느끼는 것도, 분비물도, 활동 범위와 동선도, 보는 것도, 시선 느낌도, 그 시선에 담긴 마음에 대한 짐작도, 변신 전후를 함께 한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 사람들이 하는 일도, 그 관계맺는 타자의 마음도, 심지어 그 타자의 몸까지도 다 바뀐다.

 

변신 이전,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세일즈맨을 하면서 부친의 사업 실패로 빚이 있는 가족의 생계를 건사하는 가장 역할을 한다. 어느 날 아침 곤충으로 변한 그레고르는 그 변신의 이유를 물으려,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쉽지 않지만 적응하려 한다. 곤충의 몸으로 새롭게 겪음과 여전한 인간의 의식 간의 마찰이 내내 전개 된다. 의식은 기억하고 계획한다. 그레고르는 여동생 그레테를 음악학교에 보내겠다고 크리스마스에 가족들 앞에서 선언하기로 계획했던 것을 실행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 한다. 곤충으로 변한 직후 어떻게 해야 할까를 세세히 계획하지만 그것 역시 실행 불가능한 것이고, 이전에 역할이 있었던 관계 바깥으로 튕겨져 나와 잠긴 방에 유폐되었을 뿐이다.

 

가장이 곤충이 되면서 가장에게 의존했던 모든 가족들은 다 돈을 벌어야 했다. 사업 실패 후 충분히 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그레고르에게 의존했던 아버지도 일을 하고, 어머니도 삯바느질을 해야 했다. 그레고르가 진심을 전하려 했던 그레테는 변신한 그레고르를 처음에는 거의 유일하게 동정하며 돌봐주었지만 그녀 자신이 일을 하면서 돌봄노동에 소홀하게 된다. 돌봄이 노동으로 인식되는 순간, 그것은 돈을 받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아주 큰 소진일 뿐이다.

 

곤충의 몸, 인간의 의식을 지닌 그레고르는 이 관계의 변형 속에서 가족들이 원하는 해결을 위해 인간다운 선택을 한다. 곧 죽음을 선택한다. 이 죽음과 함께 이 단편에서 그레고르 외에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였던 그레테도 숙녀로 변신한다.

 

2.

문학무식자인 나는 사람들이 왜 이 단편에 열광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들뢰즈도, 라투르도... 카프카는 내가 읽는 책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나의 앎 속에서 그는 언제나 괄호쳐진(bracketed) 존재였다. 무언가를 알고자 읽는 책에 등장하지만, 그 앎을 구성하면서도 괄호쳐진 곧 그렇다 치고 넘어가는, 질문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 괄호를 풀고 싶었다. 괄호를 푸니 낯선 모르는 것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최근 어떤 만남을 통해서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아는 것이 아님을 경험했다. 나는 그 몸들을 보아왔을 뿐, 그 몸들이 겪는 것은 몰랐다. 그 몸으로서 겪지 않고, 단지 그 몸을 보는 것으로는 전혀 모르는 앎이 있다. 그것은 단지 몸의 차이만이 아니라, 어떤 전체 구조 내에서 자리매김된 위치의 차이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대상의 지속성을 보전시키기 때문에 다른 감각들보다 앎에 우선적으로 기여한다.

 

하지만 봐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 읽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사이사이에는 무수한 괄호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봐서, 읽어서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카프카처럼... (물론 내가 이제 카프카를 좀 안다는 그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 몸이 되어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 변신하여 그 몸이 되어야 비로소 겪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만약 늙음이나 병처럼 자연스러운 변신이라면, 그 앎을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많이 들어 왔고, 또 때로는 나도 했던 다 크면 알게 될거야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말의 청자에게는 하나마나 한 소리일 뿐이고, 화자에게는 난문을 피해가는 전가의 보도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앎보다는 커도 알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 내 몸으로는 겪을 수 없는 몸들의 경험에 대한 앎이 가능할까? 모든 앎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그 앎은 모름의 모름,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해서는 절대적이다. 그리고 이 상대적이면서 절대적인 지식은 무지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름을 안다는 것이 출발이다. 일반화의 성급한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내 몸으로 겪을 수 없는 경험에 관한 상대적 지식은 그것을 겪은 사람의 호의와 이야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이 다정한 친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것이 그 친구로 변신할 수 없는 나의 최선이다.

 

3.

괄호를 떼어내니, 평생 몰랐던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안다고 떠들었던 것, 지금도 그러는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반성이 완전한 인간을 만들지는 못한다. 반성 이후의 실천이 이전보다 반드시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또 다른 새로운 실수를 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담한 무지에 대해서는 소심한 상대적 앎이 절대적으로 옳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봄(seeing)과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둘 다 인식에 필요하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듣고 생각함이다. 그 몸을 보는 것 없이, 그 몸이 겪는 것을 들을 수 있고 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어떤 앎에 기여할 것이다. 지배의 욕망이 배제된 어떤 앎이 가능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와 그의 상대방보다는 더 평등하고, 때로는 소크라테스 역할을 바꿔서 할 수 있는 친구 간의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것을 해보자는 이심전심과 그 두 마음에 대한 믿음이 이제 나는 생겼다.

 

앎과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순히 생각하면, 앎은 물음표를 허용하는 것이고, 독단적 믿음은 질문들을 배제, 추방, 거리두기, 가스라이팅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종교인은 나의 부모님을 포함하여 후자인데, 아주 드물게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 좀 기쁘다. 그러나 나의 앎 역시 어떤 믿음에 기반해 있다. 앎과 믿음은 상호배제적이지 않다. 앎 역시 믿음에 기반하고, 믿음 역시 앎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반이 앎이든 믿음이든 늘 물음표들에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앎과 믿음은 상대적인 것이 되고, 물음표 없음에 대한 절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또 다른 앎과 믿음의 조합 간에도 대화와 설명이 가능하다.

 

나는 그로 변신하지 못하고, 그도 나로 변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을 들이면 우리의 관계는 만들 수 있고, 나도 너도 변할 것이다. 이 변신이 무엇으로 변할지는, 이 함께 하는 대화가 무엇을 낳을지는 장담하지 말자. 존재(있음, being)에서 생성(, becoming)으로... 듣고 생각하고 말하며 감응하는 대화를 통해 나는 변신할 것이다. 나비가 되리라는 보장이 없어도, 괄호친 것들이 더 많은 지금의 허물을 벗을 것이다. 괄호라는 허물을 벗으면, 물음표라는 분비물들이 나올 것이다. 이 의지의 표명은 나의 대화자가 나의 알기 위한 노력, 곧 괄호떼기로 우수수 쏟아진 모름들을 다정히 보살피리라는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종류의 것이다.

 

"진리는 실천 속에서, 대화 속에서만 드러난다. 진리는 말해진 진리로서 대화 속에서 표현되어야 하고, 대화 상대자 속에서 등불처럼 타오르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생각한다. ... 친구와의 대화라는 실천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 문자로 쓰여진 책에서가 아니라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진리가, 자기와 타자의 진리가 살 수 있는 것이다." - 나카야마 겐, <현자와 목자: 푸코와 파레시아>(전혜리 옮김, 동문선), pp. 176,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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