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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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몸이 바뀌면, 걷는 것도, 소리 내는 것도, 먹고 맛을 느끼는 것도, 분비물도, 활동 범위와 동선도, 보는 것도, 시선 느낌도, 그 시선에 담긴 마음에 대한 짐작도, 변신 전후를 함께 한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 사람들이 하는 일도, 그 관계맺는 타자의 마음도, 심지어 그 타자의 몸까지도 다 바뀐다.

 

변신 이전,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세일즈맨을 하면서 부친의 사업 실패로 빚이 있는 가족의 생계를 건사하는 가장 역할을 한다. 어느 날 아침 곤충으로 변한 그레고르는 그 변신의 이유를 물으려,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쉽지 않지만 적응하려 한다. 곤충의 몸으로 새롭게 겪음과 여전한 인간의 의식 간의 마찰이 내내 전개 된다. 의식은 기억하고 계획한다. 그레고르는 여동생 그레테를 음악학교에 보내겠다고 크리스마스에 가족들 앞에서 선언하기로 계획했던 것을 실행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 한다. 곤충으로 변한 직후 어떻게 해야 할까를 세세히 계획하지만 그것 역시 실행 불가능한 것이고, 이전에 역할이 있었던 관계 바깥으로 튕겨져 나와 잠긴 방에 유폐되었을 뿐이다.

 

가장이 곤충이 되면서 가장에게 의존했던 모든 가족들은 다 돈을 벌어야 했다. 사업 실패 후 충분히 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그레고르에게 의존했던 아버지도 일을 하고, 어머니도 삯바느질을 해야 했다. 그레고르가 진심을 전하려 했던 그레테는 변신한 그레고르를 처음에는 거의 유일하게 동정하며 돌봐주었지만 그녀 자신이 일을 하면서 돌봄노동에 소홀하게 된다. 돌봄이 노동으로 인식되는 순간, 그것은 돈을 받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아주 큰 소진일 뿐이다.

 

곤충의 몸, 인간의 의식을 지닌 그레고르는 이 관계의 변형 속에서 가족들이 원하는 해결을 위해 인간다운 선택을 한다. 곧 죽음을 선택한다. 이 죽음과 함께 이 단편에서 그레고르 외에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였던 그레테도 숙녀로 변신한다.

 

2.

문학무식자인 나는 사람들이 왜 이 단편에 열광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들뢰즈도, 라투르도... 카프카는 내가 읽는 책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나의 앎 속에서 그는 언제나 괄호쳐진(bracketed) 존재였다. 무언가를 알고자 읽는 책에 등장하지만, 그 앎을 구성하면서도 괄호쳐진 곧 그렇다 치고 넘어가는, 질문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 괄호를 풀고 싶었다. 괄호를 푸니 낯선 모르는 것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최근 어떤 만남을 통해서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아는 것이 아님을 경험했다. 나는 그 몸들을 보아왔을 뿐, 그 몸들이 겪는 것은 몰랐다. 그 몸으로서 겪지 않고, 단지 그 몸을 보는 것으로는 전혀 모르는 앎이 있다. 그것은 단지 몸의 차이만이 아니라, 어떤 전체 구조 내에서 자리매김된 위치의 차이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대상의 지속성을 보전시키기 때문에 다른 감각들보다 앎에 우선적으로 기여한다.

 

하지만 봐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 읽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사이사이에는 무수한 괄호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봐서, 읽어서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카프카처럼... (물론 내가 이제 카프카를 좀 안다는 그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 몸이 되어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 변신하여 그 몸이 되어야 비로소 겪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만약 늙음이나 병처럼 자연스러운 변신이라면, 그 앎을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많이 들어 왔고, 또 때로는 나도 했던 다 크면 알게 될거야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말의 청자에게는 하나마나 한 소리일 뿐이고, 화자에게는 난문을 피해가는 전가의 보도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앎보다는 커도 알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 내 몸으로는 겪을 수 없는 몸들의 경험에 대한 앎이 가능할까? 모든 앎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그 앎은 모름의 모름,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해서는 절대적이다. 그리고 이 상대적이면서 절대적인 지식은 무지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름을 안다는 것이 출발이다. 일반화의 성급한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내 몸으로 겪을 수 없는 경험에 관한 상대적 지식은 그것을 겪은 사람의 호의와 이야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이 다정한 친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것이 그 친구로 변신할 수 없는 나의 최선이다.

 

3.

괄호를 떼어내니, 평생 몰랐던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안다고 떠들었던 것, 지금도 그러는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반성이 완전한 인간을 만들지는 못한다. 반성 이후의 실천이 이전보다 반드시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또 다른 새로운 실수를 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담한 무지에 대해서는 소심한 상대적 앎이 절대적으로 옳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봄(seeing)과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둘 다 인식에 필요하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듣고 생각함이다. 그 몸을 보는 것 없이, 그 몸이 겪는 것을 들을 수 있고 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어떤 앎에 기여할 것이다. 지배의 욕망이 배제된 어떤 앎이 가능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와 그의 상대방보다는 더 평등하고, 때로는 소크라테스 역할을 바꿔서 할 수 있는 친구 간의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것을 해보자는 이심전심과 그 두 마음에 대한 믿음이 이제 나는 생겼다.

 

앎과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순히 생각하면, 앎은 물음표를 허용하는 것이고, 독단적 믿음은 질문들을 배제, 추방, 거리두기, 가스라이팅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종교인은 나의 부모님을 포함하여 후자인데, 아주 드물게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 좀 기쁘다. 그러나 나의 앎 역시 어떤 믿음에 기반해 있다. 앎과 믿음은 상호배제적이지 않다. 앎 역시 믿음에 기반하고, 믿음 역시 앎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반이 앎이든 믿음이든 늘 물음표들에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앎과 믿음은 상대적인 것이 되고, 물음표 없음에 대한 절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또 다른 앎과 믿음의 조합 간에도 대화와 설명이 가능하다.

 

나는 그로 변신하지 못하고, 그도 나로 변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을 들이면 우리의 관계는 만들 수 있고, 나도 너도 변할 것이다. 이 변신이 무엇으로 변할지는, 이 함께 하는 대화가 무엇을 낳을지는 장담하지 말자. 존재(있음, being)에서 생성(, becoming)으로... 듣고 생각하고 말하며 감응하는 대화를 통해 나는 변신할 것이다. 나비가 되리라는 보장이 없어도, 괄호친 것들이 더 많은 지금의 허물을 벗을 것이다. 괄호라는 허물을 벗으면, 물음표라는 분비물들이 나올 것이다. 이 의지의 표명은 나의 대화자가 나의 알기 위한 노력, 곧 괄호떼기로 우수수 쏟아진 모름들을 다정히 보살피리라는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종류의 것이다.

 

"진리는 실천 속에서, 대화 속에서만 드러난다. 진리는 말해진 진리로서 대화 속에서 표현되어야 하고, 대화 상대자 속에서 등불처럼 타오르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생각한다. ... 친구와의 대화라는 실천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 문자로 쓰여진 책에서가 아니라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진리가, 자기와 타자의 진리가 살 수 있는 것이다." - 나카야마 겐, <현자와 목자: 푸코와 파레시아>(전혜리 옮김, 동문선), pp. 176,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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