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브뤼노 라투르 - 하이브리드 세계의 하이브리드 사상
아네르스 블록 & 토르벤 엘고르 옌센 지음, 황장진 옮김 / 사월의책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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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매미소리, 동네 공사, 기저질환이 될지도 모르는 새로 생긴 병, 헬스장에서 샤워를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두 시간의 밤 산책과 함께 한 20218월초의 일주일을 온전히 이 책만 읽었다. 나한테는 그런 학자/저자가 있다. 실제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는데 읽고 있는 책들도 주변 사람들도 계속 이야기하는 사람, 잘 모르면서 모른다 못하고 조금은 아는 척하는 것이 계면쩍어서 언제고 읽어야 하겠구나 혼자 생각하면서도 막상 읽기 싫은 학자. 읽기 전부터 그 도저함에 주눅들게 하는, 또 나의 익숙한 사고방식으로는 쉽게 맥락을 파악하기 힘든, 그런데 책도 두껍고 어려워서 다른 일들을 물리고 책을 펴기 어렵게 하는 학자.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늘 그 옆에 있는 다른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나름 정당해 보이는 핑계를 만들어 미뤄두는 해찰질(procrastination)의 대상, 그 학자 중에 한 명이 브뤼노 라투르였다. 나는 책을 끝까지 못 읽고 중간에 포기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데, 다른 네 권의 책을 동시에 각각 읽다가, 그것들을 제끼고 이 한 권을 일주일 동안 잡고 있었다. 방금 다 읽었다. 말 그대로 나처럼 라투르를 처음 읽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소개서이다. 그리고 나는 이 브뤼노 라투르라는 행위자-연결망의 작은 마디로 새로 편입되었다(21). 라투르가 직접 쓴 책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읽을 수 있겠다는 용기를 넘어, 읽고 싶다는 마음도 갖게 했다. 물론 아직 commitment가 그리 크지는 않다. 라투르를 잘 알거나, 철학적 사유에 익숙한 이라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1.

이 책은 덴마크의 사회학자 아네르스 블록과 STS 연구자 토르벤 엘고르 옌센이 라투르를 소개한 책으로 2011년에 영어로 출판되었다. 이들은 라투르가 올가와 함께 쓴 실험실 생활(1979)부터 7장에 실린 인터뷰가 이뤄진 2008년까지 라투르의 지적 여정을 네 정체성들 또는 라투르의 네 얼굴들(47)로 분석하여 본론인 2~5장에서 살펴보는데, 그 구성이 매우 탄탄하다.

 

<> 책의 구성

라투르의 정체성

학문

주제

주요 주장 / 비판대상

대표작 / 주요 개념

2

과학인류학자

인류학

과학

과학적 사실은 구성되는 것; 인간과 사물 간의 동맹 /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인식론적 설명 (대응이론, 확산이론); 마키아벨리; 과학적 실재론;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구성주의

실험실 생활(1979), 프랑스의 파스퇴르화(1984), 젊은 과학의 전선(1987) / 문서의 병렬, 기입, 사실구축자, 병참, 블랙박스(234), 번역(세르), ANT, 행위소

3

근대성의 철학자

철학

근대성

근대성은 1600년대에 확립되기 시작한 자연과 사회의 분리에서 유래(111); “근대 헌법은 이분법을 생산·유지(114~) / 사회 vs. 자연 이분법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3) / 대표(119, 222), 정화(123), 집합체(138, 205)

4

정치생태학자

정치이론

생태학

인간과 비인간의 하이브리드로서 자연의 의회” / 초월적 개념으로서의 Nature & Society

판도라의 희망(1999),

자연의 정치학(2004) / 사물의 의회(143, 158, 184), 인식론적 경찰(161), 코스모폴리틱스(161), 순환준거(164), 사물정치(169), 우려물(172)

5

결합의 사회학자

사회학

결합

사회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설명되어야 함; 행위자들을 따라가라; 비근대적 사회학은 인간 행위소와 비인간 행위소의 이종적 연결을 추적해야 함; 규모는 행위자 자신의 성취(238) / 사회 개념(205); 전통적 비판사회학 (뒤르케임, 부르디외); 비판적 거리두기

사회적인 것의 재조립(2005) / 상호객관성(224), 올리곱티콘(235), 파노라마(237), plug-in(239), 비판적 근접성(240, 274)

 

이처럼 탄탄한 구성 안에 라투르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들(세르, 들뢰즈, 화이트헤드, 가핀클, 퓌레, 듀이, 볼탕스키, , 타르드 등), 위의 표에 보이는 현란한 개념들, 그 개념들을 통해서 구사된 분석과 주장들, 그리고 그것들이 겨냥하고 있는 비판 대상들이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 2장은 연구자로서의 성실성이 돋보였고, 자연/사회의 근대적 이분법을 비판하는 3, 4장은 공감하며 재미있게 보았고, 5장은 의혹, 경악, 혼란의 순간을 거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근데 그럼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방식은 어떻게 되는거지?”하는 상황까지 왔다. 라투르는 대답보다 질문을 더 많이 남긴다(197). 저자들은 독자의 이러한 반응을 미리 예상한 듯, 라투르에 대한 가능한 반론들을 일별하고, 그에 대해 라투르라면 함직한 대답들을 제시하는데, 이 부분도 재미있게 읽었다(244~248).

 

사실 나의 혼란을 정리하고 싶은데, 아침 일찍 병원에 가야 하고, 내일부터는 오늘 온 다른 책을 읽고 싶기 때문에 넘어간다. (, 이 놈의 해찰질만 안 했어도 난 지금보다는 나은 인간이 좀더 일찍 되어 있을거다.)

 

2.

라투르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듣고 맡게 된다. 산책하며 듣게 되는 여러 생물과 무생물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도 조금 다르게 들리고, 집안의 사물들도 달리 보이고, 가끔 안고 걸어야 하는 개도, 알러지 때문에 멀리하는 고양이도, 몸에 나는 두드러기도, ZOOM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도, 베지태리언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눈치보는 상황도, 배달된 양장피도, QR 인증도, 백신도, 마스크도... 인간간의 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를 늘 매개하고, 그 관계에 늘 개입하는 사물들을 비로소 느끼고,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라투르를 읽고 세상을 다르게 느끼는 것과 라투르처럼 비판적 근접성을 유지하면서 그 어떤 메타담화도 없이 인프라언어(242)로 인간과 사물 간의 이종적 연쇄를 재현하고, 소외된 인간과 소외된 사물들을 대표함으로써 소위 인간주의적 비판 사회학이 못해내는 것들을 실제로 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원할지언정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종류의 과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여간 지금은 그렇다.

 

3.

저자들은 라투르의 비판의 수행적(performative) 성격을 강조한다(126, 148, 198).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에 대한 정의의 이중적 성격에 주목한 프랑수아 퓌레를 인용하며, 당시에 혁명은 (1) 사건에 대한 정의이면서 동시에 (2) “'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렇지 않았다면 가질 수 없었을 용기와 낙관주의를 고취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같은 논리로 자신이 근대적이라는 믿음은 그 믿는 자들, 곧 근대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얻게 해줬다. 수행성에 대한 이런 강조는 비판대상뿐만 아니라, 대안적 질서화 양식을 확립하려는 시도에서도 관찰된다. 라투르의 비근대 헌법이나 사물의 의회”는 적극적인 노력이며 선언, 우리로 하여금 다르게 행동하도록 고안된 해석이다. 단순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라, 제안이고 개입인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수행성을 강조하다 보면, 애정을 갖고 있지 않다면 찬성할 수 없는 주장이 펼쳐진다. “자본주의에 대항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라투르는 먼저 그것의 존재를 믿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247). 이 말을 좋게 생각하면, ‘자본주의에 대해 우리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을 근원적으로 재검토하여야 한다정도로 읽어줄 수 있다.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존재해왔고 존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일 뿐이라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이 떠올랐다. 이들은 라투르에게는 매우 전형적인 비판사회학자들일텐데, 이 부분에서는 일치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잘 모르면서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기능주의자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적 사실의 존재에 집착하는 근대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이것을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다 보면, 라투르가 이를 비판하며 했던 말을 나는 뭘로 들은건가 하는 생각이 또 드는 것이다. 아휴 참... 라투르가 직접 쓴 글을 읽을 때,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의문들을 기억해낼 수 있으면 좋겠다.

 

4.

라투르를 잘 모르지만 번역은 매우 훌륭한 것 같다. 다만 interdisciplinary학제적으로 옮긴 것은 잘못이다. “학제간으로 옮겨야 한다. 아마도 이 형용사가 수식어가 아니라 서술어로 쓰일 때, “학제간적이다라는 심히 이상한 한국말을 만드는 것을 기피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오역이다. 255쪽을 보면, post-disciplinary탈학제적으로, cross-disciplinary교차 학제적으로 제대로 옮겼는데, inter-disciplinary학제적으로 옮겨졌고, 다른 모든 곳에서도 그러하다. 이상으로 진지한 책에 대한 날라리 리뷰를 마쳐야 하겠다. 읽을 때에는 쓸 말이 장마다 넘쳤는데, 어디로 다 증발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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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is 2021-08-1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상세하고 생생한 리뷰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리뷰로 이 책에 대한 훌륭한 안내를 받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학제적˝이라는 번역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국어사전(네이버)에 이렇게 정의됩니다.
학제: (1) 학교 또는 교육에 관한 제도. (2) 학문 간의 경계를 아우름.
학제적: 여러 학문에 관계되는 성격을 가지거나 그 범위가 여러 학문에 미치는

간학제적이라고 번역하시는 분도 있으나 너무 일본어 느낌이 강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리뷰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

에로이카 2021-08-19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nto님 안녕하세요? 만약 ˝학제적˝을 네이버 국어사전 (2)의 뜻으로 쓴다면, post-disciplinary, cross-disciplinary에서 접두사가 붙는 어간, disciplinary를 ˝학제적˝으로 번역할 수는 없겠지요? 번역이 어렵다는 것은 압니다. 다만 저는 그저 저 번역에 반대하는 독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 하기˝를 읽고 있는데, 번역이 트러블이네요.. 하.. 이것도 참 라투르적이군요.. ㅋㅋ

kois 2021-08-19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네. 번역은 참 어려운 것임을 새삼 느낍니다. 해러웨이 책은 중간에 몇 장을 빠뜨리기까지 했더군요 좋은 리뷰, 도움 말씀 너무나 감사합니다 ^^ 즐거운 공부 되시길 바랍니다 !!!
 
아침이슬 50년, 김민기에 헌정하다 [2CD] - 라이너 노트(60p)
윤도현 외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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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브릿지의 연주가 돋보이는 기지촌이 제일 좋다. 이은미, 크라잉넛, 정태춘, 나윤선 등도 좋고. 서너 곡 정도가 성에 안 차는데 그저 나의 꼰대스러움 때문일 듯. 김민기의 오리지널의 위대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데, 헌정앨범의 목적이 원작의 뛰어남을 기리는 것이라면 그 목적은 이룬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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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
사이토 고헤이 지음, 추선영 옮김 / 두번째테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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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서양 고전 훈고학의 한 예. 맑스의 (생태적이든 아니든) 자본주의 비판을 완벽하게 재구성하겠다(22-23)는 야심을 표명. 미완의 정치경제학비판을 완벽하게?? 어디 한 번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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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와 목자 : 푸코와 파레시아
나카야마 겐 지음, 전혜리 옮김 / 그린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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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6월 중에 읽은 책. 600페이지쯤 되는데 매일 보지는 못해서 보름 조금 넘게 걸렸다. 이전에 본 아렌트, 데리다 해설서처럼 서양 학문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훈고학적 해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두껍지만 내용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고 번역도 훌륭해서 막힘 없이 잘 읽혔다. 번역을 탓하지 않고, 번역서를 읽은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1. 요점

『육체의 고백』이 출판되기 전인 2008년에 일본에서 출판된 이 책은 푸코의 1980년대 저작들 - 『주체의 해석학: 1981-82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성의 역사』 2, 3(1984), Wrong-Doing, Truth-Telling (1981년 루벵 가톨릭대학 강의) 에서 언급된 고대 그리스 철학(현자)과 초기 기독교 교부철학(목자)에서 전개된 고백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주체인 자기개념의 전개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요점만 이야기하자면, 전자에서 자기는 배려의 대상이었던 반면, 후자에서 자기는 부정과 포기의 대상으로 자리매김된다. 자기 포기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저주해 마지 않았던 니힐리즘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겠다. 전자, 특히 소크라테스적인 진실 말하기에서는 주로 스승이 말하고 제자가 들었지만, 후자에서는 제자가 말하고 스승이 귀를 기울인다. 전자의 목표가 자기 배려와 자기 통치라면, 후자의 목표는 자기 포기, 다른 말로 타자의 권력에 복종하는 주체의 형성이다 (575).

고대 그리스의 파레시아와 초기 기독교의 고백은 모두 타자와의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행해지는 진실 말하기이지만, 이처럼 그 효과는 전혀 다르다. 파레시아가 리스크를 감수하며 용기있게 진실을 말하는 행위인 반면, 기독교의 자기해석과 자기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말해지는 내용의 진실 여부가 아니라, 그 말한다는 행위를 통해 공고화되는 전면적 복종과 자기 포기이다. 이 자기 포기야말로 예술작품으로서 자신을 가꿔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고, 『감시와 처벌』에 나오는 순종적이고 쓸모있는 신체의 또 다른 모습이다.


2. 『육체의 고백』과의 관계

『육체의 고백: 성의 역사 4권』을 읽기 전에 보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 책을 읽었던 덕에 이 책을 더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번 『육체의 고백』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1540266)는 다시 봐도 너무 난삽한데, 그 때는 잘 몰랐던 교부 철학자들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활동한 이들였는지를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육체의 고백』에서는 잘못 번역되었던 엑소몰로게시스와 엑사고레우시스도 어쭙잖게 한국말로 번역되지 않고 원문대로 표기되어 있어 그 뜻이 오도되지 않는다. 그 때는 엑소몰로게시스는 옷차림이나 행위로, 엑사고레우시스는 말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정도만 알았는데, 전자는 수도원 밖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후자는 수도원 안에서 이뤄졌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육체의 고백』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욕망하는 주체(따라서 고백되어야 하는 주체)와 권리의 주체(따라서 책임져야 하는 주체)의 포개짐이 서구 역사에서 성행위의 이론적 위상 변화를 갖고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책 『현자와 목자』에서 법적 주체와 관련된 측면은 주목되지 않는다.


3. 마치며

참을성을 갖고 꾸준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고, 나중에 그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면 열 페이지도 안 되는 결론을 대신한 글을 읽으면 될 것 같다. 역자 후기는 푸코 초심자들에게 유용한 내용으로 아주 쉽고도 유려하게 잘 쓰여 있다. 파레시아의 핵심도 잘 정리되어 있고, 그것이 초기 기독교의 고백과 어떻게 다른지도 명확히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푸코의 1970년대 중반 이후 연구의 전반적 맥락을 잘 보여준다.


4 문득 생각난 것, 더 생각해볼 것 등

1) 역시 푸코에 대한 나의 주요 관심은 1975년부터 1979년 사이의 저작에 한정된 것 같다. 그 이전 저작들도, 그리고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그 이후  1980년대 저작들도 약간의 호기심과 경외의 대상일 뿐, 지금 당장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공부할 엄두는 내지 못하겠다.

2) 『성의 역사』 4부작을 만약 다시 읽는다면, 1권부터 4권까지 차례대로 읽을 것이 아니라, 이 책 『현자와 목자』를 길잡이삼아 2, 3, 4, 1권의 순서로 읽어야 할 것 같다. 2, 3권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쾌락의 활용과 자기 배려를 다루고 있고, 4권이 초기 기독교에서 리비도에 주목하게 되면서 고백과 참회(엑사고레우시스/엑소몰로게시스)가 자기 포기의 효과, 곧 예속적 주체화를 가능케 하는 진실 말하기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가 각주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 책의 가장 끝부분(585)이다.

3) 역자 후기를 감탄하면서 읽었는데, 권력(관계)에서 통치성으로의 (연구대상이라기보다는) 문제설정(problematique)의 변화를 정리한 부분(598-599)을 읽으면서 든 느낌적인 느낌(그러니까 아직 사유는 말할 것도 없고 생각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무언가 말로 정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곧 통치성 연구로의 전환의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통치성 연구로의 변화가 과연 이전의 권력관계 연구에 비해 더 가치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물론 파레시아와 대항품행과의 연관 속에서, 곧 정치와 윤리의 통합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움직임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규율권력과 생명관리권력이 제기한 문제들, 또 그것이 야기한 논란들이 통치성 논의를 통해 해결된다기보다는 회피되는 것이 아닐까? 그냥 문득 든 의문이지만, 답이 빠르고 쉽게 나올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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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와 목자 : 푸코와 파레시아
나카야마 겐 지음, 전혜리 옮김 / 그린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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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후기 사상의 전개에 대한 훌륭한 훈고학적 저작이다. 『성의 역사』 4부작 읽기의 길잡이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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