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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창고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10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평점 :
물류창고는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살아 있기도 하고 죽어 있기도 하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떠오른다. 슈뢰딩거 고양이는 양자역학의 확률 문제를 말할 때의 역설이다. 미시 세계에서 하나의 전자가 확률적으로 위치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다면 물류창고는 거시 세계의 사물이라 그럴 수 없을까. 언어가 상징 기호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양자역학에서 대상에 대한 관찰자의 관측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결정하듯이 언어에서도 서술자의 인식 행위가 대상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언어의 특성상 읽는 자의 해석도 감안해야 하지만 대상을 선택하고 배치를 결정하는 서술자의 역할은 매우 크다. 그래서 나는 이수명의 물류창고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이수명의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이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무한증식의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보르헤스) 같은 세계는 이번 시집의 첫 시에서도 바로 드러난다. “무덤 속을 미친 듯이 빙빙 돌았다”(「나의 경주용 헬멧」) 이수명 시는 늘 그렇듯 주체와 행위자, 공간 모두 모호하다. 무덤 속에서 빙빙 돈다는 자체가 불편한 모순을 체험하게 하는데 그렇다면 이 무덤은 누구의 것? 사실 이건 무덤이 아닐 수도 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 물건들이 계속 사라지고 증식하는 시공간은 이 시집 전체를 언어의 물류 창고로 보이게 만든다. 오늘과 밤을 잃었는데 오늘과 밤은 계속 온다(「밤이 날마다 찾아와」). 풀이 한 포기도 없는데 모두 모여 풀을 뽑는다(「풀 뽑기」). 죽음은 죽음을 죽인다(“모두들 죽음으로부터 다시 한 번 / 튕겨 나와 / 무언가로 죽음을 내리치고 있었다”, 「이디야 커피」). 최근은 점점 더 최근으로 갱신되지만 끝을 알 수 없다(「최근에 나는」). “이미 깨어 있어서 / 언제나 깨어 있어서 / 다시는 깨어나지 못해 아무도 나를” 깨울 수 없다(「물류창고」, 29페이지).
1부에 집중적으로 제시된 「물류창고」 열 편의 연작시 속에는 미시 세계의 파동과 전자들의 움직임들처럼 명확히 관측할 수 없는 것들로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 우리나 오늘과 내일의 구분도 중요하지 않고 연극을 하든 말이 안 되는 무슨 대화를 하든 큰 의미가 없다. 가야 할 배송 물건과 돌아온 반송 물건이 섞여 있는 중첩의 장소인 물류 창고니 이상할 게 무언가! “자신이 왜 그렇게 흰 목장갑을 끼고 있는지 몰라 장갑 낀 손을 내려다”(마지막 「물류창고」 시, 50페이지) 보는 이해 불가능한 상태만이 체셔 고양이의 미소처럼 남을 뿐이다.
2부의 첫 시는 무한을 계산해내던 칸토어(혹은 칸토르)의 무한집합론이 연상된다.
“숲 속에서 네가 나왔는데 화분을 들고 서 있었는데 화분에는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아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너에게 말했지 화분은 단단하지 않다고 네가 붙잡는 대로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있다고 너는 말했지 시신을 찾는 사람들이 여태 숲속에 있어서 숲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시신이 텅 비어 있어서 시신에는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아서 시신이 없다. 처음부터 없다. 하지만 시신을 찾는 사람들이 여태 숲속에 있어서 숲을 늘리고 늘려서 그렇게 숲을 들치고 마침내 시신이 발견되는 것이다. 시신으로 나를 몰아내는 것이다. 나는 없다. 처음에는 없다. 시신이 웃는다. 숲속에서 네가 나왔는데 너는 누구의 시신인가, 너는 화분을 어디에 놓으면 좋을지 묻는다.”
ㅡ 「너는 묻는다」 시 전문
애초에 없는 것을 만들고, 없음(시신) 속에 있음(숲)을 넣는 기묘한 상황! 이러한 역설 상황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늘도 거의 유사한 뒤통수로 돌아오는 중이다”(「녹지 않는 사람」). 안부는 돌고 돌아 내게 다시 묻고(「안부 기계」), 집은 연립으로 도달하며 알 수 없게 되고(「연립주택」), 모든 것이 노면 위를 지나가지만 우리는 상태와 순간만을 볼 뿐이며(「노면의 발달」), 눈이 오고 숱하게 겪었고 눈으로 보면서도 우리는 매번 놀란다(「투숙」). 우리는 그저 공처럼 개처럼 이상한 운동 상태에 있다(「오늘의 경기」, 「원주율」, 「머릿속의 거미」, 「계속」). 살아 있다면 우리는 정말 지쳐야 정상 아닌가.
끝장을 바라고 있지만 이 운동을 아무도 멈출 수 없다. 3부의 시들은 그래서 더 절망스럽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고 있다. 하얀 직사각형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네모난 유리 창문들, 현관문들이 줄지어 있고 이불이 혼자 춤을 춘다. 기우뚱거리며 떨어질 듯 날아오를 듯 위태롭게 떠다닌다. 도약 중에 잠깐 접히다가 두 번 다시 같은 모양으로 접히지 않는다. 저 이불은 너무 많은 직사각형을 가지고 있구나,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고 있다. 이불은 어떤 소식도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먼지를 쏟아낼 뿐이다. 먼지들은 자리를 바꾸면서 떠돈다. 어떤 먼지는 다시 이불에 달라붙는다. 빙빙 돌면서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먼지 속에서 이불은 언제 멈출지 모른다. 무엇을 겨누지도 못하고 각도를 맞추지도 못하고 어떻게 멈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혼자 춤을 출 뿐이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고 있다. 커다란 직사각형을 계속해서 흔들어대고 있다. 저 이불을 누가 그만
빼앗았으면”
ㅡ 「이불」 시 전문
수도 서울은 삶의 장소가 아니라 ‘소멸’ 좌표에 더 가깝고(「여기서부터 서울입니다」), 아무리 부서져도 정작 갈 곳도 없고(「흥미로운 일」), 어지럽게 떠있다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덤불 가운데 식탁보」). “비는 길고 계속 길어서 모든 비가 이어져” 있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모든 것들은 바닥에 흩어져 있다(「나의 중얼거리는 사람」). “눈을 뜨는 순간 모두 찢겨져 뒤로 물러난 듯이”(「우리를 제외하고」) 이수명의 시들은 끔찍하게 갇혀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누구도 예외 없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