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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평점 :
0.
좋은 책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시간보다 리뷰를 쓰는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책 속에 담긴 층들이 여럿 있었고, 매력적인 아이러니들을 정리해내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정말 재미있는 이 책에 대한 별 재미없는 리뷰다. 처음에 책을 읽으면서 든 인상은 <빌리 엘리어트>의 게이 버전쯤 되나보다 싶었는데, 이 책을 게이 청년의 노동자계급 탈출기만으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그 안에는 더 큰 이야기와 심오한 통찰이 담겨져 있다. 이 책에서는 개념과 경험, 또는 사회적 질문과 개인적 질문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직되어 주체화/예속화 또는 재생산의 서사가 구성된다. 덜 여문 글쓰기는 보통 추상적 이론의 일반성을 전제하고, 그것을 입증하거나 반증하는 경험적 사례들을 제시하며 글을 전개한다. 그러나 에리봉은 이론과 현실이 둘 중 하나일 때에는 그 어느 것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1. 가족의 굴곡, 또는 노동계급의 우경화?
1953년생인 디디에 에리봉은 이 책을 50대 중반인 2009년에 출판했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 열여섯에 낳은 에리봉의 어머니를 버리고 27세의 나이로 2차대전 당시 독일로 가서 일을 했던 외할머니의 젊은 시절이나 독일 점령 치하에서 먹을거리를 구하러 다니던 아버지의 얘기부터 나오니 대략 육칠십 년 정도에 걸친 한 가족의 역사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외할머니가 종전 후 삭발당해 곤욕을 치렀으리라는 상상의 장면은 독일군과 관계를 가졌던 여성들에게 조리돌림식 모욕주기를 하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장면 그대로이다(84-85). 여기까지라면 딱히 인상적일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여성들의 성적 일탈을 처벌하면서, 그리고 그렇게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력을 재확인하면서 남성적인 힘 속에서 부활”하였다고(86).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거시적 설명은 곧 미시적 개인 서사로 미끄러져 넘어간다. “그녀는 독일군과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때까지의 삶보다 좀더 나은 삶을 보장받고자 했던 것일까? 이 두 가지 설명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서술이 이 책에는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이 단죄했던 외할머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정말 그것은 명확한 의식적 결정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그냥 그 상황에 내가 속하게 되었을 뿐인가, 그것도 아니면 지나고 나서 재구성한 기억일까? 이처럼 에리봉은 사건을 재구성할 때 일견 같이 있을 수 없는 이유들의 공존 가능성, 양가성(ambivalence), 자아 내부에 존재하는 “구조화하는 양극성”에 문을 열어놓는다(182, 184). 그리고 나 역시 그래왔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에리봉은 가족을 “전략들의 총체”(104)라고 하면서, 부르주아들에게는 가족이 사회관계자본이며 또 그것의 획득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것이지만, 노동자 계급에게 가족은 정상적 가족과는 거리가 먼 부정적 자본일 뿐이고, 긍정은커녕 지우기 바쁜 관계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론적 일반화와 현실 간의 괴리, 그리고 현실들의 차이가 늘 고려된다. 재생산, 규범화, 주체화, 예속화 등의 개념은 이 다채로운 삶들을 재현하기에는 부족한 제한된 도구일 뿐이다. 신부들의 아동성추행, 자신이 못 이룬 계급상승의 꿈을 에리봉에게 투사하면서도 아들의 영어 시 암송이 자신을 모욕한다고 느껴 발끈하는 어머니, 늘 일을 더 많이 하는 어머니의 공장 출근이 불안해서 시빗거리를 찾아 근처 카페에 잠복하는 아버지, 자연스레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형, 저 멀리 제3세계가 아니라 자신들의 일상생활에서 감내해야 하는 비루함들에 대해 항의하고 거부하는 것을 좌파와 동일시하는 민중들의 공산당 지지, 그리고 이 와중에 가족들은 아무도 안 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계급탈출을 꿈꾸다가 트로츠키주의 활동가가 되면서 자신의 가족이 체현하고 있는 즉자적 계급과 책에서 읽은 대자적 계급 간의 괴리로 번민하던 에리봉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시간이 흘러 에리봉은 묻는다. 이들이 반이민주의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에 투표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토마 피케티가 이제는 “브라만 좌파”가 지배하는 고학력 정당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낀 민중들의 소외감에서 그 이유를 찾았듯, 에리봉 역시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당”을 잃어버린 데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과거 이들의 공산당 지지는 소련과는 하등 상관없는 것이었고, 제도권으로부터 “존재 자체가 체계적으로 배제된” 자신들을 정의롭게 대변하던 이들에 대한 지지였다(48). 그러나 오늘날 좌파 정당과 지식인들은 피치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통치자의 언어로 생각하고 말한다. 과거에는 피지배자와 피억업자라고 인식했던 이들을 그저 ‘배제된 자들’, 불안정성 증가의 피해자, 사회적으로 탈락한 빈민들로 호명할 뿐이다(170). 이 브라만 좌파의 호명은 민중이라는 세계 내 존재를 모욕당한 존재로 열등화한다(233). 민중에게 이 브라만 좌파는 “상인 우파”와 똑같은 저 위에 저 멀리 있는 다 똑같은 놈들에 불과하다. 에리봉은 노동자들의 국민전선 지지를 결국 “자신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서민층의 호소, ... 한때 자신들을 대표하고 방어하던 자들에 의해서까지 짓밟히고 있다고 느끼는 이들의 존엄성을 수호하려는 호소”로 해석한다(151).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먼저, 정당이다. 이 정당의 근본적 역할은 바로 “현실에 대한 정치적 지각 양식과 이론적 틀을 구축하기, 다른 관점들을 제공하고, 다시 한 번 새롭게 좌파라고 불릴 만한 미래를 스케치하기”이다(174-175).
에리봉의 성찰이 훌륭한 점은 자신의 “실존적 배반”을 인정한다는 것이다(30). 그는 이 문제, 곧 “오늘날 열등화된 주체의 구성 및 그에 수반되는 자기 침묵과 자기 ‘고백’ 사이의 복잡한 관계의 구성”을 자신 역시 외면해왔음을 인정한다(23). 그의 푸코 전기는 성적 규범화를 통해 열등화, 비체화된 자신의 정체성에 기반하였고, 이는 자신을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인 민중 계급의 열등화와 사회적 소속을 어둠 속으로 밀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곧 자신을 “노동자의 아들이 아닌 게이 어린이”로 주체화했던 것이다(31). 따라서 이 책은 자신이 마음의 구석 안 보이는 곳 어딘가에 쑤셔 박아 두었던, 어쩌면 훌훌 벗어던지고 싶었던 출신성분에 대한 용기 있는 조명이다. 50대 중반에 이른 어떤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야 쓸 수 있는 자신, 가족,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완숙했기 때문에 쓸 수 있었지만, 이 책을 썼기 때문에 비로소 완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쓰고 출판한 것이 아스케시스 자체인 작업이다.
2. 게이 청년의 지방 노동계급 탈출기라는 다소 뻔한(?) 이야기
에리봉의 성장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세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가부장제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지방 노동계급 가정에서 성장한 유년기, 게이 정체성을 인식하고 출신성분 세탁을 위해 노력하던 청년기, 그리고 노력과 행운의 결합으로 자포자기했던 꿈을 이루게 된 장년기로 나눠보자.
1) 유년기
일찌감치 결정된 사회적 운명을 지고 태어났지만, 어린 디디에는 자신의 욕망을 아버지와 닮지 않으려는 것에 투여한다. 때로는 아버지와 낚시를 하면서 유대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시간 낭비로 생각하며 책을 읽고 싶어 한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외할아버지를 좋아하면서도, 유리창을 닦는 그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누가 볼까 전전긍긍한다.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정치적으로는 노동자들 편이었지만, 그 세계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견디기 힘들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벽에 병들을 던져 깨고, 한 번뿐이지만 어머니 역시 무언가를 던져 아버지의 갈비뼈를 금가게 한다. 부모는 노동자이면서 비참함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지만,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온갖 소비재를 열렬히 욕망하면서 새로 산 물건의 비싼 가격들을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2) 청년기
이 즉자적 계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디디에는 발버둥친다. 노동자 부모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아버지 말에 따르면 “신부들이나 읽는” <르 몽드>뿐만 아니라, 맑스와 트로츠키를 읽는다. 역설적으로 맑스주의가 노동자계급 자식의 “사회적 탈동일시” 기제였던 것이다. 자신을 “인민의 아방가르드”로 간주하며, “실제의 노동자들에게서 더 잘 멀어지기 위해 ‘노동계급’을 예찬했던 것이다”(100). 에리봉은 이 아이러니를 직시한다. “자기의 귀속과 변형 과정, 정체성의 구성과 거부 과정은 내 안에서 언제나 서로 연계되어 있었고, 뒤얽혀 있었으며, 서로 맞서 싸우며 제약하는 것이었다”(109).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 진학을 위한 고등학교에 진학한 에리봉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혐오했던 [그 부르주아들의] 세계에 역설적이지만 잘 적응했다”(182). 교육체계로부터 축출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을 가족의 세계로부터 구출한다. 운동선수가 아니라 심미주의자의 길을 택하고, 자신이 적극적으로 동의한 폭력을 자신에게 행한다. “진정한 수행(修行, ascése) ... 자신에 대한 교육, 더 정확하게는 과거의 내 존재를 만든 학습으로부터의 탈피를 경유하는 재교육”(187)을. 소위 “정당한 문화”에 대한 “자발적 저항”을 계속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굽힌다. “저항은 나를 잃는 길이었고, 복종은 나를 구하는 길이었다”(190).
그 와중에 멋진 이름을 가진 부유층 친구와 우정을 나눈다(192, “성”은 이름의 오역이다). 친구는 배우고 싶다는 갈망을 가르쳐주었고, 디디에는 그를 닮고자 열망했다(193). 친구는 디디에에게 책에 대한 취향을 갖게 했고, 둘은 영화와 소설 이야기를 함께 하고, 디디에는 친구의 필체까지 따라 하고, 각자의 필명을 짓는다. “중요했던 것은 열광”이었고, “내용은 그 다음이었다”(197). 이 우정 덕택에 에리봉의 학교 문화에 대한 자발적 거부가 문화 일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거부로 귀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각자의 길을 간다. 친구는 히피의 길을, 에리봉은 트로츠키주의자의 길을...
에리봉이 진학한 랭스대학 철학과는 그의 지적 열망을 전혀 채워주지 못했고, 파리에 대한 선망을 더 키우게 된다. 그동안 주체의 자유를 강조한 사르트르에 매료되었다는 것도 역설적이다. 그의 석사논문은 사르트르에 관한 것이었는데, ‘역사를 부정’한 레비-스트로스와 푸코를 비판했다는 것이 재미있다(216).
게이 정체성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지만, 그 이후에는 선택이 이어진다. “절반은 트로츠키주의자로, 절반은 게이로” 쪼개진 에리봉은 맑스주의 안에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사회적 탈동일시 기제였던 맑스주의 자체가 이제는 벗어야 할 외투가 된다. 게이처럼 ‘규범’에 편입되지 않은 이들에게 어디서 어떻게 사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이들은 공간과 시간을 계속해서 옮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며, 이에 맞게 그 능력을 키워야 했다(245). 어떤 행운이 이 열망을 실현시켜 그는 파리지앵이 될 수 있었다(217). 게이라는 ‘오염된 정체성’은 푸코의 저작들에 대한 남다른 독서로 그를 이끈다(252-254).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푸코와 타자에 대해 글을 쓰는 사르트르가 에리봉에 의해서 오묘하게 결합된다(254).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 사르트르와 푸코는 에리봉이 자신을 재발명하고 과거를 재조명하는 데에 버팀목 역할을 했다. 그리고 수치심은 자긍심으로 변화한다(256).
3) 장년기
에필로그는 참 인상적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자 어떤 우연과 호의에 의해 모든 것이 이뤄진다. 물론 여기에는 하고 싶은 것을 꾸준히 했던 자신의 아스케시스가 존재했다. 애초에 계획했던 중등교원 자격도 얻지 못하고, 박사논문도 쓰지 못한다. 스물다섯 살 무렵 방황하던 중 만난 게이 친구의 친구가 <리베라시옹>에 근무하였는데, 그 친구와 말이 잘 통했고, 그 친구는 기사를 부탁한다. 그 때부터 에리봉의 비상은 시작된다. 계단형 발전의 어떤 도약이 일어난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다 잘 안 돼서 좌절하였을 때 그 기회가 왔고, 에리봉은 그 기회를 꽉 붙든다. 부르디외, 뒤메질, 레비-스트로스, 푸코와 인터뷰를 하며 개인적 친분을 쌓게 된다. 취재원과의 불가근불가원의 거리를 지키는 단순한 기자가 아니라, 친구이자 조력자가 된 것이다. 부르디외에게도 푸코에게도 그는 중요한 사람이 된다. 푸코 사후 뒤메질은 에리봉에게 푸코의 전기 집필을 넌지시 제안하였고, 이 훌륭한 제안자가 세상을 떠난 후 출판된 푸코 전기는 세계적인 히트를 친다. 그리고 단지 푸코 위인전기가 아니라, 푸코의 사상을 신보수주의 반혁명에 대한 대항담론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대담집, 전기 작가에서 이제 그는 또 한 계단 올라서서 자신의 이름으로 게이와 소수자에 대한 책들을 출판하며, 유럽, 남미, 미국에서 강의를 하고 여러 상을 받는다. 그리고 아미앵대학의 사회학과 교수가 된다. 어둑해질 무렵 불안을 잊으려 파트너를 찾아 거리를 어슬렁거렸을 스물다섯 게이 청년이 포기했던 미래가 이렇게 현실이 된다.
3. 매개자로서의 맑스주의와 정당
맑스주의는 에리봉의 성장에 유용한 것이었다. 그를 노동자계급으로부터 탈출시키는 사회적 탈동일시의 기제였지만, 탈출이 완료되자 벗어던지는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역설의 역설이다. 책에서 배운 대자적 계급이 현실의 즉자적 계급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고, 에리봉으로 하여금 진짜 노동자들은 볼 엄두도 못 내는 어려운 철학 책으로 이끌었으며, 나중에는 둘로 쪼개진 자기 중에서 트로츠키주의자 에리봉을 버리고, 게이 에리봉을 택한다. 이것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에리봉이 이 책을 통해 이론과 정당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케 할 어떤 이론-실천 복합체라는 매개자의 재등장을 염원한다는 점이다. 그는 자크 랑시에르를 겨냥하며, 노동자 계급이 본성상 좌파적이고 따라서 이들의 자생적 지식에 기반한 비판과 변혁의 전망을 도출해내는 것은 지식인 특유의 사고방식을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171). 이러한 주장은 얼핏 보면 의식성의 외부 도입 테제와 전위정당의 역할을 강조한 레닌의 주장과 무척 유사해보인다. 그러나 그가 염원하는 이 새로운 좌파 정치의 지침은 젊은 날의 트로츠키주의를 포함한 과거의 맑스주의와는 다른 실천철학일 것이다. 어떤 궁극적인 ‘전복’도 ‘해방’도 존재하지 않는다(258). 무언가 전복시켰다 해도 그것은 약간의 자리 이동을 만들어낼 뿐이고, 이전의 모순을 다 해결하지도 못하며, 새로운 모순을 만들어낼 것이다. 인민의 자생성과 해방의 전망에 대한 의존 없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끝나지 않는 전투를 사고하고 그에 복무할 수 있도록 만드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정당, 그것은 어떤 것일까? 이 “재등장하는 매개자(reappearing mediator)”에 대한 염원은 카르멘의 대사를 떠오르게 한다. Love comes and goes, and then comes back. 그러나 사랑이라는 어떤 행운은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그냥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 온 사랑도 떠나간 사랑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4. 아스케시스, 그리고 친구가 준 행운
이 책에서 나를 가장 매료시켰던 것은 에리봉이 자신의 존재의 원칙으로 삼은 아스케시스(askesis)이다. 푸코가 말년에 주목했던 개념인 아스케시스는 “자기연마”(『성의 역사』 3권), “자기수련”(『주체의 해석학』), ”자기수양“(『비판이란 무엇인가 / 자기수양』)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수행(修行, ascése)으로 번역된다. 사실 권력에서 통치성에 이르는 푸코의 1970년대 작업들에 비해 말년의 연구에 관심이 덜 했는데, 이는 기독교적 금욕주의(asceticism) 이전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그의 연구가 내 삶과 무관하게 느껴졌기 때문였다. 그런데 에리봉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부단한 아스케시스 과정으로 형상화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묻어 놓았던 또 다른 ”자기에 대한 자기의 작업“, 곧 아스케시스 작업을 수행한다. 자기는 구원을 위해 억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 수양, 연마, 수련을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나가는 작업 중인 작품이다. 안주하고자 하는 이에게 아스케시스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삶을 도모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면 변신을 위한 아스케시스를 시도해야 할터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나를 만드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나의 어떤 부분과는 단절하고, 어떤 부분은 더 키우는 일일 것이다. ”우리의 과거는 여전히 우리의 현재다. 따라서 우리는 표명되고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재표명되고 재창조된다 (무한정 재착수해야 하는 과업처럼)“(257).
그러나 아스케시스는 혼자서 도를 닦아 진리를 깨우치는 것은 아니다. 친구가 필요하다. 에리봉은 자신이 잘 나서 또는 혼자만의 각고의 노력으로 자수성가했다고 떠벌이지 않는다. 책을 읽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함으로써 문화 일반에 대해 접근하는 고유의 길을 알게 해준 히피 친구, <리베라시옹>에 기고를 부탁한 친구의 친구, 보수화된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근무하게 된 자기 때문에 그 정치적 성향을 알고 있음에도 인터뷰를 하고 원고를 보내준 부르디외, 푸코 전기의 집필을 권해준 뒤메질, 이 모든 이들이 없었다면 에리봉의 아스케시스는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친구들의 역할은 행운을 전해줄 수 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교류해야만 자신의 기준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다. 무엇에 복종할 것인가,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때로는 복종이 나를 구하고, 때로는 저항이 나를 지키는 것이지만, 그 둘 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 햄릿의 고뇌 끝에 내리는 결정이 과연 단독적인 것인가? 혼자만의 선택과 결정은 세상에 없다. 선택의 순간에 옳아 보였던 결정은 그 후에는 후회할 어떤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잘못된 선택을 한 시점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 선택 이후의 행보의 문제였을까? 선택의 순간에도 그 후의 과정에도 친구는 필요하다. 따라서 아스케시스에는 쉰우지아가 수반되어야 한다.
에리봉 덕에 푸코 말년의 작업의 진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아스케시스, 혹은 이미 해온 아스케시스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 것인가?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이 오랫동안 잊고 살던 질문을 다시 꺼내들게 한 책이다.
5. 애도와 화해
에리봉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와 닮고 싶지 않았고, 그와 같은 세상에 속하고 싶지 않았고, 그 세계를 떠난 후 절연하고 살았다. 그런 그가 이 책을 마무리지으며, 그 때까지 읽지 않고 남겨뒀던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변경 지방』의 결말부 -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의 심장마비 소식을 듣고 기차를 타고 돌아가던 중 부고를 듣는 장면 - 를 읽으며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나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께서는 이제 많은 것을 잊으신 듯 행복해 보이고, 나도 이제 그게 좀 편하다. 그런데 당신의 모습에는 아직도 내가 닮고 싶지 않은 것, 나의 존재와 반대되는 것 – 특히, 신앙과 정당 – 이 있다. 살아있는 이와의 절대적 화해는 죽은 이에 대한 애도보다 어렵다.
리뷰를 다 썼는데도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 층들이 많은, 아이러니가 살아 있는, 무지개빛 생애사이다. 훌륭한 아스케시스, 닮고 싶은 삶이다. 즐겁게 읽고 힘들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