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만 보아서는 무슨 반기독교 사상서인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교회법과 종교 개혁의 발단과 전개에 대해 호의를 담아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런가 하면 『코란』을 읽어 이슬람의 혁명을 이끈 무함마드의 이야기도 소개된다. 결론은 읽고, 쓰고, 혁명하라는 얘기다. 혁명은 읽는 것에서 시작하여 고쳐 읽고, 고쳐 쓰는 과정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대단히 열정적인 문체다. 나를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수단으로써 독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기록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 민족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전체 300건 가운데 11건이 우리 기록유산이다. 뭐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거니까 무조건 대단하단 건 아니지만, 아무튼 등재된 기록유산의 면면을 살펴 봐도 우리 기록물들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는 너무 분량이 방대해서 아직 번역도 다 못한 걸로 알고 있다. <훈민정음>이나 <팔만대장경판>, <실록>과 <의궤>의 가치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대한민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록물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쌓여가는 나라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거기엔 수많은 블로그와 카페, 그리고 이곳 서재도 포함되겠지.

 

(아래부터는 본문 인용)

 

여기서 루터가 ‘읽은 것’을 ‘기도이고 명상이며 시련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떠올립시다. 의미는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성급함이나 폭력을 부정하고 말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99)

 

원리주의자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수 없음’과 ‘읽기 어려움’에 맞설 용기도 힘도 없습니다. 나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말해왔습니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광기의 행위라고, 책을 읽으면, 읽고 말면, 아무래도 –내가 잘못된 건지 세상이 잘못된 건지, 몸과 마음을 애태우는 이 물음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게 된다고. 사람들은 모릅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는 책을 그래도 읽는다는 것, 그 안에 있는 텍스트의 이물감, 외재성, 생생한 타자성을 모릅니다. 가혹하기까지 한 그 무자비함을 모릅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을 모릅니다. 그 놀랄 만한 ‘읽어라’라는 명령의 열정을 모릅니다.
반대로 무척 단정하지 못한 형태로 “내가 말하는 것이 성서이고, 내가 말하는 것이 『코란』이고, 내가 말하는 것이 불전이다”라는 정말 꼴사나운 모습에 자족한 채 지칠 줄을 모릅니다. 따라서 텍스트를 향하는 잔혹한 체험에 자신의 죽음과 광기를 무릅쓰고 몸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기적이 세계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텍스트와 자신이 구별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근거나 전거는 모두 자신입니다. 준거는 자신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한 것이 모두 성서나 불전에 쓰여있다는 하찮은 망상에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는 겁니다. 거기에는 외부성과 타자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루터 또는 무함마드에게 ‘읽다’라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한 것이었을까요? 세계와 자신과 책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생생한 이물로서 타자성으로 분리되고 구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자신이 미쳤는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가하는 물음이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당연한 일이 원리주의자들에게는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원리주의적 사고의 함정은 얼마든지 널려 있습니다. 지금도. (153-154)

 

(트리보니아누스 편, 『로마법 대전』) 여기서 유럽은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한없이 정치한 법 개념과 법률 용어를 대량으로 입수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과거의 거대한 유산인 로마법을 교회법에 주입하여 전대미문의 규모로 고쳐 쓰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그들은 읽었습니다. 읽어버린 이상 고쳐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쳐 읽은 이상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반복합니다. 그것이, 그것만이 ‘혁명의 본체’입니다. (179-180)

 

피에르 르장드르의 독창적인 사고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그는 국가의 본질을 폭력이나 경제적 이익으로 줄여버리지 않습니다. 국가의 본질이란 ‘재생산=번식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아이를 낳아 기르는 물질적·제도적·상징적 준비를 갖추고 대비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입니다. 일단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당연하지 않나요. 왜냐하면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으면 단적으로 말해 절멸할 테니까요. 이런 것을 ‘저출산 문제’라 부르는 것은 문제를 하찮게 만들어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국가의 형식이야말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하고, 우리가 오랫동안 말해온 의미에서 ‘문학’의 혁명에 의해 전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로마법과 교회법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실증적이고 착실한 연구를 계속해온 역사가라서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교회법은 재상산 법이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지극히 성실하고 혁명적인 사상을 전개하는 사람이 어쩐 일인지 프랑스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반동이니 보수니 하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이런 게 왜 안 되는 걸까요? 어떤 부분이 안 되는 걸까요? 그 근거를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185-186)

 

수많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한 가지의 상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보입니다. 우리에게는 들립니다.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것만 말해왔으니까요. 우리는 ‘문학’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시를 잃었습니다. 춤을, 연극을, 노래를, 음악을, 회화를, 복식을-한 마디로 말하면 예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법이나 규범, 정치와는 관계없는 장소에 몰려 질식하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오락’, ‘장식물’, ‘사치품’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법이나 규범, 정치도 질식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실, 상실이라며 우리가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결정적으로 손에서 놓아버린 적이 있을까요. 그것 없이 살 수 있었던 예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건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210)

 

명예욕을 위해서도 아니고 금전욕을 위해서도 아니라고 한다면,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요? 그것은 –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해볼까요?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나... 발레리가 없었다면 저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나 라캉이 있어주어 다행입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요. 발소리를 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도움을 받아버린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발소리를 내는 것조차 거부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발소리를 내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터입니다. 들려주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입니다. 한발짝이라도 좋으니까요. (271)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그리고 어쩌면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이것이 혁명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래도 이렇게 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다, 라고. 루터는 문학자였습니다. 말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혁명가였습니다. (105)

중세 해석자 혁명은 ‘혁명의 본체’를 드러낸 혁명입니다. 다시 말해 법학자의 텍스트 고쳐 쓰기의 혁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척 담담하고 전혀 극적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신학자, 법학자가 밤낮으로 홀로 책장을 넘기고 사전을 찾고 판례를 조사하여 법문을 고쳐 씁니다. 정말 수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담담하고 수수한 작업에서 엄청난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줄기차게 이어지는 작업 자체가 바로 혁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세기 혁명의 위대함이니까요. (193-194)

도스토옙스키 등은 10퍼센트 이하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소설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자명한 게 아닙니다.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리스인들이 99.9퍼센트 소멸한 가운데 0.1퍼센트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처럼 러시아인들도 이겼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5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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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22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기.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돌궐 2015-01-22 21:04   좋아요 0 | URL
저도 읽고 쓰고 다시 쓰는 게 바로 혁명이란 얘기가 정말 참신했어요.
게다가 cyrus님은 저 말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계시잖아요.^^

cyrus 2015-01-22 21:09   좋아요 0 | URL
말은 이렇게 하지 머리는 안 따라줘요. 자고 일어나면 새책이 몇 권씩 늘어나는데 여기에 관심이 쏟다보니 다시 읽고 쓰는 기회가 없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01-24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필사 분량이 많습니다. 필사의 필사` 같습니다..ㅎㅎ

돌궐 2015-01-24 15:04   좋아요 0 | URL
제가 읽는 책마다 초록을 꽤 많이 남겨둡니다.^^