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헤드는 "구체적인 것"을 "포착의 합생"("the concrete" as "a concrescence of prehensions")으로 기술했다. 그는 "구체적인 것"을 "실제의 사건"으로 이해했다. 실재(Reality)는 능동태 동사이며, 모든 명사는 문어보다 발이 더 많이 달린 동명사처럼 보인다. 존재자들은 서로를 향해 뻗어나가며 "포착"이나 파악을 통해 서로와 자신을 구성한다. 모든 존재자는 관계에 선행해 존재하지 않는다. "포착"에는 결과가 있다. 세계는 운동 속의 매듭이다. 생물학적 결정론과 문화적 결정론은 모두 잘못된 곳에서 구체성을 구성한 사례들이다. "자연"이나 "문화"와 같은 잠정적이고 부분적인 추상 범주를 세계로 착각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잠재적 결과를 선행하는 기초로 오해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미리 구성된 주체나 객체는 없으며, 단일한 근원이나 단일한 행위자, 최종 목적과 같은 것은 없다. 주디스 버틀러의 표현을 빌리면 "잠정적 기초"밖에 없다. - P122
기호와 육신, 이야기와 사실. 내가 태어난 집에서는 이 생산적인(generative) 커플이 별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둘은 항상 왈왈거리면서도 떨어질 줄 몰랐다. 성인이 된 내 안에서 문화와 자연이 내파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내파가, 명사로 유통되지만 사실상 동사인 반려종을 말하거나 그 관계를 직접 살아갈 때보다 더 큰 폭발력을 발휘한 적은 없다. 요한 복음의 "말씀은 육신이 되었다"는 말의 뜻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기사 마감 5분 전, 베어스가 2점차로 지고 있는 9회말 2사 만루 투 스트라이크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P138
어원학적으로 팩트(사실)는 이미 이루어진 수행, 활동, 행위, 간단히 말해 업적을 일컫는다. 팩트는 과거분사이며, 이미 한 것, 끝난 것, 고정된 것, 입증된 것, 수행된 것, 성취된 것을 뜻한다. 팩트들은 마감을 지켰기 때문에 다음날 신문에 실린다. 픽션(서구)은 어원학적으로 팩트와 매우 가깝지만, 품사와 시제가 다르다. 픽션은 팩트와 마찬가지로 활동을 일컫지만 가장이나 속임수뿐 아니라 형태를 만들고 구성하며 발명해내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픽션은 현재분사에서 유래했고, 진행 중이며, 아직 문제로 남아 있고, 마감되지 않았으며, 사실과 어긋날 가능성이 남아 있고, 아직 진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만간 알게 될 것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동물들과 함께 살고, 그들/우리의 이야기에 거주하면서 관계의 진실을 말하려 애쓰는 것, 진행 중인 역사 속에서 공존하는 것. 이게 바로 반려종의 일이며 반려종에게 가능한 최소 분석단위는 "관계"다. - P139
trope: 수사 -> 비유 figure of speech: 문형 -> 비유(어) - P140
141: 5: 방향이 -> 의도가 141: 13: 취향도 -> 흥미(관심)도
육신과 기표, 몸과 말, 이야기와 세계, 이 모두가 자연문화 속에서 결합된다. Flesh and signifier, bodies and words, stories and worlds: these are joined in naturecultures. 메타플라즘은 실수나 헛디딤, 몸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비유를 의미할 수 있다. ... 의미의 전도, 소통 중인 신체들 간의 자리 이동, 개형, 개조, 진실을 말하는 방향 선회. 나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들만 말한다. 컹. Inverting meanings; transposing the body of communication; remolding, remodeling; swervings that tell the truth: I tell stories about stories, all the way down - Woof. - P141
나는 <반려종 선언>에서 소중한 타자의 관계 맺음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짝을 이루는 이들은 이 관계를 통해 육체와 기호 모두에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다. 뒤에 나오는 진화, 사랑, 훈련, 종류 및 품종과 관련된 이야기는 인간이 이 행성에 자신과 함께 출현한 무수히 많은 종과 더불어 시간, 신체, 공간의 그 모든 척도 속에서 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볼 때 도움이 된다. 내가 제시하는 설명은 체계적인 형태로 되어 있지는 않다. 그 대신 색다르고 시사적이며 신중하기보다는 과격하고, 명석판명한 가정보다는 우연한 근거(contingent foundations)를 따른다. 여기서 개는 반려종이 이루는 거대한 세계에서는 하나의 행위자에 불과하다. - P146
이 선언이나 자연문화의 삶에서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마릴린 스트랜선이 말한 "부분적 연결"을 찾고 있다. 이와 같은 연결 속에서는 자기 확실성이라는 신의 속임수나 불사의 성체(deathless communion)을 택할 수 없고 반직관적인 기하학 및 부적합한 번역이 필요하다. - P147
3행 이후: 인간주의적 기술 예찬론자들은 가축화(가축으로 길들이기)를 남성 한부모의 혼자 낳기의 전형적인 행위(the paradigmatic act of masculine, single-parent self-birthing)로 묘사하는데, 이는 마치 남성이 그의 도구를 발명(창조)하는 것처럼, 남성이 가축화를 통해 자신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가축은 인간의 의도를 그 몸 안에 체현한 것, 곧 자위행위가 개의 몸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남성은 (자유로운) 늑대를 잡아 (복종하는) 개를 만들고 그로써 문명의 가능성을 수립했다. 그렇다면 헤겔과 프로이트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견이라고 보면 될까? 개를, 길들인 동식물 전체의 상징으로 만들고 인간의 의도에 복종하게 만들되, 점차 진보할 것인지 타락할 것인지는 각자의 취향에 맡기면 될 것이다. 심층생태론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문화로 추락하기 전에 있었다는 야생의 이름으로 혐오하기 위해 기꺼이 믿는다. - P150
6행: 늑대를 동경하던 개들 -> 개가 되고 싶었던 늑대들 (wolf-wannabe-dogs) - P152
개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생물학적인 것으로 보면서 목축 및 농경 사회의 출현처럼 인간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는 문화적 변화라고 본 뒤 공진화 사례에서 제외하는 것은 실수다. 나는 인간 유전체가 적어도 개와 같은 반려종이 감염되는 병균에서 유래한 분자적 기록을 매우 많이 간직하고 있으리라고 추측한다. 자연문화에서 면역계는 사소한 부분이 아니다. 사람을 포함한 유기체가 생명을 유지할 가능성을 결정하고 함께 살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규정하기 때문이다. 인간, 돼지, 가금류, 바이러스 사이에 공진화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인플루엔자의 역사를 상상하기 힘들다. - P155
네덜란드의 환경여성주의자인 바버라 노스케는 고기를 생산하는 "동물-산업복합체"의 스캔들로 우리의 시선을 돌린 사람이기도 한데, 동물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SF에 나오는 "다른 세계"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애컬리는 튤립의 중요한 타자성/차이들(significant otherness)을 흔들림 없이 지지했던 경험을 곱씹으며 노스케의 주장을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튤립은 중요했고, 바로 이 점이 둘 모두를 바뀌게 했다. 애컬리 역시 튤립에게 중요했다. 이 중요성은 언어적이든 아니든 모든 형태의 기호학적 실천에 특유한 헛디딤을 통해서만 읽어낼 수 있다. 오인(misrecognition)은 극히 드물게 발생하는 적중의 순간만큼 중요했다. 애컬리의 이야기에는 몸으로 부대끼는 세속적 사랑에서 경험하기 마련인 것, 즉 육감적(fleshly)이면서도 의미를 생산하는 세부 사항이 매우 많이 나온다. - P160
남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신경증적 환상이다. 반면, 골치 아픈 조건들을 맞춰가면서 사랑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친밀한 타자를 더 잘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별수없이 겪게 되는 우습고도 비극적인 실수들은, 그 타자가 동물이건 인간이건 또한 무생물이건 간에 내 존경심을 자아낸다. 애컬리와 튤립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 P161
헌과 개릿은 한 꺼풀만 벗기면 피로 맺어진 자매다. 이 근친 교배의 핵심은 두 사람 모두 개가 자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핀다는 점이다. ... 방법에 관한 한, 행동주의 조련사와 헌 사이에 중요한 견해차가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하지만 대부분의 반려종 관계에서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넘어 이루어지는 "소통"이다. 상황 속의 부분적 연결이 중요하며 (Situated partial connection is what matters;) 그 결과로 개와 인간이 실뜨기 놀이(game of cat‘s cradle) 속에서 함께 출현한다. 놀이의 이름은 존중이다. 좋은 조련사는 중요한 타자성(significant otherness)의 기호 아래 반려종으로 관계 맺는 훈련을 한다. - P176
아담은 범주 노동으로 일을 간편하게 처리했다. 대꾸가 돌아올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고 그를 그로 만든 것은 개(dog)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 그대로 그를 창조한 신(God)이었다. ... 그 모든 말들은 철학적으로 미심쩍을 수는 있어도 누군가가 자신과 함께 일하는 동물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계속 의식하기 위해서는 이 말들이 필요하다.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누구인가는 영원한 질문으로 남을 것이다. - P177
핵심은 타자나 자신에 대해 알 수 없지만, 관계 안에서 누구와 무엇이 출현하고 있는지를 항상 질문하는 것이다. [The recognition that one cannot know the other or the self, but must ask in respect for all of time who and what are emerging in relationship is the key. -> 타자나 자신을 알 수 없지만, 관계 안에서 누가 그리고 무엇이 출현(창발)하는가에 대해 언제나 존중심을 갖고 물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종과 관계 없이 진정한 사랑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다. - P177
신학자들은 "부정의 방식으로 신을 아는 것"(the "negative way of knowing" God)의 힘을 이야기한다. 존재하는 것 또는 존재하는 자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서는 유한한 존재란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곧 [온전한 존재] 그 자신의 자아의 투사물이 아님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한 "부정적인" 앎의 종류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나는 개에 대한 앎, 특히 훈련 같은 하나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면서 개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을 이해할 때 이 신학적 고려가 설득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 관계가 사랑이라고 부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종 안팎에서 맺어진 모든 윤리적 관계는 관계-속의-타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께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 - P178
반려 "동물의 행복": 노력, 일, 가능성의 충족을 통해 얻는 만족의 능력. ... 반려동물의 다양한 소질은 훈련이라는 관계적인 일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헌(Hearne 1991)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이와 같은 행복은 근본적으로 "적중(getting it right)", 곧 성취를 통한 만족을 위해 노력하는 윤리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개와 개를 다루는 사람은 훈련의 노동 속에서 함께 행복을 발견한다. 이것은 창발한 자연문화의 사례다.
이와 같은 유형의 행복은 탁월함을 열망하는 것, 범주적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존재자가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탁월함에 도달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관련된다. 모든 동물이 비슷한 것은 아니다. 각 동물이 지닌 구체성 - 종류와 개체의 구체성 -이 중요하다. 추구하는 행복의 구체성이 중요하며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창발해야 한다. 헌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제퍼슨적인 행복을, 짝을 이룬 유한한 존재로서 동물-인간이 번영하는 것으로 번역해낸다. - P180
관례적인 인본주의는 사이보그 이후 탈식민의 세계에서 소멸했지만, 제퍼슨적 견본주의는 아직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헌은 토머스 제퍼슨을 개집으로 불러들이면서 분리된 채 앞서 존재하는 범주적 정체성이 아니라 헌신적인 관계에 권리의 기원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개는 훈련 과정에서 특정 인간에 대한 "권리"를 확보한다. 개와 인간은 관계를 통해 서로에 대한 "권리"를 구축한다. 이 권리는 존중, 배려, 반응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헌은 개 복종 훈련을 개가 인간에게 권리를 주장할 권력을 강화하는 장소로 서술했다. 자신이 키우는 개에게 진심으로 복종하기를 배우기란 주인에게 벅찬일이다(Learning to obey one‘s dog honestly is the daunting task of the owner). ... 이런 권리는 상호소유(reciprocal possession)에 기반한 것으로 해체되기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권리 요구는 파트너 모두의 삶을 바꾼다 - P181
다른 이와 나누는 애정, 헌신, 솜씨에 대한 열망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비키 헌이 말한 의미에서의 훈련 같은 애정 행위는, 연쇄를 이루며 창발한 다른 세계들을 배려하는 애정 어린 행위를 낳는다. 이것이 내 반려종 선언의 핵심이다. 나는 어질리티를 그 자체로 특정한 선이자 더 세속적일 수 있는 방편의 하나로 경험한다. 즉 좀 더 살만한 세계를 만드는, 모든 규모에 속한 소중한 타자성이 요구하는 바에 더 민감해지는 것이다. 늘 그렇듯, 문제는 세부에 있다. 연결 고리도 세부에 있다. ... - P191
훈육된 자발성(disciplined spontaneity)라는 모순어법을 목표로 ... 개와 조련사 모두가 활동을 익혀야 한다. 일관성 없는 세계에서 일관성을 충분히 지님으로써 육신 속에, 경주 속에, 코스 위에, 존중과 응답을 빚어내는 공동 존재의 춤에 참여하는 것이 과제다. 그리고 모든 척도에서, 모든 파트너와 함께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기억하는 것. - P193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역사적 자연문화를 통해 피레니즈와 오시 세계에서 백인 중산층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이 개들의 일로 유지되던 목축경제가 파괴한 초원 생태와 삶의 방식을 다시 상상하는 데 참여할 의무가, 아직 명쾌하게 규정되지는 않았어도 확실히 있다는 점을 나의 몸으로 느낀다. 나 같은 사람들은 함께 사는 개들을 통해 토착민의 주권, 목축 경제 및 생태적 생존, 육류 산업 복합체의 급진적 개혁, 인종 정의, 전쟁과 이주의 귀결, 기술문화의 제도와 맞닿게 된다. 헬렌 베란의 표현을 빌리면 "함께 잘 지내는 것(getting on together)"이 필요하다. "순종"인 카엔과 "잡종"인 롤런드, 그리고 내가 우리 서로를 만질 때, 우리는 우리를 있게 해준 개들 및 사람들과 연결된 관계를 우리의 육신 속에 체현한다. - P236
나와 땅을 함께 쓰는 이웃인 수전 코딜의 감각적인 그레이트 피레니즈인 윌렘을 쓰다듬을 때, 나는 애견 전시회 및 다국적 목축 경제뿐 아니라 새로운 서식지로 이주된 캐나다 회색 늑대, 경제적 가치가 높아진(??, upscale) 슬로바키아 곰, 국제 복원 생태학을 만지게 된다. 우리에게는 온전한 개(the whole dog) 못지않게 온전한 역사적 유산이 필요하다. 이 모두가 결국 온전한 반려종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색다른 일도 아니겠지만, 이와 같은 온전한 존재들(wholes)은 부분적 연결로 구성된 비유클리드적 매듭이다. 그러한 유산에 대해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그 안에 거주함으로써, 우리는 놀이가 선사하는 창조적 은총을 희망해볼 수 있다. - P236
이들이 즐기는 성적 유희는 생식으로 연결되는 이성애적 짝짓기 행동과는 무관하다. ... 여기서 우리는 순수한 다형적 도착성을 발견한다. ... 내게는 에로스처럼 보인다. 아가페는 분명 아니다. ... 카옌과 윌렘이 발산하는 젊음과 생기는, 정숙을 유도한다는 생식샘 절제술은 물론, 이성애가 재생산을 위한 것이라는 헤게모니를 우스운 것으로 만든다. ... 하지만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존재론적 안무다.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물려받은 몸과 마음의 역사로부터 빠져나와 발명해내고, 그들을 그들로 만들어주는 육체적인 동사로 다시 만들어낸, 생명력 가득한(vital) 놀이다. 이 게임을 발명한 것은 그들이다. 그리고 이 게임은 그들을 새로 만든다. 다시 한번, 메타플라즘. 우리는 이 중요한 말이 지닌 생물학적 맛을 언제나 다시 음미한다. 이 말은 필멸의 자연문화 속에 육신으로 만들어져 있다. - P238
인류세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해 생겨나고 있는 것은, 상황 속에서 복합적인 역사를 통해 구성된 행위의 그물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모습과는 다를 수 있고, 달랐을 수 있죠. 하지만 사람들은 말이 갖는 힘 때문에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종이 정말로 인간 본성에 맞춰 이런 일을 한다고 믿습니다. 이건 경험적으로 사실이 아니죠. - P293
저더러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자본세(Capitalocene)를 고르겠네요.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단어죠. ... 자본세에 대한 대응은 살과 피 안에, 특정 상황에, 복잡한 역사들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체계적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
자본주의는 단순히 종의 행위가 아닙니다. ... 자본주의는 절대 하나의 사물이 아닙니다. 뭣보다도, 배우 복잡한 역사적 체계의 현상이죠. 시공간적으로 역사가 매우 다양하고 균일하지 않아요. 18세기 중엽과 증기기관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요. 플랜테이션 체계가 확실히 더 근본적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요 - P294
이 문제를 농경의 발명, 심지어는 플라이스토세 Pleistocene의 수렵인, 아니면 지구상 현생 인류 Homo Sapiens sapiens의 출현, 그런 것들과 동등하게 다루는 심층생태론자를 한편에 두고, 인간을 화석연료를 사용하며 내연기관을 쓰는 존재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다른 편에 두고, 인류세가 무엇인지 논쟁을 하게 만들 수는 없어요.
마르크스주의 정치생태학자인 제이슨 무어가 좋은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지구형성 요인으로서 자본주의의 복잡성은 15세기의 인도양 연안 무역 지대를 살펴보지 않으면 생각하기 시작할 수조차 없어요. 무역 지대와 부의 축적 지대, 플랜테이션 농법의 발명, 동식물과 미생물, 사람들의 이동, 그리고 16세기 강 연안의 삼림 파괴 같은 세계형성 과정들 말입니다. 인류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바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이분법적 시간 개념으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첫 문장조차 꺼낼 수가 없어요. - P295
무역 지대와 부의 축적 지대, 플랜테이션 농법의 발명, 동식물과 미생물, 사람들의 이동, 그리고 16세기 강 연안의 삼림 파괴 같은 세계형성 과정들 말입니다. 인류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바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이분법적 시간 개념으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첫 문장조차 꺼낼 수가 없어요. 지난 200년간에 관해 이야기하든가, 아니면, 아시잖아요, 종의 탄생 시기에 대해 말을 하든가. 그 다음 차례는 심층생태론을 지향하는 사람들과 화석연료 경제만 걱정하는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는 일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시공간의 복잡성이 잘못 설정되니까요. 이 점에서는 자본세의 개념이 낫습니다. - P296
그리고 자본세는 동물, 식물, 인간 - 그리고 미생물(왜냐면, 보세요, 자본의 역사와 관련해서 발효와 질병은 근본적이고 중요합니다. 발효 문제를 빼고 2차 대전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 들 중 어떤 집단이, 어쨌든 자본세에서의 행위자들은 최소한으로 말해도, 상황 속에 있는 식물, 동물, 인간, 미생물,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의 안팎을 가로지르는 다중적 층위의 기술들인 거죠. 아주 어설프게나마 자본세에 대해 생각을 해보면 인류세와는 아주 다른 배역들이 나오게 됩니다. - P296
유진 스토머와 파울 크뤼천은 탈색된 산호초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다가 암석, 물, 대기에 인간 활동에서 비롯된, 인간이 야기한 과정이 새겨진 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다음 차례로 지구물리학자들이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서 지층 형성과 관련된 값들이 새로운 지질시대를 명명하기에 충분한 수치인지 전문적이고 엄밀한 기준에 맞춰 판단합니다. 인류세는 백악기와 고제삼기를 가르는 K-Pg 경계(스콧 길버트)와 같은 경계 사건인가, 아니면 하나의 지질시대인가, 아니면 더 큰 지질학사적 범주인가?
우리가 나눠야 하는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빈대 잡다가 초가 삼간 태우지는 않을 겁니다. (So I don‘t want to toss out the baby with the bathwater, you know;) - P299
저는 인류세라는 용어가 본래 의도보다 너무 많은 걸 함축하기 때문에 차라리 그 말을 쓰지 않는 편이 나았으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용어를 그렇게 정한 마당에, 2016년에 조사위원회가 보고서를 내면 지질학자들이 인류세를 공식 용어로 채택했으면 좋겠네요. 주요 현안에서 시급성을 더 잘 짚어낼 뿐 아니라 이 담론적 물질성 안에서 작동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자본세가 강한 담론적 물질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실제로 연구하는 기관이 없지요. 미국에서는 자본주의를 언급할 수조차 없어요.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반역 행위로 받아들여지죠. 정말로, 웬만한 곳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에요! - P299
크리터는 생태계다.
지구상의 어떤 크리터들도 그 외부에 있지 않고, 크리터들은 그 자체가 생태계인 걸로 이해되고 있어요. 다른 것이 아닌, 특정 생태계의 건강을 증진하겠다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생태계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동료/반려자들이 여기 있어야 하고 누구는 있어서는 안 되는가? ... 핵심은 생명정치에 관한 한, 생태계 배치라는 이 문제가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생명 게임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끝. 다른 게임은 없어요. 개체 더하기 환경이 아니죠.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되고 역사적으로 역동적인 접촉 지대로 이루어진 생태계의 그물들만 존재합니다. ... 저는 가끔 이런 내작용적(intra-active)이고 회절하는(diffractive) 복잡성을 지질-생태-진화-발생-역사-기술-심리적 공제작 (GeoEcoEvoDevoHistoTechnoPsycho sympoiesis)이라고 부르죠! 이 계열은 자체적으로 펼쳐졌다 다시 접혀듭니다. - P307
DH: 나는 진흙으로 되어 있고, 그 진흙다움은 진행형입니다 (I am of the mud, the muddiness is ongoing). 세계되기(worlding), 공제작(sympoiesis) ... CW: 진창(the muddling) ... DH: 정말로, 저는 진창이에요. 그리고 진창 속에 있죠. 그래서 "진창 속에서 계속 되는대로 해나가기 (muddling along)"는 사유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거예요. 이렇게 우리가 기호학적 육신성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우로보로스, 곧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안에 있는 어떤 순간(계기, moment) 같은 거예요. 이 말은 요한의 "육신이 된 말씀"에 있는 신학적인 냄새 때문에 그 말을 피해서 대신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기호학적 육신성, 이 "물질적 기호학", 기호학적 물질, 그것의 분리불가능성을 일컫는 것이죠. - P345
우로보로스를 포함해 촉수를 뻗은 존재들로 가득한 진흙 속에서, 아니면 진창 속에서, 뱀은 언제나 자기 꼬리를 삼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완성의 형상으로 여겨질 수 있지요. ... 뱀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전체론(holism)의 형상으로 쓸 수가 없어요. 하지만 물질적 기호, 육체적 기호 작용이 부정의 방식과 만나는 특별한 형상으로 간주할 수 있죠. 우로보로스적인 성질과 같은 것이 있는데요, 나사에서 촬영한 지구 전체 사진이든, 살아 있는 지구에 관해 러브록이 주장한 가이아 가설의 변형(라투르가 설득력 있게 논의한 것처럼 잘못된 해석이죠)이든, 지구 전체의 형상을 그릴 수 없다는 걸 염두에 두게 되죠. 지구 전체는 어떤 형태로든 없어요. 더 오랜 전통을 따라도 마찬가지고, 우주 시대에 좀더 가까운 방식이어도 마찬가지고요. CW: 그래서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거군요. - P346
행위자-네트워크의 질문들과 관련해서는 둘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정말 많죠. 음, 기호학이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너무 환원적(reductive)이에요. ... 퍼스 전통의 기호학이죠. 사실 그 측면에서 브뤼노와 이자벨은 프래그머티즘의 유산에서 수렴합니다. 제 생각에 브뤼노는 상황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현재의 조합에서 생각하는 데 중요한 자원들 일부에 대해 저항감을 보였던 것 같아요. 푸코가 그 중 하나고, 맑스가 또 그렇죠. 페미니즘 전통 전체도 그렇지만 이제 변하는 모습이 보여요. 브뤼노는 페미니즘 사유는 훨씬 더 많이 인식하게 되었고 궁금해하지만, 그 성과물을 자신의 주장이나 형상화에 활용하는 건 아주 힘들어 했던 것 같아요. 이제 페미니즘 글들은 훨씬 더 많이 인용하지만, 막 실제로 사용하기 시작한 정도예요. 그런데 왜 그럴까요? 저는 그 사연 전체를 알지는 못해요. - P360
저는 브뤼노를 매우 가까운 친구이자 대화 상대로 생각합니다. 한때 브뤼노는 "부엌 싱크대 증후군"이라고 부른 것 때문에 저한테 몹시 화가 났어요. 제가 갖고 싶은 걸 모조리 다 집어넣어버리고 말았거든요! 하지만 브뤼노는 훨씬 신중하게 생각하죠! 저보다 진창에는 덜 빠져 있는 것 같네요. - P361
나의 툴루세는 필멸의 구성체가 서로에 대해, 서로와 함께 위태로운 관계에 있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회절하는 그물망의 그 모든 시간성, 특수성, 물질성으로 된 무수한 촉수들이 발산하는, 땅의, 지속적 힘의 카이노스(-세, -cene)입니다. 카이노스는 섬유질이 두텁게 뭉친 "현재"의 시간성으로, 고대의 것이며 아니기도 합니다. 크툴루세는 있었고, 지금 있으며, 다가올 현재입니다. 크툴루세는 끝없이 회절되는 시공간입니다. 이런 힘들은 모두 테라에서 솟아오릅니다. 이 힘들은 파괴적/생성적이며 쉽게 다룰 수 없습니다. 힘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매우 무서운 힘일지도 모릅니다. 그 재출현은 섬뜩한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건이 속한 장르는 희망이 아니고 도전적인 응답-능력, 책임일지도 모릅니다. 대지의 힘은 도발을 일삼는 어리석은 자들을 죽일 것입니다.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이 어리석은 자들의 영령은 끝을 모르는 파괴의 촉수에 갇힐 것입니다. - P363
지하에서 생성하고 파괴하는 이 힘들은 (라투르와 스텐저스의) 가이아의 킨입니다. 이 힘들은 어머니가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고 죽을 운명인 메두사, 뱀과 같은 고르곤입니다. 그들은 위를 올려다보는 자들, 스스로를 인류라 부르는 사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위를 올려다보는 자들은 방문하는 법,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법, 고통을 주지 않고 호기심을 추구하는 법을 전혀 모릅니다. 인류세에서 지하의 존재자들은 바다, 육지, 대기, 물에서 산업, 초이동, 자본화를 추구한 이들의 오만함이 야기한 이중의 죽음을 가속화하거나 그 과정에 가담할 수 있습니다. 인류세에, 촉수가 달린 이는 핵이며 탄소 섬유입니다. - P364
지하의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과 잡다하게 뒤섞인 채 더불어-되기를 해가는 인간 거주자들을 아우르며 땅에 속하는 모든 이들에게 스며들 수 있습니다. ... 이 모든 존재는 살고 죽습니다. .... 툴루세는 "홀로세"였고, 홀로세이며, 그 재출현 - 지속 - 으로 가득찬 것일 수 있습니다. 홀로세는 야생적이고, ... 언제나 진화하는 생명체들에게는 늘 풍족합니다. 위험하고 뒤죽박죽인 툴루세는 우리의 고향 세계, 테라의 시간성입니다. - P365
회복, 부분적 연결, 재출현에 관심을 기울이는 우리는 모두 촉수의 뒤얽힘 속에서 모든 것을 우리 식으로 재단하고 묶으려 애쓰지 않으면서도 잘 살고 잘 죽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촉수는 감각기관입니다. 촉수에는 침이 박혀 있습니다. 촉수는 세계를 맛봅니다. 인간 거주자들은 촉수의 생물군계(holobiome) 안에서 그것을 이루고, 인류가 연소시키고 추출하는 시간은 한때 균류의 물질성 및 시간성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연대하던 숲과 농장 그리고 산호초가 있던 곳에 놓인 단작 플랜테이션 지대 및 점균의 판과도 같습니다.
인류세는 짧을 것입니다. 인류세는 시대라기보다는 K-Pg경계(백악기-고제3기의 경계)와 같은 경계 사건입니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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