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가격 - 증여와 계약의 계보학, 진리와 돈의 인류학
마르셀 에나프 지음, 김혁 옮김 / 눌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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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받고 주기, 받았기 때문에 줘야함으로 시작해서 받지 않았음에도 줌으로 끝나는 책이라고 하면 될까? 넉달 동안 조금씩 읽고 나서 리뷰를 쓰려니 머릿속에는 몇 가지 파편들만 떠돌고 있고 하나의 이야기로 엮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 속독하며 정리하고 리뷰를 쓰려 했다. 그런데 속독 정리가 불가능해서 저 밑에까지 쓰다가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ㅠㅠ... 좋은 책이다. 독자의 관심이 무엇이건 한두 번쯤 들어보았을 유명한 철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의 논의들이 대가의 안목으로 독특하게 직조되며 하나의 새로운 이론적 전망을 여는 책이라고 느꼈다.

 

저자 에나프는 철학, 인류학, 정치경제학, 사회학, 문학을 넘나들며 정말 많은 저자들의 작업을 역사적·지적 맥락 안에 자리매김함으로써, 또 그들에 대한 자신의 찬반논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내가 그들에 대해 갖고 있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맥락적 지식으로 변화시킨다. 그것은 아마 저자가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인류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이 역사적 맥락 안에 자리매김되고, 인류학적 연구가 이론적 맥락 안에 자리잡는다. 보통 별 관계를 생각하기 힘든 주제들 소피스트의 경제활동, 의례적 선물교환, 희생, 부채, 은총, 저작권, 정신분석가의 급료, 그리고 인정 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다양한 논의들이 재료로 활용되어 이 위대한 인류학자/철학자를 통해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소피스트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바울, 아퀴나스, 몽테스키외, 디드로, 루소, 칸트, 스미스, 맑스, 니체, 베버, 짐멜, 프로이트, 말리노브스키, 모스, 폴라니, 벵베니스트, 코제브, 고들리에, 르포르, 세르, 왈저, 호네트, 레비나스, 그리고 처음 들어본 프랑스 학자의 논의들이 각 장마다 비중이 바뀌며 등장한다. 어떤 장의 주연이 다른 장에서는 훌륭한 조연으로 등장하는 방식이 지속된다. 논의가 반복된다는 느낌이 들 수 있지만, 등장인물의 배치가 달라지고, 하나의 배치에서 다음 배치로의 이동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점층적 논술형식 때문일지 논의를 기승전결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중간을 딱 떼어내고 앞뒤만 말하자면, “진리의 가치라는 입구로 들어가서 타자에 대한 인정이라는 출구로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데모스 윤리학에 나오는 앎과 돈을 동시에 잴 수 있는 공통의 잣대는 없다는 말이 계속 반복되긴 하지만(23, 170, 502, 530, 541), 책 제목인 진리의 가격”은 사실 입구에 대한 이야기일 뿐, 책 전체의 내용을 포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중간의 여정이 학문적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정리하기가 어렵다. 다음은 내맘대로 요약이다. 2부에서 비중있게 다뤄진 의례적 선물교환, 희생제의, 은총에 관한 인류학적·신학적 논의는 제외했다.

 

2. 화폐

화폐에 관한 논의는 1장 이전의 서문(36, 53-54)3(8-10)에서 주로 다뤄지고, 모스, 아리스토텔레스, 짐멜, 세르의 논의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모스를 비롯한 많은 인류학자들은 시장교환에서 사용되는 현대 화폐가 미개화폐(archaic money) 또는 야생(savage)화폐로부터 진화된 것으로 보는데, 에나프는 이에 반대한다. 양자는 공존했지만, 엄밀히 다른 영역에서 쓰였다. 물론 화폐가 통용되려면 그것이 귀중한 것임을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에 의례적 교환에서 쓰이는 것들과 동일한 재료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례적 교환에서 중요한 것은 교환대상의 등가성이 아니라 그것으로 상징되는 바이므로, 엄격한 등가성이 추구되지는 않는다. 반면, 유용품 교환을 매개하는 화폐는 일반적 등가물여야 하는데, 이는 화폐가 사회의 정의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화폐를 필요를 대체하기 위해 필요한 필수적이고 정당한 수단으로서 교환에서의 정의를 보장하는 것으로 본다(495-8). 여기에서 교환은 시민간의 교환이지 시장상인이 매개하는 교환은 아니다. 에나프는 모스의 해석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대질시키면서, 의례적 교환에서 상품교환으로의 이행을 가정하는 모스의 계보학은 허구라고 비판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수정보완한다. 곧 물물교환 또는 척도사물이 매개하는 교환에서 주조화폐를 사용하는 상업적 교환으로의 이행은 정치적 조직과 사회적 분업의 출현과 병행하여 이뤄진다(480). 이는 씨족 집단 간의 보복적 정의로부터 법이 규정하는 중재적 정의로의 이행을 수반한다(491). 이제 유용한 재화의 교환은 단순한 생계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근본적 측면이며, 정치와 경제의 문제가 결합된다. 의례적 교환에서는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던 교환되는 사물 자체의 등가성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화폐를 정의의 수단으로 보지만, 정치학은 그것의 역효과, 곧 상인의 화식술(貨殖術, chrematistics)을 경계하였고, 이는 루소와 맑스에게까지 이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화폐가 두 사물 간의 교환을 매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비이성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앞문장에서 화폐는 필요의 측정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뒷문장에서 화폐는 이제 화폐에 대한 욕망 자체를 측정한다(149). 이 화폐는 필요의 충족이라는 목적으로부터 단절된, 따라서 한계가 없는 욕망의 대상이 되어 스스로 목적이 되면서, 애초의 도구로서의 본성과 대립하게 된다. 이제 돈이 돈을 낳고, 돈은 상품이 된다. 맑스는 이를 C-M-C에서 M-C-M으로의 이행, 곧 자본으로서 화폐의 출현으로 이해한다(151). 전자에서 화폐는 중간항, 메존, 메소테스, 초연한 판관이지만, 후자에서 화폐는 그 자체로 이윤(ΔM = M‘ - M)을 얻기 위한 하나의 재화가 되며, 이 이윤은 시간으로부터 초연했던 화폐의 성격을 훼손한다. 곧 이윤이 화폐를 도구에서 행위자로 만들고, 이로 인해 시민들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도시는 멸망의 위험에 처한다(152).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맑스로 이어지는 이 전통과 단절한 것이 짐멜의 돈의 철학(1900)이다. 화폐는 자유를 실현하는 도구(507)로서, 화폐경제가 도래함으로써 특정 장소나 사물로부터 벗어나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510). 짐멜은 해방의 수단이 억압의 도구로 바뀔 수 있음을 알고 있지만, 전자를 중요시한다(513). 임금이라는 화폐의 매개는 막 시작된 자율성의 보증으로서,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더는 인격적으로 종속되지 않음을 뜻하였다(515). 화폐 유통이 현대사회에서 상호교류와 행동의 근본조건이 됨에 따라, 화폐는 사회화의 조건이 되었다. 짐멜은 화폐를 한편으로는 주체의 자율성 획득과, 다른 한편으로는 정의의 실행을 위한 틀로 기능하는 객관 세계의 구성이라는 양 측면을 지닌 한 과정의 핵심으로 파악하였다(520). 화폐는 통화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율성 증대에 있어서 상수이자, 구시대의 신분적 종속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오는 열쇠였던 것이다(528-9, 588-9). 아리스토텔레스는 화폐를 시민들 간의 필요를 정당하게 매개하는 정의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였던 반면, 짐멜은 근대의 역사주의적 세계관에 따라, 기술변동과 끝없는 확장 운동의 틀 안에 화폐를 자리매김하고 자유의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화폐의 긍정적 힘, 곧 정의와 자유를 분석하였다.

 

시장교환을 매개하는 화폐는 이윤을 얻기 위해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나타난다(467-8). 여기에서 화폐는 일반적 등가물이다. 곧 화폐의 획득을 가능하게 하는 활동들은 모두 똑같이 취급되고, 화폐 앞에 거의 무한한 선택지가 펼쳐진다. 현금에 내재한 이 개방성에서 자유의 감각이 생기는 것이다(504). 에나프는 여기에서 미셸 세르의 논의에 의존한다. 세르는 현찰로서의 화폐를 조커혹은 비어 있는 요소라고 칭한다(506). 일반등가물로서 화폐는 텅 빈 매개체이자 완전히 가상적인 매개체로서, 아무리 큰 가치라도 표현할 수 있고, 어떤 욕망이나 정열도 포획하여 표현할 수 있다. 화폐는 어떤 종류의 가능성도 나타낼 수 있는 추상이며,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서 예외인 유일한 재화이다(588). 바로 이 무한한 번역 가능성 때문에 화폐는 욕망의 대상이 되면서 그 욕망을 무한하게 만들고, 이로부터 권력과 부패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 번역 가능성은 맑스로 하여금 화폐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 비판하게 하였지만, 짐멜로 하여금 자유의 근원으로서 화폐를 찬양하게 한 것이다.

 

3. 부채

부채는 3장 뒷부분(142-163)부터 다뤄져서, 4장 일부분(243)에 잠시 나왔다가 주로 6장에서 논의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 돈이 돈을 낳는 것을 부를 얻는 방식 중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며, 이를 자연에 어긋나는 생식이라고 비판한다(145). 이 관점은 기독교 초기의 교부들에게서도 조금은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지적하지 않은 주제, 곧 빚이 빚을 낳는 것이 문제시된다. 고리대금업 비판은 4세기 카이사레아의 성 바실리우스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명확한 형태를 띠게 되고, 중세(13세기경)에 이르러서 고리대금업은 대죄(mortal sin) 중 하나인 탐욕의 한 형태로 규정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156-8). 고리대금업자들은 시간을 판다. 곧 시간에 값을 매긴다. 서두에서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의 자리에 앎, 지식, 진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를 슬며시 이 시간이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시간은 신(초밤의 토마스) 또는 모든 피조물(오세르의 기욤)에게 속하는 것이므로, 고리대금업자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도둑질해 파는 것이다. 곧 그들은 신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준 우주적 선물인 시간의 전유를 통해 돈을 버는 자들이다. 공짜로 선물받은 것을 이익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것, 증여관계를 상업관계로 변형하는 고리대금은 상호 대갚음의 사회적이고 우주적인 사슬 전체를 깨뜨리고, 상호의존과 인정의 관계를 지배와 착취의 관계로 바꾸는 결과를 낳고, 자연 전체에 해를 입히는 것이다. 시간과 세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학자들의 관점은 상이하지만, 양자는 모두 고리대금업을 포함한 이윤추구 행위를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은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쇠퇴한다. 18세기 초의 정치경제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도시를 해체할 위험으로 간주했던 것을 시장 메커니즘의 해방을 위한 계기이자 새로운 기회로 상정한다. 고리대금업에 대한 신학적 저주도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줄어들고, 종교개혁 이후 칼뱅주의는 계약적인 교환의 확장과 완전히 도구화된 투자의 시간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등식, 시간=을 제시한다(163). 시간과 세계에 대한 재개념화는 이처럼 역사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 에나프는 자본주의 시대의 부채에 대해서 바로 말하지 않는 대신, 2부에서 여러 받고 주기에 대한 인류학적·철학적 논의들을 살펴본다. 이 중 부채는 선물, 희생, 은총 등에 공통분모(common denominator) 역할을 한다. “부채의 세계는 희생제의의 실천과 더불어 출현한다”(243, 253, 295, 298, 314-5, 6). 곧 부채는 신이 준 큰 선물, 곧 은총과 함께 등장한다. 신의 은총을 받은 인간은 채무자가 되고, 신 또는 조상에게 채무를 갚기 위한 노력이 희생 제의의 형태를 띤다(295, 298). 모스가 관심을 기울였던 선물 주기 역시 받았기 때문에 줘야 하고, 줌으로써만 자신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무, 죄의식, 양심의 가책이 모두 부채의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본 니체의 통찰은 훌륭하다. 그러나 에나프가 훌륭한 점은 니체의 이 통찰이 유대-그리스도교 바깥의 전통으로까지 확장될 수 없음을 인류학적·언어학적 연구를 통해 보여준다는 것이다(319-323). 그리고 그는 니체가 선물과 답례 영역의 호혜성의 상징적 의무와 상업적 교환 영역에서 빌린 것을 돌려줘야 한다는 법적 의무 양자를 혼동하였다고 지적한다. 또 고대 게르만 사회에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관행은 없었기 때문에 니체가 빚과 죄의 뜻이 함께 있다고 지적한 독일어 Schuld 역시 중세 초기에나 출현하였음을 분명히 힌다(322). 이로부터 에나프는 부채라는 용어를 상업적 교환과 계약에만 국한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금융적 부채보다 더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상징적 부채가 존재함을 주장한다. 또 금융적 부채도 상징적 차원을 지닐 수 있고, 이것이 니체를 매혹시켰다고 해석한다. 오늘날에는 반대로 피해에 대한 경제적 보상처럼 금융적 부채가 상징적 부채를 대체하고 있는데, 이와 동시에 상업적 교환에 의한 선물교환 관계의 주변화와 부채 감정의 감소가 수반되고 있다.

 

에나프는 상징적 부채를 응대(reply)의 빚, 예속(dependence)의 빚, 감사(gratitude)의 빚, 이렇게 세 유형으로 구분한다. 응대의 빚은 선물교환 관계처럼 증여와 답례가 끝없이 지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빚이라는 말 자체의 사용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속의 빚은 채권자에게는 이익을, 채무자에게는 손해를 지속적으로 축적시킴으로써 채무를 갚을 수 없을 때에는 노에로 만들어 버리는 상황이다. 감사의 빚은 사실상 응대이지만 그것은 어떤 제약도 없는 응대로서, 오직 받는 기쁨과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 표현되는 상황이다.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이 행복해하므로 기쁘다. 그 외의 것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일방적인 증여의 지속은 가장 교활한 형태의 빚으로 악화될 수 있다(325-330). 이러한 상징적 부채들은 무엇보다 어떤 불균형 상태의 현시이다. 채워져야 할 결여이며, 바로잡아야 하는 어떤 부족함이다. 그것은 회복되어야 할 피해라기보다는 바로잡아야 할 무질서의 표현이다. 따라서 부채는 세계의 질서와 연관되어 있다(353).

 

그러나 현대에서는 화폐가 부채를 없애는 보편적 도구가 됨에 따라 이 상징적 부채들은 점차 소멸되는 경향을 띤다(330). 현대에서는 빚으로 생활하다가 다시 빚을 얻어 빚을 갚을 수 있고, 빚을 내서 투자하기도 한다. 에나프는 이를 자본의 시간성이라고 부른다(368). 자본의 시간성의 등장은 위에서 살펴본 화폐의 자본화에 대한 맑스와 짐멜의 상반된 두 통찰과 포개진다. 이제 이전의 상징적 부채들에서 중요시되었던 균형의 회복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전에 부채는 안정된 우주를 전제하였고, 그것이 청산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전체의 균형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늘날 투자되는 부채는 항구적 운동 상태의 우주를 전제한다. 이러한 우주에서는 받은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끝없이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369).

 

에나프는 모더니티가 야기한 세 수준의 변화를 부채의 변화의 맥락으로 제시한다(371-2). 첫째, 평형 모델은 이제 항상성이 아니라, 신용과 금융부채의 동학이 창출하는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 볼 수 있듯 운동의 속성을 전제한다. 시간 자체가 판돈이 되는 것이다. 둘째, 화폐가 상징적 부채를 갚는 데 사용되었던 여러 재물과 재화들을 대체하였다. 모든 활동과 평가가 시장으로 편입됨에 따라, 돈이 고통, 생명, 범죄를 보상하는 일반적 대체물로 기능한다. 셋째, 모더니티는 이전의 형식적으로 평등한 개인들의 공동체 내에서의 의무와 연합을 무력화시키게 되었다.

 

4. 인정

책 전체에서 에나프는 의례화폐와 상업화폐, 선물교환과 유용품 교환, 상징적 부채와 금융적 부채가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양자를 진화 과정의 선후 국면으로 이해한 학자들을 비판한다. 자본의 시간성 안에 존재한 해석자들은 그 바깥에 존재하는 부적, 귀중품, 선물을 화폐와 상품의 조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모스도 선물교환이 상업적 교환과 완전히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526). 양자는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어떻게? 상업적 교환에서 중요한 것은 등가적인 사물이지만, 선물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에 남겨져 있는 증여자의 어떤 인격성이다. “선물을 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이다”(205). 이 선물은 바로 유대를 강화시키는 재화”(231)이다. 시장은 친구와 낯선이를 차별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참여자들 간에 사회적 유대를 창출하지 않는다(237, 592). 법은 시민을 공적으로 인정하지만, 타인을 한 사람으로 인정하도록 이끌지는 못한다. 에나프는 우리 사회에는 한 쪽에는 법과 시장질서가 다른 한 쪽에는 상호인격적인 선물교환 간의 분업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마 이 양자의 점이지대가 상당히 넓게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이 집단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 처음부터 인정이 보장된 유대 바깥에 있는 타자, 우리의 일상 공간 안에 들어온 우리가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에나프는 여기에서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에서 제기한 문제와 답을 수용한다. 타자는 누구인가? 타자는 순수한 사건이다. 그는 언제나 다른 곳에서, 예기치 않게, 불시에 온다. “절대적인 새로움, 그것이 타자이다”(595). 타자의 출현 자체로 나는 채무자가 된다. 타자가 나에게 무조건적인 인정을 요구하는 만큼, 윤리적인 요구는 타자로부터 연원한다.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윤리적 관계는 도덕적 증여, 타자를 향한 친절이 아니라, 타자를 그의 절대적 타자성 속에서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자본의 시간성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가격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 타자와 함께 존재하는 환대의 공간에서 인정받음으로써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성, 이것이야말로 삶 그 자체이고,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책의 결말에서 에나프는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에 나오는 미스 아멜리아의 카페 분위기를 전한다. 일상의 삶의 비루함을 잊게 해주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존엄성을 되찾는다.

 

5. 감상

이질적인 재료들을 모아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내는 저자의 관점의 독특성은 무엇일까? 저자 에나프는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따라서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사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쓴 철학사를 읽다 보면, 보통 두 가지 감정이 든다. [많은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철학사를 본인의 관심에 따라 정리했겠지만, 여기서 그 철학사를 쓴 철학자들로 염두에 둔 이들은 들뢰즈, 하버마스, 라투르(?)이다.] 첫째, 철학에 대해 과문한 탓이겠지만, 그들이 다루는 철학의 선배들은 이름을 들어보았어도 또는 읽어본 적이 있어도 내가 아는 내용과는 괴리가 있으며, 내가 안다 생각한 것은 기껏해야 새발의 피일 뿐이었다는 무지의 자각이다. 둘째, 그들의 철학사는 끊임없이 한 텍스트에서 다른 텍스트로 이동할 뿐, 텍스트들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이한 역사적 맥락을 주변화함으로써 철학 비전공자들에게 일종의 진입장벽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 난점 때문에 그 철학사를 쓴 저자의 논의에 대해서도 역시 무지함을 깨닫는다. 무지의 자각이 겸손과 알고 싶다는 오기라는 효과를 가져오면 좋으련만, 보통의 경우는 그 이름을 다시 들었을 때, ‘, 그 어려운 말해서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스스로 멀리하게 된다. 그 저자의 작업 말고도 우리는 읽어야 하고 읽고 싶은 책들이 넘쳐나기 때문이고, 그 책들도 죽을 때까지 다 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내 철학사 독서 경험을 넘어서게 해주었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듯, 진리의 척도 문제로부터 시작한 그의 연구는 스승에게는 선물로 존경을 표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을 전기로 예기치 않게 증여라는 인류학적 주제로 넘어가서, 그 증여 안에는 집단 간, 개인 간 인정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6-8). 그리고 이 책은 출판 이후 엄청난 각광을 받게 되고, 여러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 책에 대한 논쟁을 담은 책으로는 악셀 호네트 등이 참여한 베스텐트 한국판 2012가 번역되었다. 저자의 다른 책들, 폴 리쾨르, 아마르티아 센 등과의 논쟁들, 그리고 저자가 의지하고 있는 미셸 세르의 주요 저작들도 한국어로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좋은 책을 읽었는데, 정리하기 정말 힘들었다. 이 책의 끝맺음은 무척 감동적이다. 내게도 미스 아멜리아의 카페 같은 곳이 있다. 옷매무새를 고칠 정성은 없지만, 오늘은 거기 가서 한 잔 해야 하겠다.

 

6. 번역

번역은 별로 좋지 않다. 불어를 못하므로 제대로 평가하지는 못하겠지만, 저자의 학제횡단적 연구를 역자의 실력으로 따라잡기 힘들었던 것 같다. 역자 후기를 보면, 한국말은 잘 하시는데, 번역 실력은 별로 같다. 똑같은 개념이 서로 다른 한국말로 번역되고(: archaic money), “단편으로 번역되어야 할 fragment입자로 번역되고, 수식어를 엉뚱한 데다 갖다 붙이고, 불필요하게 끊은 문장과 불필요하게 붙인 문장들이 너무 많다.

 

 

더 읽고 싶은 책

악셀 호네트 외. 베스텐트 한국판 2012(문성훈 외 옮김, 사월의책)

카슨 매컬러스. 슬픈 카페의 노래(장영희 옮김,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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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의 진화
홍성욱 지음, 박한나 그림 / 김영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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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로 들여오는 자연과 그 실험실에서 연구의 결과 나가는 자연은 같은 것이 아님을 역사적으로 잘 보여주는 책. 지은이, 그린이, 출판사 제작자 모두가 공들인 노력이 돋보이는 훌륭한 콜래버레이션의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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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의 진화
홍성욱 지음, 박한나 그림 / 김영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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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에 책 한 권을 본 것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다. 곰곰 생각해보니 아마도 82년생 김지영』이 마지막였던 것 같다. 그렇다. 이 책은 내가 보통 보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20대 말부터 에세이나 소설을 잘 안 읽게 되었다. 가끔 보게 되어도 사지 않았다. 내게는 훨씬 중요한 다른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나는 책 한 권을 갖고 몇 달을 씨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다른 중요한 일이 생기거나, 다른 읽을거리가 생겨서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보통 잘 읽지 않는 주제의 책였지만, 이 책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읽었다. 이 책 독서의 목적은 보름 동안 씨름했던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특히 그 책에 나오는 보일과 홉스의 논쟁과 대조에 관해 좀더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힘들게 읽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직 많은 라투르의 그 책의 배경을 좀더 알고 싶었다. 이 책 『실험실의 진화』의 5-8장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2장의 훌륭한 입문서이다. 오늘 하루의 독서로 이 목적을 이룬 내게 이 책은 분명히 유익했다. 라투르라는 힘든 산을 오르다 쉬고 있는데, 그 산에 먼저 올랐다가 내려오는 사람이 하는 "조금만 더 힘내면 된다"는 인사 같았다. 하지만 턱까지 차는 숨을 내쉬며 산을 기다시피 오르는 사람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 말이 주는 기대가 독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화", "매개" 등 라투르 특유의 낯선 개념 없이 라투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잘 전해주고 있다. 


진공은 발견된 것인가, 발명된 것인가? 그것은 자연인가 인공인가? 이런 이분법이 무의미해지는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 또 그 과학을 만들고 있는 공간인 실험실이 이 책의 대상이다. 곧 라투르가 "자연/사회의 대분할"이라고 칭한 것이 과학 활동의 결과이지, 그 전에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아주 쉬운 언어로 밝히고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자연의 일부를 실험실로 들여왔는가, 또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하이브리드들이 생산되고 증식되면서, 결국 마치 저 밖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자연"이라는 결과를 생산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 번째 유익함은 이 책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권리 옹호』의 저자 매리 울스턴크래프트라든가 『마르크스의 생태학』에서 맑스의 물질대사 균열 이론에 영감을 주었던 유스투스 폰 리비히 같은 이들이 잠시지만 얼굴을 비춰 반가웠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짧아 아쉽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관심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연금술이나 실험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만을 가진 이들에게도 이 책은 매우 유익할 것 같다. 그들이 흰 가운을 입고 실험을 해본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들을 거리를 둔 채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들을 잘 알게 되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인류학자의 시선일텐데, 이 책은 그 시선의 온당함과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글도 쉽게 쓰여져 있지만, 읽는 내내 재미있었는데, 세 가지 점이 좋았다. 일단 책 제본이 마음에 들었다. 실로 된 제본이 책 등에서 장이 분리될 위험 없이, 그리고 두 페이지에 걸쳐 있는 삽화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 소소한 것일 수도 있는데, 책에서 언급되는 명화들이 실리지 않고 QR 코드로 찍어 보게 되었는데, 이것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셋째, 삽화가 정말 훌륭하다. 나는 "그린이의 말"이 실려 있는 책은 처음 본 것 같은데, 거기에 실린 그린이 박한나의 꼼꼼함과 정성에 격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래서 지은이와 그린이 두 분의 공동저작의 속편을 기대한다.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린이의 다음 작업들이 몹시 기대된다.

과학자는 자연 전체를 실험실로 들여올 수 없다. 실험실로 가지고 들어오기 위해서는 자연을 일부만 추출하거나 변형해야 한다. - P64

해킹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의 핵심 주장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실험에는 (이론과 무관한) 그 자체의 삶이 있다‘는 것이다. ... 해킹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실험은 대부분 이론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 해킹은 실험을 ‘자연을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 해킹의 책이 나오면서 실험의 역할은 이론을 검증함으로써 이론의 발전을 보조하는 것에서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바뀌었다.그렇지만 무시되었던 실험을 복권해 ‘실험으로의 전환‘을 촉발한 해킹도 실험이 진행되는 공간인 실험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해킹은 자신이 분석한 여러 실험을 실험실이라는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이 아니라 마치 추상적인 공간에서 일어난 일처럼 기술했다. - P68

라투르는 ... 병역 의무 대신에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의 대도시 아비장에 있던 프랑스 평화봉사단 근무를 자원했다. 이때 라투르는 아비장의 프랑스 기관에서 일하던 백인 상급자를 지역의 흑인으로 대체했을 때 생길 수 잇는 문제를 연구하는 데 참여했다. ... 당시 아비장의 프랑스인 학교에서는 흑인 학생들이 ‘아프리카인의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기계공학에서 쓰는 3차원 제도 도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평하던 교사들이 있었따. ... 그런데 흑인 학생들을 인터뷰한 라투르에 따르면 이들이 제도 도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엔진 같은 기계를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프리카인의 심성‘과는 상관이 없었다. ... 그는 이 초기 연구에서 전문성이나 능력이라고 부르는 역량은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일종의 네트워크, 혹은 링크와 비슷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나중에 이런 생각을 과학에도 적용한다. - P74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가설이나 주장 수준에서 확고한 사실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다른 과학자의 연구, 특히 경쟁자의 연구는 사실 수준에서 가설 수준으로 낮추려고 한다. 라투르는 확고한 사실이 된 과학 지식을 ‘블랙박스‘라고 부른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지고 있었떤 링크들이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사실 하나만 패키지처럼 남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론 다른 과학자들도 그 가실을 받아들일 뿐, 블랙박스의 속을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이렇게 블랙박스가 된 사실들은 ‘만들어진 과학‘이다. 과학자가 과학철학자들이 합리적, 객관적, 보편적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은 이런 것이다. 반면에 실험실은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을 볼 수 있는 장소이다.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히다. 사실은 아직 주장이나 가설 단계에 있고, 논쟁과 토론이 오가고, 실험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한다. - P81

우리는 보통 과학자가 사실을 발견한다고 생각하지만, 라투르에 의하면 과학적 사실은 이런 이종의 요소들이 얽힌 네트워크가 공고해지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과학‘에서 과학적 논쟁의 승자와 패자는 자연이라는 실재가 정한다. 승자는 자연에 잘 들어맞는 이론을 제창했꼬, 패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승패가 갈린다. 반면에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에서는 과학 논쟁이 종결되면서 승자의 이론이 자연의 실재에 부합하는 것으로 평가되기 시작한다. 자연이 논쟁을 종결한 것은 아니지만, 선후 ㅗ간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연에 의해 논쟁이 종결됐다고 믿는다. 라투르에 의하면 ‘만들어진 과학‘과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이라는 과학의 두 모습은 마치 두 얼굴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야누스와 비슷하다. - P82

파스퇴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을 배양해서 페트리접시 위에서 세균 군체(colony)를 만들었다. 이렇게 세균을 눈에 보이도록 만들고 나니, 이를 약화시키기 위한 여러 방법을 도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파스퇴르는 무서운 세균을 길들일 수 있게 됐는데, 이는 오직 그의 실험실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즉 파스퇴르의 실험실에서는 파스퇴르가 세균보다 강했다. 실험실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힘의 역전이 일어나는 공간이었따. - P91

사회학자들은 권력이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나 권력 기관, 규율 같은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데 반해 라투르는 백신이나 표준저항 같은 인공물에 주목한 것이다. 인간은 백신과 연합하면서 과거에는 없었던 인간, 즉 특정한 세균에 항체를 가진 인간으로 변한다. 세균은 백신이 되면서 인간을 죽이는 존재에서 인간을 살리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이렇게 인간과 세균의 새로운 연합을 만들어내는 곳이 바로 실험실이었다. 파스퇴르는 백신으로 프랑스를 실험실화하면서, 스스로 모든 프랑스인이 거쳐가야 하는 존재로 거듭났다.
실험실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혼종 네트워크가 생겨나는 곳이다. 실험실에서 생긴 네트워크는 보통은 인공물 형태로 실험실 밖으로 나온다. 이것은 또 다른 인간-비인간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 성장하던 네트워크의 일부는 인공물 같은 형태로 블랙박스화된다. 이런 블랙박스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의무통과점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네트워크는 계속 성장한다. - P96

보일은 집에 있는 실험실에서 얻은 결과를 책이나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실험을 직접 보지 않았떤 다른 과학자들도 그 결과를 믿을 수 있었을까? ... 실험은 사적인 공간에서 보일이알는 개인이 수행한 작업이다. 반면에 그 결과는 공적인 공간에서, 과학자들이라는 집단을 대상으로 발표된다. 실험하고 결과를 발표하던 보일도 어느 시점에 이런 딜레마를 느꼈던 듯하다. ... 우선 그가 채택한 방법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실험을 지켜보았다고 기록하는 것이었따. 진공펌프의 유리구 속에 새를 넣고 공기를 빼자 새가 점차 기운을 잃다 죽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이 실험을 여러 번 반복했다. 왜 새가 죽는지가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기록할 때 숙녀와 신사들, 의사와 수학자들이 이 실험을 목격했다고 썼다. ... 보일은 독자에게 자신은 물론 이런 목격자들 모두가 젠틀맨이고, 따라서 거짓말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한 것이다. - P106

실패한 실험에 대한 이런 보고는 성공한 실험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었다. ... 보일의 진공 실험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분석한 과학사학자 스티븐 셰이핀은 보일의 스타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셰이핀은 보일이 자신의 실험을 목격했던 사람을 언급하고, 실험의 시시콜콜한 세부사항을 모두 적고, 실패한 실험까지 기록한 것은 자신의 실험이 믿을 만한 것이라는 인상을 독자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동료 과학자들은 보일의 논문이나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보일이 했던 실험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이 실험을 스스로 재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셰이핀은 이를 "가상의 목격"이라고 불렀다. 즉 보일의 산만한 스타일은 사적인 공간인 자신의 실험실에서 했던 실험 결과를 공적인 공간인 과학자 공동체가 수용하도록 만들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다. 셰이핀은 이런 장치를 "문필적 기술"이라고 불렀다. - P110

홉스는 보일이 철학적인 사유 없이 실험 결과를 곧이곧대로 믿은 점을 비판했다. 보일의 펌프는 명백하게 공기가 새고 있었고, 그런 펌프를 가지고 진공을 만든 뒤에 진공 때문에 새가 숨을 쉬지 못해서 죽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홉스는 진공펌프의 틈으로 공기가 급격하게 빨려 들어와서 유리구 속에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새가 이 공기의 소용돌이에 맞아서 죽었다는 새로운 설명을 제시했다. 홉스는 실험이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주장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 철학자였다. 그에게 확실한 진리는 실험이 아니라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일은 다시 실험을 통해 홉스를 논박했다. 보일은 새를 넣은 유리구 속에 작은 깃털 하나를 매달았다. 그리고 공기를 빼서 진공을 만들기 시작했다. 새는 괴로워서 헉헉대는데, 깃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홉스의 말대로 공기의 강한 소용돌이가 새를 죽인 것이었다면 깃털은 이런 소용돌이 때문에 요동을 쳤을 것이다. - P113

과학자는 자연을 실험실로 가지고 들어온다. 실험실로 들어온 자연은 단순해지고 반복 조작이 가능한 대상으로 변한다. 실험실에서 자연은 과학자의 통제하에 놓인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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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아우또노미아총서 20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 갈무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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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다른 차원을 보여줌. 소위 ˝근대˝가 은폐한 영역에서 수행된 매개 과정에 대한 신박한 조명. 한 유럽 지식인의 대칭적 인류학을 위한 노력. 라투르의 사유방식을 따라읽기가 쉽지는 않음. 원문이 어려워서 못한 번역이 아니라 어이없는 오역들도 상당히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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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 (1881년 봄-1882년 여름) 책세상 니체전집 1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안성찬.홍사현 옮김 / 책세상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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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학문을 언제쯤 차분히 볼 수 있을까?

다른 곳에서 인용된 부분들을 먼저 모아둔다.

363. ...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각각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성의 사랑의 조건 중 하나는 하나의 성이 다른 성에 대하여 같은 감정을, "사랑"에 대한 같은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이 이해하는 사랑은 지극히 명백하다. 아무런 고려나 유보를 하지 않는 영육의 완전한 헌신(복종뿐만 아니라), 단서나 조건과 연결된 헌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수치와 공포를 느끼는 그런 헌신이 여성의 사랑이다. 이처럼 조건이 없다는 점에서 여성의 사랑은 신앙이다: 여성은 그 외의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 남성은 여성을 사랑할 때 바로 이러한 사랑을 원하며, 따라서 그 자신은 여성적인 사랑의 전제 조건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완전한 헌신에 대한 요구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남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 그가 남성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처럼 사랑하는 남성은 노예가 된다.
-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제12장 처음 - P362

381. ...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나의 경우는 나의 무지를 통해서든 나의 활발한 기질을 통해서든 그대들에게 이해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어떤 문제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것에 재빨리 다가가야 한다고 나의 활발함이 아무리 강요할지라도. 나는 심오한 문제들을 다룰 때면 차가운 물에 들어갈 때처럼 - 빨리 들어갔다가 빨리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충분히 깊은 곳까지 내려갈 수 없다고 믿는 것은 물을 두려워하는 자나 차가운 물을 싫어하는 자들의 미신이다.: 그들은 아무런 경험도 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오, 몹시 차가운 것은 움직임을 빠르게 한다! -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제1장 끝부분 - P390

290.
한 가지가 필요하다. - 자신의 성격에 "樣式을 부여하는 것"은 위대하고 희귀한 예술이다. To "give style" to one‘s character - a great and rare art!
이것을 실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이 지닌 힘과 약점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을 조망하여, 일체의 요소가 예술과 이성으로 보이고 약점조차 눈을 황홀하게 할 때까지, 그것을 예술적 계획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 M. Foucualt, "On the Genealogy of Ethics" in _Ethics, EWF_ Vol. 1, p. 262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서우석 역, 나남), p. 333.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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