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 9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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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2018 제9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작 모두를 ‘윤리’라는 스펙트럼에 모을 수 있다. 그래서 전체가 비슷비슷하게 느껴졌고 각각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음에도 기존에 비슷한 소재와 접근법이 있었던 게 겹쳐져서 신선도가 떨어졌다. 심사평은 9회를 맞은 이 상에 대단히 자부심을 내보였지만 이 7편의 선정이 심사 위원의 취향과 역량 탓인지 2017년 발표된 한국 단편의 역량의 바로미터인지 나는 의심만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피터 싱어는 『더 나은 세상』에서 2011년 철학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데렉 파피트 《중요한 것에 관하여》(국내 미출간)를 언급하며, “이 책은 윤리적 객관주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궁금해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적인 위협을” 던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성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말해주며, 우리의 내재적 욕망과 기호는 이성의 범위 밖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파피트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한다. ‘1+1=2’가 참(진실)이라고 이해하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이 미래의 고통을 피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그런 동기나 욕망을 갖고 있고, 미래에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는 무관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할 동기도 갖고 있다(비록 그게 항상 결정적인 동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자명한 규범적 진실이야말로 윤리학에서 파피트가 주장하는 객관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윤리적 객관주의를 반대하는 주요한 반론 중 하나는 “옳고 그름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지와 미혹으로 비난할 수 없는 철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만약 임마뉴엘 칸트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조차 우리가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행동에 이견을 보인다면, 과연 객관적 진실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반론에 대한 대응으로, 파피트는 객관적 윤리에 대한 자신의 변론보다 훨씬 더 과감한 주장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것에 대한 대표적인 세 가지 이론인 칸트의 도덕 이론,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존 로크(John Locke),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및 현대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 스캔론(T. M. Scanlon)의 사회계약론, 그리고 벤담의 공리주의 이론을 살펴보면서 칸트의 이론과 사회계약론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수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수정된 이론은 거시적인 차원에서 공리주의와 맥락을 같이하는 결과주의(Consequentialism)의 한 가지 형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민정 「세실, 주희」는 ‘J-세실-주희’ 라는 세 여성이 민족주의와 젠더 사이에서 어떤 삶과 선택을 했는지, 그 속에서 상대가 원한 바 없는 어떤 곤경을 주는지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성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유비적이고 주요 사건도 상동(相同)한다. 사대주의적이며 서구 문화의 향유자인 J를 동경하고 따르던 주희는 그녀와 함께 뉴올리언스 축제에 갔다가 어쩐지 J의 의도로 혼자가 되고 마는데, 마초적인 남성들에게 성 모욕을 당한다. 더 점입가경은 그때 자신의 영상이 ‘쌍년’이란 꼬리표로 포르노 사이트에 올라가 그녀는 이 해결을 위해 전전긍긍한다. J와 주희의 관계처럼 한류 아이돌 문화를 동경해 한국으로 온 세실과 직장 동료인 주희는 언어적 문화적 우위에 있다. 식민지 역사에 대해 왜곡해 받아들이며 살아온 세실을 주희는 우연찮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집회에 섞이게 만들면서 앞서 J-주희의 상황을 재현하고 만다. 뒷날 세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건 누구의 잘못이 될까. 옳고 그름의 경계를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진실의 본질은 뭘까. 파피트와 싱어의 고찰에서 보듯 우리는 각자가 가진 ‘윤리적 객관주의의 모호성’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킬 정답을 도출하기 어렵다. 이 단편의 해설을 맡은 이은지도 이 어려움을 잘 정리해 말했다.

 

“세실이 소녀상의 의미를 모르듯이 그 순간의 의미를 주희는 ‘모른다’. 이 무지한 투사의 이미지에 우리는 열광하는 동시에 곤혹스러워해야만 할 것이다. 주희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가 이데올로기에 대적하는 순간을 영원히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세실, 주희」는 언제 어떻게 무엇을 향해 투쟁해야 하는지 안다고 착각하는 이 시대의 주체들이 처한 곤경을 가리켜 보이는 서사로서 값한다. 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분명 우리를 비참하게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를 더욱 직면해야 할 것이다. 주희가 그러했듯이.”

본심 심사위원이었던 이장욱의 평도 귀담아 둘 만하다.
     

“박민정의 「세실, 주희」를 읽으며 다시 확인했다. 오늘날 소설이라는 장르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공인된 사실을 재확인하고 알리는 일보다는, 그 올바름의 위태로움 속으로 들어가 더 예각화된 고통과 갈등을 마주하는 쪽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나는 이 단편이 그런 소설적 사유의 사례라고 느꼈다.”

 


『2017 제8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대상 「고두」에서도 그랬지만 임현에게 ‘윤리’는 굉장히 중요한 주제의식이다. 이번 수상작 「그들의 이해관계」도 그랬다. 정의와 윤리 문제에서 꼭 거론되는 ‘한 사람과 다수의 죽음 중 어느 쪽을 택하는 게 옳은가’ 같은 문제가 등장한다. 한 여자(해주)로 인해 여러 사람이 살아남게 되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수해를 받은 이들은 안도에 그치고 만다. 한순간에 사라진 이 존재에 대해 유독 죄책감에 시달리는 두 사람이 있다. 여자를 고속버스 휴게소에 두고 떠나버린 운전기사와 해주의 남편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운전기사는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자신의 이전 선택도 있었기 때문에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해주의 남편은 해주와 성격 차이로 인해 끝없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조목조목 거론하고, 해주가 여행을 떠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음을 이유로 밝히며 「고두」의 윤리교사처럼 기만적인 면을 드러낸다. 해주가 죽은 이유를 파헤치는 것조차 자기 위안을 위해서다. 물론 이들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아버지 표도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피한 이반보다 윤리적 죄책감은 덜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해관계」 문제는 ‘사건’이 아니라 ‘사고’라서 우연이라고도 운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요소가 달랐다면 한 가지만이라도 달랐다면 그녀는 살았을까. 그래서 임현은 결정론적 물리법칙보다 확률적 양자역학 속 인간을 더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의 수로 존재했다가 그중 가장 낮은 확률의 나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되지 못한 무수한 또 다른 나를 떠올리다 보면 그들도 어딘가에서 지금의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나로부터 한참 떨어진 뒤에도 내가 되지 못한 것을 두고 후회하고 그것으로 소설도 쓰고 그러는 걸까. 진짜 그렇다면 거기도 뭐, 별거 없네. 그 별것 아닌 것으로 나를 너무 낭비했다.

   그럼에도 만약, 내가 나를 미리 알고 다른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때도 나는 여전히 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금의 나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대신 미래의 나는 평범하고 성실하게 늙어가면서 앓는 질병과 처방받은 약품의 성분으로 나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 수도꼭지의 온도를 조절하느라 오랜 시간을 허비할 것이고, 매번 왼쪽부터 먼저 닳는 신발이라든지, 길 한가운데 버려진 양말 같은 것을 발견하며 이건 또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렸나 궁금해할 것이다. 어딘가 서로 닮은 것들을 바라보며 ‘너무 나 같네’ 하고 적적해하겠지. 아니더라도 내게 없던 장면들을 상상하고 나랑 비슷한 누군가를 등장시키며 무언가를 써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쓴 거의 대부분의 것들도 이미 그렇게 쓰인 셈이다.”
ㅡ 임현, 작가노트

우리는 이런 소설을 읽을 때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기 힘들어졌다. 이 사건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우리는 국민적 미궁 속에 빠져 버렸다. 누구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어서 언제까지라고 할 수 없이 고민 속에 숙연해진다. 다수가 그래야 한다고 말하면 너무 윤리 강요적일까.   
    


김세희 「가만한 나날」은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한 시뮬라크르(가상)에 함몰된 인간의 한 예를 보여준다. 경진은 블로그 마케터로 가짜 블로그를 만들어 첫 직장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자기 전공을 살린 만족감에 도취한다. 그런데 자신이 광고한 ‘뿌리는 살균제(옥시 사건)’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속은 줄도 모르고 외려 경진의 안부를 걱정하는 피해 이웃의 쪽지에 경진은 자기방어부터 생각한다. 혹시나 책임 소지가 있지 않을까 싶어 자신의 실수를 고민하고 상관에게 조언을 구하지만 아무런 죄책감을 받지 않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행동도 상관과 다르지 않다. 속죄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정들었지만 자신의 과오가 남아 있는 블로그를 지워 버린다. 책임을 전가하기 쉬운 이런 사회 구조에서 현실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이런 선택을 자주 한다. 그러나 알고리즘으로 복잡하게 얽힌 콘텐츠 생태계처럼 아무리 지운들 우리는 살아오며 남긴 자신의 수치를 확실히 피할 수는 없다. 적성 갈등과 업무 무능력으로 퇴사했던 직장 동료를 우연히 만난 경진은 진실을 살펴볼 생각도 없이 가짜 블로그가 자기 적성에 맞는다며 우월성을 과시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깨닫는다. 정정하고 싶지만 동료는 이미 떠났다. 우리는 어디까지 부인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어디까지 사과해야 하며 어디까지 용서받을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한계와 미진할망정 잠정 결론이라도 그을 수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매우 다른 윤리의 지형에서 헤맨다.
선정적인 작품으로 논란이 많았던 D. H 로렌스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제목을 따와 경진이 만든 채털리 부인 블로그 얘기를 잠깐 짚고 가자. 이 작품은 숱한 에로물의 전범이 되기도 했고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지배 계급의 성적 억압과 위선을 잘 다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채털리 부인’은 인간의 내밀한 본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경진에게 ‘채털리 부인’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 테지만 그걸 쉽게 가져왔고 쉽게 소비한다. 우리의 성과 욕심과 고민 없음이 의미를 지워버리는 결과만 남는다. 누구라도 이런 게 없을 리 있나. 이런 공통점은 서로에게 고백할 수도 없다. 세상은 그래서 가만-기만한 나날, 가만-기만한 사람들로 넘쳐나는지도 모른다. 문제가 생기면 외면하거나 도망치면서 홀로 삭이면서.
   


“그곳을 나온 이후 나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책장에 꽂혀 있으나 어쩐지 펼쳐볼 마음이 일지 않는 책. 나는 어디에서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ㅡ 김세희 「가만한 나날」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과 윤리에 대해 공격적으로 나오는 현대 작가로 나는 필립 로스와 미셸 우엘벡을 바로 떠올린다. 이 수상 작품집을 읽으며 미셸 우엘벡을 자주 생각했다. 예술이 작품의 뼈대 모티프가 된 최정나 「한밤의 손님들」, 임성순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의 풍자성도 그렇고, 최정나의 ‘가족 해체’는 미셸 우엘벡 『소립자들』, 뉴에이지를 끌어들여 기괴하게 빠지는 『어느 섬의 가능성』의 시도가, 임성순이 보여준 ‘자본주의와 중심 없는 해체에 빠져든 예술’은 미셸 우엘벡 『지도와 영토』가 떠올랐다. 특히 『지도와 영토』는 스위스에서 상업화된 안락사 소재가 나오는데 정영수 「더 인간적인 말」과 비교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미 이런 접근과 고민들은 있어왔다. 없는 게 이상하겠지만. 최정나, 임성순, 정영수가 한국적으로 잘 요리했고 문체와 스타일이 다른 게 칭찬받을 점이라고 해도 예상되는 결말과 정형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내 인상이다.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자기 과잉과 자기 함몰적인 기존의 퀴어물과 크게 차별성이 있지는 않다. 질주하는 욕망, 현실 부적응, 일탈 속에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로 끝나는 엔딩은 42년 전 나온 퀴어 문학의 고전이라고 할 무라카미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1976)에 비해 청출어람이 되지도 못했다. 박상영도 류를 의식했던지 작가 노트의 제목을 “한없이 평범한 날들”이라고 붙였던 게 의미심장하다. 여전히 타개점이 잘 보이지 않는 성소수자 처지, 한국적 상황, 현재 시대 반영 등을 감안해야 하는 것일까. 동시대적이라는 면에서 재미와 공감할 부분이 많지만 나는 이 작품의 ‘문학적 평범성’에 아쉬움이 많은데 신형철 평론가는 “‘실패를 반복하는’ 패기 넘치는 찬가”라고 격찬하니 생각의 온도차만 느낄 뿐이다.
또 짚고 싶은 게 심사 총평에서 신수정 평론가가 박상영과 김봉곤을 비교하며 박상영을 우위에 둔 너무나 주관적인 평가에 불만스럽다.

 

"나는 박상영의 내레이션에 푹 빠져 그가 풀어내는 기나긴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버렸지만 이 소설의 과잉에 질려버린 것도 사실이다. 이토록 많은 디테일들이 뒤섞여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설도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이다. 여담이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일기나 페이스북 낙서처럼 휘갈기는 김봉곤의 스타일과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두 사람 다 자전성이 많이 반영된 퀴어 문학을 보여주는 작가다. 퀴어 성향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 두 사람은 영화와 음악에 대한 관심도 많아 작품에 적극 활용하는 것도 비슷하고 둘의 등단 시기도 2016년이라 비교가 많이 되는 듯하다. 그러나 신수정 평론가가 김봉곤을 ‘일기나 페이스북 낙서처럼 휘갈기는 스타일’이라 폄하하며 박상영을 추어올리는 건 부당하게 보인다. (김봉곤이 신춘문예, 박상영이 2016년 문학동네 신인상 등단자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 게 아니길 바라며...) 김봉곤의 소설을 여러 편 읽어보며 김봉곤의 문체와 스타일이 그가 관심 가진 작가들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질의 비교는 제쳐두고 롤랑 바르트, 이인성 같은 작가들처럼 그의 소설에서 파편적이면서 단상적인 자조와, 스토리보다는 의식의 흐름처럼 가고자 하는 면을 자주 발견한다. 그런 작중 인물들을 통해 이성만이 아닌 심리와 정서를 자극하는 내밀하고 강렬한 문장들을 만나 한 방 맞고는 한다.

 

 


박상영과 김봉곤이 주류 문학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퀴어 파라 그런 거 같은데, 라이벌 구도로 만들지 않았으면 싶지만 인간 특징이 또 비교라...... 주목할 것은 해설을 맡은 노태훈의 말처럼 퀴어 문학은 자신만의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작가와 작품을 구분하고, 다시 그 작가를 자연인으로서의 개인과 분리하여 예술가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층위를 나누어 예술을 분석하는 태도를 객관적이며 또 진보적인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최근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비롯한 ‘미투 운동’의 폭발적인 전개 양상을 감안한다면 예술을 작품 그 자체로서만 평가하는 관점에는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럴 때 퀴어적이라는 것은 삶과 예술이 구별될 수 없다는 감각에서 특별해진다. ‘가짜’ 정체성으로는 ‘진짜’ 예술의 영역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가장 첨예하게 인식하는 집단이 퀴어이고, 그들은 그 진정성(authenticity)을 무기로 기존의 예술에 균열을 가한다.”

요즘 철학, 과학, 문학 분야를 가리지 않고 대두되는 경향이라든가 전 세계적인 화두라 할 수 있는 공동체의식과 분배, 성차별과 페미니즘 운동을 보면 ‘윤리’는 인류가 끝까지 고민하게 되는 문제의식 같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머무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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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7-20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젊은 작가상이라 현재 우리 주변의 과제 상황을 배경으로 하기에 낯설지 않은 주제가 흥미롭습니다.^^:) 우리의 현재 이슈가 문학 작품에 녹여 들어가는 맛이 있을 것 같네요!

AgalmA 2018-07-21 03:06   좋아요 1 | URL
낯설지 않아서 좀 식상하기도^^; 제가 문학을 읽는 건 현실적인 걸 보려는 목적은 낮거든요. 그런 건 뉴스나 다른 책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