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와 목자 : 푸코와 파레시아
나카야마 겐 지음, 전혜리 옮김 / 그린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Synousia

"함께 사는 것", "공재(共在, 함께 있음)", "사제동행" 등으로 번역된다.


나는 수누지아(sunousia)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리스어의 영어 표기이고, 아마 "쉰우시아(synousia)"가 맞는 한국어 표기법인 것 같다. 플라톤의 『편지들』 중 「일곱째 편지」에서 논의되었고, 푸코는 이를 1982~83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자기와 타인의 통치1983년 2월 16일 강의에서 다뤘다.    


가장 직접적인 정의는 아래 밑줄긋기의 174쪽, 각주 31번 참조.

나머지는 이 대화의 맥락.


[신플라톤주의 전통(플로티노스, 포르피리오스, 아우구스티누스)과 달리], 플라톤은 이러한 신적인 것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더불어 진실을 향한 길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 P121

플라톤은 ... 대화의 길, 디알렉티케의 길만이 진실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이 사랑의 변증법에서의 세번째 단계인데, 젊은이나 사랑하는 자나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상대와 진실을 더불어 사랑하는 주체로서 행동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에게 젊은이와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 모두가 주체가 되어 진실에 이르는 길을 나아가는 비의를 가르친다. ...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진실에 이르는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가 진실에 이르는 길에 스스로 참가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그것이 젊은이와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의 ‘공동생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P124

푸코는 플라톤이 이 대화편들에서 사랑의 문제 속에 진실의 문제를 근본적인 문제로서 도입했다고 지적한다.
<향연>과 <파이드로스>는 상대방의 자유와 ‘환심을 사려는 행위‘에 맞추어진 만들어진 연애술로부터 주체의 금욕과 진리[진실]를 향한 공동의 접근에 관심의 초점이 놓여진 연애술로의 이행을 보여 준다.[<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p. 278]

푸코는 이 자기 제어 자체가 윤리적 파레시아의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곱째 편지>에서는 진실이 책에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밝혀져 있다. 함께 사는 삶에서, 진실은 영혼 속에 머무른다. 진실은 말해지는 말 속에, "영혼 속에 쓰인 말"(<파이드로스>, 276a)로서만 나타난다.
플라톤은 진실을 위한 존재론적 조건이 충족되는 최고의 장이 에로스의 장이라 여기고 있다. 이 에로스는 성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신체적 관계를 포기하고 타자를 진심으로 배려함으로써 타자와 함께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P125

서로 바라보는 행위 속에서 사람은 주체임과 동시에 객체가 된다. ... 나를 보는 눈은 내가 보는 눈이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소크라테스는 제안한다. 바라보는 상대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이다.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가, 그리고 자신의 얼굴에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눈동자가 비춰지고 있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133a).

여기서 주체인 눈동자는 살아있는 인간 안에서 객체인 자기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자기‘를 인식하려 한다면 자기 자신의 영혼으로 다른 영혼을 들여다 보고 거기서 자기를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말, 로고스이다. "그러니까 나와 너의 말(로고스)를 사용해서 혼으로 혼을 상대로 서로 교제"(130d)해야 한다.
영혼이 자기이고 주체라는 것은 영혼이 타자의 영혼과 ‘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의 영혼을 개입시키지 않고서는, 영혼은 자기를 인식할 수 없다. - P150

푸코는 플라톤이 철학과 그 외 학문간의 차이를 중시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다른 학문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이것을 암기하여 자신의 지식으로 삼는 것이 습득의 길이다. 이에 비해 철학은 실천(프라그마)이며 공동생활(쉰우시아스)이라 여겨지고 있다. 푸코는 이 쉰우시아스라는 표현이, 함께 사는 것이자 거의 성적인 관계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는 데 주목한다. (각주 31: 푸코의 1983년 2월 16일 강의. ‘함께 사는 것‘을 원래 의미로 갖는 쉰우시아는, 보통 사회적 교류를 의미하지만 성교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1269c에서 ‘남성 상호 간의 교섭‘, 즉 소년에 대한 남성의 ‘쉰우시아‘라는 말을 사용하며, 플라톤은 <향연>, 206c에서 ‘남녀의 성교‘에 ‘쉰우시아‘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진리는 이 생활 속에서 램프의 불이 타는 것처럼 영혼 속에서 빛나며, 쓴다는 행위도 이 공동생활의 일부로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 P174

철학에서의 진리 개념은 책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것은 푸코가 이제까지 다루어 온 파레시아의 실천적 개념과 공통되는 요소이다. - P174

플라톤은 철학 행위가 진리를 보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실천으로서 나타냈다. 이 실천에서 진리는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영혼 속에 머무르는데, 이것은 친구와의 대화에서, 말 속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했던 대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영혼 속에 그 진리의 램프를 타오르게 하기 위한 행위이며 그 자체가 진리를 말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진리가 진리로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거의 언제나 진리의 부재를 보이는 것으로 대화를 끝내곤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는, 이를테면 ‘용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리‘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푸코가 주목하는 바는, 플라톤이 이 서신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친구와의 대화라는 실천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자로 쓰여진 책에서가 아니라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진리가, 자기와 타자의 진리가 살 수 있는 것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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