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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ㅣ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이 세상의 질서가 참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어떤 이는 글을 쓰고 어떤 이는 음악을 듣고 어떤 이는 총을 쏜다. 나는 소심하면서도 완강하게 연도와 날짜를 적지 않고 일기를 써나간 적 있다. 계절 얘기나 특정 사건 때문에 대략의 시간은 추정할 수 있어 완벽한 미스터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2018년인데 2008년이라고 찍힌 다이어리에 쓰고 있었다면? 많은 시간이 지나 한 300년 뒤 이 다이어리를 누군가 발견한다면 이 기록을 2008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용 표시 같은 걸 하지 않고 책의 여러 문장들을 내 꿈과 생각과 합쳐 적어 놓았다면? 멀리 갈 것도 없이 10년 뒤 글을 쓴 당사자인 내가 봐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앞뒤 인과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현실’ 또는 '사실'은 우리 ‘기대’나 ‘설정’에 지나지 않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생각과 상상을 쏟아내고 실현하는 이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신’을 떠올린 순간부터 인간은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더라도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그들을 생각한다. 성 정체성도 평생의 족쇄로 따라다닌다. 이런저런 구분의 질서 속에 있는 한 내가 ‘나’라는 인식은 늘 불만스러운 좌표 위에 있다. 반문도 따라 나온다. 도대체 왜 이래야 하는가.
배수아는 근간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도 ‘질서’가 아니라 시간과 자아의 철저한 ‘망각’을 실험한다. “바늘 없는 시계”의 세계에서, 사라지고 죽는 일은 너무 흔해서 지워지지도 않아 한 번도 없었던 일처럼 일어나고, 꿈과 과거-현실-미래와 이야기가 트럭이나 문, 교수대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경계 없는 시공간이 펼쳐진다. 당연히 주인공도 특정한 사건도 없다. 같은 이름의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겪는 일들로 가득해 A가 B여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살면서 같은 이름의 사람을 만난 적 있다. 흔한 이름이라면 좀 더 씁쓸해 하면서. 누군가에게 버려지는 일도, 누군가가 죽는 일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다들 겪는다. 그것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내가 겪는 특별함이자 기억이기 때문이다. 배수아는 여기서 다시 비튼다. 이해할 수 없이 ‘공유’되는 특별함을.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서 여자는 오래전에 떠났던 할머니의 양철 가방을 벼룩시장에서 발견해 그 가방과 함께 자신도 여행 중이다. 어느 날 할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이해할 수 없는 반두어로 적힌 편지를 받는다. 그녀는 그녀대로 이 편지를 이해하고, 어머니 뱃속에서 반두어를 들었을 뿐인 잭도 편지 낭독을 듣고 그 나름대로 이 편지를 이해한다. ‘낭독’은 배수아 작가가 여러 소설에서 쓴 소재인데, 언어와 음악의 결합 같은 이 방식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인류의 소통 방식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난 당신이 소리 내어 읽은 그 언어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가 있었어요. 어쩌면 내게는 선험적 말이고, 말 이전의 말이었는데! 제안을 하긴 했지만, 크게 자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적당히 꾸며대서 당신을 웃겨볼 생각이었던 거예요. 정말로 내가 온전히 이해하리라고는 절대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정말로 이해를 했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도저히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요. 그건, 그건 당신의, 아니, 당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어쩌면 당신 할머니일 수도 있는 소녀의,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매우, 매우, 아아 답답해 미치겠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매우 언유주얼한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더욱 놀랍습니다.”
잭은 충격과 감동으로 몸을 부르르 떨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서 이어서 말했다.
“놀랍게도, 우리의 경험이란, 사실 우리의 직관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에 불과합니다.”(p265~266)
작가가 문학작품을 쓰고 독자가 그 책을 읽는 과정도 위와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을 누군가 글로 보여줬을 때의 쾌감과 공감, 강렬했지만 구체적으로 복기하지 못하던 꿈을 실제로 만났을 때의 기시감 같은 것 말이다. 현실에서는 기억을 못해 실수를 하거나 꾸지람을 듣거나 봉변을 당하기 일쑤지만 꿈을 기억하지 못해 그런 일을 당하는 일은 없다. 꿈에서 나를 비난하고 처벌하는 이는 무의식을 지배하는 오직 나 하나다. 사실과 환상을 모으고 설치하는 문학은 현실에 틈을 비집고 공유할 자리를 만든다. 많은 작가들처럼 배수아가 제시하는 잔상들은 그로테스크한 ‘악몽’의 이미지들이다. 아이들이 극히 비극의 대상인데 누군가 쉽게 훔칠 수도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존재이다. 여왕에게 잡혀가지 않게 소녀들은 남자아이로 살거나 검은 아네모네즙 때문에 눈이 멀고 야만인 흉노의 자식으로 낙인찍혀 급기야 처형당하기도 한다. 질서의 대행자 남성들은 위로는 사령관, 경찰, 의사, 아래로는 교사, 역장, 눈표범 조련사, 돼지 장수, 살인자 등 타인에게 적극적인 개입을 하는 역할을 하다 사라진다. 「얼이에 대해서」의 얼이처럼 빨리 죽거나 「1979」의 남교사의 히키코모리 남동생처럼 편지를 쓰면서 눈에 띄지 않게 살지 않는 이상 그들은 대체로 그레이하운드 사냥개처럼 당당하다. 반면 여성들은 적당한 자리가 없다. 의탁할 곳 없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선 꼭 아버지에게 물어보려 하고 버림받아도 아버지를 찾아가고 아버지가 사령관이길 바라는 여자아이, 미친 자, 아이 낳는 자, 아이를 잃는 자(남성이라면 부하를 잃는 자, 「노인 울라에서」), 강간당하는 자, 죽임을 당하는 자, 여승, 갈 곳 없이 떠도는 자, 사라지는 마술을 하며 살다가 정말 사라지는 자로 부유한다. 유일하게 분명한 역할이 있었던 「뱀과 물」에 나오는 여교사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삶을 산 끝에 죽음을 꿈꾸는 파괴적인 몽상을 하면서 “그렇다면 어디로”를 되뇌며 사직서를 쓰고 있다.
배수아가 펼쳐놓는 이 이미지들의 나열과 중첩에서 여성으로 산 시대적 감수성을 제거하고 읽기란 힘든 것 같다.
우선 이 단편들 속에는 이국적인 것도 조금 끼어 있지만 대체로 작가가 자라온 시대, 정서적 매개물을 보여주는 사물들과 호칭으로 가득하다. 이 단편들이 어린 시절을 다루기에 더욱 그렇다. 작가가 상상하고 재구성한 어린 시절이면서 작가가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어린 시절이기도 하다. ‘우물, 두레박, 서커스, 고아원, 철봉, 전신주, 담배가게, 모래를 실은 손수레, 바구니를 이고 등에는 아기를 업은 아낙네들, 함지박을 옆구리에 낀 식모아이들, 돼지 장수, 등받이가 높고 따르릉 소리나는 화물용 자전거, 굵은 설탕을 뿌린 달콤한 도넛, 달걀 행상 노파, 무당, 초가집, 보건소, 기찻길, 주름진 함석지붕을 얹은 길가의 오두막’ 등등. 이것들은 이제 많이 사라져서 오래된 동화 같은 분위기로 이 소설의 독특한 정서를 만든다.
여성 작가라는 관점에서는 어떤가. 여왕이 일곱 살이 넘은 여자아이는 잡아가지 않기 때문에 일곱 살 이후로는 여자아이라는 정체성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아버지를 찾아가는 눈 아이 이야기는 여러 단편을 관통하는 하나의 상징처럼 깔려 있다. 「얼이에 대해서」에서 아이는 동급생 얼이, 여동생과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누나가 주는 흰색 원피스를 받으며 여왕 얘기는 더 이상 믿지 말라는 훈계를 듣는다. 「도둑 자매」에서 아이는 가짜 언니에게 납치당한 뒤 가짜 어머니가 죽고 난 후 낡고 검은 광목 원피스 차림에 가방을 들고 어린 시절과 작별하며 집을 떠난다. 「1979」에는 분홍 원피스를 입은 키 큰 소녀를 어려워하는 동급생 남학생들과 달리 성적으로 끌리는 성인 남성이 여럿 나온다. 작가는 이 시기에 아이들의 정체성이 갈리는 풍경 묘사를 이렇게 쓰고 있다.
“정전기를 일으키는 비슷비슷하게 거칠고 건조한 천에 싸인 채 흐릿한 몸 냄새를 풍기는 여든한 개의 작은 육신이 두 종류의 무의식을 주장하며 교사를 사이에 두고 마치 길처럼, 두 갈래로 나뉘었다.”(p85)
남교사의 남동생은 성 정체성의 갈래만이 아니라 아이와 성인의 갈래도 망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p94)
남동생의 말처럼 이 소설 속의 아이들은 실제 시간 속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기억 속 아이들이고, 여러 시공간을 넘나드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며, 작가가 형상화한 아이들이다. 자의식 이후 어린 시절을 포획물로 남겨둔 자들에 대해서는 「뱀과 물」에서 언급하고 있다.
“어린 시절도 일생 동안 지속될 너울거림을 불현듯 멈추었다. 어린 시절,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여교사는 생각했다. 모든 비명이 터지기 직전, 입들은 가장 적막했다. 시간과 공기는 맑은 술처럼 여교사의 갈비뼈 사이에 고여 있었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p223)
일기나 글쓰기는 기억을 구체화함으로써 성장과 치유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아직 ‘나’를 내세우지 못하고 기어 다니고 세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절이 지난 뒤에도 우리는 이렇게 아직도 한참 쓰고 읽고 말하고 있다. 가방도 매일 지니고 다닌다. 대관람차가 허공의 같은 자리로 돌아오듯이 내 방에 매번 돌아오면서도 여행자 같다. 바늘 없는 시간인데도 빠르다, 느리다, 늙었다 하면서 우리는 삶을 더 사는 망상, 죽음을 더 늦추려는 망상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망상을 돌리는 윤활유는 대체로 욕망 아닐까.
내가 ‘나’라는 감각을 가장 극도로 느낄 때는 삶 속에서가 아니라 죽음에 다다를 때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듯 이 책의 여러 단편에서 죽음과 에로티시즘은 다양한 겹으로 펼쳐진다. 이 경향은 작가가 내비치는 세계관과 연관된다. 「도둑 자매」의 끝 문장 “만일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모든 기억이 이토록 생생할 리가 없다.”와 「뱀과 물」에서 이어지는 “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신비롭다. 그것은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비순차적인 시간을 몽상하는 어떤 자의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라는 문장은 대조되면서도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보여준다. 시간을 비순차적으로 여기는 인식 속에서 상상과 실재는 서로의 우위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힘과 신비에서 동등하며 동시적인 가능성을 지닌다. 죽었으면서도 살아 있다. 명확한 서사를 강조하는 질서의 세계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바로 무너지지만 배수아가 그려내는 동시성의 세계는 끊임없으면서 불쑥불쑥 이어지는 세계다. 폭력과 불협조차도 이 세계에 있어야 할 조건이다.
읽고 쓰고 말하며 매일 경험 속에 있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비친 것만 더 심하게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잘 보고 있는 것일까. 정면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자신의 뒤통수를 평생 상상으로만 채우는 우리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내리는 비와 눈과 빛과 어둠 속에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가. 어디에도 보낼 수 없는 신비한 말들을 이렇게 묶으며 배수아는 자신의 갈래 길로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